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 나는 될놈이다 1779화
“이… 이게 무슨…?!”
스미스는 보기 드물게 당황했다.
당연한 일이었다.
이제까지 어떤 상황에서도 충성을 바쳐왔던 굶주린 혼돈이 그를 배신한 셈이었으니까.
“시간을 조금만 더…!”
다른 플레이어들은 희생양처럼 써먹더라도 스미스에게는 호의를 보여주던 굶주린 혼돈이었다.
‘이럴 순 없다!’
스미스는 어떻게든 굶주린 혼돈을 설득하려고 했다.
직감이 외치고 있었던 것이다.
시간을 조금만 더 준다면 반드시 김태현을 잡을 수 있다!
“상대도 지금 지칠 대로 지친….”
[굶주린 혼돈이 당신을 계속해서 삼킵니다!]
[저항에 실패합니다!]
“스미스 이 케인 같은 놈아! 내가 몇 번을 말했냐!”
보고 있던 태현은 답답함을 참지 못하고 외쳤다.
세상에는 공짜가 없었다.
아무런 대가 없이 힘을 퍼주는 존재가 있다면, 그만한 페널티가 당연히 있는 것이다.
[카르바노그가 맞는 말이라고 외칩니다.]
아키서스만 봐도 절대로 공짜로 힘을 주지 않았다. 하나부터 열까지 스스로 다 찾아서 힘을 가져야 했다.
…물론 그건 좀 너무 엄격한 수준이긴 했지만, 요점은….
“빠져나와라! 스미스!”
“크윽…! 이럴 수는… 이럴 수는….”
“속았다는 걸 인정해! 누구나 속게 마련이다!”
“맞아!”
“!”
위에서 날아온 케인이 대화에 끼어들었다.
“나도 너 같은 적이 있었다, 스미스! 너처럼 속았던 적이!”
옆에 있던 최상윤이 주변을 두리번거리며 속삭였다.
“케인… 너 지금 여기서 태현이한테 속았다고 외치면 넌 진짜 매장당한다.”
안 그래도 팬들 사이에서 ‘케인 놈 숙소에서 일 안 하는 게 사실인가요?’, ‘농담 아니었나?’, ‘저번에 인터뷰 보니까 진짜 같던데?’ 같은 식으로 전적이 있는 케인이었다.
케인이야 농담으로 태현한테 속았다고 외치더라도 팬들은 ‘저런 배은망덕한 새끼’ 소리가 나올 수밖에 없는 것이다.
다행히 케인은 태현을 이야기하는 게 아니었다.
“나도 예전에 길드원들한테 배신당한 적이 있었다! 정말로 괴로웠고! 하지만 그걸 극복해야….”
“케인 선수한테까지 저런 말을 들을 줄이야!”
“…이 자식이 뭐라고 했냐?”
스미스가 좌절한 목소리로 외치자 케인은 분노했다.
예의 바르고 인성 바른 놈인 줄 알았는데!
최상윤이 중얼거렸다.
“너하고 같은 포지션이라서 저러나 본데.”
같이 세계 최고의 탱커 자리를 두고 경쟁하는 입장인 만큼, 라이벌에게 저런 말을 듣는 게 아플 수밖에 없었다.
“그, 그렇지? 날 무시해서 저러는 게 아니라 날 존중해서 저러는 거지?”
“앞에! 앞에 봐!! 한눈팔지 말고!”
[굶주린 혼돈이 당신을 완전히 삼킵니다!]
[…]
“스미스!”
태현이 뭘 할 틈도 없이, 스미스는 그대로 빨려 들어가서 로그아웃 당해 버렸다.
‘어이가 없군….’
태현은 할 말을 잃었다.
스미스와 맞붙게 되면 어떻게 싸워야 할지 꽤 많이 생각해 보긴 했었지만, 그중에서 이런 상황은 한 번도 생각해 보지 않았었다.
싸우기 전에 굶주린 혼돈이 스미스를 제물로 삼아버릴 줄 누가 상상이나 했겠는가.
[차원을 뚫고 굶주린 혼돈이 직접 강림을 시도합니다.]
우득!
불길한 소리와 함께 찢어진 차원의 틈에서 굶주린 혼돈이 몸을 내밀기 시작했다.
정해진 형체가 없는 혼돈의 덩어리가 입을 열고 태현을 협박했다.
건방진 놈 같으니. 네놈이 내 계획을 얼마나 방해했는지 아느냐?
“내가 할 소리다. 너 때문에 내가 할 생각도 없는 퀘스트들을 몇 개나 했는지 아나?”
파멸을 앞두고 허세를 부리는구나. 네놈의 파멸이 가까이 찾아왔는데도 말이다. 보아라!
<굶주린 혼돈의 강림-아키서스의 화신 퀘스트>
대륙의 가장 사악한 위험인 굶주린 혼돈은 여러 번의 계획 실패와 하수인들의 더딘 진전으로 인해 더 이상 인내할 수 없게 되었습니다.
아직 불완전한 상태이지만 굶주린 혼돈은 다른 제물들을 흡수해 직접 대륙에 나타나기로 마음먹었습니다.
