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 나는 될놈이다 외전 12화
“대장장이. 길드에 들어갈 생각은 없나?”
“스카웃하려고 온 게 아니라고 하지 않았나?”
태현은 망치에 시선을 던졌다.
한 번 했던 말을 뒤집는 놈은 두 번도 뒤집을 수 있었다.
길드에 들어오지 않으면 공격하려고 할 수도 있으니 먼저 치는 게 나을지도….
그 낌새를 눈치챈 이주홍은 다급하게 외쳤다.
“꼭 스카웃을 하겠다는 게 아니다. 그냥 생각을 물어본 거다. 너도 판온에서 혼자서 플레이하는 것의 한계를 느끼고 있을 텐데?”
그 말에 대장장이는 비웃음을 터뜨렸다.
“한계는 어떻게 플레이해도 느끼게 되어 있지. 지금 당장 너도 원하는 아이템 하나 멋대로 사지 못하고 위에다가 보고를 하고 허락을 기다리고 있을 텐데.”
“그건… 그건 길드의 규칙이다. 그리고 이런 규칙을 감안해야 길드가 굴러가는 법이고. 물론 어느 정도 자유가 제약될 수 있지만 길드에 들어가서 누릴 수 있는 게 훨씬 더 크다고.”
이주홍은 대형 길드에 소속된 선택을 전혀 후회하지 않았다.
규칙이나 길드 내 정치 같은 것에 신경을 써야 했지만 그만큼 얻는 것도 많았다.
대형 길드의 전폭적인 지원은 절대 혼자서 플레이해서 얻을 수 있는 게 아니었다.
길드 소유의 던전을 혼자 사냥하는 것, 길드원들의 지원으로 희귀 퀘스트를 빠르게 돌파하는 것, 길드의 제작 직업 랭커들이 만든 최고급 아이템들을 먼저 장비하는 것….
이 모든 게 다 대형 길드에서만 가능한 일이었다.
“그건 네 착각이지.”
“뭐?”
“길드에 소속되지 않고 지금 말한 것들을 달성하려고 해봤나?”
“해보진 않았지만….”
“혼자서도 할 수 있는 일들이다. 그런 것 때문에 길드까지 들어갈 필요는 없지.”
“…….”
터무니없는 대장장이의 말에 이주홍은 할 말을 잃었다.
말도 안 되는 소리라고 반박하고 싶었다.
그러나….
이상하게 말이 나오지 않았다.
눈앞의 대장장이는 그 터무니없는 말을 진심으로 지키고 있었던 것이다.
“…그러면 길드에 들어갈 생각이 조금도 없나?”
“전혀.”
* * *
“나 파워 워리어에 가입할까?”
“네? 아니요? 왜 그러세요?!”
이다비는 물을 마시다가 사레가 들려서 콜록댔다.
태현이 파워 워리어에 가입한다니.
아무리 요즘 충격적인 사건이 많아도 그렇지 판온이 뒤집힐 일이었다.
-김태현, <파워 워리어> 가입….
└파워 워리어에서 또 왔냐?
└파워 워리어 제발 좀 작작해라. 이미 잘 나가는데 그런 루머 마케팅을 해야 해?
└김태현이 파워 워리어 가입하면 내가 판온 접는다.
└김태현이 파워 워리어 가입하려면 길마 자리 정도는 줘야 가능한 거 아니야?
└길마 자리 줘도 모자랄 것 같은데.
아마 가입하고 나도 한동안 사람들이 믿지 못하고 <파워 워리어>에서 조작한 거라고 생각할 가능성이 높았다.
“그냥. 같이 있고 싶어서.”
“…….”
이다비는 목이 멘 표정으로 태현을 쳐다보았다.
그리고 이다비의 동생들은 부엌 밖에 있다가 미친 듯이 콜록대기 시작했다.
“윽, 콜록, 콜록.”
“목… 목이….”
“건조한가? 가습기 틀어줘?”
“아, 아니요. 괜찮… 괜찮습니다….”
이다비의 동생들은 후다닥 거리를 벌려서 자기들 방으로 들어갔다.
그러고는 충격과 공포에 빠진 얼굴로 서로를 쳐다보았다.
“방금 내가 잘못 들은 거 아니지?”
“나… 나도 듣긴 했는데….”
“내가 생각한 그게 맞아? 내가 생각한 그게 맞아!?”
“오… 오해일 수도 있어. 원래 언니랑 오빠가 친했잖아.”
“그래도 방금 말은 좀… 그렇잖아! 사귀고 있는 거 아니야 이 정도면?!”
이다비 동생들은 ‘이다비와 태현이 언제쯤 사귈지’로 고민하는 건 물론이고 ‘두 사람이 사귀기는 할지’로도 고민했다.
분명 친한 것 같은데 하도 일정이 바쁘다 보니 진전이 없는 것 같기도 하고 또 이거 물어보면 언니가 화내기도 하고….
