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 나는 될놈이다 1760화
-아하!
파이토스 교단 망치기사단 단장, 아크락스가 가장 먼저 태현의 생각을 알아차렸다.
-아키서스 교단은 악마를 붙잡아서 전투악마로 교화시키고 있지. 저 악령 또한 전투원으로 훈련 시키려는 것이겠군.
-…어… 꼭 그래야 합니까?
데메르 교단 대지사제단 대주교 비니시오가 당황해하며 물었다.
아무리 생각해도 그게 꼭 필요한가 싶었던 것이다.
그러자 아크락스가 망치로 바닥을 두드리며 벌컥 화를 냈다.
-그게 무슨 말이오! 지금 아키서스 교단의 전투악마를 무시하는 건가!
-무시하는 게 아닙니다. 그리고 망치질 좀 작작 하십시오.
비니시오는 어이가 없다는 듯이 아크락스에게 말했다.
대주교든 성기사단이든 저 정도 레벨의 NPC는 저런 협박에 겁을 먹지 않았다.
-어쨌든 교황 성하께서 저 악령 놈을 길들이고 싶으신 거라면, 저 또한 반대하지는 않겠습니다.
[친밀도가 매우 높습니다!]
[공적치 포인트가…]
[평가가…]
[……]
비니시오도 한 번 우려를 표했을 뿐 태현의 의견을 말리진 않았다.
문제는….
“…그냥 굶주린 혼돈의 정보를 캐내려고 기다리라고 한 거다.”
태현도 황당하다는 듯이 아크락스를 쳐다보았다.
굶주린 혼돈의 하수인들은 서로의 정보를 상당히 가지고 있는 편이었다.
이제 곧 시작될 공세에 대해서 알아낼 수 있다면 남는 장사였던 것이다.
-아. 그렇습니까?
-그래도 길들이는 게….
아크락스는 미련이 남았는지 태현을 쳐다보았지만 태현은 고개를 저었다.
“솔직히 길들여진다고 길들여지겠나? 괜히 고생을 하는 것보다는 정보만 캐내고 처치하자고.”
-뭐 이런 쓰레기 같은 놈을 보았나? 정보만 캐내고 처치해?! 절대, 아무것도 알려주지 않겠다!
[굶주린 혼돈의 악령이 분노합니다!]
[도발에 성공합니다!]
[화술 스킬이 오릅니다!]
최고급 8을 찍은 화술 스킬은 이제 숨쉬듯 자연스럽게 상대를 조종할 수 있었다.
굶주린 혼돈의 악령은 마치 홀린 것처럼 태현의 말에 넘어가 펄펄 뛰었다.
“하지만 네가 넘어가지 않는데 내가 널 살려줄 방법이 있나?”
-최소한 정보를 털어놓으면 목숨은 살려줘야 할 것 아니냐! 이런 더러운 모험가 놈 같으니. 어떤 모험가도 너처럼 더럽게 굴진 않았다!
“그 말은 정보를 털어놓을 생각이 있다는 건가?”
-목숨을 살려준다면 당연히!
“오….”
악령은 자신도 모르게 속고 있다는 사실을 깨닫지 못했다.
태현은 지도와 깃펜을 꺼낸 다음 말했다.
“그렇다면 하나씩 말해봐라.”
* * *
“재칼 님과 이렇게 같이 움직이게 되어서 영광입니다!”
“케인 선수와 같은 길드 출신인데다가, 아키서스 교단 비전 암살자 직업을 가지신…!”
“…….”
재칼은 진땀을 흘렸다.
온갖 우연 끝에 아키서스 교단에 가입해서 새로운 직업을 갖게 되었지만, 여전히 사람들의 고평가는 재칼을 무섭게 만들었다.
케인과 같은 길드 출신이었다고 거짓말을 하며 사람들을 겁줬던 과거.
그 과거만 봐도 알 수 있듯이 재칼은 실력에 비해 겁이 매우 많았다.
정작 태현이나 케인은 ‘아니 너 정도면 잘 싸우는 거야 케인보다 잘 싸우는듯’ ‘그래 너 정도면 잘 싸우는 거 맞아 물론 나 정도까진 아니고 김태현 말은 대충 넘겨 쟤가 원래 저러니까’라며 재칼을 격려해 줬지만, 원래 이런 성격은 격려 좀 받는다고 달라지지 않았다.
“다… 다들 날 따라오십시오.”
“재칼 님께서 따라오라고 하신다!”
“저런 실력을 가지고서도 우리에게 존대를 해주시다니….”
‘도망치고 싶다.’
재칼은 벌써부터 도망치고 싶었지만 그럴 수 없었다.
태현이 재칼을 믿고 맡긴 일들이 있었던 것이다.
-지도 줄 테니까 거기 있는 곳 좀 털고 부수고 와. 잘 할 수 있지? 그래. 넌 잘 할 수 있을 거다.
-저기 저 아직 대답 안 했….
재칼뿐만이 아니라 아키서스 교단과 골짜기에 소속된 여러 랭커 파티들은 태현의 명령을 받고 에랑스 왕국으로 움직이고 있었다.
선제공격!
