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 나는 될놈이다 1724화
[카르바노그가 그래도 좀 해보는 게 낫지 않냐고 묻습니다.]
‘카르바노그. 잘 생각해 봐라. 지금 상황은 예전과 차원이 달라.’
예전 굶주린 혼돈의 공격에 맞서 싸울 때는 기본적으로 태현 쪽 전력도 상당했다.
태현을 믿고 따라오는 든든한 원정대 파티들.
거기에 태현이 판온 초중기 때부터 키워 온 교단, 영지 NPC들.
이런 전력이 있었던 만큼 태현도 작정하고 붙어볼 수 있었던 거였다.
그런데 지금 태현에게 있는 전력은?
언제 튈지 모르는 약탈자 플레이어들.
거기에 말 안 듣는 야만부족들.
유리한 점이라고는 에스파 왕국의 험준한 산맥밖에 없는데 그나마도 물량으로 밀고 들어오면 뭐….
[카르바노그가 납득합니다. 빨리 튀자고 말합니다.]
“저. 태현 님.”
“?”
이다비가 영상을 틀어주었다. 굶주린 혼돈 쪽에서 참가하고 있는 플레이어들이 생방송을 진행하고 있는 모양이었다.
-어떤 희생을 감수하더라도 아키서스의 후계자를 붙잡아와라. 아키서스의 후계자는 절대 놓쳐서는 안 된다! 아키서스의 뿌리를 뽑아라!
-들으셨습니까, 시청자 여러분? 지금 여기는 굶주린 혼돈의 공격 준비로 분위기가 뜨겁습니다! 과연 이번에 김태현을 확실히 잡을 수 있을지! 제가 끝까지….
“…….”
태현은 빠르게 현실을 파악했다.
‘따로 못 튀겠군.’
저 정도로 이를 가는 걸 보면 태현이 정체 숨기고 나간다고 해도 붙잡을 준비가 되어 있을 가능성이 높았다.
굶주린 혼돈 쪽 권능에 사악하고 독특한 스킬들이 많다는 건 이미 알고 있는 사실.
위험을 감수하고 도박을 거는 것보다는….
“싸운다!”
“??”
“…!!”
“진, 진짜 싸운다고?”
태현의 외침에 약탈자 플레이어들은 깜짝 놀랐다.
솔직히 그들은 태현이 도망치자고 할 줄 알았던 것이다.
머리가 돌아가는 랭커라면 지금 상황 파악을 안 하려고 해도 안 할 수가 없었다.
여기 똘똘 뭉친 랭커들이 있는 것도 아니고 김태현이 끌고 다니던 NPC들이 있는 것도 아닌데….
도망치지 않고 싸우겠다니.
“잘 생각해 봐라. 지금 에스파 왕국의 도둑놈… 아니, 플레이어들이 이렇게 한 자리에 모여 있다.”
“방금 도둑놈이라고 했…?”
“이런 기회는 흔히 오지 않아. 더군다나 에스파 왕국의 부족들까지 모여 있다! 물론 굶주린 혼돈은 만만치 않은 적이지만, 놈들을 격퇴한다면 어마어마한 타격을 줄 수 있을 거다. 에스파 왕국 해방도 꿈이 아니다!”
“…!!”
자리에 모여 있던 사람들은 충격을 받았다.
이런 불리한 상황에서도 저런 말을 할 수 있다니.
이래서 김태현인 건가??
‘말도 안 돼… 어떻게 여기서 싸울 생각을 하지? 김태현 놈은 뭔가 보이는 건가?’
‘생각해 보니 판온 1때도 그랬지만 저놈은 허언을 한 적이 없었지.’
판온 1 때부터 태현을 상대한 적 있던 약탈자 랭커들은 갑자기 부끄러움을 느꼈다.
판온 1 때부터 태현과 싸워왔었고, 판온 2에서도 나름대로 레벨을 올리고 캐릭을 키웠지만….
이런 부분 때문에 그들은 태현을 따라갈 수가 없었다.
운이나 실력 같은 핑계를 댔었지만 근본적인 이유는 바로 이것이었다.
그들은 안 될 거 같으면 도망쳤지만 태현은 맞서는 것이다.
“김태현…!”
“젠장. 이 자식. 그렇게까지 말하면 우리가 도망칠 수가 없잖아!”
“??”
태현은 의아해했다.
몇몇 약탈자 랭커들이 눈시울이 붉어진 상태로 고개를 끄덕이고 있었던 것이다.
‘술 마셨나?’
“같이 싸우자, 김태현! 이번에는 뭔가 보여주겠다!”
“그래! 도망만 치진 않겠다! 우리도 너처럼 도망치지 않고 싸울 줄 안다는 걸 보여주겠어!”
“????”
“태현 님도 도망 많이 치지 않아요?”
“그러니까…?”
이다비와 태현은 황당한 표정으로 속삭였다.
도망친 횟수만 놓고 보면 태현이 저기 약탈자 플레이어들보다 더 많을 텐데 이상한 소리를 하고 있었다.
다행히 제정신이 남아 있는 약탈자 플레이어 몇 명이 황당하다는 듯이 물었다.
