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 나는 될놈이다 외전 15화
밀라벤은 경악해서 속삭였다.
“저 사람들이 왜 와??”
“어… 그러고 보니 두 사람이 사귄다고 발표했었지.”
“…지금 그렇게 담담하게 말할 때냐!”
자리에 모여 있던 랭커들이 경악했다.
아니, 소소하게 커플들이 오순도순 모여서 인기 좀 모으려는 방송에 왜 이미 충분히 인기 넘치는 사람이 온단 말인가.
이 무슨 상도덕 없는….
“아… 아니. 오히려 좋은 걸지도 모르겠는데.”
“뭐가?”
“보는 사람들은 일단 엄청나게 많을 거 아니야. 그러면 업혀갈 수 있겠지.”
“과, 과연…!”
원래 방송이란 게 다른 사람들보다 좀 더 돋보이지 않으면 순식간에 편집당하고 밀리기에 십상이었다.
나름 방송에 많이 나가 본 랭커들은 잘 알았다.
이런 방송 프로그램 안에서도 경쟁이 치열하다는 것!
어떻게 보면 그냥 혼자 깨는 퀘스트가 더 마음 편한 부분이 있을 정도였다.
그런 만큼 저런 거물 커플의 등장은 여기 랭커들을 압도하고 있었지만….
역으로 생각해 보면 꼭 경쟁 상대라고 생각할 필요는 없었다.
태현과 이다비를 중심으로 흘러가긴 하겠지만, 거기에 맞서기보다는 거기에 업혀 가는 게 훨씬 이득인 것이다.
당장 둘의 이름을 듣고 새로 몰려 올 시청자들만 생각해도….
“어… 어서 오십시오!”
이동원이 일어나서 앞의 먼지를 털어내고 빠르게 양탄자를 깔자 밀라벤은 경악했다.
‘그렇게까지!?’
물론 잘 보여서 나쁠 건 없었지만 너무 속보이고 심하지 않나?
오히려 역효과가 날 수도 있는 일이었….
“….”
그러나 그건 밀라벤의 착각이었다.
“아닙니다! 제 양탄자에 앉아주십시오! 이 양탄자는 비전 재봉 스킬을 갖고 있는 엘프 재봉사 NPC가 만든 양탄자인데 옵션이….”
“제가 엎드릴 테니 그 위에 앉아주십시오! 김태현 선수를 제 등에 얹는 게 평생소원이었습니다!”
이동원의 아부 정도는 눈에 들어오지도 않을 수준이었다.
자리에 있던 랭커들은 상황 파악을 끝내고 미친놈처럼 달려들기 시작한 것이다.
그 모습에 태현은 배장욱 PD를 보며 물었다.
“원래 이런 방송 아니지 않습니까?”
“하… 하하. 이 친구들이 의욕이 넘쳐서 그런지 장난을… 하하하….”
배장욱은 정말로 창피했다.
* * *
“보통 뭘 하나요?”
혼란이 진정되자 이다비가 물었다.
그러자 랭커들은 서로 주먹을 날리기 시작했다.
“?!?”
“이 자식아 비켜! 내가 대답할 거라고!”
“양보해 좀! 넌 양보란 걸 모르냐 쓰레기 같은 놈아!”
“이다비 님! 전 아키서스 교단 골드 등급입니다! 이 정도면 제가!”
“….”
이다비는 경악했다.
그냥 태현하고 같이 소소하게 즐길 수 있는 프로그램이라고 들었는데 이 살벌한 분위기는 대체…?
“보통 뭘 합니까?”
태현은 그냥 배장욱에게 물었다.
“사실, 평범하게 판온을 하시면 됩니다.”
“?”
“이 프로그램 보는 분들은 무슨 거창하고 작위적인 상황을 좋아하는 게 아니라, 평범하게 판온을 하는 커플들을 좋아하는 거거든요.”
괜히 무리하게 뭘 할 필요 없이 퀘스트 깨고 던전 돌고 마을 가면서 커플들이 나누는 대화만으로 재밌는 상황이 만들어졌다.
그런 자연스러움이 이 프로그램의 인기였던 것이다.
“오….”
태현은 고개를 끄덕이다가 생각했다.
‘근데 그러면 평소에 이다비하고 하는 것과 다른 게 없지 않나?’
사귀기 전에도 매번 같이 던전 돌고 퀘스트 깼던 것 같은데….
“그러면 던전 가면 됩니까?”
“뭐든지 원하는 대로 하시면 됩니다. 저한테 물어보지 말고 다른 사람들한테 물어보시죠.”
배장욱의 말에 태현은 고개를 끄덕였다.
그리고 다른 커플들을 보며 물었다.
“던전 가….”
“네!!!!!!!!!!!!”
“따르겠습니다!!”
‘사귀는 사이들이 아닌 것 같은데?’
태현은 커플들을 보며 의아해했다.