굶주린 혼돈을 쓰러뜨릴 방법을 찾아내십시오!
적을 쓰러뜨리지 못한다면 대륙의 모든 생명체는 허기진 굶주린 혼돈의 뱃속으로 들어가게 될 것입니다.
보상:?, ???
‘이걸… 다행으로 봐야 하나?’
태현은 고민했다.
만약 더 내버려 뒀다면 굶주린 혼돈이 각종 준비를 통해 훨씬 더 강력한 상태로 나타났을 것이다.
그런 점에서 봤을 때 이렇게 도발해서 먼저 끌어낸 게 결코 나쁜 것만은 아니었다.
…태현의 눈앞에서 살벌하게 노려보고 있어서 그렇지.
‘결과적으로 옳은 선택이긴 했는데 문제는….’
[굶주린 혼돈이 당신을 집어삼킵니다!]
“아, 안 돼!!! 안 돼!!!”
달려온 원정대 플레이어들이 아닌 남은 굶주린 혼돈 랭커들이 쏙쏙 흡수당하기 시작했다.
자리에 있던 랭커들이 아무것도 하지 못하고 로그아웃 당하자, 달려온 원정대 플레이어들은 압도당해서 입을 다물었다.
적이긴 했지만 저렇게 순식간에 쓰러질 줄이야.
“말도 안 돼…!”
“저게 굶주린 혼돈인가?”
“흥! 굶주린 혼돈이든 뭐든 어디 한번 이것도 버티나 보자고!”
누가 미친놈 아니랄까 봐 기계공학 대장장이 중 한 명이 뛰쳐나왔다.
[공포로 인해 모든 스킬에 페널티가…]
[굶주린 혼돈의 시선이 당신을…]
[…]
“죽어라!”
[<신성한 저항의 살육폭탄>이 터집니다!]
[기계공학 스킬이 높습니다!]
[추가로…]
[…]
콰콰콰콰콰쾅!
기계공학 대장장이들이 아껴서 만들었던 폭탄들이 모습을 드러냈다.
태현만큼은 아니어도 골짜기의 기계공학 대장장이들도 폭탄의 장인.
이들이 필요할 때 쓰려고 만들어놨던 폭탄들은 그 위력이 상상을 초월했다.
그러나….
[굶주린 혼돈의 힘이 폭탄을 삼켜 버립니다.]
[폭발이 가라앉습니다.]
[…]
아직 배가 고프다. 더 갖고 와라. 더! 더! 더!!
굶주린 혼돈은 폭탄은 무시한 채 굶주린 혼돈을 섬기는 플레이어들을 더욱 집어삼켰다.
태현은 작정하고 검을 휘둘렀다.
-아키서스의 첫 번째 공격!
[아키서스의 첫 번째 공격을 시전합니다!]
[강력한 연속 공격이…]
[전설 검술 스킬이…]
[…]
[…]
-위험해! 이거 진짜 위험해! 저놈 진짜 위험한 놈이다!!
-고대 제국 황실의 검으로 데미지를 넣어! 놈에게 통하는 공격이 얼마 없어!
마검 안에 갇힌 기계공학자들은 비명을 지르며 조언을 던졌다.
굶주린 혼돈은 그 방어에 있어서도 사기적인 힘을 자랑했다.
어지간한 물리 공격이나 속성 공격은 통하지도 않는 것이다.
하지만….
[신성력이 매우 높습니다. 굶주린 혼돈의 실체에 타격을 줍니다!]
[행운 스탯이 매우 높습니다. 굶주린 혼돈의 실체에 타격을…]
[아키서스 검법이 굶주린 혼돈의…]
[전설 검술 스킬이…]
태현에게는 이야기가 달랐다.
아키서스의 화신이자 드높은 행운 스탯, 그리고 전설 검술 스킬을 가진 사람!
이 모든 것들이 굶주린 혼돈에게 상처를 입힐 수 있는 자격이었다.
[굶주린 혼돈이 짜증스러워합니다.]
[굶주린 혼돈이 힘을 회복합니다!]
성가신 날벌레 놈이 죽음을 원하는가?
그 순간 굶주린 혼돈이 자기 하수인들을 삼키는 걸 멈추고 공격을 날렸다.
[굶주린 혼돈의 파동이 퍼져 나갑니다!]
“…!!!”
이제까지 몇 번이고 봐왔던 굶주린 혼돈의 파동.
똑같은 스타일의 스킬이었지만 그 압박감은 상상을 초월했다.
속도와 범위가 태현의 예상을 뛰어넘어서 달려오고 있었던 것이다.
‘큭!’
생각을 하기 전에 태현의 몸이 본능적으로 움직였다.
-아키서스 반격의 검!
[<아키서스 반격의 검>이 성공합니다!]
[굶주린 혼돈의 파동을 돌려보냅니다!]
태현을 제외한 주변이 굶주린 혼돈의 파동으로 쓸려나갔다.
땅이 뒤집히고 충격으로 날아왔던 원정대 플레이어들이 탈것에서 떨어질 뻔했다.