그런데 갑자기 저런 말로 훅 들어오다니.
“객관적으로… 침착하게, 냉정하게 평가해 보자.”
“으, 으응.”
“방금 같이 있고 싶어서라고 말했지. 그렇지?”
“응.”
“이 말이… 연인 사이에서만 쓰는 말인지 아닌지 생각해 보자구.”
“맞지 않아?”
“하지만 팀 KL 선수들한테도 비슷한 말을 했었어.”
-케인. 방금 그 어처구니없는 실수는 뭐지?
-그, 그게… 이게 일부러 그런 게 아니라….
-시끄럽다. 넌 오늘 나하고 같이 간다.
“이런 말을 했었다고.”
“다르지 않… 비슷한가? 아니, 누나가 그렇게 실수를 했다고?”
“실수를 해서 그런 걸 수도 있지.”
“그… 그런가?”
두 동생은 혼란스러워졌다.
자세히 생각해 보니까 사귀는 게 아닐지도….
둘은 너무 섣부르게 판단했다고 반성하면서 나왔다.
태현과 이다비는 아직도 부엌에 앉아 있었다.
“잠깐. 이다비. 뺨에 밥풀 묻었어.”
“앗. 제가 뗄 수 있….”
태현은 이다비의 뺨에 손가락을 가져다 댔다. 둘이 서로를 애틋하게 쳐다보았다.
두 동생은 다시 마시던 물을 뿜고 방으로 돌아갔다.
“방금… 방금 본 건 확실하지 않아???”
“아, 아니. 그런데 나 비슷한 거 본 적 있어.”
“저런 걸 본 적이 있다고!?”
“그게….”
-야. 흘리지 말고 먹어.
-어? 흘렸나? 어디에?
-여기에 이 자식아.
-악! 악! 왜 때려! 말로 해도 알아들어!
“…그건 뺨을 만진 게 아니라 때린 거 아니야?”
“그렇… 그렇긴 한데… 방금도 그런 거 아니야?”
“아니었는데. 아무리 생각해도 뺨 때린 건 아니었어.”
“하지만 언니랑 오빠가 정말 사귄다니 믿기질 않….”
“나, 나도 그렇긴 해.”
두 동생들은 정작 계속 기다려 온 상황이 찾아오자 받아들이지 못했다.
진짜 사귈… 리가 없잖아?
똑똑-
태현이 문을 두드렸다. 둘은 화들짝 놀라서 문을 열었다.
“뭐… 무슨 일이세요!?”
“저희 아무런 수상한 일도 안 했어요!”
“그건 수상한 일 하는 사람만 하는 대사인데.”
태현은 그렇게 말하며 두 동생들을 쳐다보았다.
뭘 생각하고 있었는지 궁금하긴 했지만, 원래 십 대 때는 다 비밀이 필요한 법.
하나하나 캐물을 필요는 없었다.
“별 건 아니고. 너희 언니하고 데이트 좀 하고 오려고.”
“네.”
“그래. 집 잘 지키고. 올 때 필요한 거 있으면 연락해. 사다줄 테니까.”
“그러실 필요 없다니까요.”
이다비가 쿡 찌르자 태현은 알겠다는 듯이 고개를 끄덕였다.
그러고는 동생들만 볼 수 있게 눈을 찡긋거렸다.
“저번에 케이크 맛있었는데 케이크 사다 달라고 할까?”
“…잠깐만. 방금 뭐라고 했지?”
“케… 케이크?”
“그거 말고!”
“떡… 떡이 낫나?”
“그거 말고!! 멍청아! 데이트라고 했잖아!”
“뭐? 진짜? 어? 어어어어어어??”
* * *
이다비는 걸어가면서 태현의 손을 쳐다보았다.
‘잡을까?’
하지만 잘 생각해 보니 멋대로 손을 잡는 건 안 좋을지도 몰랐다.
둘이 사귀기 시작하긴 했지만 둘에게는 각자의 위치가 있고 책임이 있었다.
태현은 팀 KL의 간판이나 마찬가지인 만큼 섣불리 열애 사실을 발표하는 게 옳지 않을지도….
탁-
태현은 이다비의 손을 붙잡았다.
“괜찮지?”
“느… 느에.”
“느에?”
“…아무것도 아니에요.”
이다비는 방금 고민했던 것들을 말하려고 했지만, 전부 사라져서 입밖으로 나오지 않았다.
“잠깐 뭐 좀 마시고 갈까?”
“그러죠.”
태현이 자주 가는 카페를 가리키자 이다비도 동의했다.
카운터 안에 앉아 있던 카페 주인은 둘이 들어오는 걸 보고 내심 반가워했다.
‘팀 KL 선수들이 왔군.’
괜히 반가워하거나 아는 척을 해서 귀찮게 만들고 싶지는 않았다.
카페에 찾아온 손님을 배려해 주는 것도 주인의 역할인 법.
카페 주인은 흐뭇하게 두 선수를 쳐다보았다.
