§ 나는 될놈이다 외전 16화
“이다비가 확실히 겸손하긴 합니다.”
태현은 말리기는커녕 오히려 부추겼다.
이다비는 태현이 지금 상황에서는 별로 도움이 되지 않는다는 걸 깨달았다.
판온에 관해서는 어떤 몬스터가 나오더라도 믿음직스러운 사람이었지만, 이런 대화에서는 오히려 대화를 산으로 가게 만든다!
“확실히 저도 그렇게 생각합니다!”
“이다비 선수만큼 겸손한 선수가 없습니다. 이다비 선수하면 겸손, 겸손하면 이다비 선수라고 생각이 들 정도로.”
“맞습니다. 이다비는 다른 분야에도 뛰어나지만 겸손도 상상을 초월하죠. 파워 워리어 길마면서 그걸 내세우지도 않습니다. 쑤닝 보세요. 길드 동맹 하나 가족 있다고 얼마나 유세를 떨면서 지랄을 했습니까? 그에 비해 이다비는….”
“은신처 문 열었어요!!”
이다비는 대화를 끊기 위해 <서리거인의 동굴 은신처> 문을 열었다.
태현은 아쉽다는 듯이 랭커들을 쳐다보았다.
“뒷이야기는 들어가서 하도록 하죠.”
“…….”
‘농담이지?’
‘농담 아닌 것 같은데….’
진지하게 저 이야기를 계속 하겠다는 태현의 모습에 랭커들은 정신이 아득해지기 시작했다.
배장욱 PD와 짜고서 태현이 랭커들을 놀려주려는 게 아닌가 싶을 정도였다.
…아니 김태현 선수가 원래 저런 사람이었나??
‘저렇게 그… 오글거리고….’
‘미친 사람인 줄은….’
[<서리거인의 동굴 은신처>에 입장합니다.]
[거인들이 당신의 입장을 알아차립니다!]
[주의하십시오! 동굴 안의 고드름들이…]
“이다비. 조심해!”
“어… 김태현 선수. 고드름 구역은 아직 멀었는데요.”
“그러니까 지금 조심해야죠.”
“…맞, 맞는 말씀입니다.”
태현이 개정색을 하자 랭커들은 쫄았다.
뭔 소리를 해도 아무렇지도 않던 사람이 이다비 조심하란 말에 ‘굳이 그럴 거까지 있나요?’ 했다고 저렇게 정색을 하다니….
“이다비 선수! 조심하십시오!”
“조심! 조심!”
‘고드름 구역 들어가지도 않았거든요….’
이다비는 뒤에서 들려오는 응원이 어이가 없었다.
하나도 안 위험한데 저러니 오히려 더 민망했다.
* * *
[서리거인이 쓰러집니다!]
[아이템을 얻었습니다!]
[……]
[……]
“청, 청루석!”
“뭐?! 청루석이 나와?!”
랭커 한 명의 외침에 다들 깜짝 놀라서 시선을 돌렸다.
판온의 수많은 광석 중 하나인 청루석은 최근 그 인기가 급격하게 오르고 있는 광석이었다.
대장장이 몇몇이 새로 찾아낸 강화 스킬과 제작법 덕분에 그 재료인 청루석의 수요가 급격하게 늘어난 것이다.
지금은 방어구든 무구든 안 들어가는 곳이 없을 정도로 인기 좋은 광석.
다만 그만큼 구하기 힘들다는 게 단점이었다.
추운 곳의 광산에서 소량만 발견되는데 그것도 안정적으로 얻을 수가 없었으니….
그런데 여기 서리거인한테서 청루석이 나온다고??
“김태현 선수! 김태현 선수!!”
“?”
“여기서 청루석이 나온답니다!”
“네. 나오던데요.”
“…?”
무덤덤한 태현의 반응에 랭커들은 당황했다.
어….
어라?
“김태현 선수가 잘 모르시는 모양인데 이 청루석이 요즘 아주….”
“야. 미친놈아. 누가 뭘 몰라….”
랭커가 설명하려고 하자 옆에 있던 랭커가 경악했다.
김태현이 대장장이로만 싸워도 네 대가리 정도는 박살 낼 수 있을 텐데 그게 무슨 망언을…!
“아. 청루석 제작법? 들어서 알고 있습니다.”
태현은 고개를 끄덕였다.
기계공학 대장장이들 사이에서도 유행하는 폭탄이 있듯이(물론 잘 모르는 사람들 눈에는 미치광이들로만 보였다), 대장장이들 사이에도 유행이 있었다.
누군가 새 퀘스트를 깨고 새 제작법이나 새 스킬이 퍼지면 유행이 오는 것이다.
이번 유행은 청루석 관련 유행이었다. 제작법부터 강화 스킬까지 전부 다 청루석을 쓰는 게 유행할 정도로.
그러나 태현은 굳이 싶었다.
