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 나는 될놈이다 1746화
“와우, 정말 흥미로운데요.”
“맞아요. 이런 모습을 보게 될 줄은 몰랐어요.”
“미친놈들아 지금 그렇게 남 일처럼 말할 때냐!?”
마치 썰물 때처럼 사라져가는 바닷물들을 본 몇몇 랭커들은 기겁했다.
지금 ‘이런 장관을 판온에서 보게 될 줄이야’ 하며 감탄할 때가 아니었던 것이다.
물론 감탄스럽긴 했다.
판온을 초창기 때부터 한 플레이어들도 저렇게 바닷물들이 비어가는 모습을 본 적은 없었으니까.
하지만 경험 많은 랭커들은 알고 있었다.
보통 판온에서 한 번도 본 적이 없는 장엄한 광경이 눈앞에 펼쳐진다면, 그 뒤에는 보통 그만한 규모의 퀘스트가 찾아왔다.
지금 이렇게 바닷물들이 증발해서 사라지는 걸 보니 어떤 이벤트가 대륙에 닥칠지 상상도 가지 않았다.
* * *
[바닷물이 일시적으로 줄어듭니다!]
[대륙에 폭풍이 몰려옵니다!]
[기온이 일시적으로 올라갑니다!]
[……]
[……]
에랑스 왕국의 영지를 하나씩 맡아서 관리에 들어가기 시작한 굶주린 혼돈 랭커들은 갑작스러운 자연재해에 당황했다.
아니, 저 멀리 바다 너머에 있는 원시의 섬에서 참사가 일어났으면 거기서 끝나야지 왜 중앙 대륙까지 끌고 온단 말인가?
-이거 완전 미친놈 아니야?
-굶주린 혼돈이 하늘섬 떨어뜨렸다고 욕할 처지냐? 김태현이 더 심한 놈이네!
-고생고생해서 간신히 영지 하나 얻어서 팔자 피려는데 그걸 방해하다니 이거 완전히 횡포 아니냐!
물론 대다수 사람들은 굶주린 혼돈 랭커들의 편을 들어주지 않았다.
-차라리 같이 죽는 게 낫지 굶주린 혼돈 랭커들 이득 보는 꼴은 못 보겠다!
-뻔뻔한 새끼들! 지들이 먼저 회오리 일으켰다가 카운터 맞아놓고는 누구 탓을 하는 거야?
-세금이나 내려!
에랑스 왕국 플레이어들은 안 그래도 굶주린 혼돈의 공격을 준비하느라 올라간 세금에 허덕이고 있었다.
그래도 계속해서 플레이해 왔던 왕국을 버릴 수가 없어서 남아 있었던 거였는데, 이런 자연재해까지 겹치자 진지하게 왕국 이탈을 고민하게 됐다.
어수선한 분위기가 닥치자 굶주린 혼돈 랭커들은 영주 자리가 생각보다 만만치 않다는 걸 깨달았다.
평범한 플레이어일 때는 느끼지 못했던 온갖 고충들!
-지금 세금 때문에 제작 직업 랭커들이 영지에서 이탈하고 있는데 세금을 낮춰주는 게 좋을까요? 다른 굶주린 혼돈 랭커분들은 어떻게 하고 계신가요?
-세금 낮추면 안 됨.
-네가 세금 낮추면 우리도 세금 낮춰야 하잖아! 세금 낮추는 놈은 배신자다.
-왕국 내에서 세금 다르면 플레이어들이 이동할 텐데 그냥 단합해야 한다니까. 어차피 왕국 버리고 이동하는 건 쉽지 않아. 목소리 큰 몇 놈이야 나가겠지만 대부분은 가만히 있을 거다. 걱정할 거 없어.
-내가 길드 동맹 출신인데, 길드 동맹 때도 세금 올려봤자 말로만 떠들지 이탈은 별로 안 됐다. 중요한 건 결과물이야. 세금을 아무리 내더라도 시설이 좋고 내가 이 영지 소속이라는 자부심이 있으면 사람들은 남는다니까?
-잠깐. 그런데 길드 동맹은 망했잖아?
-너 뒤지고 싶냐??
굶주린 혼돈의 초보 영주들은 그래도 자기들 나름대로 고민을 해가며 어떻게든 방법을 준비했다.
물론 그 방법이라는 게 왕국 플레이어들 대부분에게는 ‘이걸로 참으라고??’ 수준이긴 했지만….
애초에 다들 탐욕으로 가득 찬 상황에서 ‘다 같이 손해 좀 보죠?’ 같은 말이 나올 수는 없는 것이다.
-지금 하늘섬 추락 때문에 영지 박살난 것도 수리해야 하고 저번에 내전 터진 것 때문에 날아간 시설도 수리해야 하고, 영주해도 남는 거 하나도 없어.
-맞아. 오히려 적자라니까? 수입도 확 줄었지. 지금 농부 NPC들 숫자가 얼마나 줄었는데.
-우리가 이렇게 고생하는데 플레이어들은 이것도 몰라주고… 굶주린 혼돈이라 손해 본다니까 오히려.
