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 나는 될놈이다 1774화
‘뭔 미친 소리지?’
태현은 전령의 말에 당황했다.
지금 굶주린 혼돈의 군대가 피해를 줄이기 위해 흩어져서 도망치고 있는 상황에 태현을 기사로 삼겠다고 부르다니.
무슨 생각인지 짐작도 가지 않았다.
그리고 무엇보다….
‘내가 가장 안 어울리는 직업이 기사 아닌가?’
[카르바노그도 동의합니다!]
단순히 HP가 낮고 방어 위주로 싸우는 스타일이 아니기도 했지만, 그것보다 일단 태현이 기사 직업과는 성격적으로 맞지 않았다.
명예 높고 선한 퀘스트 하고 남들 안 속이고 반칙 안 하고 등등등….
이런 기사 직업은 기본적으로 성격이 맞아야 할 수 있는 것이다.
그에 비해 암살자 직업은 훨씬 태현과 잘 맞았다.
위에 나온 조건들과 전부 정반대에 가까운 플레이어들에게 잘 맞는 직업!
-주인님께서는 지금 굶주린 혼돈을 섬기는 모험가들 중에 쓸 만한 놈을 찾고 계시지. 너는 그중 한 명으로 뽑혔다.
<굶주린 혼돈의 기사-굶주린 혼돈 퀘스트>
굶주린 혼돈의 기사단장 젝스칼은 대륙에 남아 있는 저항군들을 빠르게 쓸어버리지 못하고 있는 것에 분노하고 있습니다.
이에 젝스칼은 모험가들 중 쓸 만한 자들을 불러 모아 새로이 굶주린 혼돈의 기사로 삼아 직접 진격하려고 합니다.
당신은 사악한 악명으로 기사단장 젝스칼의 눈에 드는 데 성공했습니다.
젝스칼의 시험을 통과하고 굶주린 혼돈의 기사로 들어가십시오!
보상: ?, ????
“…….”
태현도 카르바노그도 바로 납득했다.
아…!
굶주린 혼돈의 기사라면 어울리긴 하겠구나!
* * *
“지금 안 도망쳐도 되나? 협곡 근처가 완전히 개판 났는데.”
“무슨 생각이 있어서 부른 거 아니겠어?”
굶주린 혼돈의 랭커들은 수군거리며 발걸음을 옮겼다.
국경지대에서 그리 멀지 않은 평원에, 기사단장 젝스칼과 기사단이 플레이어들을 기다리고 있었다.
모두 다 굶주린 혼돈의 기사 퀘스트를 받은 플레이어들!
당연히 기뻐해야 할 귀한 기회였지만, 기쁘기보다는 조금 찜찜했다.
굶주린 혼돈의 랭커들도 지금 상황이 어수선하다는 걸 알고 있었던 것이다.
-국경지대 공략 완전 망했다.
-미친놈들이 내분 더럽게 심함. 길드 동맹도 이 정도는 아니었다.
-자기들끼리 서로 찌르고 죽이고… 완전 미친놈들이야.
-전사 놈들이 무시하고 다녀서 그렇지!
-저 뻔뻔한 암살자 새끼들이…!
-협곡에서 무슨 일 있었던 거죠?
-국경지대 날리려고 대마법 준비하고 있었는데 폭주했나 봐.
-내 친구 원정대 랭커인데 지금 엄청 신나게 웃고 있더라.
-나 같아도 웃겠다. 알아서 넘어져서 무덤에 들어가는데.
-진격 퀘스트에 참가하는 거 좀 미루는 게 나으려나?
-나을 것 같음. 지금 국경지대 쪽도 후유증 장난 아니라 진입 자체가 불가능함.
-나 지금 41군단 소속인데 설마 다시 진격 시작하진 않겠지??
-할 거 같으면 그냥 잠시 나오는 게 속 편할 것 같다.
피해도 피해지만 혼란이 심했다.
어마어마하게 모여 있던 굶주린 혼돈의 군단들이 다시 재정비하고 모이려면 시간이 걸리는 것이다.
