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 나는 될놈이다 1797화
“뭐가 너희 때문이란 거지?”
“그 길마님하고 일대일로….”
“너희 때문 아니다.”
태현의 말에 길드 동맹 간부들은 일단 안도의 한숨을 내쉬었다.
그러나 태현은 안 싸우겠다고 한 게 아니었다.
“어쨌든 접속하면 오라고 해라. 일대일로 붙어보자고.”
“아니… 왜 이러십니까. 김태현 선수.”
“이런 분 아니셨잖아요.”
방금까지 사납게 투덜대던 길드 동맹 간부들이 마치 순한 양처럼 변했다.
굶주린 혼돈 레이드 전에도 태현은 미친놈처럼 강했지만, 굶주린 혼돈 레이드 이후의 태현은 얼마나 강한지 상상도 불가능했다.
만약 여기서 ‘하 김태현 선수 우리 길마를 너무 무시하는 거 아닙니까?’ ‘길마님이 겁먹을 줄 알고 이러시는 겁니까? 호된 맛을 보여드리겠습니다’ 하고 수락했다가는 진짜 쑤닝한테 멱살 잡히는 수가 생겼다.
“난 원래 이런 놈이었어. 쑤닝 오면 분명하게 말해놔라. 도망치면 너희들까지 죽는다.”
“…….”
“…….”
굶주린 혼돈 레이드하면서 보여줬던 카리스마가 간부들한테 향하자, 길드 동맹 간부들은 심장이 멈추는 듯한 충격을 받았다.
뭐 이런 새끼가….
-그냥 해보면 안 되나? 김태현 놈 굶주린 혼돈하고 싸우느라 장비도 부서졌을 테고, 각종 페널티도 쌓였을 텐데?
-이거 완전 미친놈이네. 지금 그걸 말이라고 지껄이냐? 길마님한테 네가 말해볼래?
간부 한 명이 행복회로를 돌리려다가 다른 동료들에게 뭇매를 맞았다.
물론 강한 보스 레이드가 끝나면 평소보다 약해지는 일이 없는 건 아니었다.
장비도 싸우느라 부서지고, 갖고 있던 아이템도 소모되고, 비장의 스킬들은 쿨타임이 돌며, 재수 없을 경우에는 각종 저주로 전체 능력치가 쭉 내려가게 되니까.
하지만 그것도 어느 정도가 있지 지금 김태현이 약해졌을 거라고 보는 건 미친 생각이었다.
-김태현 전설 검술 스킬 찍은 거 봤지? 가까이서 본 랭커가 그러는데 전설 기계공학 스킬도 찍었다더라.
-굶주린 혼돈까지 잡은 지금에는 대체 얼마나 올랐을지 상상도 안 간다. 굶주린 혼돈한테 맞아봤자 얼마나 맞았겠냐? 지금쯤 다 회복했겠지.
쑤닝을 존경하는 길드 동맹 간부들도 이건 쑤닝의 편을 들 수가 없었다.
아무리 쑤닝이 강하고 준비를 많이 해오더라도 태현과 1:1로 붙으면 개미처럼 짓밟힐 터.
…어떻게든 막아야 한다!
하지만 어떻게?
“…일단 길마님한테 말해보자고.”
* * *
아직 사망 페널티 때문에 판온에 접속하지 못하고 있는 쑤닝은 길드 동맹 간부들이 찾아오자 의아해했다.
“다들 무슨 일이냐?”
“굶주린 혼돈 레이드를 축하드리기 위해서 왔습니다!”
“축하는 무슨… 내가 한 것도 별로 없는데.”
“아닙니다! 물론 아무것도 모르는 사람들은 길마님의 활약을 알아차리지 못했지만, 보는 눈이 있는 랭커들은 다 길마님을 찬양하고 있습니다. 앨콧도 길마님 덕분에 굶주린 혼돈을 잡을 수 있었다고 했습니다.”
“앨콧이? 하여간 앨콧 그놈. 보는 눈이 있다니까.”
말은 그렇게 해도 쑤닝은 상당히 기분이 좋아진 표정이었다.
