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 나는 될놈이다 외전 14화
“왜 그래?”
“그걸 굳이 다 일일이 언급하지 마세요…!”
“하지만 여기 적혀 있는 질문인데. 그러면 그냥 넘어갈까?”
방송을 생각하는 태현의 책임감 있는 태도에, 이다비의 마음이 흔들렸다.
“그… 그러면 한 개만.”
“한 개는 너무 적지 않을까?”
“두 개만 하죠. 그러면….”
“두 개도 너무 적지 않나? 세 개?”
“알겠어요. 세 개.”
“기왕 늘린 김에….”
“…….”
“알겠어. 세 개만 하면 되잖아.”
대화를 마친 태현은 고개를 들었다.
하연뿐만 아니라 주변의 스태프들이 모두 얼어붙은 표정으로 태현을 쳐다보고 있었다.
현장에 나와 있던 PD는 기겁한 얼굴로 입을 뻐끔거렸다.
-이거 생방송이에요!! 지금 인터넷으로 중계되고 있….
“알고 있습니다.”
“…어… 그래요?”
“네. 피디님. 저도 선수 생활을 했고 방송에 나간 적이 있는데 그런 걸 모를 리가 없잖습니까.”
태현이 ‘허 참 피디님 날 너무 무시하시네’ 같이 말하자, PD는 갑자기 억울해졌다.
지금 누가 폭탄발언을 해서 이렇게 놀랐는데…!
“그… 그러면 진짜 이대로 진행합니다? 진짜 이대로 진행합니다??”
“네. 그러세요. 사실 피디님이 왜 이러시는지 모르겠습니다.”
“그야 두 분이 사귀는 게 워낙… 그… 놀랍고 충격적이라….”
“서로 좋아하는 사람들이 사귀는 것에 그리 놀랄 필요 없습니다. 자. 피디님. 이리 와보세요.”
태현은 뒤에 있던 피디를 질질 앞으로 끌어왔다.
다른 스태프들은 멍하니 있다가 퍼뜩 정신을 차렸다.
‘말려야 하지 않나?!’
방송 컨셉이나 계획과 확 달라진 상황.
그러나 그걸 결정해 줄 피디는 지금 김태현 선수한테 붙잡혀서 끌려가고 있었다.
나름 산전수전 겪은 PD인데도 태현 앞에서는 허둥대고 있었던 것이다.
“저, 저는 왜? 저는 방송에 참가할 게 없습니다만?”
“이거 받아주고 읽어주셔야죠.”
태현은 하연한테서 뺏어 들은 큐카드를 건넸다. 피디는 어이가 없었다.
아니…!
“자. 어서.”
그러나 따지기도 전에 태현은 단호하게 재촉했다. 피디는 결국 홀린 것처럼 큐카드의 질문을 읽어나가기 시작했다.
“두 분은 언제 서로에게 반했….”
* * *
└????
└????????
└????????????????
수많은 ‘?’만이 생방송 리플란을 가득 채우고 있었다.
처음에는 ‘와 팀 KL 선수들이다!’ 했던 팬들이었지만 지금은 망치로 뒤통수를 몇 번 얻어맞은 것 같은 기분을 맛보고 있었다.
누가 누구랑 사귄다고????
└조… 조작 아닌가??
└가짜나 분장한 배우일 수도….
└아무리 그래도 그렇지 그딴 짓을 왜 해!
└진… 진짜 사귀는 것 같은데.
└이거 이렇게 공개해도 되는 거 아니야? 생방송인 거 모르고 말한 거 아니야??
└저 자식들은 왜 지나가는 선수들을 멋대로 데리고 와서 이 난리를 만들어!
몇몇 팀 KL 충성팬들은 방송에 화를 내기 시작했다.
태현이 스태프들한테 속았다고 생각한 것이다.
그러나 이어지는 대화를 보니 그런 게 아니었다.
숨길 생각이 조금도 없는 당당함.
└…혹, 혹시 둘이 예능 찍는 거 아닐까? 가상결혼예능 같은….
└맞는 것 같음. 그런 게 아니라면 갑자기 나와서 저런 말을 할 리가 없잖아.
└김태현 선수가 뭐가 아쉬워서 가상결혼예능에 나와요?
└방송국 사장이 와서 무릎 꿇었나?
보고 있던 사람들이 혼란스러워하거나 말거나 태현은 계속 자기 할 말을 했다.
“자. 다음 질문 해주시죠.”
“그… 예. 알겠습니다.”
졸지에 갑자기 끌려와서 MC 역할을 맡게 된 피디는 당황스러웠지만 큐카드를 읽었다.
“평소에 가졌던 불만이나….”
“언제나 너무 열심히 하는 게 불만… 잠깐. 질문 하나 놓치셨습니다.”
“그, 그렇군요.”
“그 질문 읽어주세요.”
“상대의 외모에서 가장 좋은 부분….”
이다비가 안 보이는 각도에서 태현의 등판을 찰싹 때렸다. 태현은 움직이지 않았다.
“제가 보기에는 모든 부분이….”