적극적으로 접근하지는 않았지만 주인은 둘의 팬이었던 것이다.
‘팀 KL 선수들은 다 친한 게 참 보기 좋단 말이지.’
게임단 소속 선수들 중에는 서로 사이가 나쁜 선수들이 생각보다 꽤 있었다.
아니, 사실 사이가 좋은 편이 드물었다.
서로 판온에서 한가닥하던 랭커들을 모아놓은 만큼 충돌이 안 일어날 수가 없는 것이다.
게다가 게임단은 게임단 사정대로 선수를 데리고 오고, 보내고, 키우고, 방출하니 그렇게 오랜 기간 동안 같이 있기도 힘들었다.
그에 비해 팀 KL 선수들은 사이가 끈끈하단 게 밖에서 확 느껴졌다.
당장 팀 KL을 직접 이끄는 선수부터가 압도적인 거액의 제안에도 불구하고 자기 자리를 지키고 있는 만큼 가능한, 기적 같은 일이었다.
‘특별히 더 맛있게 해줘야지.’
“라떼 아트 부탁드려도 될까요?”
태현이 다가와서 묻자 카페 주인은 고개를 끄덕였다.
저번에도 태현은 팀 KL 선수들에게 라떼 아트를 해준 적이 있었다.
커피 위에 ‘연습 좀 해라’라는 메시지를 남긴 것이다.
-…커피가 오늘 유난히 쓰네….
-시럽 넣어서 먹어.
-시럽 넣었는데도… 힝.
“저번처럼 해드릴까요?”
“아니요. 하트 모양으로 그려주세요.”
“네. 알겠습니다.”
카페 주인은 별생각 없이 커피 위에 하트 모양을 그렸다. 태현은 감사하다는 듯이 고개를 숙이고 가져갔다.
둘은 한 시간 정도 계속 떠들다가 일어서서 손을 잡고 밖으로 나갔다.
그 뒷모습을 흐뭇하게 쳐다보던 카페 주인은 무언가 위화감을 느꼈다.
“…으… 으응???”
“왜 그래요?”
학교 갔던 딸이 돌아오자 카페 주인은 있었던 일을 설명했다.
그러자 딸이 코웃음을 쳤다.
“에이. 착각한 거죠. 둘이 사귈 리가 없잖아요.”
“그… 그래? 하지만 그렇다기에는 너무 다정했던….”
“원래 팀 KL 선수들이 서로 친하잖아요.”
“그… 그런가?”
어린 딸의 강한 말에 카페 주인은 흔들렸다.
요즘 젊은 사람들은 그냥 우정의 표시로 하트를 하거나 손을 잡는 걸지도…?
* * *
MBS 방송국의 공신이나 마찬가지인 배장욱 PD는 신입과 같이 길을 걷고 있었다.
“그러니까 이렇게 커다란 퀘스트가 끝났을 때일수록 방심하지 말고 더더욱 새로운 콘텐츠를 찾아야 한다는 거지.”
“과연…!”
신입은 존경스러운 시선으로 배장욱 PD를 쳐다보았다.
방송국 내에서는 거의 전설이나 마찬가지인 만큼, 하는 말 한 마디 마디가 다 존경스러웠다.
“참고하겠습니다.”
“그래. 너는 재능이 있으니까 충분히 잘 할 수 있을 거야.”
그렇게 같이 길을 걷던 도중 갑자기 신입이 콜록대기 시작했다.
“왜 그래?”
“피, 피디님. 방금… 그….”
“?”
“김태현 선수가 여자친구와 같이… 걸어가는 걸 본 것 같은데요.”
“무슨 말도 안 되는 소리야?”
배장욱은 어이가 없다는 듯이 신입을 쳐다보았다.
김태현 선수 관련해서 열애설을 퍼뜨린 사람이 없었던 건 아니었다.
물론 모든 것들이 다 가짜 뉴스였었고 이들은 대가를 치러야 했다.
└오! 김태현 선수를 건드리다니! 믿을 수 없습니다! 당신은 한국인 아닙니다!
└항의해 주는 건 고마운데 이 사람 어느 나라 사람임?
└어떻게 더 외국인들이 많냐…?
전 세계에 팬들이 있는 선수를 잘못 건드리면 얼마나 큰일이 날 수 있는지, 기자들은 알지 못했던 것이다.
“하… 하지만 정말 봤어요.”
신입은 그런 핀잔에도 물러서지 않았다. 배장욱은 진지한 표정으로 물었다.
“뭔가 착각한 게 아니고? 옆에 있던 사람은 누구였는데?”
“그… 아!!! 같은 팀의 이다비 선수였습니다!”
“그러면 그렇지. 같은 팀이여서 같이 다니는 거잖아.”
배장욱은 알겠다는 듯이 말했다.
“하, 하지만 둘이 꽤 친해 보였….”
“알아. 알아. 팀 KL 선수들은 다들 친하거든.”
“…??”