길드 동맹의 랭커 중 가장 믿음직스러운 앨콧이 쑤닝을 칭찬했다니 안 기쁠 수가 없는 것이다.
길마의 기분이 좀 풀린 것 같자, 간부들은 서로 눈치를 보며 입을 열었다.
“길마님.”
“왜?”
“길마님이 접속하면 그, 일대일 하자고 신청한 놈이 있는데요.”
“어떤 건방진 놈이 감히?”
쑤닝의 눈썹이 위로 솟구쳤다.
한 번 죽었어도 쑤닝은 누가 만만히 시비를 걸 만한 사람이 아니었다.
갖고 있는 각종 사기적인 장비들부터, 길드 동맹이라는 거대한 길드의 힘으로 키워낸 레벨. 게다가 오스턴 왕국에서 추가로 얻어낸 사기적인 스킬들까지.
“마침 잘 됐군. 굶주린 혼돈 레이드도 끝났는데, 사람들 보도록 붙어보는 것도 나쁘지 않겠군.”
굶주린 혼돈 레이드가 워낙 판온의 초대형 이벤트였던 만큼, 모든 관심이 여기에 쏠려 있었다.
레이드가 끝났다고 하더라도 그 관심은 쉽게 식지 않았다.
레이드 이후 관련 복구 퀘스트나 원정대 플레이어들 관련으로 몇 달 정도는 열기가 더 갈 게 분명했다.
그렇다면 쑤닝도 그걸 이용해야 했다.
‘제대로 제압해서 길드 동맹이 살아 있다는 걸 보여준다.’
쑤닝은 아직 포기하지 않았다.
이제 굶주린 혼돈도 사라졌고 그 짜증 나는 스미스 놈도 몰락한 만큼, 다시 한번 길드 동맹의 왕국을 만들고야 말리라!
“그… 길마님….”
“그게… 으음….”
“??”
간부들이 말끝을 흐렸지만 쑤닝은 눈치채지 못했다.
“그래서 상대가 누구냐? 선수 출신인가?”
“예….”
“어디 선수? 뉴욕 라이온즈? 뉴욕 라이온즈 놈이어도 상관없다. 선수 출신이라고 까불어봤자지.”
쑤닝은 코웃음을 쳤다.
사람들은 판온 리그에 참가한 선수 출신의 랭커라고 하면 지나치게 과대평가하는 경향이 강했다.
하지만 그건 착각이었다.
판온 리그는 어디까지나 투기장 안에서 싸우는 것.
레벨도, 장비도, 스킬도 제대로 쓰지 못하는 상황에서 싸우는 게 무슨 의미가 있겠는가.
투기장 밖이라면 쑤닝은 압도적인 아이템과 스킬들로 상대를 짓눌러버릴 자신이 있었다.
“그래서 누구냐니까?”
“그… 김태현이요.”
압박을 이기지 못한 길드 동맹 간부 한 명이 입을 열어버렸다.
순식간에 공기가 싸늘해졌다.
“김태현?”
“…예….”
“동명이인이겠지?”
“아니요.”
“<김태현내가이김> 같은 놈을 말한 건가?”
“아니요….”
“설마 진짜 김태현이 갑자기 일대일 신청을 했을 리는 없고. 뭐냐? 빨리 말해라.”
“…진짜 일대일 신청 했습니다.”
“김태현이 미쳤나 봐요.”
간부들은 결국 모두 입을 열고 있었던 일들을 설명했다.
쑤닝은 믿기 힘들다는 듯이 간부의 멱살을 잡았다.
“뭐라고 지껄이는 거냐! 김태현 그 새끼가 왜 갑자기 일대일을 하자고 해! 네놈들이 시비 걸었지!”
“안, 안 걸었습니다! 저희가 왜 김태현한테 시비 겁니까!”
“김태현 욕이라도 하다 걸린 거 아니냐!”
“그, 그건 했지만… 김태현 놈 못 들었어요! 못 들었다고요!”
“다른 놈들이 들어서 고발했겠지! 이런 눈치도 없는 놈들…! 네놈들 때문에 이게 무슨 꼴이냔 말이다!”
