소설리스트

나는 될놈이다-1732화 (1,731/1,826)

§ 나는 될놈이다 1732화

“그럼 우린 언제 나갈 수 있는 겁니까?”

-말했잖나. 적이 쓰러지거나. 네가 쓰러지거나.

“…아. 그러니까 공적치 포인트를 쌓으면 혹시 이탈이 가능한…?”

약탈자 플레이어들은 예상치 못한 상황에도 꽤나 침착하고 이성적으로 대응했다.

원래라면 칼부터 나갔을 놈들치고는 상당히 성장한 반응이었다.

그러나 상대방을 잘못 골랐다.

상대방은 대화가 통하지 않는 미친놈들이었다.

퍽!

수인족 전사 하나가 분노한 표정으로 무기를 휘둘렀다.

아까 빠져나가려다가 한 대 맞고 비틀거리면서 붕대를 감고 있던 약탈자 플레이어는 졸지에 한 대 더 맞게 되었다.

“컥!”

[HP가 0이 되어…]

[…]

[…]

“….”

분위기가 급격하게 싸늘해졌다. 그러거나 말거나 수인족 전사들은 단호하게 외쳤다.

-이탈은 허락하지 않는다고 말했다. 두 번 물으면 베겠다!

-명심해 둬라! 이 싸움은 오로지 적들이 전멸해야 끝난다! 이탈하는 자는 죽이겠다!!

“뭐 이런….”

“쉿. 그러다 너도 죽어!”

약탈자 플레이어들은 황당했지만 어쩔 수 없었다.

법은 멀고 눈앞의 칼은 가깝지 않은가.

[에스파 왕국의 고대 수인족 부족들이 굶주린 혼돈과의 싸움에 참전합니다!]

[에스파 왕국 전역에 흩어져 있는 고대 수인족 부족들이 일치단결하는 일은 매우 드문 일입니다.]

[에스파 왕국 전역에 소집령이 내립니다!]

[부족들이 추가로 합류할 확률이 올라갑니다!]

[…]

“이래도 되는 거 맞아?!”

“팀 KL 선수들! 도와줘! 저 사악한 NPC들이 우리를 강제로 묶어두고 퀘스트를 시키려고 하고 있잖아!”

약탈자 플레이어들은 눈물로 팀 KL 선수들에게 호소했다.

팀 KL 선수들은 정말 안타까워 죽겠다는 표정으로 대답했다.

“저런… 정말 잘된… 아니, 정말 안타까운 일인데….”

“어쩌겠습니까? 그냥 즐기면서… 아니, 즐기긴 힘들겠지만 열심히 해야죠.”

“….”

“….”

팀 KL 선수들의 양심 없는 발언에 약탈자 플레이어들은 분노했다.

“그쪽이 어떻게 이럴 수가 있는 거야!”

“팀 KL이잖아!”

“저희가 뭘요?”

“맞아. 우리는 힘이 없다고. 태현이도 없어서 설득할 능력도 없는데.”

팀 KL 선수들은 뻔뻔하게 약한 척을 했다.

약탈자 플레이어들은 이를 갈며 동료들을 쳐다보았다.

“어이! 지금 이런 상황을 보고서도 가만히 있을 거야??”

“어쩔 수 없지 않나?”

“그래. 목숨을 살려주신대잖아. 감사히 일하자.”

“…????”

약탈자 플레이어들은 귀를 의심했다.

뭐야?!

약탈자 플레이어들이라고 모두 한 몸 한뜻이 아니었다. 당장 아까만 해도 떠나려는 약탈자 플레이어들과 남으려는 약탈자 플레이어들이 갈렸던 것이다.

기기긱이나 메이미 같은 약탈자 랭커들은 애초에 남자고 주장했던 만큼 지금 같은 상황이 반가웠다.

“어쩔 수 없는 상황이잖아. 다 같이 열심히 싸우자고.”

“굶주린 혼돈이 쓰러지면….”