└아니 왜 PD가 더 부끄러워하냐?
└나 같아도 지금 고개 못 들 것 같음.
└저런 말을 실제로 할 수 있는 사람이 앞에 있다고 생각해 봐라.
정작 말하는 태현은 표정에 변화 하나 없었는데 PD는 자기가 부끄러워서 죽으려고 했다.
물론 이다비도 그랬다.
“이제 제가 할게요.”
“하연아…!”
PD는 눈물 그렁거리는 표정으로 정신이 돌아온 하연을 쳐다보았다.
그리 길지 않은 시간이었지만 MC가 얼마나 힘든지 실제로 느낀 것이다.
죽는 줄 알았네!
“피디님. 지금 반응 장난 아니에요.”
“앗….”
자리로 돌아온 피디는 다른 스태프들의 말에 그제야 정신이 돌아왔다.
김태현 선수의 광기 어린 고백을 연달아 듣다보니 정신이 혼미해졌는데, 생각해 보니 지금 상황은 프로그램에 어마어마한 호재였다.
크게 기대하지 않고 진행한 길거리 생방송에서 이런 대박 사건이 터질 거라고 어느 누가 예상했겠는가.
‘감사합니다… 김태현 선수!’
피디는 마음속으로 깊숙이 감사해했다.
* * *
“저 친구들은 이번 주에 복권 사야겠네.”
배장욱은 스마트폰으로 생방송을 보면서 중얼거렸다.
지금 주변에 있는 사람들 모두 다 숨을 죽이고 생방송을 보고 있었다.
곳곳에서 탄성이 튀어나왔다. ‘김태현 선수 맞아?’나 ‘그 김태현 선수가’같은 소리가 들려왔다.
배장욱은 아주 이해가 됐다.
‘나도 놀랍다!’
사람이 사랑에 빠지면 변한다는 걸 알고 있었지만 이 정도로 변하다니….
이건 거의 뭐…!
“와, 이 사람들은 전생에 무슨 선행을 했길래 길가다가 김태현 선수가 나와서 열애 사실을 밝히는 거죠?”
“그만 투덜거리고 우리는 우리 일을 한다.”
배장욱이라고 안 부러울 리가 없었다.
평소 모이던 시청자 숫자가 수십배, 수백배로 늘어나더니 자막도 없는 다른 나라 사람들까지 몰려오기 시작했다.
그 사이 열애 이야기가 퍼진 게 분명했다.
[시청자 숫자가 너무 많아 일시적으로…]
[시청자 숫자가 너무 많아 일시적으로…]
사람들이 몰려와서 생방송이 멈추고 사이트가 터져나가는 그런 상황.
피디로서는 꿈과 같은 상황일 것이다.
하지만 배장욱은 고개를 흔들고 잡념을 떨쳐냈다.
“김태현 선수가 우리 방송에도 나와 준다고 약속했다. 그러니까 어떻게 가닥을 뽑을지 최대한 머리를 굴려봐.”
“으음!”
“크으음….”
방송국에서 가장 센스 있고 재능 있는 PD들이 모였지만, 그들의 표정은 오히려 더 긴장된 상태였다.
김태현이라는 아이템이 너무나 사기적인 아이템이었기에 더더욱 그랬다.
그냥 나와서 숨만 쉬고 밥만 먹고 가도 전 세계 팬들이 몰려와서 봐주고 가는 만큼, 피디 입장에서는 업혀가는 기분이 드는 것이다.
저런 아이템으로 성공하는 건 아무나 할 수 있는 일.
뛰어난 피디라면 뭔가 더 보여줘야 한다!
‘이번 기회는 절대 놓칠 수 없다!’
‘김태현 선수 관련된 거라면 절대로….’
피디들은 눈빛을 빛내며 제안서를 만들기 시작했다.
* * *
-길마님 축하드립니다!!
-길마님 축하드립니다!!!!!
-저는 평소부터 길마님을 존경해 왔습니다! 앞으로 길마님을 몇 배로 더 존경하게 될 것 같습니다!!!
-길마님 충성충성충성!!!
-파워 워리어 길마님. 제가 길드 동맹 소속 간부였는데 혹시 김태현 선수한테 잘 말해줘서 영지 좀….
-대체 왜 태현이 같은 놈이랑 사귀냐? 뭐가 좋아서?!
-안녕하십니까 길마님 저희가 두 달 전에 파워 워리어 길드하고 부딪혔었는데 그건 정말 고의가 아니었고 죄송하단 말슴을 드리고 싶어서 이렇게 연락을 드렸습니다 저희는 정말….
이다비는 바로 귓속말을 껐다.
접속하자마자 아는 사람 모두 폭주하듯이 연락을 날리기 시작한 것이다.
“길마님! 길마님!”
“길마님 만세!!!”
“…지금부터 찬양하는 놈들 모두 처벌이야.”
“…….”
“어… 어째서….”
파워 워리어 길드원들은 억울하다는 듯이 쳐다보았다.
이런 경사스러운 일을 축하하지 않으면 대체 뭘 축하한단 말인가.