“죄송합니다! 죄송합니다!”
* * *
쑤닝은 정말 접속하고 싶지 않았다.
길드 동맹이 망하기 직전까지 갔을 때도, 길드 동맹이 쪼개졌을 때도, 심지어 스미스 놈한테 졌을 때도 이 정도로 접속하기 싫지는 않았었다.
‘무언가 착각이 있는 거다.’
쑤닝은 냉정하게 생각해 보았다.
김태현은 합리적이고 대국적인 시야를 가진 플레이어.
절대 감정적으로 행동하거나 함부로 행동하지 않았다.
굶주린 혼돈을 잡기 위해 모인 원정대 플레이어들.
그중 하나로 대활약한 쑤닝을 짓밟으려고 일대일을 한다고?
그건 김태현의 이미지와 정반대되는 짓인데다가 다른 길드 동맹 플레이어들도 불안해할 수 있었다.
김태현은 그런 짓을 할 사람이 아니었다.
판온 접기 전에 막나가는 사람도 아닌데 그런 짓을 왜 하겠는가!
“김태현 선수가 쑤닝 밟는댄다!!”
“와아아아아아아!”
“근데 왜 밟는 거지?”
“평소부터 보기 싫었던 거겠지.”
“아하. 이해가 간다.”
“김태현 선수가 쑤닝을 짓밟겠다고 선언하셨습니다! 길드 동맹이 저지른 폭정의 대가를 치르게 만드시겠다고!”
└김태현이 쑤닝하고 일대일 뜬다고???
└결투가 아니라 처형 아니냐?
└야. 쑤닝 생각보다 강함. 길마라서 나설 일 없어서 사람들이 잘 모르는데, 길드 동맹에서 비싼 아이템이란 아이템은 다 지가 처먹고 좋은 퀘스트란 퀘스트는 다 지가 깼어.
└그래서 어쩌라고? 그래서 너 쑤닝한테 걸 거임?
└아니… 나도 김태현한테 걸 거임. 그냥 그렇다고.
└김태현! 쑤닝을 짓밟아줘!
└내가 저 새끼한테 당했던 것만 떠올리면 아직도 치가 떨린다!
└감히 세금을 올려!?
└근데 방금까지 같이 싸운 사람인데 저렇게 일대일로 짓밟아도 되나? 너무 잔인한 거 아니야?
└쑤닝은 그래도 돼.
└쑤닝은 그래도 돼.
└꼬우면 길드 동맹 그렇게 운영하랬냐? 자기가 한 대로 받는 거지.
사람들의 반응은 쑤닝이 기대했던 것과 좀 많이 달랐다.
대부분의 사람들은 팝콘 신나게 뜯으면서 ‘와 쑤닝 놈 개쳐맞듯이 쳐맞겠구나!’ 하고 있었던 것이다.
“…….”
쑤닝은 쏟아져나오는 분위기에 슬슬 상황이 망했다는 걸 느끼고 있었다.
‘…큰일 났다!’
협곡에 모인 수많은 플레이어들 중 ‘싸우지 마세요! 같은 원정대였잖아요!’라고 말리는 놈이 한 명도 없을 줄이야!
쑤닝은 어이가 없었다.
‘이런 쓰레기 같은 쓰레기들….’
“쑤닝! 쑤닝! 쑤닝!”
“네 용감함을 칭찬한다!”
“가라! 쑤닝!”
가는 길목에 나팔과 북을 들고 신나게 연주하는 플레이어들이 나타났다.
그들은 쑤닝을 향해 음악을 연주하고 팝콘을 던졌다.
길드 동맹 간부 중 한 명이 감동한 표정으로 말했다.
“그래도 길마님을 응원하는 사람이… 너희 길드 동맹 소속 길드원이었냐?”
“아니? 우린 김태현한테 돈 걸었는데?”
“너 덕분에 돈 따서 고맙다고. 쑤닝.”
“…꺼져! 꺼지지 못해!?!?”
“아. 거 성질 더럽네!”