‘청루석이 쓸 만하긴 한데 내가 보기에는 좀 애매하지.’
대장장이들이 청루석에 열광하는 이유는 강화나 제작에 사용했을 때 성능도 성능이지만 그 내구도나 안정성이 확 올라가서였다.
장비 하나 망가뜨리면 부모와 조상까지 욕 먹는 게 대장장이인 만큼 저런 걸 선호할 수밖에 없었다.
그에 비해 행운 스탯으로 먹고 사는 태현은 저런 부분에서는 걱정할 필요가 없었다.
일단 남 장비 만들어줄 일도 적은 데다가 행운 스탯이 워낙 높아서 제작 실패나 내구도 관련해서는 이득을 볼 수밖에 없는 것이다.
그냥 태현은 기존에 쓰던 재료들로 충분했다.
“그 청루석입니다! 김태현 선수!”
“아니… 알겠습니다. 다들 진정하시죠.”
태현은 랭커들을 진정시켰다.
다들 청루석을 얼마나 좋아하는지 표정이 탐욕으로 가득차 있었다.
“자. 여기 청루석 나눠드리겠습니다. 저는 그렇게까지 필요 없으니.”
“…?”
“??????”
랭커들은 태현이 청루석을 한 아름 꺼내자 기겁했다.
어디서?!
“어디서 나셨습니까!?!?”
“광맥 있었어요!?”
“말도 안 되는… 청루석 맞아? 진짜야!?”
“잡아서 나왔는데요.”
“…….”
갑자기 무거운 침묵이 감돌았다.
원래 태현의 말은 무조건적으로 믿어주는 랭커들이었지만 지금 말은….
‘말이 되나?’
‘아니 그냥 광맥 말해주기 싫으시면 싫다고 하시지… 우리가 그걸 억지로 알려달라고 하지도 않을 거고….’
이런 산에서 청루석 광맥을 찾았으면 그들이었어도 알려주기 싫었을 것이다.
태현은 랭커들의 표정을 보고 속마음을 알아차렸다.
‘못 믿는군.’
“자. 보세요. 지금 잡습니다.”
괜히 설득하는 것보다 그냥 보여주는 게 나았다.
태현은 지나가는 서리거인을 찾아 다시 공격을 퍼부었다.
퍼퍼퍼퍼퍼퍼퍽!
[치명타가 터졌습니다!]
[아이템…]
[……]
[……]
“자. 획득해 보십시오.”
태현의 말에 랭커들은 어리둥절한 표정으로 손을 뻗었다.
[청루석을 얻었습니다!]
[청루석을…]
[……]
“…?????”
“?!?!?!?”
랭커들의 표정이 경악으로 물들었다.
‘아니 잠깐… 청루석이 나온 건 그렇다치고 왜 여러 개가 나와??’
분명히 서리거인을 천 마리 잡아서 한 개가 나올까 말까인데 왜 여러 개가?
“이제 믿음이 가십니까?”
“저희가… 저희가 믿음이 부족했습니다!!”
“저희를 용서해 주십시오!!”
“으헝헝!”
랭커 커플들은 누가 먼저라고 할 것도 없이 무릎을 꿇고 외쳤다. 그 모습에 태현과 이다비는 할 말을 잃었다.
“아니 뭔 이렇게까지….”
“용서해 주십시오!!”
“용서해 주십시오, 김태현 선수!!”
‘이거 방송 괜찮은 거 맞아요?’
이다비는 태현을 쳐다보며 작게 말했다.
아무리 생각해도 커플들의 보기만 해도 알콩달콩한 방송과는 좀 거리가 먼 것 같은데….
“…난 분명히 내 마음대로 하겠다고 피디한테 말했으니까.”
태현도 그걸 느꼈는지 시선을 피하며 변명했다.
이렇게 된 이상 어쩌겠는가.
…나머지 편집은 피디가 알아서 잘 해주겠지!
“김태현 선수! 저희를 이끌어주십시오!”
“사냥을 계속하게 해주세요!”
“알겠습니다. 갑시다!”
태현은 누가 사냥하자고 하면 굳이 거절하지 않는 사람이었다.
랭커들이 원한다면 못 해줄 것도 없었다.
가자!
지옥 같은 무한사냥으로!
이다비는 속으로 생각했다.
‘여기서 사냥 끝나고 커플들 헤어지는 거 아니겠지…?’
* * *
[서리거인이 쓰러집니다!]
[아이템을 얻었습니다!]
“청루석이다! 청루석!”
“나도!!”
“김태현 선수! 더! 더 들어갑시다!”
“좋은 자세입니다. 갑시다!”
[아이템을 얻었습니다!]
[아이템을…]
[무게가 올라서 이동속도가 내려갑니다!]
[……]
“헉… 헉. 배낭 2/3 정도 찼는데?”
“청루석으로 이 정도 채우다니 대단해…!”