파워 워리어에 사실상 김태현 선수가 가입한 것이나 마찬가지인데!
“랭커들 까불면 죽는다! 우린 파워 워리어야!”
“이 자식들! 우린 그 파워 워리어라고!”
“그만해 미친놈들아!”
이다비는 참다못해 폭발해서 간부들을 직접 두들겨 팼다. 그러는 사이 접속한 태현이 찾아왔다.
“뭐하냐 다들?”
“…충성충성충성!”
태현을 본 파워 워리어 길드원들이 90도로 허리를 굽히며 인사를 올렸다.
“그래. 고맙다. 이다비. 준비됐어?”
“네. 준비는 됐는데….”
이다비의 말이 끝나기도 전에 파워 워리어 소속 음유시인들이 우르르 달려와서 뒤에서 연주를 시작했다.
애틋한 선율이 울려퍼졌다.
[<연인을 위한 왕궁의 세레나데>가 연주되기 시작합니다!]
[방어력에 추가 보너스…]
[……]
[……]
[……]
태현은 갑자기 연주해 주는 파워 워리어 길드원들의 모습에 고마워했다.
“노래 좋군.”
“감사합니다! 영광입니다!”
“다음 곡 연주해드려! 빨리!”
“그럴 것까지는 없는데.”
“아닙니다! 배웅하는 동안 계속 연주해드리겠습니다!”
파워 워리어 길드원들은 몰려오더니 꽃가루를 뿌리고 음악을 연주하고 하여간 온갖 스킬들을 사용해서 환영과 축하를 표현했다.
태현은 고개를 끄덕이며 그 축하를 받아들였다.
“그래. 다들 고맙다.”
“…태현 님 이게 안 부끄러우세요…??”
“이다비 너하고 사귀는 일인데, 이 정도 축하는 오히려 좀 조촐하지.”
“조촐하시댄다!!!”
“야! 창고 가서 더 꺼내와!!!”
“그만해 미친놈들아!!!”
이다비는 다시 한번 폭발했다.
* * *
“저것들은 또 보이는군.”
밀라벤과 이동원은 표정을 찌푸리며 다른 사람들을 쳐다보았다.
둘은 판온에서 나름 유명한 랭커들이었다.
커플로 유명한 랭커들!
판온 초기부터 닭살 돋는 애정을 과시하며 온갖 플레이어들의 염장을 지른 이 커플은 그 컨셉으로 상당한 인기를 모은 랭커들이었다.
물론 이런 컨셉을 잡는 게 그들만 있는 건 아니었다.
눈앞의 제켄-도르도 커플도 커플이라는 점을 강조해서 판온의 각 곳을 돌아다니며 같이 콘텐츠를 즐기는 걸로 시청자를 모으는 커플이었다.
둘이 서로 비슷한 컨셉인 만큼 경쟁이 치열할 수밖에 없는 상황.
이렇게 방송국 쪽에서 부탁해서 모였지만 사이가 좋을 리는 없었다.
“화내지 마. 밀라벤. 다른 사람들은 절대 우릴 따라올 수 없으니까. 다들 우리를 따라 한 거나 마찬가지라고.”
“헛소리하고 있군. 커플 컨셉은 너희들이 하기 전에도 예전부터 있었던 거야. 고작 그거 가지고 따라 했다니.”
“맞아. 그리고 둘의 인기는 요즘 좀 식지 않았나?”
“콘텐츠를 바꾸면서 흔히 보이는 일시적인 감소 현상이지. 곧 회복될 거라고. 그에 비해 너희 커플은 이름을 거의 본 적이 없는데, 너무 재미없는 거 아닌가?”
“뭐… 뭐라고…?!”
방송은 시작도 안 했는데 커플 랭커들끼리 벌써 살벌하게 부딪혔다.
그때 배장욱 PD가 접속해서 달려왔다. 배장욱의 얼굴을 알아본 커플 랭커들이 매우 반가워했다.
“피디님!!”
“안녕하십니까?”
배장욱이 가진 명성과 실력을 아는 커플 랭커들은 매우 격렬하게 환영했다.
배장욱의 눈에만 들면 방금까지 이름 없던 랭커였던 사람도 순식간에 스타가 될 수 있었다.
그 정도로 마이더스의 손을 가지고 있는 사람인 것이다.
“직접 제안 주셔서 참 기뻤습니다! 다른 커플 랭커들과 이렇게 함께하게 되다니요.”
“다른 사람들과 같이 할 수 있는 이런 기회가 참 좋네요!”
방금까지 싸웠던 게 마치 거짓말인 것처럼 랭커들은 입을 모아 말했다.
배장욱은 고개를 끄덕이며 대답했다.
“다들 감사합니다. 아. 그리고 한 커플이 더 올 건데….”
커플 랭커들은 별 신경을 쓰지 않았다.
누가 오든 말든 뭐….
“저기 오시는군요.”
랭커들은 피디가 가리키는 방향을 따라 무심코 고개를 돌렸다.
그리고는 경악했다.
“…?!?!?!?!!!”