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 나는 될놈이다 1796화
‘확실히 내가 좀 건방지긴 했어.’
케인은 빠르게 겸손해졌다.
생각해 보면 케인은 스미스와 함께 도중에 참가하지 않았던가.
원정대 플레이어들이 처음부터 목숨을 걸고 싸웠던 것과 비교도 되지 않았다.
그런데 굶주린 혼돈 하나 잡았다고 이렇게 호들갑을 떨다니.
그것 때문에 태현의 기분이 상한 걸지도 몰랐다.
“김태현! 내 잘못이다!”
“??”
“내가 좀 더 빨리 왔어야 했는데…! 하지만 이유가 있다! 저 새끼들 때문이야!”
“????”
이번에는 뉴욕 라이온즈 선수들이 경악했다.
아니 케인 저 새끼는 같이 열심히 퀘스트 해놓고 갑자기 뭐 잘못 먹었나?!
“뭐라는 거야 미친놈아!”
“왜 그게 우리 때문이야!”
“굶주린 혼돈 잡았으면 됐지! 지금 뭐하는 건데!”
뉴욕 라이온즈 선수들은 어이가 없었다.
다들 굶주린 혼돈 못 잡을 거라고 예상한 불리한 상황.
그런 상황에서 잡았으면 기쁨의 축포를 쏘아 올려야지 왜 갑자기 책임을?
“너희들이 신전 파괴만 빨리했어도 더 빨리 돌아올 수 있었다고!”
“저… 저런 뻔뻔한 새끼!”
“머리통 세 개라고 낯짝도 세 배로 두껍냐?!”
“너랑 스미스가 뒤에서 방송 볼 때 우리는 목숨 걸고 신전 부쉈어!”
뉴욕 라이온즈 선수들은 진심으로 억울해했다.
케인과 스미스가 방송 보면서 ‘야 김태현 잘 싸운다!’ 하는 동안 신전 실질적으로 부순 게 누군데 저딴 소리를?!
물론 케인은 쉽게 밀려나지 않았다.
팀 KL에서 구른 경험이 있는데 저런 말에 밀리지 않는 것이다.
“무슨 소리야? 난 그런 기억이 없는데?”
“…….”
“…….”
뉴욕 라이온즈 선수들은 말문이 턱 막혔다.
저런 양아치 새끼…!
‘표정 하나 안 바꾸고 거짓말을 치네!’
‘미친놈인가?’
“스미스! 뭐라도 말해봐!”
“예?”
기뻐하던 스미스는 화살이 자신한테 돌려지자 급격히 당황했다.
케인도 지지 않고 외쳤다.
“스미스! 같은 팀이라고 편들어주지 말고 솔직히 말해!”
“뭐라는 거야 양아치 자식아!!”
“…….”
└저 인간들 왜 싸우는 거임??
└지금 누가 더 못했는지로 싸우고 있는 것 같은데.
└…왜??
└그러게…?
└굶주린 혼돈 잡았어도 원정대의 구멍은 찾아내야 한다 이거지.
└대체 왜 그런 짓을?
└몰라. 프로들은 그러나봐.
└아… 하긴 경기 이겨도 반성하고 복습하는 그런 것처럼?
└나도 게임단 소속 선수인데 보통 퀘스트 깨고 나서 저러진 않는 것 같은데??
이유는 이해 가지 않았지만, 보는 사람들에게 매우 흥미로운 상황이긴 했다.
원래 게임보다 게임 이후의 정치질 상황이 더 흥미로울 때가 많지 않은가.
심지어 그게 자신과 상관없는 정치질이라면 흥미로울 수밖에 없었다.
“스미스! 빨리!”
뉴욕 라이온즈 선수들은 스미스가 그들을 편들고 케인을 망신시켜 주리라 믿었다.
일단 같은 팀이기도 했고 무엇보다 스미스는 거짓말을 하지 않는 사람이었으니까.
그러나 뉴욕 라이온즈 선수들은 알지 못했다.
“…저하고 케인 선수가 가장 열심히 싸웠던 것 같은데요?”
“…이봐!!!!”
“스미스! 너 왜 그래!”
“너 그런 놈 아니었잖아! 머리 개수 늘어나고 미쳐 버렸냐?”
스미스는 못 들은 척 고개를 돌렸다.
스미스도 사람이었다.
뉴욕 라이온즈 선수들이 그렇게 난리를 치고 시비를 걸었는데 뭐가 예쁘다고 편을 들어주겠는가!
케인은 머리 하나를 돌려서 눈을 찡긋거렸다. 스미스도 머리 하나를 돌려서 고개를 끄덕였다.
이세연은 그 모습을 매우 한심하다는 듯이 쳐다보았다.
‘미친 키메라들 같으니….’
혀를 차던 이세연은 고개를 돌렸다. 어느새 태현이 사라져서 보이지 않았다.
‘어디 간 거지?’
* * *
“거짓말한 건 죄송해요.”
“응? 아. 그건 괜찮아. 할 수도 있지 뭘.”
태현은 이다비를 데리고 조금 떨어진 곳으로 이동했다.