무릇 사귀는 사이라면 태현과 이다비처럼 서로 애정 넘치는 시선을 보내야 하는데 저 커플들은 서로에게 관심을 보내는 대신 판온에 미쳐 있는 것 같았다.
“이다비. 판온도 좋지만 사귀는 사이인데 저렇게 삭막하게 대하는 건 좀 아닌 거 같아. 난 저렇게 하지 말아야겠어.”
“태현 님… 혹시 잊고 계신 걸지도 모르는데 지금 이거 다 촬영되고 있거든요…!”
이다비가 새빨개진 얼굴로 대답했다.
* * *
크로와포드 산.
태현이 정한 목적지였다.
이다비 직업 퀘스트 관련해서 필요한 아이템들이 크로와포드 산 정상에 위치해 있었던 것이다.
“그러면 여기 바로 가자.”
“…그냥 다른 던전 가면 안 될까요?”
“왜?”
“….”
이다비는 부끄러움에 고민하다가 결국 고개를 저었다.
“가죠!”
태현은 이런 부분에서 설득할 수 있는 사람이 아니었던 것이다.
“장소 정하셨습니까?”
“예. 정했습니다.”
“어디로?”
“크로와포드 산이요.”
“크로와포드 산!! 정말 탁월하신 선택이신… 잠. 잠깐.”
일단 감탄부터 하고 판단을 늦게 한 바람에 랭커들은 살짝 늦었다.
크로와포드 산이라면….
판온 동부 지역의 높은 산맥 중에서 험준하고 사납기로는 손꼽히는 산 아닌가.
랭커들도 꼭 필요한 일이 아니면 굳이 발을 디디지 않는 위험한 곳이었다.
그런데 지금 거길 간다고?
“아. 안 됩니까?”
“…그럴 리가요!”
“사실 제가 크로와포드 산에 저번부터 가고 싶었어요!”
“데이트는 등산 코스가 최고 아닙니까!”
랭커들의 말에 태현은 의아해져서 이다비에게 물었다.
“일반적으로 등산 코스가 데이트로 인기가 있나? 저번에 케인이 가겠다고 하던 걸 말렸는데.”
“잘 말리셨어요.”
* * *
[크로와포드의 광풍이 불어오기 시작합니다!]
[온도가 내려갑니다!]
[서리의…]
[…]
[…]
휘이이이이이이잉!
‘생각보다 더 심하다!’
랭커들은 경악했다.
각종 두꺼운 장비는 다 꺼내고 추운 지역에서 싸울 준비를 마쳤는데도 불구하고 크로와포드 등산은 장난이 아니었다.
이 정도일 줄이야!
“이다비. 괜찮지?”
“네.”
“혹시 모르니까 이거 버프 걸어줄게.”
“앗. 감사합니다.”
“그래도 혹시 모르니까 이거 추가로 장착해.”
“감사합니다.”
“그래도 혹시 모르니까 스킬 하나 더 쓸….”
“…창피하니까 그만해요!”
뒤에서 따라오던 커플들은 둘의 모습에 경악했다.
‘대체 어떻게 저런 닭살 돋고 손발이 오그라드는 행동들을 저렇게 태연하게….’
‘지금 촬영하고 있다는 걸 아는데 저게 가능한가?’
프로 연예인과 아마추어의 차이는 촬영하고 있다는 사실을 알고 있을 때의 반응으로 갈렸다.
프로 연예인은 눈앞에 수십 대의 카메라가 있어도 자기가 해야 하는 일을 알고 명확하게 수행했다면, 아마추어는 긴장하고 머릿속이 복잡해져서 행동이 달라지는 것이다.
혼자서 방송할 때는 그렇게 재미있는 랭커들도 이렇게 방송국에서 데리고 오면 말을 더듬고 머뭇거리는 게 다 그래서였다.
태현과 이다비는 당연히 오랫동안 프로 선수로 활동한 만큼 나름 방송 출연 경험도 많고 노련한 선수들이었다.
…그러나 그걸 감안해도 그렇지 지금 눈앞의 둘은 너무 프로페셔널했다.
저게….
저게 프로??
‘아니, 둘이 저러면 우리들은 뭐 먹고 살라고….’
‘연기 아닌가?’
“이다비. 혹시 모르니까 이것도 좀 마셔. ‘아’ 해봐.”
“태현 님, 저 진짜 밧줄에서 손 놓고 내려갈 수도 있거든요.”
“그래. 그러면 다시 붙잡을 테니까. 마시고 가자.”
보고 있던 이동원은 정신을 차리고 말했다.
“나… 나도 저렇게 해야겠다.”
“저걸 하겠다고? 진짜로? 할 수 있어?”
“할… 할 수 있어.”
“절대 저건 따라 할 수가 없어….”
그렇게 떠드는 사이 얼음폭풍 속에서 괴성과 함께 몬스터가 나타났다.
[크로와포드의 서리거인이 나타납니다!]
[서리거인이 울부짖습니다!]
“조심해!!”
안 그래도 험준한 비탈길에서 대형 몬스터를 상대하는 건 몇 배로 위험한 일이었다.