당연히 왕국 플레이어들은 이런 말에 공감하지 않았다.
지금 굶주린 혼돈과 맞서 싸우기 위해 모인 원정대 플레이어들은 더욱더 맹렬하게 공격했다.
-저 굶주린 혼돈 놈들이 에랑스 왕국 플레이어들을 말려 죽이고 있습니다!
-왕국 플레이어 분들 뭐하십니까! 에랑스 왕국을 탈출해서 자유 원정대로 오십시오!
-길드 동맹 출신인 내가 봐도 굶주린 혼돈 영주들 통치는 정말 끔찍하다! 어떻게 세금을 저렇게 걷을 수가 있지? 숨도 쉬지 못할 거다!
원정대도 지금 최대한 플레이어들을 끌어모아야 하는 만큼 수단과 방법을 가리지 않았다.
굶주린 혼돈 쪽에도 길드 동맹 간부가 있듯이, 원정대 쪽에도 길드 동맹 간부가 있었다.
길드 동맹 간부들은 자기 출신을 적극적으로 살려서 상대방을 공격했다.
어떻게 저럴수가!
길드 동맹보다 심하다!
-와, 길드 동맹보다 심하다고? 그건 진짜 심한 건데.
-굶주린 혼돈 쪽은 진짜 일반 플레이어가 지내기 힘든가 보다.
-길드 동맹보다 심하면 좀….
당연히 굶주린 혼돈 랭커들은 펄쩍 뛰었다.
-뭘 길드 동맹보다 심해!! 그때보다 줄여서 하고 있어!!
-야, 나도 길드 동맹 출신이야! 어디서 말도 안 되는 거짓말을 하는 거야!
-쑤닝, <우리도 좀 심했지만 굶주린 혼돈 영주들은 진짜 심하게 통치한다…>
-길드 동맹보다 심한 놈들이네.
-그러게. 길드 동맹보다 심한 놈들인 듯.
원래 이런 건 한 번 이미지가 박히면 어떻게 해명하든 풀기 힘들었다.
사람들은 박힌 이미지만을 기억하니까!
그 결과, 생각보다 훨씬 더 많은 플레이어들의 이탈이 시작되었다.
-에랑스 왕국 국경지대 틀어막아! 도주 못하게!
-이 자식들이 생각보다 너무 잘 도망쳐서 막기가 힘듭니다! 원정대 놈들이 들어와서 데리고 도망치고 있어요!
* * *
“중앙 대륙에 난리가 났지만 우리는 우리 할 일을 해야지.”
“…….”
“…….”
태현의 말에 (구) 굶주린 혼돈 플레이어들은 순간 어이없다는 표정을 지었다.
맞는 말이긴 한데 그걸 네가 말하면 좀 이상하게 들리잖아…!
“선상 요새를 타고 이동한다! 자, 다들 움직여!”
-■■ ■■■■■.
움바카는 황금고릴라들과 함께 태현을 따라가겠다고 말했다.
뿐만 아니라 거대 카르바노그, 아니, 거대 토끼 등 여러 원시의 섬 짐승들이 태현을 따라 굶주린 혼돈과 맞서 싸우겠다고 뜻을 밝혔다.
태현은 감동한 표정으로 고개를 끄덕였다.
“너희들도 타라!”
“…잠깐. 김태현. 쟤네들은 사람을 먹지 않아?”
랭커들 중 몇 명이 뒤늦게 그 사실을 깨닫고 경악했다.
한동안 꽤 오랫동안 바다 위를 돌아다니게 될 텐데 자기들을 먹을 몬스터와 같이 있는 건 좀 위험하게 느껴졌던 것이다.
그러자 펭귄팬더와 빈체로 같은 선수들이 나섰다.
“너희들도 몬스터를 잡아서 먹을 때가 있잖아!”
“그… 그건 그렇긴 한데… 아니, 그게 지금 그거랑 무슨 상관이야? 우리는 쟤네를 안 잡아먹지만 쟤네는 우리를 잡아먹을 생각이 가득해 보인다고!”
기세에 넘어가려던 플레이어들이 정신을 차렸다.
움바카와 황금고릴라들인 빤히 쳐다보는 게 매우 소름끼쳤던 것이다.
그러거나 말거나 선수들은 이미 김태현의 편이었다.
위에서 단단히 명령이 내려온 것이다.
-이번에 너희 퀘스트를 중계한 방송 조회수가 이제까지 너희가 뛴 경기 조회수보다 높다. 무슨 소리인지 알겠나? 김태현 선수한테 감사합니다 하고 어떻게든 붙어 있어!
-알… 알겠습니다.
-하지만 김태현 놈이 저희와 같이 서는 걸 피하려고 하면 어떻게 합니까?
-내가 ‘어떻게든’이라고 말한 걸 벌써 기억에서 잊었나? 머리라도 박던가 케인 선수한테 뇌물이라도 바치던가 알아서 해!
-저, 저희도 자존심이 있는데 그건 좀….
-그래. 알겠네.
-!
조심스럽게 항의했던 선수는 반색했다.