임시로 준비된 일대일 결투장까지 가는 길이 무슨 사형대로 가는 길 같았다.
길가를 꽉 채운 플레이어들은 쑤닝이 나타나자 환호성을 질렀다.
“뭐야?! 뭐야!?”
“쑤닝 왔댄다!”
“정말 왔어!? 안 튀고?!”
“이야. 쑤닝 고맙다!! 덕분에 좋은 거 보겠네!”
“쑤닝, 넌 할 수 있어! 넌 김태현을 이길 수 있다고!”
“미쳤냐? 대체 어떻게 쑤닝이 김태현을 이겨?”
“쉿. 조용히 해. 안 그러면 도망칠 수도 있다고.”
“아하! 그래! 쑤닝! 넌 할 수 있어!”
순식간에 플레이어들이 미어터지듯 몰려왔다.
굶주린 혼돈 잡고 나서 현장에 놀러 온 플레이어들이 전부 다 이번 결투를 구경하기 위해 찾아온 것이다.
초대형 길드를 운영했던 쑤닝도 이렇게 많은 사람들은 처음 보았다.
이게 다 쑤닝을 보기 위해서 모인 거라니!
한 번도 경험해 본 적 없는 인기였다.
…물론 그게 좀 다른 방향의 인기긴 했지만….
“김태현.”
“왔냐?”
태현은 앉아서 장비를 수리하고, 강화하고, 새로 제작하고 있었다.
굶주린 혼돈과의 싸움으로 차고 있던 장비들이 대부분 파괴당한 상태였다.
태현은 욕심내서 새로운 장비를 만드는 대신, 어디에서나 구할 수 있는 재료로 장비를 만들어서 강화하고 있었다.
경지에 오른 제작 스킬들 덕분에 가능한 일이었다.
숨만 쉬고 만들어도 명품이 나온다!
‘흠. 파워 워리어 간부들한테도 장비들 좀 선물해 줘야겠군…’
태현은 작업하면서도 머릿속으로 견적을 내고 있었다.
부활한 고대 제국을 관리하고 나누고….
쑤닝과 싸우기 직전이었지만 쑤닝에 대한 생각은 별로 하지 않았다.
그냥 가서 이기면 됐으니까.
“김태현! 오해가 있다. 간부들이 널 욕하긴 했지만 그건 내가 시킨 게 아니라….”
“네 간부들이 날 욕했냐?”
“…….”
태현이 몰랐다는 듯이 묻자 쑤닝은 진땀을 흘렸다.
괜한 소리를 한 덕분에 매를 더 번 셈이었다.
“간부 중에 어떤 놈이?”
“…아, 아무것도 아니다. 그건 잘못 말한 거다. 잠깐… 그러면 나하고 왜 일대일을 붙자고 한 거지?”
“나하고 일대일 붙고 싶다면서?”
“내가 언제?!”
“예전에. 길드 동맹 잘나갈 때 나하고 일대일 붙어도 이긴다면서.”
“…….”
쑤닝은 할 말을 잃었다.
물론 예전에 길드 동맹이 잘 나가고 김태현 놈이 치고 빠질 때 도발하기 위해서 그런 말을 한 적이 있었다.
-김태현 놈은 일대일로도 이길 수 있다. 온다면 일대일로 붙어주지! 어디 한번 나타나봐라!
물론 태현은 바보가 아니었다.
쑤닝을 상대하기 위해서 나타나는 순간 쑤닝은 절대로 일대일을 하지 않았을 테니까.
그렇게 흐지부지 된 옛날 일이 쑤닝의 발목을 잡을 거라고는, 쑤닝 본인도 예상하지 못했었다.
“그래서 이렇게 기회를 주는 거다. 자. 붙자.”
“잠깐, 잠깐만!”
“?”
“스미스 놈도 일대일로 이길 수 있다고 한 적 있다!”
쑤닝은 저 멀리 있는 스미스를 끌어들이려고 했다.
그러나 스미스는 담담하게 말했다.
“저는 이미 제가 졌다고 선언을 했습니다.”
“…….”
야 그러면 안 되지!!