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 나는 될놈이다 1798화
“스미스 너 이놈! 넌 자존심도 없냐!? 뉴욕 라이온즈의 대표라는 놈이!?”
“자존심이고 뭐고 못 이기는 건 어쩔 수 없잖습니까.”
스미스가 무슨 소리를 하냐는 듯이 쑤닝을 쳐다보았다.
물론 스미스도 자존심이 있는 사람이었다.
한때 태현과 치열한 경쟁을 했던 만큼 스스로 패배를 인정하는 건 몇 배로 힘들었다.
하지만 그렇다고 하더라도 결과가 너무 뻔한 상황에서 싸우자고 덤벼들 정도로 스미스는 멍청하지 않았다.
지금 태현을 대충 견적만 내보면….
전설 스킬 다수 보유.
굶주린 혼돈 레이드 이후 추가 스킬 얻었을 확률 높음.
레벨도 최상위권 랭커들 사이에서 손꼽히는 편이었을 텐데 굶주린 혼돈까지 잡았으니 더 올랐을 거고..
스미스의 설명을 듣고 있던 태현은 고개를 끄덕였다.
“음.”
이제 다른 사람들이 태현의 레벨 이야기를 하더라도 당당하게 고개를 끄덕일 수 있었다.
이제는 그게 사실이 되었으니까!
“스미스! 너무 비관적으로 생각하지 마라!”
“객관적으로 생각하고 있습니다만.”
“김태현 놈은 원래 갖고 있던 장비를 대부분 잃어버렸다! 지금이라면 충분히 상대할 수 있을 거란 말이다!”
“그렇게 자신 있으시면 그냥 싸우시면 되잖습니까.”
“그러게.”
태현은 스미스의 말에 동의했다.
말문이 막힌 쑤닝은 주변을 둘러보았다. 안타깝게도 쑤닝을 도와줄 사람은 보이지 않았다.
“…….”
쑤닝은 순간 태현과 한 번 붙어볼까 진지하게 고민했다.
이렇게 된 이상 한 번 진짜 해봐?
하지만 태현을 쳐다보니 바로 정신이 돌아왔다.
‘스미스 놈이 저렇게 싸워보지도 않고 포기할 정도면 정말 만만치 않나 보구나…!’
굶주린 혼돈 레이드가 끝나고 지금 태현의 스펙에 대해 이런저런 분석들이 오가고 있었다.
└레벨 500쯤 돌파한 거 아닌가?
└600 돌파했을지도.
└아이고. 판온 하나도 모르는 사람들이 헛소리하네. 600은 커녕 아직 500도 돌파한 사람이 없을 텐데.
└또 자칭 전문가임? 그래서 굶주린 혼돈 못 잡는다고 하던 전문가들 다 어디감? 잡았는데?
└내가 보기에 레벨 700은 넘었다.
└아무리 내가 예측 실패했어도 그건 아니지…!
└대체 굶주린 혼돈 뭘로 잡은 거지?
└레벨은 솔직히 좀 부풀려진 게 커보이고, 전설 스킬들 덕분에 잡은 것 아닌가?
└전설 검술 스킬에 전설 기계공학 스킬 가능성이 높아 보임. 거기에 아키서스 교단 힘까지 합친 거지.
워낙 굶주린 혼돈 레이드가 예상을 뛰어넘는 일이었던 만큼, 딱 정확하게 결론을 내놓는 사람은 없었다.
소문이 소문을 낳고 부풀리는 일만 계속 반복되는 상황!
그 헛소문은 쑤닝도 겁먹게 만들었다.
‘내가 붙으면… 음… 끄응….’
고민하던 쑤닝은 낯익은 얼굴을 발견했다.
길드 동맹 간부들 중 가장 충성스러운 간부, 앨콧이었다.
“앨콧!”
‘저 양반은 왜 날 불러?’
앨콧은 당황해서 머뭇거렸다. 태현을 포함해서 자리에 있던 수많은 사람들의 시선이 앨콧을 향해 쏟아지기 시작한 것이다.
“왜 부르지? 둘이 친한가?”
“같은 길드 동맹 출신이잖아.”
“그랬어? 몰랐네.”
“쑤닝하고 의형제 사이래.”
“그래서 저렇게 친하게 대하는 거구나.”
사람들의 말에 앨콧은 당황해서 외쳤다.
“의형제 아닙니다! 의형제 아니라고!”
뭔 의형제야!
그러거나 말거나 쑤닝은 앨콧한테 가까이 다가갔다.
“앨콧. 일대일 결투라면 또 네 전문 분야잖나. 지금 어떻게 해야 한다고 보냐? 싸워서 승산이 있을 것 같나?”
“…….”
앨콧은 어이가 없었다.
‘길드 동맹 망해서 지능이 내려갔나?’
양심이 있다면 지금 같은 상황에서 ‘내가 김태현하고 싸우면 이길 확률이 얼마나 될까?’란 질문을 하면 안 됐다.
쑤닝도 앨콧의 차가운 시선을 눈치챈 것 같았다.
“…그렇게 낮냐?”
“혼자서 굶주린 혼돈 레이드 하실 수 있을 정도면 뭐….”
