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 나는 될놈이다 외전 10화
[HP가 0이 되어…]
태현은 길드원을 로그아웃 시킨 다음 아이템을 챙겼다.
수도 없이 한 만큼 빠르고 정확한 동작이었다.
그러고는 고개를 들어 다른 플레이어들을 쳐다보았다.
“…저, 저희는 같은 길드 아닙니다!”
“그냥 구경하고 있었습니다!!!”
태현의 시선에서 위험을 느낀 플레이어들은 다급하게 외쳤다.
웬 미친 길드원 놈이 건방 떨다가 박살 났는데, 그들을 같이 따라가고 싶지는 않았던 것이다.
“왜 구경하고 있었지? 수상한데.”
그런 해명에도 불구하고 태현은 쉽게 의심을 풀지 않았다.
발칼락 길드와 싸운 지 얼마나 됐다고 이런 놈들이 찾아온 만큼, 지금 지하 1층 광장에 있는 다른 플레이어들도 수상쩍었던 것이다.
“예?”
“3초 준다. 3, 2….”
“아니! 아니! 아니! 그. 글 봤습니다! 대장장이 직업이신데 발칼락 길드하고 싸워 이겼다고…!”
구경하고 있던 대장장이 플레이어는 황급히 외쳤다.
정말 이대로 가다가는 말도 안 되는 오해를 받을 것 같았다.
“그래서 그냥! 그래서 그냥 보고 싶었던 겁니다!”
“죄, 죄송합니다! 다시는 그냥 구경을 하지 않겠습니다!”
광장에 모인 플레이어들의 외침에 태현은 이해가 안 간다는 듯이 다시 물었다.
“그냥 구경하러 여기 모여 있었다고?”
“예!”
“왜 그런 시간 낭비를?”
“…그… 그러게요?”
플레이어들은 태현의 질문에 당황했다.
그… 그러게?
‘근데 구경 좀 할 수 있지 않아?’
‘맞아. 구경 좀 할 수 있지… 이런 기회가 또 얼마나 온다고….’
자리에 모인 플레이어들은 갑자기 살짝 억울해졌다.
판온에서 플레이어 한 명이 대형 길드를 탈탈 털어먹는 일이 또 언제 생기겠는가.
심지어 그 플레이어가 대장장이라면 더더욱.
이 정도면 솔직히 자기 퀘스트 버려두고 구경 와도 이해가 가지 않나?
“구경하지 말고 자기 할 일 해.”
“저… 대장장이 님!”
“?”
“그, 이 광산 이용 관련해서….”
파티장 중 한 명이 조심스럽게 말했다.
발칼락 길드와 그렇게 치열하게 싸운 만큼, 저 대장장이가 이 광산 던전에 대한 소유권을 주장하지 않을 리 없었다.
“입장할 때 얼마 내면 됩니까?”
물어보면서도 파티장은 조마조마했다.
입장할 때 골드를 내는 것 정도라면 아주 운이 좋은 편이었다.
보통 대형 길드가 광산 던전을 점령하면 길드원 외에는 입장을 허가하지 않는 경우가 많았다.
안에 있는 아이템들을 길드원 주기도 모자란데 굳이 외부인 줄 필요가 없다는 것이다.
‘설마… 입장은 허락해 주겠지?’
“뭘 낸다고?”
“예? 골드요.”
“그걸 왜 나한테 내지? 이 광산이 내 건가?”
“…맞지 않습니까?”
“헛소릴 하는군. 쓰고 싶으면 마음대로 해라.”
태현은 무시하고 광산 입구를 나섰다. 밖으로 나오자 반짝이는 햇빛이 태현을 맞이했다.
‘다 챙겼군.’
거인의 늑골 광산에서 싸운 이유는 아직 챙겨야 할 아이템을 다 얻지 못했는데 시비가 붙어서였다.
이제 필요한 광석들은 다 챙겼으니 새로운 명검을 제작할 수 있었다.
‘그 전에 마을 가서 얻은 장비들 정리해야겠다.’
대형 길드와 싸우는 게 꼭 단점만 있는 건 아니었다. 싸우고 나면 넉넉한 전리품들이 태현을 흐뭇하게 만들었다.
기본적으로 이런 길드원들은 악명 스탯이 높아서 좋은 장비를 잘 떨구는 것이다.
태현은 이런 장비들을 팔지 않았다. 거의 다 녹이거나 분해해서 재료로 만들었다.
장비들의 수준이 나빠서는 아니었다. 태현이 보기에도 괜찮은 장비들은 꽤 있었다.
하지만….
‘다시 만들어야 대장장이 기술 스킬이 오르니까.’
[아콘 마을에 입장합니다!]
[퀘스트로 인해 친밀도가 매우 올라가 있는 상태입니다.]
[퀘스트로 인해 평가가 매우 올라가 있는 상태입니다.]
[……]
[……]
[마을 사람들이 당신을 환영합니다!]
