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 나는 될놈이다 1756화
“그냥 제가 연습하려고 시전한 건데….”
“이 멍청한 놈! 사람들 모여 있는 곳에서 화염 마법을 연습하면 어쩌자는 거야!”
랭커가 버럭버럭 화를 냈지만 싸늘해진 플레이어들의 시선은 변하지 않았다.
‘저거 김태현 오면 가장 먼저 튈 것 같은데….’
‘저놈을 믿고 오스턴 왕국에 들어가야 하나?’
“김태현을 두려워하지 말라니까!”
“알겠으니까 그쪽이 좀 앞에 섭시다!”
-다들 시끄럽게 떠드는군.
[굶주린 혼돈의 군단장, 기사단장 젝스칼이 나타납니다!]
기사단장 젝스칼.
에랑스 왕국의 옛 기사 출신으로, 굶주린 혼돈 플레이어라면 누구나 알고 있는 네임드 NPC였다.
대전사 니테렐로가 김태현 놈의 사악한 음모에 빠져 산맥을 무덤으로 쓰러진 지금 굶주린 혼돈의 군단장 중에서는 가장 발언권이 큰 NPC!
그런 젝스칼이 등장하자 느슨해져 있던 분위기가 다시 팽팽하게 돌변했다.
-누가 배신자고, 누가 도망자인가? 그런 걸 걱정할 필요는 없다.
“어… 어째서입니까?”
플레이어 중 한 명이 자신도 모르게 물었다. 그러자 젝스칼이 친절하게 대답해 주었다.
-어떤 모험가도 도망치지 못하게 내가 만들어줄 테니까!
“…….”
‘야 이거 분위기가 이상한데.’
‘그렇지?’
굶주린 혼돈 플레이어들은 갑자기 찬물을 끼얹은 것처럼 정신이 들었다.
복수를 하고 싶긴 했지만 그렇다고 뒤에서 미치광이 NPC들이 쫓아오는 상황을 원하지는 않았던 것이다.
아직도 굶주린 혼돈 플레이어들한테는 에스파 왕국에서 있었던 일들이 눈에 생생했다.
-으아악! 적이 있는데 어떻게 올라가란 겁니까?
-죽거나 올라가라. 후퇴는 용서하지 않겠다!
누가 굶주린 혼돈 NPC 아니랄까 봐, 보통 굶주린 혼돈 NPC들은 매우 극단적이었다.
후퇴하면 사형, 정지해도 사형!
-너희는 명예로운 굶주린 혼돈의 이름으로 동쪽으로 전진하게 될 것이다.
젝스칼의 말과 함께 메시지창이 떴다.
[기사단장 젝스칼이 굶주린 혼돈의 기사단을 동원합니다.]
[타락한 기사들과 새로 증원된 왕국의 기사들로 이뤄진 이 굶주린 혼돈의 기사단은, 굶주린 혼돈의 어린 양들을 채찍질하는 채찍이자 인도하는 늑대입니다!]
‘우릴 잡아먹는다는 소리 아니야?’
[퀘스트가 추가됩니다!]
<진격!-굶주린 혼돈 퀘스트>
굶주린 혼돈은 중앙 대륙의 강적들을 어느 정도 정리하는 데에 성공했습니다.
이제 굶주린 혼돈을 섬기는 모험가들은 동쪽으로 진격해야 합니다!
기사단장 젝스칼이 굶주린 혼돈의 기사단을 지휘해 동쪽으로 향할 테니, 모험가들은 모두 참가하십시오!
보상: ?, ???
플레이어들이 모여 있는 자리에 굶주린 혼돈의 기사단이 나타났다.
가문의 이름도 기억나지 않을 정도로 오래전부터 굶주린 혼돈을 섬긴 기사부터, 이번에 새로 굶주린 혼돈을 섬기게 된 기사들까지.
그리고 플레이어들도 몇 명 있었다.
“뭐, 뭐야? 어떻게 들어간 거야?”