“알겠다. 알겠어. 다른 방법은 없냐? 너라면 분명 좋은 방법을 떠올릴 수 있을 거다. 앨콧.”
쑤닝의 부담스러운 신뢰에 앨콧은 당황했지만, 그렇다고 무작정 거절하기도 조금 그랬다.
그리고 앨콧은 아직도 약간 양심의 가책이 있었다.
…왜냐하면 앨콧은 길드 동맹의 전성기 시절부터 첩자 역할을 하고 있었던 것이다.
앨콧은 자기 자신이 이렇게 가책을 느낄 줄은 상상도 하지 못했었다.
‘아. 이거 은근히 성가시네.’
쑤닝 놈이 하필이면 앨콧을 이상하게 많이 믿어서….
“졌지만 잘 싸웠다로 가는 건 어떻습니까?”
“졌지만 잘 싸웠다? 그게 무슨 말도 안 되는 소리냐?”
“이게 생각보다 효과적이라….”
앨콧은 진지하게 말했다.
가끔 어떤 싸움은 패배자도 그렇게 타격을 받지 않곤 했다. 아니, 오히려 패배자가 승리자보다 더 유명해질 때도 있었다.
당장 스미스만 해도 태현에게 쓰러진 적이 있었지만 여전히 인기를 유지하고 있었고….
태현도 판온 1을 접기 직전에 이세연한테 진 적이 있었지만 사람들은 어느 누구도 태현의 실력을 의심하지 않았었다.
중요한 건 어떻게 싸우냐일지도 몰랐다.
“과연….”
처음에는 시큰둥하던 쑤닝도 앨콧의 말을 들으며 설득된 것 같았다.
연신 고개를 끄덕이며 생각에 잠겼다.
“확실히 그럴듯한데? 역시 앨콧이군.”
“이거 감사합….”
“좋다! 여론이야 어떻게든 조작할 수 있으니 최선을 다해서 한 번 붙어볼까.”
쑤닝은 의욕이 생겼다.
이기지는 못하더라도, 태현을 상대해서 지지 않고 시간을 끌 자신은 충분히 있었던 것이다.
‘앨콧 놈이 아주 기특해.’
쑤닝은 장비를 챙기고 앞에 섰다.
앨콧의 말을 들은 순간부터 쑤닝은 벌써 계획을 빠르게 세운 뒤였다.
‘결투에서 최대한 버틴 다음에 사람들을 풀어서 찬양하는 여론을 만들고, 그걸 바탕으로 굶주린 혼돈 레이드에서 했던 일도 좀 부풀린 다음….’
이미지를 바꾸고 길드원들을 다시 불러모아 길드 동맹을 재건하고야 말겠다!
쑤닝은 그렇게 생각하며 무기를 들었다.
“준비 다 됐나?”
“그래.”
“알겠다. 시작하지.”
* * *
5초.
쑤닝이 버틴 시간이었다.
[결투에서 승리합니다!]
[……]
[……]
[……]
“…….”
“…….”
“…다, 다시 하자고 할까?”
가까이서 보고 있던 랭커들도 경악했는지 쉽게 입을 열지 못했다.
물론 랭커들 모두 태현이 이길 거라고 생각하고 있었다. 어떤 미친 놈이 여기서 쑤닝에게 걸겠는가. 아무리 도박중독자여도 그건 불가능했다.
하지만 태현이 5초 만에 쑤닝을 그냥 박살 내고 결투를 끝내버릴 거라고는 어느 누구도 생각하지 못했다.
…너무 잔인하지 않냐!?
랭커들은 처음으로 쑤닝이 불쌍해졌다. 거꾸로 결투장에 처박혀 있는 모습이 매우 처량했다.
“쑤, 쑤닝. 너무 마음 쓰지 마라.”
“그… 그래. 결투하다 보면 질 수도 있지.”
“넌 잘 싸웠어!”
랭커들은 자신도 모르게 마음에도 없는 말을 했다.
물론 보고 있던 사람들은 훨씬 더 냉정했다.
└5초ㅋㅋㅋㅋㅋㅋㅋㅋㅋㅋ
└5초는 좀 심하지 않냐?
└쑤닝 대체 무슨 배짱으로 결투하자고 한 거임?
└내가 듣기로 쑤닝 판온 접으려고 한다더라. 그래서 받아들인듯.
└접을 거면 얌전히 접지 미친놈이 왜 5초컷을 당하고 접는데?
└다시는 접속하지 않겠다는 결심인 거겠지.
└쑤닝 5초 만에 진 거 아니다.
└????
└설마 방금 있었던 결투가 없었다고 우기려는 건 아니죠?
└6초다. 6초 걸림.
└아하…!
└6초나 버티다니 사실 쑤닝 대단한 거 아님?
└판온에서 김태현하고 결투해서 5초 버틴 사람 얼마 없지 않냐?
└그야 결투한 놈이 얼마 없으니까 그렇겠지. 아무리 그래도 5초가 뭐냐? 도망만 다녀도 5초보다는 더 버텼겠다.
사람들이 떠드는 사이 태현이 입을 열었다.