승패를 떠나서 미끄러지면 그냥 아래로 추락하는 것이다.
태현은 바로 달려 나갔다.
[치명타가 터졌습니다!!]
전설 검술 스킬이 펼쳐지자 서리거인의 머리통이 그대로 박살이 났다. 서리거인이 무슨 스킬을 쓰기도 전에 일격에 처리한 것이다.
“더 있어요!”
“알고 있어!”
이다비의 외침에 태현은 고개를 끄덕이고 반격을 기다렸다.
아니나 다를까 얼음폭풍 속에서 계속해서 몬스터들이 나타나기 시작했다.
-아키서스의 안개!
[<아키서스의 안개>가 시전됩니다.]
[몬스터들의 시야가 봉쇄됩니다!]
[몬스터들이 균형을 잃고…]
[…]
[…]
“시야 막았어요!”
“알겠어. 지금 잡는다!”
이다비가 시야를 가리자 태현은 그 틈을 타 서리거인을 하나씩 노리기 시작했다.
[치명타가 터졌습니다!]
[전설 검술 스킬로 인해 추가 효과가…]
[서리거인이 쓰러집니다!]
[서리거인이 당신의 검술에 겁을 먹습니다!]
[서리거인이 도망치기 시작합니다!]
[…]
[…]
“쫓자!”
-아키서스의 흔적 추적 저주!
이다비가 지팡이를 휘두르자, 저주가 걸린 서리거인의 뒤로 흔적이 표시되기 시작했다.
시야를 가리는 얼음폭풍 속에서도 선명하게 보이는 표식이었다.
“가죠!”
태현은 줄을 놓고 비탈길에서 달려 나온 이다비의 손을 단단히 붙잡았다.
그리고 푹푹 빠지는 눈밭 위로 반쯤은 날듯이 달려갔다. 서리거인을 추적해서 쓰러뜨리기 위해서였다.
“….”
“…아!”
뒤늦게 밧줄 붙잡고 비탈길 기어오르고 있던 랭커들도 정신을 차렸다.
싸움이 너무 빨리 끝나서 반응하지도 못한 것이다.
멍하니 보는 그 짧은 사이에 태현이 서리거인들 목 따고 이다비가 마법 걸고 둘이 갑자기 추적하러 멀리….
“같, 같이 가요!”
“김태현 선수! 같이 갑시다! 아니! 멋대로 가시면 안 된다구요! 이거 같이하는 거예요!”
“그보다 대체 왜 이렇게까지 어려운 곳을 고르신 겁니까!”
랭커들이 외쳐봤자 공허한 메아리만 설산에 감돌았다.
* * *
휘이이이이잉!
[얼음폭풍이 심해집니다!]
[체온이 내려갑니다!]
[…]
[…]
[주의하십시오!]
서리거인이 사라진 방향으로 갈수록 더욱더 날씨가 사나워졌다.
태현과 이다비는 본능적으로 느꼈다.
‘뭔가 있군.’
서리거인을 쫓아가서 잡으려고 한 이유는 두 가지였다.
하나는 내버려 둬서 좋을 게 없다는 거였고(태현이나 이다비는 버텨도 다른 랭커들이 밧줄에서 튕겨 나가 굴러떨어질 가능성이 컸다)….
다른 하나는 서리거인을 쫓을 경우 추가적으로 뭔가 발견할 수 있을지도 모른다는 이유였다.
서리거인도 휴식하는 곳이 있을 테니, 발견만 한다면….
슥-
태현은 이다비를 끌어당겨서 한쪽 팔로 안았다. 이다비는 의아해하며 물었다.
“저 아직 온도 괜찮은데요?”
“그냥 이러고 싶어서 한 건데.”
“….”
이다비는 자신도 모르게 주변을 둘러보았다. 다행히 본 사람은 이다비와 태현 둘밖에 없었다.
‘다행이다…!’
“너무 판온 위주로 생각하는 거 아니야?”
“태현 님이 그러시면 안 되죠…!”
이다비는 어이없어했지만 팔을 쳐내진 않았다.
내심 기쁘….
“김, 김태현 선수! 같이 가요! 같이!”
팍!
이다비는 재빨리 팔에서 벗어났다. 태현은 상처받은 표정으로 이다비를 쳐다보았다.
“싫어서 그런 게 아니라요! 싸울 때 위험하잖아요!”
“하긴 그렇긴 하지.”
“두 분이 무슨 이야기를?”
“아. 방금….”
태현이 있었던 일을 설명하려고 하자 이다비가 급하게 화제를 돌렸다.
“지금 상황을 보니 저 앞쪽에 뭔가 있을 가능성이 높아요!”
“예? 어… 너무 위험하지 않을까요? 확실한 보장도 없는데….”
[<서리거인의 동굴 은신처>를 발견합니다!]
[…]
[…]
[…]
“…정말 존경스럽습니다!!”
“그냥 운인데요.”
“겸손까지…!”