적들이 이쪽을 치기 위해 힘을 모으고 있는데, 가만히 두고 볼 정도로 태현은 안일하지 않았다.
이번 기습은 적들에게 타격을 줌과 동시에 전 세계 판온 플레이어들에게 강한 메시지를 보내게 되리라.
[<굶주린 혼돈의 군영>을 발견합니다!]
[어마어마한 병사들의 숫자에 겁에 질립니다. 페널티…]
[……]
[……]
“!!!”
목적지에 도착한 파티원들은 깜짝 놀랐다.
예상했던 것보다 너무나도 많은 굶주린 혼돈의 병사들이 대기하고 있었던 것이다.
물론 굶주린 혼돈이 마음만 먹으면 끝도 없는 물량을 쏟아낼 수 있다는 것 정도는 파티원들도 알고 있었다.
하지만 이건….
‘예상을 뛰어넘는다!’
고작 여기 군영 하나에 이 정도로 빽빽하게 인원들이 차있으면 다 합하면 대체 몇 명이나 나올지 짐작도 가지 않았다.
“다… 다들 침착해라. 날 따라와. 저놈들을 모두 상대할 필요 없다. 중요한 시설만 파괴하고 가면 되니까.”
재칼은 벌벌 떨리는 목소리를 가다듬고 말했다.
저 병사들을 다 상대할 필요 없었다.
중앙 막사를 찾아 들어간 다음 천인대장만 노리면 됐다.
조용히 처리하고 조용히 털고 그 다음에 부수고 도망치면….
“역시 재칼 님.”
“이 상황에서도 전혀 달라지신 게 없으시군.”
파티원들은 재칼의 배짱에 감탄했다.
저 정도 인원을 보고 겁을 먹지 않는 사람은 김태현밖에 없을 것 같았다.
저런 담대함이라니!
‘환장하겠다….’
재칼은 벌벌 떨며 은신 스킬을 썼다.
아키서스 교단 비전 암살자란 직업이 본인의 목숨을 구해주기만을 간절히 빌 뿐이었다.
* * *
-침입… 크악!
[기습이 성공합니다!]
-이상하군. 뭔가 지나간 것 같았는데.
[은신에 성공합니다!]
재칼은 벌벌 떠는 것치고는 꽤나 성공적으로 해냈다.
파티원들을 이끌고 복잡한 군영 통로를 뚫은 뒤 거대한 중앙 막사로 접근한 것이다.
[굶주린 혼돈의 천인대장을 발견합니다!]
[명성이…]
[두려움으로 인해 페널티가 붙습니다!]
[……]
[……]
거대한 막사 안에 있는 목표물.
재칼은 이를 악물었다.
‘스킬 다 준비됐고. 몇 번이고 확인했다. 다 쏟아부으면 충분히 잡을 수 있어!’
오늘 같은 날을 위해 아키서스 교단 비전 암살자의 희귀한 사기 스킬들을 쓰지 않고 아껴뒀었다.
몽땅 다 퍼붓는다면 재칼에게도 승산이 있었다.
암살자의 자존심은 바로 이 폭딜!
“다… 다들 주변 경계하고 소리 안 나가게 조심해 주십시오.”
“목숨을 걸고서라도 지키겠습니다!”
“걱정하지 마세요!”
파티원들의 응원과 함께 재칼은 쏘아져나갔다.
파파파파파파파팍!
수십 개의 스킬이 연속으로 발동되고 재칼이 미친 듯이 굶주린 혼돈의 천인대장을 찍어나갔다.
-커… 커억!!
[치명타가 터졌습니다!]
[데미지가…]
[……]
게다가 운이 좋았다.
재칼의 연속 스킬 중 1/4이 넘는 공격이 치명타가 발동된 것이다.
폭딜을 주무기로 하는 암살자에게는 정말 감사한 행운이었다.
‘감사합니다, 아키서스 님!’
재칼은 자신도 모르게 아키서스한테 감사 인사를 올렸다.
정말 이럴 때면 아키서스한테 감사하는 마음이 절로 솟구치곤 했다.
“잡… 잡았습니다!”
“역시…!”
“재칼 님은 정말 대단하십….”
“칭찬은 나중에 하고 빨리 튑시다! 굶주린 혼돈한테 들키면….”
[굶주린 혼돈의 천인대장이 나타나지 않아 부하들이 막사로 찾아옵니다!]
[……]
[……]
“…….”
망했다!
재칼은 그렇게 생각했다.
기껏 조용하게 다 잡았는데 이렇게 재수 없게 걸리다니.
“재칼 님. 저희가 지켜드릴 테니 먼저 도망치십시오!”
“맞아요! 재칼 님은 여기서 잡히실 분이 아닙니다!”
“…아니. 같이 싸웁시다.”
재칼은 미안해서 차마 먼저 도망칠 수가 없었다.
다들 자꾸 자신을 대단한 사람으로 오해하는데 그걸 믿고 도망칠 수가 없었던 것이다.
그게 사람이냐!
‘케인 선수라면 도망치지 않았겠지…!’
태현이 있었다면 오해를 풀어줬을 테지만 자리에는 태현이 없었다.