“거기 어떻게 들어갔어?”
“후. 이래서 일반 플레이어들은… 당연히 퀘스트 깨고 들어왔지.”
굶주린 혼돈의 기사단에 들어간 랭커들은 매우 거만해진 상태였다.
퀘스트 깬 보상을 받은 만큼 한창 거만할 때!
‘이 새끼들 되게 재수없네.’
‘참아. 물어봐야 하니까.’
일반 굶주린 혼돈 플레이어들은 욕이 나왔지만 꾹 참았다.
정보가 필요했던 것이다.
“어떤 퀘스트들을 깨야 기사단 쪽에 갈 수 있지? 그쪽이 차라리 나을 것 같은데.”
“그걸 말해줄 것 같냐? 조용히 우리 지시나 들으라고.”
“…….”
“저 새끼들이 돌았나!”
일반 굶주린 혼돈 플레이어들은 참다가 폭발했다.
이 새끼들이 봐주니까 아주 밑도 끝도 없이!
“감히 일반 플레이어들이!”
[굶주린 혼돈의 기사들이 달려옵니다!]
-모험가 놈들은 빨리 제 위치로 가지 못할까!
-자신의 위치로 돌아가라! 곧 진격이 시작된다!
플레이어들은 씩씩대며 물러났다.
“내가 언젠가 저 자식 한 번 죽인다.”
“김태현 불러버릴까? 여기 위치 말해주자고.”
“야. 미친 소리 하지 마. 내 친구가 그 소리 했다가 김태현이 진짜 와서 도시 태워버렸대.”
“힉….”
* * *
‘레벨 327.’
도시도 여러 개 태우면 더 레벨이 올라갔다.
오스턴 왕국으로 귀환한 태현은 레벨을 확인하고 오랜만에 만족스러워했다.
굶주린 혼돈 퀘스트를 시작하고 나서 빠르게 오르기 시작한 레벨.
이게 좋은 건지 나쁜 건지 애매하긴 했지만 레벨이 오른 걸 보면 뿌듯할 수밖에 없었다.
그뿐만이 아니었다.
[신성 스탯이 경지에 도달했습니다.]
[모든 신성 관련 스킬들이 강화됩니다!]
드디어 도달한 신성 스탯 100,000의 경지.
빠르게 오르면서도 동시에 소모될 일이 많아서 은근히 정체되고 있었는데 결국 십만을 찍은 것이다.
[신성 스탯이 경지에 도달한 것으로 인해 스킬이 추가됩니다.]
[<신의 증오> 스킬을 얻습니다!]
<신의 증오>
상대방 세력에 쌓인 당신의 악명만큼 추가 보너스를 받습니다. 일정 확률로 특정한 효과가 일어납니다.
“…?”
태현은 살짝 당황했다.
나쁜 스킬은 아니었다.
태현이 이제까지 적들과 쌓은 악연을 생각해 보면, 확실히 좋은 스킬이 맞았다.
‘내가 악명을 어디어디에 쌓았더라?’
일단 굶주린 혼돈은 물론이고 악마 등 다양한 세력들에게 차곡차곡 쌓은 악명.
확실히 좋은 스킬이 맞았다.
이게 신성 관련 스탯으로 나오니 조금 당황스러워서 그렇지!
‘아. 그렇군. 신성 관련 직업이면 퀘스트 깨면서 사악한 세력에 악명을 쌓을 수밖에 없으니까….’
태현은 뒤늦게 이 스킬의 의미를 깨달았다.
닥치는 대로 주변에 시비 걸고 폭탄 터뜨려서 악명 쌓은 다음 버프 받으란 스킬이 아니었다.
각종 사악한 세력과 맞서 싸우는 성기사나 사제들에게 추가 버프를 주기 위한 스킬이었다.
[카르바노그가 당연히 그런 스킬이지 그걸 누가 그렇게 해석하냐고…]
태현은 무시하고 다음 스킬을 확인했다.