다른 대형 길드원들과 달리 태현은 이런 부분에서 제작 직업 덕을 봤다.
제작 직업만이 할 수 있는, 마을에서 반복 퀘스트로 친밀도 올리기!
-대장장이가 왔군! 대장간을 쓰려고 하나?
“예.”
-자네 정도의 실력을 가진 대장장이라면 얼마든지 써도 좋네! 핫핫핫!
[화철의 대장간 사용이 허가됩니다!]
[……]
[……]
태현은 바로 대장간으로 향했다.
가진 장비들을 다 갈아버리기 위해서.
* * *
“저거… 그 대장장이 아닌가?”
“에이, 설마요. 지금 발칼락 길드가 아무리 망해도 그렇지 남은 길드원들 중에 칼 갈고 있는 놈들이 한둘이 아닐 텐데 근처 마을에 이렇게 대놓고 오겠습니까?”
판온 1의 대형 길드, <진혼곡> 길드의 간부 이주홍은 화철의 대장간으로 들어가는 대장장이를 보며 의아해했다.
“남 일처럼 말하지 마. 그 대장장이 찾아야 한다고.”
“알고 있습니다. 어디로 가는지 확인하면 되는 거 아닙니까. …어? 광산 나갔다고???”
길드원은 귓속말에 당황했다.
그렇게 적을 만들었으니 당연히 광산에 더 있을 줄 알았는데, 대장장이가 대놓고 광산 밖으로 나갔다고 하지 않은가.
뭐지?
“광산 나갔다는데요?!”
“이런 멍청한… 일반적인 플레이어가 아니니까 선입견 가지지 말라고 했잖아!”
“죄, 죄송합니다.”
구박을 받은 길드원은 허겁지겁 간부의 뒤를 쫓으며 물었다.
“그런데 이 대장장이가 그렇게까지 탐을 내야 할 놈인가요? 아니, 물론 실력이 좋다는 건 알겠습니다. 대장장이로 그렇게 난리를 쳤으니까….”
대장장이 혼자서 발칼락 길드와 맞붙어서 이겼다!
이 사실은 지금 판온을 뜨겁게 뒤흔들고 있었다.
하지만 몇몇 대형 길드들은 좀 더 냉정하게 상황을 분석하고 있었다.
-맞붙어서 이겼지만 결국 광산의 환경을 이용해서 아닌가?
-발칼락 길드의 실수도 컸지.
-대장장이치고는 대단하지만 계속 저렇게 싸우다 보면 언젠가 빈틈을 드러낼 거다.
<진혼곡> 길드도 비슷하게 분석을 하고 있었다.
…무엇보다 저 대장장이 놈한테 한 번 길드원들이 박살 난 적이 있었던 것이다.
“결국 장비빨로 이긴 게 아니냐 이거지?”
“예. 당연히 제작 실력이 탐이 나긴 하는데, 성격 보니까 길드 밑에 들어와서 제작을 할 바에는 접을 놈 아닌가요?”
대장장이가 장비빨로 이겼다는 것도 충분히 대단했지만, 그걸 감안해도 저 대장장이는 너무 뻣뻣했다.
스카웃 불가능한 대장장이에 무슨 의미가 있겠는가.
“그건 네 착각이다. 세상에 불가능한 건 없다고. 어떤 놈이든 간에 생각을 바꿔서 길드에 들어올 수도 있어.”
“저놈이 길드에 들어오면 당한 놈들이 가만히 있을까요?”
“가만히 안 있을 거면 어쩔 건데? 저 정도면 A급, 아니 그 이상가는 대장장이야. 장비빨이라지만 대장장이가 사실 장비면 전부 아니냐?”
“…그건 맞긴 합니다.”
대장장이한테 ‘저 자식 전투 스킬 없어서 시간 지나면 거품 꺼질 거다’라고 말하는 것도 좀 웃긴 일이었다.
대장장이는 전투 직업이 아니었으니까.
“그리고 그보다 더 급한 게 있다.”
“?”
“저 대장장이가 손에 넣은 장비들 숫자만 해도 어마어마해. 그걸 교섭해서 가져오는 거다.”
“!”
<진혼곡> 길드는 물론이고 지금 몇몇 길드와 발칼락 길드까지 포함해서 저 대장장이한테 장비를 뺏긴 숫자가 상당했다.
지금 파악된 것만 계산해 봐도 돈으로 사기 힘든 희귀한 아이템들이 우르르 넘어간 상태.
저 대장장이가 경매장에라도 뿌리면 가격이 폭증할 테니 회수하기가 곤란해졌다.
그 전에 어떻게든 교섭해서 손에 넣어야 했다.
“확실히 그렇습니다.”
“알겠지? 빨리 움직여! 다른 길드에서도 나설지 모른다고!”
* * *
발칼락 길드의 길마, 발칼락은 붉어진 눈으로 태현을 노려보았다.
애지중지해서 키운 길드였다.