산맥에 모였던 원정대 플레이어들은 축제 분위기라 눈치채지도 못하고 있었다.
“네? 그거 말하려고 오신 거 아니었어요?”
“아닌데? 케인도 아니고 그런 거짓말 좀 했다고 화를 낼 리가 없잖아.”
‘화내실 줄….’
이다비는 살짝 당황했다.
당연히 케인이 거짓말할 때마다 ‘너 이 자식 던전 20개 돌라고 했는데 19개 돌아? 넌 오늘 고기반찬 없어!’, ‘너 이 자식 던전 20개 돌라고 했지 누가 21개 돌라고 했어? 반항해? 넌 오늘 햄부침 압수야!’ 같이 엄격했던 태현이라, 당연히 그거 이야기를 할 줄….
“그보다 다른 할 말이 있어.”
“?”
태현이 진지한 표정으로 말하자 이다비는 놀랐다.
무슨 말을 하려고 저러는 거지?
“…!”
그리고 태현의 입에서 나오는 이야기를 듣자 이다비는 더 놀랄 수밖에 없었다.
“정말로 접으시려고요?”
“할 거 다 한 것 같아서.”
이다비는 한동안 신중하게 생각하다 고개를 끄덕였다.
“그래요. 태현 님이 그렇게 생각하신다면야….”
“물론 바로 접는다는 건 아니야. 바로 접으면 꼭 이상한 소리가 나오더라고.”
판온 1에서 느낀 것처럼, 아무리 게임에서 잘나가고 할 거 다 했다고 하더라도 그냥 접으면 안 됐다.
-김태현 접음? 스미스 무서워서 접었군.
-내가 보기에는 케인 무서워서 접은 듯.
-아님. 내가 보기에는….
…같은 온갖 ‘겁먹고 튀었네 ㅉㅉ’ 하는 헛소문이 퍼지는 것이다.
“그리고 그거랑 별개로 다른 놈들 좋은 짓 해주기도 싫고.”
태현은 매우 진심을 담아서 말했다.
태현이 할 거 다 했다고 접었는데 길드 동맹 놈들이나 스미스의 화이트 나이트 같은 놈들이 ‘야 우리 세상이다! 세금 500%!’ 같은 짓을 해서 케인이 ‘엉엉 전 재산 뺏겼어’하면 상당히 화가 날 것 같았다.
“뒷정리는 다 하고 가야지.”
“안 그러셔도 되는데… 하긴, 저도 태현 님이 이상한 소리 들으면 화가 나긴 하겠네요.”
이다비는 고개를 끄덕였다.
“그런데 뒷정리는 어떤 식으로 하실 거예요?”
“일단 고대 제국 부활한 거 아까우니까 그거 복구하고.”
“좋죠. 이번에 건축물들 엄청나게 새로 생겨났더라구요.”
“왕국들 박살 난 것도 좀 고치고. 교단들도 좀 고치고.”
“그것도 중요하죠.”
“그리고 자기 방송으로 나하고 일대일 붙으면 이길 수 있다고 한 놈들 찾아가서 붙고.”
“아. 그것도 엄청나게 중요하네요.”
이다비는 매우 공감 간다는 듯이 고개를 끄덕였다.
사실 태현한테 말하진 않았지만, 이다비는 파워 워리어 길드원들을 통해 다 전해 듣고 있었다.
-길마님. <김태현내가이김> 이란 랭커가 김태현 선수하고 붙으면 자기가 이긴다고 떠들고 다니는데요.
-우리 파워 워리어 길드원들이 몰려가서 악플을 달아줍시다!
-영상에 싫어요도 누르고!
-…그러지 마.
분노한 길드원들이 달려가는 건 말렸지만, 이다비라고 해서 기분 좋을 리 없었다.
정말 최상위권 랭커들은 사실 저런 도발을 잘 하지 않았다.
도발을 해서 얻을 게 없을뿐더러 실제로 태현을 만날 일이 비교적 많은 만큼, 실제로 만났다가 태현과 시비라도 붙으면 서로 곤란한 것이다.
무엇보다 그들은 태현의 성질이 생각보다 더럽다는 걸 잘 알고 있었다.
‘김태현 그 새끼 판온 1 때 생각해 보면 바로 보자마자 PK 시도할지도….’
‘지금이야 선수 생활하니까 성질 죽이는 거지 바로 시비 걸지도 모른다.’
그러나 하위권 랭커들은 이야기가 달랐다.
시간이 지나면서 랭커들 숫자도 기하급수적으로 늘어난 상황.
이제 어지간해서는 레벨 좀 높다고 유명해지기 힘든 것이다.
-내가 랭커 김정식이다!
└네가 누군데?
└처음 들어보는 놈인데?
└개나 소나 다 랭커네 요즘.
└솔직히 레벨 뻥튀기시킨 걸 듯.
유명해지기 위해서는 그냥 레벨 높은 게 아니라 뭔가 제대로 보여줘야 했다.
굵직한 퀘스트를 깨거나, 선수로 들어가거나, 판온에서 커다란 사건을 일으키거나….