“방금 쑤닝과 결투를 했다.”
“!”
태현이 입을 열자 그렇게 시끄러웠던 사람들이 모두 입을 다물었다.
누가 시켜서나 누가 협박을 해서가 아니었다. 자리에 있는 모두가 행여라도 태현의 말을 놓칠까 봐 귀를 기울인 것이다.
“그리고 이겼지.”
“김태현! 김태현! 김태현!”
“역시 김태현 선수십니다!”
“길드 동맹의 다른 간부들도 처형해 버리죠!”
태현은 고개를 저었다.
“딱히 길드 동맹에 원한이 있어서 한 건 아니다.”
“뭐 저런 새…?”
길드 동맹 간부 중 하나가 태현의 말에 분노했다.
원한이 없으면 쑤닝을 대체 왜 결투장에 거꾸로 처박아버렸단 말인가?!
그것도 5초 만에!
“그러면 왜 결투하신 건가요?”
“예전에 쑤닝이 나하고 일대일 해서 이길 수 있다고 했었지. 그래서 기회를 줬다.”
“…….”
“…….”
자리에 모인 사람들은 물론이고 방송으로 보고 있던 사람들도 경악했다.
정말 생각지도 못했던 이유였던 것이다.
길드 동맹 간부들도 마찬가지로 경악했다.
‘지금 예전에 도발한 것 때문에…?’
‘너무한 거 아닌가??’
태현은 두툼한 리스트를 꺼냈다. 그러고는 한 명씩 이름을 불렀다.
“나하고 결투하고 싶어 하는 랭커들이 대충 이 정도인데, 파워 워리어 쪽으로 연락하면 내가 찾아가겠다. 피하지 말고 붙어보자.”
“…?”
“???”
사람들은 순간 태현이 무슨 소리를 하나 바로 이해하지 못했다.
조금 뒤늦게 이해한 사람이 물었다.
“어, 그러니까 태현 님한테 결투하자고 했던 랭커들 모두와 싸우실 생각이신가요?”
“그래.”
“…….”
“그, 혹시, 결투하고 싶다! 이런 것 말고 ‘내가 김태현 이긴다!’ 같은 것도 포함이 됩니까?”
물어보면서 랭커는 설마 싶었다.
태현이 그런 도발 하나하나 다 챙겨줄 정도로 한가한 사람이 아니지 않은가.
그럴 리가….
“그래.”
“…….”
“…….”
“나한테 결투하자고 한 놈들은 파워 워리어한테 빨리 연락하는 게 좋을 거다. 연락 안 하고 숨어 있거나 도망치다가 잡히면 좋게 안 봐줄 생각이니까.”
└김태현이 미쳤다!!!
└아니 굶주린 혼돈 잡고 왜 저래? 누가 굶주린 혼돈 보상이라도 훔쳐간 거 아니야??
└굶주린 혼돈이 김태현 열받게 만들었나? 왜 저러지?
└야. 잘 생각해 봐라. 김태현은 원래 저랬어. 저놈 취미가 랭커들 부수고 다니는 거였잖아.
└…!!!
└다른 랭커들이 어떻게 도발해도 김태현이 하도 가만히 있길래 뭔가 이상하다 했는데, 김태현 저놈 일부러 가만히 있었던 거 아님?
└맞는 것 같은데.
└저런 소름 끼치는 놈 같으니!
└리스트 만들고 쌓일 때까지 기다렸네! 그냥 시비 걸 때마다 대응하면 다들 겁먹어서 안 할 테니까!
└설… 설마 다 찾아다니지는 않겠지? 그거 말한 사람이 얼마나 많은데?
└여기서 이러는 거 보니까 당사자인듯.
└아, 아, 아니거든??
* * *
랭커 <김태현내가이김>.
닉네임만 봐도 알 수 있듯이 태현이 유명해진 다음에 올라온 신진랭커였다.
“야. 들었냐?”
“뭘?”
“김태현이 자기하고 싸우겠다고 하거나 이길 수 있다고 도발한 랭커들 다 찾아다니며 일대일로 붙는다는데.”
<김태현내가이김>은 코웃음을 쳤다.
아무리 생각해도 말이 안 됐던 것이다.
“야. 김태현 도발한 놈이 수천 명은 되겠다. 그걸 다 어떻게 쫓아다녀? 김태현이 시간이 남아도냐? 지금 굶주린 혼돈 레이드하고 나서 뒷정리하느라 바쁠 텐데.”
“그… 그런가?”
“그렇다니까. 넌 판온을 그렇게 한 놈이 눈치가 없어서야… 그거 그냥 김태현이 자기 폼잡으려고 한 말이야.”
“뒷정리 다 하고 올 수도 있잖아.”
“그럼 다음 퀘스트 해야지! 김태현이 바보냐!? 하늘이 무너지는 한이 있더라도 김태현이 저런 짓을 할 리가 없다니까. 김태현은….”
“으, 으, 으아아악! 김태현!”
“왜 이렇게 호들갑이야?”
<김태현내가이김>은 고개를 돌렸다.
저 멀리서 어디서 본 것 같은 사람이 미친 듯이 달려오고 있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