[<아키서스의 단호한 선언>을 얻습니다!]
<아키서스의 단호한 선언>
아키서스의 힘으로 아이템의 이름을 정확하게 부르면, 그 아이템이 떨어집니다.
‘…사기적이긴 하군!’
솔직히 이건 인정할 수밖에 없었다.
쿨타임이 어마어마하게 긴 대신 그만한 값을 하는 스킬이었다.
태현의 행운 스탯이 아무리 높고 상대방이 각종 페널티를 갖고 있다 하더라도 원하는 아이템을 쉽게 뽑아내는 건 언제나 어려운 일.
그에 비해 이 스킬은 한 번 쓰면 원하는 아이템을 정확히 바닥에 떨어뜨릴 수 있었다.
‘죽이기 직전에 쓰는 게 가장 효과적이긴 하겠군. 스미스 놈 상대로….’
스미스는 지금 굶주린 혼돈 퀘스트를 깨면서 이런저런 사기적인 아이템들로 무장하고 있었다.
태현도 나름 왕국 전체의 자원을 총동원해 가면서 장비를 맞추고 있긴 했지만 솔직히 스미스의 장비는 너무 사기적이었다.
굶주린 혼돈이 지속적으로 백업을 해주고 있지 않은가!
‘아키서스 이름 들어간 장비면 아키서스가 계속 나와서 버프 줘야 하는 거 아닌가?’
그런 양심 없는 생각을 하면서 태현은 다음 스킬을 확인했다.
최고급 대장장이 기술 7 (96%)
최고급 기계공학 9 (21%)
최고급 검술 8 (51%)
최고급 화술 8 (21%)
최고급 마법 5 (41%)
……
……
‘괜찮군.’
이번 에랑스 왕국 서쪽 방화 퀘스트로 기계공학, 대장장이 기술, 마법 스킬에 커다란 보너스를 받았다.
굶주린 혼돈을 상대하기 위해 최소 스킬 하나 이상을 전설 등급 달성해야 하는 태현 입장에서는 반가운 보상이었다.
‘근데 진짜 전설 등급 스킬을 여러 개 찍는 게 가능한가 싶었는데, 불가능하지 않을 것 같다는 게 더 놀랍군.’
최고급 기계공학, 최고급 검술, 최고급 화술.
태현은 이 3개를 중점적으로 노려 볼 생각이었다.
아키서스의 퀘스트야 가능한 전설 스킬을 많이 찍을수록 좋다고 했지만 그건 실질적으로 무리였고….
역시 현실적으로 선택을 해야 했다.
그리고 그 결과가 기계공학, 검술, 화술.
이 3개 정도라면 어떻게든 되지 않을까?
‘내가 생각했지만 좀 어이없는 생각이었다.’
다른 플레이어들이 들었다면 태현을 미친놈이라고 생각했을 것이다.
지금 전설 스킬 하나 찍은 사람도 없는데 셋을 같이 노리다니….
하지만 어쩔 수 없었다.
굶주린 혼돈의 스탯이 워낙 사기적이었던 것이다.
거기에 맞서려면 태현은 아키서스는 물론이고 다른 신들의 권능과 고대 제국, 전설 스킬, 악마 공작들의 힘까지 다 써야 했다.
애초에 사람들이 굶주린 혼돈을 믿지 않았으면 이런 일도 없었을 텐데!
‘스미스를 너무 괴롭혔나….’
다른 건 몰라도 스미스가 저렇게 굶주린 혼돈에 가입해서 열렬히 활동할 거라고는 생각한 적이 없었다.
이세연이 하면 했지 스미스는 좀….
[오스턴 왕국 국경지대 요새를 확인합니다!]
[신앙의 요새를 발견합니다. 명성이 오릅니다!]
[신성이 오릅니다!]
[……]
[……]
“!”
태현은 국경지대의 요새를 보고 깜짝 놀랐다.
생각했던 것보다 너무….