-내가 랭커 <김태현내가이김>이다!
└뭐 저런 미친놈이?
└니가 뭔데 김태현을 이김? 뭐지?
└미친놈인가 봐.
…어떻게든 관심을 끌든가!
그런 만큼 하위권 랭커들에게 태현은 생각보다 먹음직스러운 상대였다.
일단 하위권 랭커들은 태현을 만날 일이 없었다.
도는 던전의 수준 차이도 심한 데다가 판온이 얼마나 넓은데 퀘스트 좀 한다고 만나겠는가.
그리고 하위권 랭커들이 ‘내가 김태현 이김’한다고 태현이 직접 찾아오기라도 하겠는가?
절대 그럴 리 없었다.
그런 만큼 하위권 랭커들은 신이 나서 태현을 도발해 댔다.
도발도 서로 하다 보면 이제 경쟁이 붙고 불이 타오르게 마련.
어지간한 도발로는 먹히지 않자 더욱더 자극적으로 변했다.
<김태현 내가 이긴다…. 충분히 승산 있어….>
<김태현은 사실상 퇴물… 길드 동맹 상대할 때 한 번에 다 죽이지 못한 거 보면 이제 에이징 커브 왔다….>
<김태현은 완전히 거품이라고 봐야….>
욕이야 더럽게 먹었지만 어쨌든 관심은 받고 인기는 끌 수 있었다.
…그리고 태현한테 두들겨 맞은 사람들도 은근히 응원했다.
└야! 파이팅이다!
└열심히 해라! 젊은 놈이 기특하네!
└진짜로 한번 가서 붙어보는 게 어떠냐!
“가서 죽여 버리죠!”
“아니 뭐 그렇게까지… 그냥 일대일 신청할 생각인데.”
“그렇다면 일대일 정도만 하죠.”
‘이다비가 요즘 스트레스 쌓일 일이 많았나?’
태현은 의아해했다.
하긴 굶주린 혼돈 상대하느라 준비한 걸 생각해 보면 사람이 스트레스받을 만했다.
“누구부터 패볼까….”
“추천해도 괜찮나요?”
태현과 이다비는 떠들면서 다시 원정대가 있는 곳으로 돌아왔다.
그 짧은 사이에 원정대 플레이어들은 각자 모여서 축제 분위기를 연출하고 있었다.
“음식 다 꺼내와! 오늘 여기 있는 사람들, 제가 다 대접하겠습니다! 배낭 싹 다 비우겠습니다!”
“와아아아아아아!”
“원래 공짜로는 연주 안 하던 곡인데 연주하겠습니다!”
“와아아아아아아!”
“부서진 장비 갖고 있으면 다 갖고 오십시오! 전부 다 무료로 수리해 드리겠습니다!”
“와아아아아아아!”
“저희는 팝콘을 평소보다 맛있게 팔겠습니다!”
“…….”
“…50% 할인?”
평소에는 얼굴도 보기 힘들었던 쟁쟁한 랭커들이 묻지도 따지지도 않고 수리를 해주고 음식을 만들어줬다.
간신히 살아남은 길드 동맹 간부 몇몇은 투덜거리면서 파워 워리어 길드 팝콘을 한 움큼 입에 털어 넣었다.
“은혜도 모르는 자식들. 길마님이 목숨 걸어서 발을 묶어서 해낼 수 있었던 건데.”
“맞아. 이 자식들이 뭘 알겠어.”
“하여간 레벨 높은 사람만 기억하고 말이야. 아주 어이가 없어.”
길드 동맹 간부들이 투덜거리는 것도 당연했다.
이번에 쑤닝을 포함해서 간부들이 싸우다가 로그아웃당했는데 모두 다 김태현만 찬양하고 있으니 배가 안 아플 수가 없었던 것이다.
“일반인들은 판온을 모른다니까!”
“맞아! 판온을 보는 방법을 몰라! 그냥 유명하면 다 좋다고 해주고!”
“길마님이 솔직히 김태현하고 붙어서 질 리가 없거든?”
“맞아. 김태현 놈이 길마님하고 제대로 붙은 적이 없이 맨날 치고 빠져서 그런 거지.”
“김태현을 무시하는 게 아니라, 김태현이 사실 그런 식으로 치고 빠지는데 특화된 놈인데 너무 과평가 받고 있다 이거지.”
“맞는 말이야! 그리고 스미스 그 새끼도 솔직히 굶주린 혼돈 때문에 이긴 거지!”
지나가는 사람들은 길드 동맹 간부들이 떠드는 소리를 듣고 머리에 손가락을 빙글빙글 돌리며 지나갔다.
아무래도 미친 사람들인가 봐!
그렇게 투덜거리며 지나가는 길드 동맹 간부들 앞에 태현과 이다비가 나타났다.
간부들은 움찔했다.
방금까지 뒷담 까던 게 있어서 더 움찔할 수밖에 없었다.
“쑤닝 언제 접속하지?”
“왜… 왜요?”
“접속하자마자 오라고 해라. 일대일로 한번 붙어보자.”
“…….”
“저, 저희 때문인가요???”