“아니 지금 상황에서 뭘 싸워요? 다 죽겠네.”
“김태현이 우리 화살받이로 쓰면 어쩌려고?”
“닥쳐! 이 불평밖에 할 줄 모르는 쓰레기 자식. 너 같은 놈은 나중에 판온 3이 나와도 불평밖에 못 할 거다. 운이 나빠서, 재수가 안 좋아서 김태현보다 잘나가지 못했다고 투덜거리겠지!”
“아, 아니. 얼마 전만 해도 김태현 욕하던 놈들이 뭐라는 거야?”
하지만 약탈자 플레이어들 사이의 분위기는 이미 돌아섰다.
기기긱 같은 판온 1 출신 약탈자 랭커들도 태현의 편을 들고 나선 이상, 기본적으로 약탈자 플레이어들의 의견은 찬성으로 쏠릴 수밖에 없었던 것이다.
“확실히… 김태현이 없는 소리 할 놈은 아니잖아.”
“김태현이 기기긱도 아니고 우리 버리고 사라질 놈은 아니긴 해.”
“게다가 이기면 얻을 것도 많고….”
약탈자 플레이어들은 고개를 끄덕이며 뜻을 모았다.
모인 지 얼마 안 된 약탈자 플레이어들도 분위기에 넘어가서 합류했다.
“그래! 한번 해보자!”
“굶주린 혼돈을 몰아내고 에스파 왕국을 도둑들의 왕국으로 만드는 거야!”
물론 이런 와중에도 도망치려는 놈들은 있었다.
“그러면 나는 빠져도 되지?”
“어. 그래. 빠지고 싶은 놈 있으면 저기로 나가면 돼.”
“…절, 절벽이잖아???”
“응. 저기로 나가라고.”
“…아니야! 참가할게!”
“잘 생각했다!!”
약탈자 플레이어들은 태현한테 배운 걸 아주 알차게 써먹고 있었다.
* * *
“일단 모으긴 했는데 걱정이야.”
“그러게 말이에요.”
태현은 이다비와 같이 한숨을 쉬며 함정을 설치했다.
지금 팀 KL 선수들은 각자 흩어져서 약탈자 플레이어들을 이끌고 있었다.
약탈자 플레이어들이 뭘 잘못 먹었는지 대동단결해서 ‘와! 싸우자!’이러고 있긴 했지만, 저 분위기가 언제 바뀔지 몰랐다.
할 수 있는 건 전부 지금 해두는 게 좋긴 했지만….
‘할 수 있는 게 정말 한정되어 있군.’
굶주린 혼돈의 군단은 차근차근 산맥 전체를 둘러싸듯이 포위망을 완성해 나가고 있는데 이쪽에서 할 수 있는 건 많지 않았다.
올라올 수 있는 좁은 길이란 길마다 함정을 깔아버리고 작은 요새를 설치하는 것 정도.
‘저번에 보니까 굶주린 혼돈이 작정하면 지형은 거의 의미가 없어지던데.’
마음만 먹으면 수직에 가까운 절벽을 그냥 힘으로 뚫고 올라오는 이상, 요새 하나 작정하고 짓는 건 별 의미가 없었다.
이곳저곳 함정 최대한 많이 설치하고 뚫리면 뒤로 빠지면서 괴롭히는 것 정도밖에….
[대장장이 기술 스킬이 오릅니다!]
[기계공학 스킬이 오릅니다!]
[명성이…]
[……]
[……]
제작 스킬을 올리는 건 좋았지만 마음은 무거웠다. 이다비가 화제를 돌리기 위해 입을 열었다.
“참. 최고급 화술 8 찍으셨다고요?”
“아. 응. 스킬들 강화되고 하던데.”
<언령>
간단한 말을 하는 것으로 스킬 효과를 만들어냅니다. 화술이 경지에 올라 MP 소모가 없어집니다.
“…….”
태현은 눈을 감고 다시 스킬을 확인했다.
…어라???
‘내가 잘못 봤나?’
원래라면 <화술의 근원> 스킬을 켜야 적용되는 효과가 그냥 패시브로 적용되는 무시무시한 강화.
태현은 할 말을 잃었다.
화술도….
후반까지 올리면 진짜 쓸모가 있구나…!
‘사실상 페널티 없는 마검사군.’
검술과 마법을 같이 쓰는 직업이 없는 건 아니었지만, 이런 직업들은 언제나 페널티가 주렁주렁 달려왔다.
당장 태현 같은 사람만 해도 MP 부족으로 마법을 쓰려면 각종 편법을 써야 하지 않았던가.
하지만 언령 스킬이 열린 이상 이런 페널티가 없어졌다고 봐야 했다.
검술과 마법의 연속공격을 폭풍우처럼 퍼부을 수 있게 된 것이다.
[<만물의 소리를 들어라> 스킬이 발동됩니다!]
[골동폐허 산맥의 잊혀진 총독이 당신에게 속삭입니다.]
“제가 지금 바빠서 퀘스트를 받을 수가 없는데요.”
태현은 귀찮다는 듯이 대꾸했다.