‘잘 되어 있잖아?’
원정대의 숫자도 만만찮게 늘어난 상황이었지만 태현은 그렇게까지 크게 기대하지 않았다.
골짜기 때부터 함께하던 파티들은 비교적 소수인 데다가 대다수가 이곳저곳에서 모인 사람들인 것이다.
그런 플레이어들인 만큼 일치단결해서 뭔가 하는 일 자체가 힘들었다.
-여기 요새를 지읍시다!
-아니야! 여긴 요새를 짓기 좋은 곳이 아니라니까! 저기 강을 끼는 곳에 요새를 지어야 해!
-다들 틀렸어! 성을 지어야 해! 요새 몇 개보다 성이 더 낫다니까!
-요새 만들 때 비행 몬스터 대비해서 시설 만들어놓는 게 좋을까요?
-이 근처에 대공 공격 가능한 마법 탑들을 몇 개 지어놨는데 추가로 해? 낭비야!
-안전을 위해서 하는 일인데 낭비가 어디 있어!
…같은 식으로 대화가 흘러가면 서로 부딪히기 딱 좋았다.
각자가 열심히 하는 만큼 오히려 더 물러서지 않는 것이다.
그래서 태현은 애초에 원정대 플레이어들이 오스턴 왕국으로 모일 때 간단한 말만 남겨놨었다.
-각자 자기 구역 나눠서 서로 참견하지 말고 알아서 잘 지켜주게 해줘. 괜히 힘 합쳐서 뭐 하자고 해봤자 어지간해서는 말 안 들을 테니까.
그런데 지금 보니 국경지대는 상상을 초월할 정도의 방어가 완성되어 있었다.
빽빽하게 배치된 요새들부터 시작해서 각종 방어시설들.
아무리 굶주린 혼돈의 군단이 온다고 하더라도 강을 넘고 해자를 건너 몇 중으로 설치되어 있는 요새벽을 넘어 그 안에 있는 각종 공성 병기까지 해체시키려면 얼마나 많은 소모가 들지 알 수 없었다.
게다가 또 그 요새들에는….
‘저거 골짜기 기계공학 대장장이들이 만든 폭탄 동상 아닌가?’
태현은 요새를 보며 눈을 가늘게 떴다.
제법 장식용 동상처럼 생겼지만 아무리 봐도 저번에 기계공학 대장장이들이 만든 자폭용 폭탄이었다.
요새 넘어가는 순간 저 폭탄이 ‘쾅’ 하고 터지는 것이다.
‘플레이어들이 알고 있는 건지 모르겠는데….’
“김태현 선수!!!”
요새 벽을 추가로 보강하고 있던 랭커들이 태현을 보자 깜짝 놀랐다.
“살아계셨군요!!”
“내가 죽은 줄 알았나?”
“하도 화염 스킬을 강하게 쓰셔서 사람들 사이에서 목숨 바쳐서 쓴 거 아닌가 하는 이야기가 나오더라구요.”
“…….”
태현은 반박할 수 없었다.
‘하긴 그 정도 위력이긴 했지….’
얼마나 화력이 대단했으면 사람들이 ‘저거 목숨 바쳐서 쓴 거 아닌가?’ 하는 의심을 했겠는가.
“그런데 여기 요새는… 어떻게 이렇게 짧은 시간에 다들 협력해서 잘 지은 거지?”
“모두 굶주린 혼돈과 맞서 싸우기 위해서 힘을 합쳤기 때문이죠.”
교과서적인 대답을 하는 랭커의 모습에 태현은 슬쩍 물었다.
“보는 사람 없으니까 솔직히 말해도 되는데. 이세연이 협박했나?”
“예? 아니요! 아무도 협박하지 않았습니다!”
“그래. 그랬겠지.”
태현은 의미심장하게 고개를 끄덕였다. 랭커는 아니라고 오해를 풀고 싶었지만 방법이 없어 보였다.
‘정말 아닌데…!’