역시 진지하게 말하니까 통하는구나!
-지금 그 자리에 서고 싶어하는 선수들이 한둘이 아닌데 자네 자르고 넣으면 되지.
-…머리를 박겠습니다.
단단히 경고를 받은 선수들은 혹시라도 태현의 기분이 상할까 봐 매우 긴장한 상태였다.
정신없이 원시의 섬 퀘스트를 할 때는 몰랐지만, 끝나고 나서 방송을 보니 위에서 왜 저러는지 이해가 갔던 것이다.
이제까지 했던 모든 퀘스트들의 반응을 뛰어넘은 격렬한 반응!
맨날 ‘너희는 그것밖에 못하냐’ ‘예선탈락한 놈 죽어’ 같은 말을 하던 팬들이 이렇게 응원해 줄 거라고는 선수들 본인도 예상하지 못했다.
이 인기를 조금이라도 더 누리고 싶다!
“너희. 잘 생각해 봐라. 노아의 방주 이야기도 있잖아. 노아의 방주에서 노아가 동물들을 모을 때 동물들이 ‘노아가 우리를 잡아먹으면 어쩌죠?’ ‘맹수가 우리를 잡아먹으면 어쩌죠?’ 같은 소리를 하면서 안 탔냐? 아니지. 믿고 탔잖아.”
“잘 말했다. 펭귄팬더. 믿음이 중요한 거다. 같은 아키서스 교단 신도잖아.”
“그… 그런가?”
선수들의 설득에 다른 플레이어들은 슬슬 흔들리기 시작했다.
확실히 그런 거 같기도 하고….
“하긴 김태현이 우리를 먹이로 주진 않겠지?”
“그렇지. 우리도 아키서스 교단 신도들인데.”
“…….”
태현은 멈칫했다.
‘어, 주면 안 되나?’
생각해 보니 이제 아키서스 교단으로 갈아탄 플레이어들인 만큼 너무 가혹하게 대하는 건 좀….
[카르바노그가 정말 줄 생각이었냐고 당황합니다.]
‘하지만 배고파할 텐데… 어쩔 수 없군. 다른 음식을 챙겨줄 수밖에.’
[카르바노그가 보통 그 생각이 먼저 나와야 한다고 말합니다.]
-주인이여. 이동하겠다. 내게 주어진 시간이 사라지기 전까지, 주인을 이끌고 안내하겠다.
선상 요새는 듬직하게 외치고는 바닷물이 빠져나가 바닥이 보이는 바닥에 발을 내디뎠다.
팍팍팍팍팍-
[선상 요새가 질주를 시작합니다!]
“오오…!”
“빠르다!”
플레이어들은 감탄했다.
배로 바다를 달리는 것보다 몇 배는 빠른 속도였다. 골렘 형태로 변한 선상 요새는 물이 빠진 바다 위를 전속력으로 질주했다.
“김태현이 이걸 노리고 바다를 말린 건가?”
“그건 아니지. 미친 소리 좀 하지 마.”
태현은 플레이어들의 대화를 들으며 앞을 쳐다보았다.
‘…바닷물이 얼마나 줄어든 거야?’
슬슬 바닷물이 보일 줄 알았는데 가도 가도 마른 바닥만이 보였다. 태현은 불안해졌다.
에이….
아무리 화염이 세도 그렇지 설마 그렇게까지 세진 않았을 텐데….
설마 대륙이 굶주린 혼돈이 아니라 다른 요인 때문에 멸망하는 건 아니겠지.
-주인이여.
“?”
태현은 고개를 들었다.
선상 요새가 어느새 발을 멈추고 있었다.
-저기 주인의 건축물이 있다.
“무슨 말도 안 되는 소리를?”
태현은 무슨 말을 하냐는 듯이 아래를 내려다보았다.
원래라면 막대한 바닷물이 덮고 있어야 할 심해의 바닥에, 거대한 문이 드러나 있었다.
복잡한 문양을 가진 낡은 문이었지만 태현은 그 문이 어떤 문인지 바로 알 수 있었다.
‘저건….’
[사디크 교단의 잊혀진 미궁을 발견합니다.]
<심해의 불꽃-사디크 교단 퀘스트>
고대 제국 시절 사디크 교단은 제국의 기계공학자들을 동원해 아무도 올 수 없는 심해 밑바닥에 불꽃을 보관하는 미궁을 만들었다.
사디크의 후계자로서, 당신은 미궁의 문을 열고 불꽃을 손에 넣을 자격이 있다!
그러나 주의하라.
사디크 교단은 침입자들을 환영하지 않으니….
보상: ?, ????
‘침입자를 환영하는 교단도 있나?’
“뭐야? 저 미궁 문은?”
“무슨 교단이지?”
다른 랭커들은 퀘스트창을 보지 못해서 의아해했다.
태현은 사디크 교단을 알아보지 못하는 랭커들의 모습에 괜히 씁쓸해졌다.
이렇게 망했을 줄이야….
[카르바노그가 화신이 망하게 만든 거 아니냐고 어이없어합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