“이런 미친놈들아! 싸우고 싶으면 너희들만 싸우라고! 아까 남아서 싸우자고 했는데 떠나겠다고 해서 이러는 거냐!”

“어허! 이 자식이 어디서 막말을! 수인족 전사 여러분들! 저놈이 탈주를 선동합니다!”

“이런 개… 크악! 안, 안 튑니다! 안 튀어요!”

탈주를 주장하던 약탈자 플레이어들은 금세 진압되었다.

사방이 적인 만큼 오래 버틸 수가 없었던 것이다.

“안 튀겠습니다! 싸우겠습니다! 그러니까 그만 좀 패!!”

“굶주린 혼돈을 쓰러뜨리기 위해 제 인생을 바치겠습니다!! 살려주십쇼!”

보고 있던 사람들은 팀 KL 선수뿐만 아니라 모두 대만족했다.

방송으로 보고 있던 사람들은 감탄하며 박수를 쳤다.

-약탈자 놈들도 정신을 차릴 때가 있구나!

-저건 그냥 협박….

-봐라! 약탈자들도 굶주린 혼돈은 거르잖아!

-에스파 왕국에서 도둑놈들 설치는 거 꼴 보기 싫었는데 잘됐네.

-내가 저럴 줄 알고 참가 안 함. 김태현 쪽 퀘스트에 참가했다가 영원히 못 빠져나오는 수가 생김.

-영원히 못 빠져나오면 어떻게 되는데?

-강제로 고렙 보스 몬스터들 상대하면서 레벨이 오르게 됨.

-???

-난 상관없다! 다른 놈들 잡혀갔으면 오히려 좋지. 내일부터 바로 약탈 시작….

[고대 수인족 부족들이 왕국의 모험가들을 강제로 참가시킵니다.]

[에스파 왕국 전역에 강제 참가령이 선포됩니다!]

[…]

[도망칠 경우 수인족 부족들에게 추적당할 수 있습니다!]

-??

-?????

남 일처럼 웃고 떠들던 에스파 왕국 플레이어들은 갑자기 얼음물을 맞은 것처럼 멈칫했다.

방금 뭐라고??

-에스파 왕국이면 무조건 강제참전임???

-나, 나는 굶주린 혼돈이랑 별 감정 없는데….

-지금 약탈하려고 용병들 고용하고 계획도 다 짜놨는데?!

각자 다른 이유로 혼란에 빠졌지만, 이미 붙잡힌 약탈자 플레이어들은 매우 신이 나서 외쳤다.

-굶주린 혼돈을 멈추기 위한 성전에 에스파 왕국 플레이어라면 당연히 참가해야 한다!

-이거 참가 안 하면 굶주린 혼돈 첩자임.

-설마 에스파 왕국 플레이어인데 굶주린 혼돈과의 싸움을 피하는 건 아니겠죠??

-지금 떠드는 놈들 붙잡힌 놈들 아니야? 왜 갑자기….

-야 이 미친 약탈자 새끼들아!! 내 위치를 불어버리면 어떡해!!

-지금 약탈자 새끼들이 은둔 마을 위치 불고 있어!!

약탈자 플레이어들은 단순히 말로만 끝나지 않았다.

수인족 전사들에게 적극적으로 은둔 마을 위치를 고발하기 시작한 것이다.

싸움을 피해 숨어 있던 플레이어들에게는 날벼락 같은 일이었다.

-이렇게까지 해야 해?? 진짜 이렇게까지 해야 해?!?

-시끄러. 굶주린 혼돈한테 따져.

* * *

사디크와의 대화는 끝났지만 태현은 바로 밖으로 추방되지 않았다.

[파이토스의 권능을 갖고 있습니다!]

[파이토스 교단을…]

[…]

[…]

[…]

[…]

[당신은 파이토스에게 선택받았습니다.]

[파이토스의 그림자가 모습을 드러냅니다.]

망치와 방패로 무장한 거대한 성기사의 조각상이 눈을 뜨자, 태현과 카르바노그는 아까보다 좀 더 긴장했다.