고대 제국 총독이든 뭐든 간에 지금은 너무 바빴던 것이다.
하지만 잊혀진 총독은 태현의 귀에 대고 속삭였다.
-사악한 힘을 원하나…?
“??”
-모험가여… 너의 눈빛만 봐도 나는 알 수 있다… 정의로운 길만 걸어왔겠지… 하지만 그 정의로운 길이 너에게 무엇을 남겨줬는가? 내 힘을 보아라!
<옛 존재의 사악한 속삭임-만물의 소리를 들어라 퀘스트>
만물의 소리를 듣는 화술 스킬은 꼭 선량한 존재의 목소리만을 들려주진 않는다!
타락한 옛 존재가 당신에게 접촉해 왔다.
한때 고대 제국에 반기를 들려고 골동폐허 산맥 안에 사악한 계략을 숨겨 놓은 잊혀진 총독은, 자신의 미련을 풀기 위해 그 계략을 발동시키려고 한다.
사악한 목소리에 주의하라! 한 번 휘둘리기 시작하면 언제든지 타락할 수 있….
보상: ?, ???
“앉아서 자세히 말씀해 보십시오.”
-…???
태현은 바로 경청 자세로 돌아섰다.
타락한 힘이고 뭐고 지금 산맥 안에서 쓸 수 있는 게 있다면 다 써야 했던 것이다.
굶주린 혼돈의 힘도 쓰는데 뭘 새삼!
* * *
“공격 시작이다!”
포위망이 완성되자 마치 밀물처럼 굶주린 혼돈의 군대가 산맥 안으로 들어오기 시작했다.
대기하고 있던 약탈자 플레이어들은 가파르고 좁은 길 아래로 올라오는 굶주린 혼돈의 전사들을 향해 각종 공격을 퍼부었다.
콰콰콰콰콰콰콰쾅!
[연쇄 칼날 폭탄이 추가로…]
[……]
[……]
[……]
아무리 골짜기 기계공학 대장장이들이 악명이 높아도, 원조 중의 원조가 직접 만든 솜씨는 따라오기 힘들었다.
화끈한 연쇄 폭발에 약탈자 플레이어들은 싸움도 잊고 감탄했다.
[굶주린 혼돈의 장막이 힘을 줍니다!]
[부상에서…]
“뭔 바퀴벌레도 아니고….”
“길 끊고 튀자!”
약탈자 플레이어들은 남은 함정을 가동시키고 후다닥 튀었다.
대부분이 발빠른 딜러인 약탈자 플레이어들은 이런 부분에서는 상당히 유리했다.
욕심 내지 않고 도망치는 건 누구보다도 잘한다!
처음에는 ‘그래 까불어봐라’ 하고 나아가고 있던 굶주린 혼돈 플레이어들도 슬슬 열이 받기 시작했다.
[지형 파괴 폭탄이…]
[……]
[……]
“야 미친놈들아 작작하지 못해?!”
“이 새끼들이 자신이 없으면 튀기나 할 것이지 뭐하는 거야!??!”
함정 작동시키고 길 끊고 튀는 것도 한두 번 해야지 수십 번을 그것만 하면 없던 화도 생기게 되어 있었다.
게다가 자꾸 얼굴을 마주치니 모르려고 해도 모를 수가 없었다.
저놈들 에스파 왕국의 약탈자 플레이어들이잖아!
“숨어서 도둑질이나 할 놈들이 여기 와서 왜 깝죽대?!”
“뒤지고 싶냐 진짜!”
굶주린 혼돈 플레이어들은 이를 갈며 외쳤다.
저런 사건이 생길 때마다 <퀘스트가 추가됩니다> <길을 복구하십시오> <새 길을 찾으십시오> 같은 메시지 창이 날아오는 만큼 스트레스가 몇십 배였다.
차라리 어떻게든 도발해서 싸우고 싶다!
물론 약탈자 플레이어들이 저런 욕을 먹는다고 흔들리진 않았다.
“좀 더 창의적인 욕을 해봐라!”
“솔직히 굶주린 혼돈에 가입하는 것보다는 정정당당하게 도둑질하는 우리가 더 낫지 않냐?”
‘정말 추한 싸움이군.’
옆에서 돕고 있던 최상윤은 속으로 생각했다.
굶주린 혼돈 플레이어들이랑 약탈자 플레이어들이 누가 낫니 싸우는 건 정말 보기 힘든 모습이었다.
“멍청한 것들아! 정신 차려라! 김태현이 너희를 이용하고 있는 거라니까!”
굶주린 혼돈 플레이어들은 말로 설득해 보려고 했다.
원래는 김태현하고 야만부족만 잡으러 온 거였는데 웬 약탈자 플레이어들까지 껴서 이 꼴이 난 것 아닌가.
저놈들만 이탈시킬 수 있다면….
“같잖은 이간질까지 하고 추하구나!”
“그런다고 통할 거 같냐!”
“김태현이 너희 같은 놈인 줄 아냐!”
“…미친놈들이 진짜 정신이 나갔나!!”
굶주린 혼돈 플레이어들은 어이가 없었다.
그 사이에 뭐 잘못 먹었나??