그러는 사이 적들도 또 방어를 할 테니….
‘조금 더 시간이 지난 다음에 들어가는 게 맞을지도 모르겠는데.’
‘저번에도 보니까 먼저 들어가는 놈들만 손해 보더라.’
랭커들의 그런 마음을 읽었는지 기사단장 젝스칼이 묵직한 목소리로 말했다.
-모험가들이 도착했군.
“예. 뵙게 되어서 영광입니다.”
-다들 알겠지만, 굶주린 혼돈께서는 동쪽으로 진격 명령을 내리셨다.
“…….”
플레이어들도 다 알고 있는 만큼 무거운 침묵이 감돌았다.
퀘스트 참가 안 하려는 사람들을 굶주린 혼돈의 기사단이 손수 공격하지 않았던가.
그때는 굶주린 혼돈의 기사단이 좋아 보였다. 기사단 안까지 들어간 굶주린 혼돈의 플레이어들은 또 얼마나 잘나가는 것처럼 보였던가.
하지만 지금 보니 괜히 초반부터 까불었다가는 앞장서서 죽을 것 가다는 생각이 들었다.
‘굶주린 혼돈의 기사가 되는 게 꼭 좋은 건 아닐지도 모르겠군.’
‘퀘스트를 무식하게 깰 필요가 없지.’
-그러나 여기 모인 수많은 병사들을 비롯한 하수인들은 굶주린 혼돈을 실망시켰다.
“그렇습니다.”
“정말 나빴습니다. 반성합니다.”
랭커들은 대충 비위를 맞춰줬다.
사실 굶주린 혼돈의 기사단도 책임이 있다고 생각했지만 그런 말을 했다가는 목이 날아갈 테니까.
“열심히 하겠습니다!”
-그런 말을 하려는 게 아니다. 굶주린 혼돈께서는 새로운 명령을 내리셨다.
“…?”
-나약한 자들은 필요 없으시다고!
“예… 그렇죠?”
랭커들은 새삼 너무나도 당연한 소리에 의아해했다.
보통 사악한 성향의 세력에서 하는 말이 저랬다.
약한 자는 필요 없다.
레벨 올리고 퀘스트 깨라.
뭘 이제 와서 새삼?
-새로 동원된 수많은 병사들, 굶주린 혼돈께 아부하는 하찮은 전사들… 이런 자들은 필요 없다는 게 결론이다.
“???”
뭔가 분위기가 이상하게 흘러가자 랭커들은 당황했다.
“필요 없… 으면 그럼 누가 공성전을 합니까?”
공성전을 할 때 물량이 있어야 진행이 원활하다는 건 상식이었다.
그렇지 않다면 저 요새들을 누가 다 뚫겠는가.
-강자들이. 새로 시련을 통과하고 만들어 질 강자들이!
“??”
‘무슨 퀘스트를 주려고 저러는 거야?’
랭커들은 당황해하면서도 살짝 기대를 했다.
굶주린 혼돈이 악명은 높아도 가입만 하면 확실하게 강력한 스킬들과 퀘스트를 주는 곳이었다.
그런 곳에서 저렇게 분위기를 잡으니 기대가 안 될 수가 없었다.
[굶주린 혼돈이 자신을 섬기는 하수인들 중 강하고 자질 있는 자들에게 은밀히 명령을 내립니다.]
[퀘스트가 추가됩니다!]
<포식과 흡수-굶주린 혼돈 퀘스트>
하찮은 하수인들의 실수와 실패를 참아 온 관대한 굶주린 혼돈께서, 대륙의 오랜 혼란을 끝내기 위해 마침내 결단을 내리셨습니다.
다른 약한 하수인들을 처리하고 흡수해서 당신의 힘으로 만드십시오!
보상: ?, ???
“??!??”
-가라, 굶주린 자들아! 이 대륙에 쓸데없이 많은 생명들은 필요 없다. 오로지 강한 생명만이 필요할 뿐!