사디크는 그래도 좀 정상참작이 가능했다면, 파이토스는 정말….

‘대주교나 성기사단장 구해준 적 있으니까 그걸로 좀 퉁 칠 수는 없나?’

-반갑다. 후계자. 널 기다리고 있었다.

“!”

태현은 안심했다.

상황이 상황이다 보니, 신들이 정말 다 쿨하게 넘어가 주는구나!

“기다려주셔서 감사합니다. 여기가 워낙 좀 멀어서 오는 데 시간이 걸렸습니다. 그래서 저한테 무엇을 주시겠습니까?”

[카르바노그가 조금 기다렸다가 말하지 그랬냐고 당황합니다.]

당당하게 빨리 내놓으라고 말하는 태현의 모습에 카르바노그가 당황했다.

‘하지만 카르바노그. 내가 많이 바쁘잖아.’

지금 파이토스뿐만 아니라 여러 신들 만나고 최대한 챙긴 다음 빨리 나가야 하는데, 서로 인사하고 안부 묻고 그런 귀찮은 대화를 나누면 시간이 너무 오래 걸렸다.

서로 할 말만 하고, 받을 거 받은 다음에 작별하자!

-지금 대륙에 있는 파이토스 교단의 신전들이 대부분 파괴되고 있다.

“….”

태현은 멈칫했다.

‘아니, 왜 약한 소리를….’

하다못해 교단이 망한 그 사디크도 마계의 불꽃을 훔쳐다가 태현한테 주는 성의를 보여줬는데, 대륙에서 가장 잘나가는 교단 중 하나인 파이토스 교단이 줄 게 없을 리 없지 않은가.

-파이토스 교단을 섬기는 성기사들과 사제들은 굶주린 혼돈에 맞서 싸우다가 쓰러지거나, 굶주린 혼돈 밑으로 굴복해 들어갔다. 교단의 창고에 있던 수많은 권능들과 재산들도 놈들의 손에 넘어갔지. 안타까운 일이다.

“아니… 뭔… 비밀창고 없어요?”

진짜 아무것도 안 줄 것 같자 태현의 목소리가 황당함으로 가득 찼다.

물론 파이토스 교단이 에랑스 왕국 같은 곳에 거대하고 화려한 대신전들을 여럿 갖고 있고, 재산도 대부분 거기 있다는 것 정도는 알고 있긴 했다.

그렇지만 중앙 대륙 전체에 퍼질 정도의 신앙이면 다른 곳에도 알음알음 비밀창고들을 뿌려두고 비자금을 만들어뒀어야 하지 않은가.

에랑스 왕국 하나 넘어갔다고 지금 줄 게 없다고 저러는 게 말이 되나?

다른 왕국에….

‘생각해 보니 아탈리 왕국에서 쫓겨난 건 나 때문이긴 하군.’

따지려던 태현은 빠르게 사실을 떠올리고 멈췄다.

생각해 보니 태현도 어느 정도 책임이 있긴 했던 것이다.

‘아니. 그런데 다른 왕국에 비밀창고나 비자금 조성을 안 한 건 파이토스 교단 잘못이잖아?’

다시 생각해 보니 파이토스 교단 잘못이 더 컸다. 태현은 목소리를 높였다.

“지금 굶주린 혼돈의 힘이 너무 강해서 대륙이 불타기 직전입니다! 이대로 내버려 두면 그나마 남은 파이토스 교단의 사람들이 다 죽을지도 모르지 않습니까! 뭐라도 주십시오!”

[카르바노그가 무슨 깡패 같다고….]

-걱정할 것 없다. 후계자. 보물이나 힘은 주지 못하더라도 그보다 더 영광스러운 것을 네게 주겠다.

“?”

-바로 자격이다.

“….”

태현은 인상을 굳혔다. 만약 파이토스가 그다음 말도 개소리를 하면 욕을 할지도 몰랐다.

[파이토스가 당신에게 자격을 부여합니다.]