‘이건….’
“일단 빠지죠!”
이다비가 날아와서 태현의 손을 붙잡았다.
지금 태현의 상황에서 굶주린 혼돈과 목숨을 걸고 싸우는 건 너무 위험한 도박이었다.
‘일단 빠져나가서 회복해야 해!’
“이다비, 위험한데 왜 굳이….”
“지금 그걸 태현 님이 말하시면 안 되거든요?!”
이다비는 어이없다는 듯이 소리치면서 탈것을 앞으로 몰았다.
굶주린 혼돈의 강림에 경악해 있던 원정대 랭커들도 뒤늦게 정신을 차리고 외쳤다.
“빠져나갑시다!”
“흩어져서 시선을 피해! 뭉쳐 있으면 위험하다!”
“우리 파티는 태현 님을 보호한다!”
미리 계획했던 대로 원정대 파티들은 빠르게 움직였다.
몇몇은 흩어져서 각종 어그로 끄는 스킬로 굶주린 혼돈의 신경을 분산시키고, 몇몇은 태현 뒤에 붙어서 만약의 상황을 대비하기 위해서 준비했다.
“이럴 것까지는….”
태현은 대놓고 자기 대신 방패를 하려는 원정대 플레이어들을 보고 멈칫했다.
평소에 태현은 이런 식의 플레이를 하지 않았다.
혼자 싸우고, 지더라도 혼자 진다.
이런 식으로 하는 건….
“저희가 자원한 겁니다. 빨리 가시죠!”
“지금 여기서 붙잡히면 굶주린 혼돈 퀘스트는 절대 불가능하지 않습니까!”
랭커들은 자기 캐릭터는 신경 쓰지 않고 태현을 재촉했다.
태현은 고개를 끄덕였다.
이런 상황에서 괜히 고집을 부리는 건 더 멍청한 짓이었다. 태현은 랭커들 사이에 있는 케인을 보며 말했다.
“케인. 고맙다. 잘 부탁한다.”
“…!!”
태현이 갑자기 안 하던 말을 하자 케인은 소름이 돋았다.
‘굶… 굶주린 혼돈한테 당했나?’
“케인 선수 뭐 합니까! 빨리 안 가고!”
“가고 있잖아! 이 자식들이 왜 이렇게 성질이 급해가지고!”
케인은 다른 랭커들의 재촉에 울컥해서 대답했다.
지금 얼마나 감동적인 순간인지도 모르는 자식들이….
[굶주린 혼돈이 하늘을 막기 시작합니다.]
[굶주린 혼돈의 창이 발사되기 시작합니다.]
아래에서 성벽도 뚫어버릴 것 같은 창들이 살벌하게 날아오기 시작했다.
자리를 이탈하던 원정대 플레이어들 중 몇몇이 맞고 추락했다.
“달려! 더 달려!”
“몸으로라도 막아! 연막 최대한 치고!”
“여기서 잡히면 끝장이다! 빠져나가야 해!”
굶주린 혼돈은 태현의 위치를 집중적으로 노렸다. 이다비가 몰고 있는 탈것을 향해 계속해서 창을 날렸다.
콰콰콰콰콱!
랭커들이 아무리 방어하고 이다비가 잘 몬다고 하더라도 한계가 있었다.
굶주린 혼돈의 창이 이다비가 타고 있는 기계공학 오토바이를 꿰뚫었다.
콰직!
[굶주린 혼돈의 창이…]
“!”
이다비가 균형을 잃고 흔들렸다. 그 순간 굶주린 혼돈의 창이 다시 날아들었다.
태현은 즉시 검을 뽑아 들었다.
여기서 받아칠 경우 충격으로 인해 떨어질 수도 있었지만, 그런 생각은 들지 않았다.
몸이 먼저 반응했다.
막는다!
“으어억! 안 돼!”
그러나 그런 일은 일어나지 않았다. 케인이 방패를 들고 끼어든 것이다.
꽝!!!
[굶주린 혼돈의 창이 방패를 찢어발깁니다!]
[충격이 당신을 마비시킵니다!]
[추락합니다!!]
창에 제대로 얻어맞은 케인은 균형을 잃고 탈것에서 밀려 나갔다.
“케인 선수!!”
“훌륭했습니다!”
따라오던 플레이어들은 케인의 희생에 깜짝 놀랐다.
저 상황에서 자기를 희생할 줄이야.
밀려서 떨어지며 케인은 뒤늦게 깨달았다.
“…김, 김태현이 아니라 이다비를 노린 거였어…!?”
그런 거면 그냥 내버려 둬도 됐을 텐데…!
태현을 지키기 위해 인간방패를 하고 있는 거였지 이다비는 케인과 동급 아닌가!
“으아아아아아아!”
케인은 떨어지면서 울부짖었지만 위에서 달려나가고 있는 사람들에게는 들리지 않았다.
태현은 고개를 끄덕이며 고마워했다.
‘고맙다. 케인.’
저녁 밥상을 호화롭게 차려줄 정도의 활약이었다.
이 희생은 결코 잊지 않으리라!