랭커들은 너무나도 턱없는 퀘스트에 당황했다.
닥치는 대로 굶주린 혼돈의 다른 하수인들을 처리해서 흡수하라니.
“…알겠습니다!”
“진짜 할 거냐?!”
“야, 공짜로 레벨업 시켜주는 셈인데 이걸 안 한다고?”
“그렇긴 한데….”
머리로 생각하면 바로 받아들이는 게 맞았다.
하지만 레벨업이나 퀘스트를 할 수 있다면 환장하는 랭커들 중에서도 무언가 찜찜했는지 머뭇거리는 사람들이 나왔다.
원래 굶주린 혼돈에 가입한 랭커들이 꿈꾸는 건 굶주린 혼돈이 대륙을 지배하면, 그 밑에서 각자 자기들이 영주 노릇을 하는 것이었다.
길드 동맹 같은 초대형 길드들이 꿈꿨던 대륙 제패!
그걸 굶주린 혼돈의 힘을 빌려서 하는 게 목표였던 것이다.
그런데 이렇게 보이는 대로 NPC들을 싹 쓸어버리고 숫자를 쓸어버리면….
정작 끝나도 다스릴 영지가 없어지는 것 아닐까?
‘그보다… 이거 퀘스트 다 끝나면 설마 우리끼리 싸움 시키는 거 아닌가?’
‘…!’
* * *
굶주린 혼돈의 흉흉한 명령이 물밑에서 시작되고 있는 동안 태현도 자리에 도착했다.
[악명이 매우 높습니다.]
[굶주린 혼돈의 암살자로서 수많은 아군들을…]
[……]
[……]
[당신의 행적이 아주 높은 평가를 받습니다.]
“!”
태현은 굶주린 혼돈의 랭커들 중에서도 아주 특별한 대접을 받았다.
기사단장 젝스칼이 따로 불러낸 것이다.
주변을 보니 태현도 이름을 들어본 랭커들이 몇몇 있었다.
악명을 쌓을 대로 쌓거나, 초창기부터 각종 굶주린 혼돈 퀘스트를 닥치는 대로 깨서 어마어마하게 공적치 포인트를 쌓은 굶주린 혼돈 랭커들.
PVP 쪽에서 악명이 높은 약탈자 랭커 젠타스나 초창기 때부터 굶주린 혼돈에 가입한 파이토스 교단 출신 랭커 시센 등 스미스에게 밀려서 스포트라이트는 받지 못했지만 꾸준히 이득을 보고 있는 랭커들이 자리에 섰다.
그리고 그들은 태현을 보고 의아해했다.
‘못 보던 놈인데.’
‘우리처럼 주목을 피하고 퀘스트만 깬 놈인가?’
“잘 부탁드리겠습니다!”
태현은 그 시선을 눈치채고 공손하게 외쳤다.
보통 악명 높은 플레이어들 사이에서는 볼 수 없는 공손한 태도에 랭커들은 살짝 경계심을 누그러뜨렸다.
“보아하니 이번에 암살자 퀘스트 깬 랭커 맞나?”
“게시판이 상당히 시끄럽던데.”
“부끄러울 뿐입니다. 여기 이렇게 따로 오게 될 줄이야! 무엇 때문에 이러시는 건지 짐작가시는 바가 있습니까?”
“아마 추가 보상을 주기 위해서겠지. 들어보니 지금 다른 굶주린 혼돈 랭커들에게는 학살 퀘스트가 나오고 있다던데.”
말이 끝나기가 무섭게 젝스칼이 입을 열었다.
-너희들을 이렇게 따로 불러낸 데에는….
[굶주린 혼돈이 현현합니다.]
쿠르르릉!
젝스칼 뒤의 공간이 뒤틀리더니 다른 차원이 모습을 드러냈다. 그리고 그 안에서 시꺼멓게 꿈틀거리는 악의 기운이 나타났다.
나는….
[굶주린 혼돈이 권능을 선사합니다.]
[강력해진 아키서스의 힘이 권능을 거부합니다.