대신 다른 게 나타났다.
쿠우우우웅-
“???”
“뭐야?”
걸어다니는 선상 요새가 어둠을 뚫고 나타났다.
거대한 바다를 건너서 태현을 쫓아온 선상 요새가 아직 힘을 잃어버리지 않고 플레이어들을 돕기 위해 지원에 나선 것이다.
“포격 개시해!!”
요새 위에 올라타 있던 (구) 굶주린 혼돈 플레이어들은 지원사격을 퍼부으며 외쳤다.
굶주린 혼돈에 가입했다가 갈아탄 선수들인 만큼, 더욱더 공을 세우고 싶어했다.
“위험할 줄 알고 대기하고 있었다! 구하러 왔어!”
“여… 여러분!”
재칼은 깊은 감동을 받고 고개를 들었다. 그리고 펭귄팬더와 차우차우의 얼굴을 보고 당황스러워했다.
“…아니. 여러분들 굶주린 혼돈 쪽 아니었습니까?”
“아니야! 갈아탔어!”
“과거 일을 꼭 지금 말해야겠냐! 조용히 하고 위에 올라타!”
옛 굶주린 혼돈 플레이어들은 민망함에 조용히 하라고 소리를 쳤다.
보는 사람들이 몇 명인데 흘러간 과거 이야기를 한단 말인가!
[포격이 개시됩니다!]
[선상 요새가 화염을…]
-크아아아악!
-이 배신자 놈들!
거대한 선상 요새는 각종 공격을 퍼부으며 군영을 혼란에 빠뜨렸다.
달려오던 굶주린 혼돈의 병사들은 비명과 고함을 지르며 날아갔다.
그중에는 플레이어들도 있었다.
“이런 배신자 새끼들이 진짜! 김태현 무서워서 들어갔으면 얌전히 숨만 쉬고 살 것이지 여기 와서 까불어?!”
“밤길 조심하는 게 좋을 거다. 굶주린 혼돈도 이제 까부는 놈들 처리하려고 슬슬 암살자를 보내고 계시니까!”
“그렇지. 구오청??”
암살자 랭커, 구오청은 동료들의 말에 멈칫했다.
“으… 으응. 그렇긴 하지.”
“저 자식들이 곧 박살 날 모습이나 기대하자고!”
-떠들지 말고 추격해라!
“구오청! 저놈들을 추적해! 네가 암살자니까 잡을 수 있을 거다!”
원래 길드 동맹 소속이었던 데다가 베이징 파이터즈까지 입단했던 구오청은 야심만만한 랭커였다.
이번 굶주린 혼돈 퀘스트를 바탕으로 자신도 다른 선수들처럼 크게 이름을 날리려고 했던 랭커!
에랑스 국왕을 암살하려고 했던 것도 그래서였다.
그러나 일은 구오청의 생각처럼 흘러가지 않았다.
길드 동맹 쪽에서는 ‘저 새끼는 길드 동맹 박살 낸 스미스한테 붙어먹었어? 저런 배신자 새끼!’ 하며 욕을 먹고, 베이징 파이터즈 쪽에서는 ‘대놓고 스미스한테 붙어먹었다고? 매국노 새끼’ 하며 욕을 먹고, 에랑스 왕국 플레이어들한테는 ‘왕국을 아주 개박살 낸 당사자 새끼’ 하며 욕을 먹고, 굶주린 혼돈 플레이어들한테는 ‘국왕을 혼자 먹으려고 했어? 치사한 새끼’ 하며 욕을 먹는….
판온은 생각보다 쉽지 않은 게임이었다.
같은 레벨, 같은 직업, 같은 실력을 갖고 있다고 하더라도 어떤 사람은 욕을 먹고 어떤 사람은 인기를 끌 수가 있는 것이다.
그런 점에서 구오청은 매우 불운한 케이스였다.
나름 이것저것 했는데 욕만 먹고, 받쳐줄 세력도 없어서 이런 곳에서나 있고….
그런데 이번에 펭귄팬더나 차우차우 같은 선수가 대박을 내는 걸 보니 정말 배가 아팠다.
“구오청! 뭐하냐니까! 빨리 쫓아가라고!”
“놓치면 네가 책임질 거냐? 이럴 때 안 움직이면 뭐할 거냐고! 빨리 뛰어! 잡아야 해!”
“…에잇!”
구오청은 결심하고 검을 휘둘렀다.
[치명타가 터졌습니다!!]
“!???!”
“뭐야?!”
갑작스러운 기습을 당한 굶주린 혼돈 플레이어들은 기겁했다.
이게 대체 무슨 짓이란 말인가.
“죽어라! 난… 굶주린 혼돈을 버리고 빛의 길로 나아가겠다!”
“뭐라는 거야 미친놈이!”
“차우차우! 펭귄팬더! 날 봐라! 나도 갈아타겠다! 날 데리고 가!”
구오청은 검을 휘두르며 외쳤다.
선상 요새 위에서 지켜보고 있던 펭귄팬더와 차우차우에게 시선이 몰렸다.
“저 랭커와 친하십니까?”
“아, 아니. 모르는 사이야. 모르는 사이.”