“김태현 선수! 잠깐 쉬었다 가도 될 것 같습니다!”
“아니야! 더 가자고! 쉬는 건 나중에 쉬어도 돼!”
“그, 그런가?”
“좋은 자세입니다. 갑시다!”
태현은 랭커들의 의견을 존중해 줬다.
랭커들은 또 한바탕 사냥했다.
[더 이상 아이템을 얻을 경우 무게 때문에 추가 페널티가…]
[……]
[……]
“김태현 선수! 이제 정말 돌아가도 될 것 같습니다!”
“아닙니다.”
“예? 배낭이 다 찼….”
“옆에 두고 새로 배낭을 만들어서 착용하시면 됩니다.”
“…새로 배낭 만들 줄 모르는….”
“그럴 줄 알았습니다. 새로 하나 만들어드리겠습니다. 이다비. 도와줄래?”
“네.”
“…….”
“…….”
어라?
청루석에 신나하고 있던 랭커들은 갑자기 찬물을 끼얹은 것처럼 정신이 번쩍 들었다.
이 사냥….
안 끝나나?
[서리거인의 가죽으로 배낭을 제작합니다!]
[행운 스탯이 매우 높아서 추가 보너스…]
[……]
[……]
“이렇게 같이 배낭을 만드니까 옛날 생각이 나네.”
“어떤 생각이요?”
“판온 1 때.”
“판온 1 때 다른 사람하고 배낭을 같이 만든 적이 있으셨어요?”
이다비는 의아해했다.
태현이 판온 1 때 솔로 플레이만 주로 했다고 알고 있었던 것이다.
“응. 같이 만든 적이 있지.”
“와… 누구에요?? 알고 싶어요!”
“그래?”
지쳐서 헐떡이던 랭커들도 그 대화에 움찔했다.
조금 궁금했던 것이다.
‘누구지?’
‘우리가 아는 랭커인가?’
* * *
“손 쉬는 놈들은 뒤진다.”
“…….”
“…….”
퍽!
[HP가 0이 되어 로그아웃…]
“어, 어째서!! 어째서!! 손을 쉰 적 없는데 왜!”
“눈빛이 수상했다. 그리고 내가 언제 말하라고 허락했나?”
“잠….”
퍽!
[HP가 0이 되어 로그아웃…]
태현은 설산 동굴 속에 갇혀 있는 길드원들을 냉정하게 쳐다보았다.
설산 등정 왔다가 대장장이 하나 발견하고 털어먹으려고 했는데….
졸지에 갇힌 꼴이 되다니.
길드원들은 이 상황이 믿기지가 않았다.
-도움 언제 와!? 빨리 도우러 오라고! 미친놈이 우릴 포로로 잡고 있어!
-기다려! 너희들이 높게 올라가서 가는 데까지 시간이 걸린다고!
대장장이한테 시비를 거는 순간, 대장장이는 파티장의 대가리를 날려버리고 그 다음으로 레벨 높은 랭커의 대가리를 날려버렸다.
그리고는 동굴 입구를 잡고 도망을 못치게 막은 다음 말했다.
-지금부터 내 명령을 따르지 않는 놈들은 죽는다.
-뭔 개….
퍽!
반항하거나 손 멈추거나 기타 등등을 저지른 길드원들이 일격에 로그아웃당하자, 남은 길드원들의 반항심은 싹 사라졌다.
슬슬 피부로 느끼고 있었던 것이다.
우리가 미친놈한테 걸렸구나!
-야. 잠깐만. 대장장이한테 걸렸다고?
-그래! 빨리 오라고!
-너희 설마 그 미친 대장장이 만난 거 아니냐?
-…설, 설마. 잠깐만…!
길드원들은 경악한 표정으로 대장장이를 쳐다보았다.
몇 달 전 판온을 시끄럽게 만든 그 대장장이가 설마….
여기 설산에 있었다고?
* * *
“아니. 잠깐만요. 태현 님.”
“왜?”
이다비는 물론이고 다른 랭커 커플들도 황당하단 시선으로 태현을 쳐다보고 있었다.
말하는 것만 들었을 때는 판온 1에서 만난 아름다운 인연이나 우정, 혹은 추억 이야기인 줄 알았는데….
그냥 싸움 이야기였잖아!
“배낭 같이 만든 이야기 궁금하다면서?”
“그… 그렇군요.”
“김태현 선수, 지금 이렇게 같이 만들면서 왜 그런 폭력적인 이야기를….”
“그것도 같은 제작이니까 그렇죠. 방해하지 말고 들어보십시오.”
“…예….”
랭커 커플들은 무거운 배낭을 내려놓고 털썩 주저앉았다.
왠지 이상하게 이야기 속의 길드원들에게 동정이 갔다.
무시무시한 놈한테 잘못 걸려서 동굴 밖으로 나가지 못하고 갇혀버린다는 점이, 이상하게 동질감이 들었던 것이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