[칭호, <파이토스의 자격>을 얻습니다!]

[파이토스의 권능 스킬들이 강력해집니다.]

[파이토스의 교단 건물들의 건설이 가능해집니다.]

[파이토스 교단 NPC들에 대한 명령이 가능해집니다!]

[…]

[…]

[권능 스킬, <파이토스의 일격>이 사용 가능해집니다!]

“!”

<파이토스의 일격>.

예전에 파이토스 훈련장에서 얻어놓고 정작 조건이 해금되지 않아 얼마나 침만 삼켜왔던가.

파이토스 교단의 스킬들 중에서는 사기적이고 강력한 게 많았지만, 이 스킬만큼 태현이 탐을 내고 있는 것도 드물었다.

무려 그 이전에 했던 공격의 데미지를 그대로 갖고 와서 꽂아 넣는 사기적인 스킬.

그만큼 조건도 까다로웠다. 신성력부터 명성까지 온갖 기초 조건은 물론인 데다가 파이토스 교단 훈련장까지….

사실상 잊고 있었는데 이런 기회에 태현의 손에 들어올 줄이야.

“아쉽지만 이걸로 만족하겠습니다. 하지만 다음부터는 조금 더 챙겨주시는 게 좋을 겁니다.”

-교단을 이끌고 대륙을 사악한 적들로부터 지키도록 해라.

태현과 파이토스의 그림자는 서로 보고 자기 할 소리만 했다. 그 모습에 카르바노그는 고개를 절레절레 저었다.

* * *

[현재 파이토스 교단 교황의 자리가 공석입니다.]

[임시 대리로 고대 제국의 후계자, 김태현이 자리를 이어받습니다.]

[새로운 퀘스트가 추가됩니다!]

[교단 관련 스킬들이 사용…]

[…]

[…]

“?”

“엥?”

열심히 오스턴 왕국 수비를 준비하고 있던 파이토스 교단 플레이어들은 메시지 창에 당황스러워했다.

너무 뜬금없는 퀘스트 창이 나온 것이다.

물론 파이토스 교단의 여러 NPC들이 에랑스 왕국 점령 과정에서 쓰러진 건 이미 알고 있었다.

굶주린 혼돈에게 맞서 싸우거나 항복하거나.

교황은 물론이고 여러 대주교들과 성기사단장들도 레이드 당했다고 알고 있었는데….

왜 갑자기 김태현??

“고대 제국의 후계자…에 뭐 그런 효과가 있나? 남의 교단 대리하는 그런…?”

“생전 처음 듣는 효과인데??”

“교황이 없는 것보다는 있는 게 낫긴 한데….”

좋고 싫고를 떠나서 너무 뜬금없어서 당황스러웠다.

대체 뭐지?

뭘 어떻게 해야?

“다들 떠들지 말고 집중해. 굶주린 혼돈의 공격이 언제 시작될지 모르니.”

이세연이 주변을 둘러보며 말했다.

오스턴 왕국 수비를 위해 이세연은 물론이고 원정대 랭커들은 잠시도 쉬지 않고 계속 지역을 확인하고 있었던 것이다.

“하지만 이건 정말 놀라운 일이라서… 이세연 선수도 들으시면 놀랄 겁니다!”

“지금 주장을 뭐로 보고! 주장께서는 그런 걸로 안 놀라신다!”

‘뭐길래 저러는 거야?’

이세연은 황당한 걸로 투덕거리는 사람들의 모습에 어이가 없었다.

뭐길래….

“지금 파이토스 교단 소속 플레이어들한테, 사라진 교황 대신해서 김태현 선수가 대리 맡는다고 메시지 창이 떴습니다.”

“…별거 아니군.”

“거봐! 안 놀라시잖아!”

“그, 그런가? 별로 놀라운 일이 아닌가…?”

파이토스 교단 플레이어들은 머쓱해졌다.

생각보다 그렇게 놀라운 일은 아닌가 봐!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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