지나가는 사람들을 붙잡고 골드를 뺏고, NPC들의 재산을 약탈하고, 세금을 몇 배로 올리면서 욕도 같이 먹었지만….
길드를 키운다는 일념하에 참을 수 있었던 것이다.
그런데 그 길드가 산산조각 나서 망해버렸다.
직접적인 원인이야 다른 길드들이 갑자기 연합해 들어와서였지만 발칼락은 잘 알았다.
모든 원인은 저 대장장이 놈 때문이라는 걸!
‘죽여버린다!’
이렇게 된 이상 대장장이 놈만 쫓아다니면서 PK만 할 생각이었다.
네가 접나, 내가 접나의 승부.
그런데….
화르르르륵!
‘저 새끼 뭐하는 거지? 장비 만드나?’
발칼락은 대장간에 들어가서 불을 올리는 대장장이의 모습에 의아해했다.
만약 장비를 만드는 거라면 조금 기다려 줄 수도 있었다.
죽인 다음에 장비를 뺏은다면 그게 훨씬 더 좋은 복수일 테니까.
장비가 좋으면 좋을수록….
‘괜찮은데?’
발칼락은 갑자기 기대가 됐다.
길드는 망했지만 판온이 끝난 건 아니었다.
놈의 장비가 괜찮다면 그걸로 다시 활약할 수 있을지도 몰랐다.
정말로 미운 놈이었지만 대장장이 기술 스킬 하나만큼은 확실한 놈 아닌가.
분명….
“?”
발칼락은 눈을 끔뻑거렸다.
대장장이가 배낭에서 꺼낸 갑옷이 어디서 많이 본 갑옷이었던 것이다.
저 갑옷은 분명…?
“!!!!!”
발칼락은 자신도 모르게 자리에서 벌떡 일어섰다.
그리고 살벌하게 외쳤다.
“내 갑옷에서 손 떼, 이 빌어먹을 대장장이 놈아!”
태현은 발칼락의 고함에 시선을 돌렸다. 그러고는 무시하듯이 다시 화로로 시선을 원상복귀시켰다.
화아아악!
어마어마한 열기에 갑옷이 녹아내리기 시작했다. 발칼락은 그걸 보고 심장이 멎는 충격을 느꼈다.
“네… 네놈을… 절대 용서하지 않겠다!!!”
* * *
“발칼락 길마잖아요!?”
“이, 이거 생각보다 더 거물인데?!”
이주홍은 당황했다.
어지간한 놈이라면 나서서 막겠는데 발칼락은 좀 이야기가 달랐다.
괜히 대형 길드의 길마가 아닌 것이다.
게다가 요즘 길드 망해서 눈 뒤집혀 있는 상태일 텐데 잘못 걸리면 그대로 로그아웃 당할 수 있었다.
원래 잃을 게 없는 놈이 더 무서운 법 아닌가.
“가서 도와줘야 하는 거 아닙니까? 저 대장장이 놈이 아이템 뺏기기라도 한다면….”
“그건 그런데, 발칼락 놈하고 부딪히는 것도 위험하다고.”
“저 대장장이 놈은 왜 도망 안 가는 겁니까?!”
길드원은 이해가 안 간다는 듯이 외쳤다.
발칼락이 저렇게 고함을 지르며 달려드는데 대장장이는 태연하게 갑옷을 녹이고 있었다.
도발하나?
‘대체 무슨 생각이냐, 대장장이?’
이주홍은 속으로 물었다.
머리가 잘 돌아가는 놈인 만큼 아무 생각도 없지는 않을 것이다.
지금 상황이 어떤 상황인지 분명히 파악하고 있을 터.
그런데 그냥 저렇게 작업을 하고 있다니.
‘대장장이로서의 자존심 같은 건가? 죽을 때 죽더라도 작업을 멈출 수는 없다?’
이주홍과 길드원이 침을 꿀꺽 삼킬 때, 태현이 뒤늦게 움직였다.
“저놈이요.”
-저놈을 잡아라! 감히 영주님의 신성한 대장간에서 칼을 휘두르다니!
“!??!”
대장간 근처에 대기하고 있던 경비병들이 우르르 튀어나오기 시작했다.
발칼락은 갑자기 달려드는 경비병들의 모습에 경악했다.
“아… 아니!? 아니!?”
-저놈 악명 높은 범죄자 놈이다! 지원을 불러!
-기사님! 도와주십시오!
-알겠네! 기다리게!
태현은 기사들까지 몰려들기 시작하자 흐뭇하게 고개를 끄덕였다.
마을의 장비란 장비는 모두 다 맡아서 수리해 주고 보강해 준 보람이 있었다.
‘다시 작업해도 되겠군.’
태현은 갑옷을 완전히 녹여버렸다. 발칼락은 병사들한테 두들겨 맞는 와중에도 비통한 비명을 질렀다.
“멈… 멈춰! 멈추라고! 이 대장장이 새끼… 크악! 크하악!”
‘와. 발칼락 놈이 불쌍하게 보일 때가 있구나!’