[굶주린 혼돈이 당신의 정체를 알아차립니다!]
…?
굶주린 혼돈도 상황 파악이 한 발짝 늦었다.
설마 아키서스의 후계자가 변장까지 하고 여기 와있으리라고는 상상도 하지 못했기 때문이었다.
그 사이 태현이 먼저 움직였다.
쉭!
[치명타가 터졌습니다!]
[아키서스 검법이…]
[아키서스의 두 번째 공격이 시전됩니다!]
[언령 마법을 시전합니다!]
[적의 시야가…]
“뭐…!?”
갑자기 있다가 옆의 동료한테 기습을 당한 젠타스가 눈을 크게 떴다.
“뭐하는 거냐?! 아래 놈들을 죽이라고 했지! 미친놈!”
태현은 대답하지 않고 검을 휘둘렀다.
젠타스는 빠르게 스킬을 사용해 거리를 벌리고 회피하려고 했지만 태현은 그대로 궤도를 예측하고 따라붙어서 젠타스에게 공격을 쑤셔박았다.
젠타스는 경악했다.
PVP에 이골이 난 만큼 자신이 회피 스킬들을 조합해서 콤보를 썼을 때 따라오는 사람은 없었다.
뒤로 빠지고 혼란시킨 다음에 위치를 재배치시키는 강력한 콤보인데….
이걸 예측하고 따라잡았다고??
[치명타가 터집니다!]
[갑옷의 가슴 부분이 파괴됩니다!]
[추가 데미지가…]
[추가적인 효과로 인해 당신의 모든 공격 속도가…]
[……]
“이 미친 놈이! 정체가 뭐냐! 뭐하는 놈이냐!”
기사단장 젝스칼은 아직 상황 파악이 덜 됐는지 외쳤다.
-그렇다! 굶주린 혼돈께서는 강한 자를 선호하신다. 하지만 여기서 가장 강한 자를 벌써부터 가릴 필요는 없다. 약한 놈들을….
놈을 죽여라! 놈은 아키서스의 후계자다!
-?!?
굶주린 혼돈이 뒤늦게 깨닫고 외치자 젝스칼은 경악했다.
태현은 기어코 따라붙어서 젠타스를 끝장내 버렸다. PVP에서 적수가 없다고 자랑하고 다니던 약탈자 랭커의 최후치고는 너무나도 허망했다.
[HP가 0이 되어…]
[명성이 크게 오릅니다!]
[……]
[……]
태현은 주변을 둘러보았다.
경악한 표정으로 태현을 쳐다보고 있는 굶주린 혼돈 랭커 몇몇과, 무기를 뽑아들고 있는 굶주린 혼돈의 기사단장 젝스칼. 그리고 이쪽에 살의를 지독할 정도로 뿜어내고 있는 굶주린 혼돈까지.
‘굶주린 혼돈을 직접 대면할 줄은 몰랐는데.’
악명 스탯이 너무 높고 퀘스트를 너무 잘 깬 탓에 이렇게 대면하게 될 줄 누가 알았겠는가.
이렇게 된 이상 할 수 있는 건 하나밖에 없었다.
‘최대한 죽이고 빠져나간다!’
-감히 나를 암살하기 위해 여기까지 잠입했다니. 그 용기 하나는 인정해 주겠다.
젝스칼의 말에, 다른 굶주린 혼돈 랭커들도 동감하는 표정을 지었다.
솔직히 말해서 아무리 김태현이라지만 여기 이렇게 혼자 잠입한 건 믿기지 않았던 것이다.
정말로 배짱 하나만큼은 이제까지, 그리고 앞으로의 어느 누구도 따라갈 수 없을 정도!
“대단하군. 김태현 놈.”
“젝스칼을 암살하려고 이렇게….”
“…그래. 바로 그렇다. 그거 말고는 이유가 없지!”
태현은 괜히 마법진 이야기를 꺼내는 대신 바로 수긍했다. 랭커들의 경탄 어린 눈빛이 더욱더 진해졌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