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 나는 될놈이다 1723화
“…김태현이 까먹은 거겠지?”
“그, 그렇겠지.”
약탈자 플레이어들은 누가 나설 생각을 하지 못했다.
저번에 괜히 나섰다가 김태현한테 ‘뒤지고 싶으면 나가던가’라고 들었던 기억이 아직 생생했던 것이다.
[<푸른 보름달> 늑대 부족의 은거지를 발견합니다!]
[고대 늑대 수인족 부족은 곰 부족과 달리 어떤 모험가들의 접근도 허락하지 않습니다. 주의하십시오!
[……]
[……]
하찮게 취급을 해도 모험가들을 일단 안으로 들여보내주는 곰 부족과 달리, 늑대 부족들은 아예 접근 자체를 허락하지 않았다.
나름 에스파 왕국에서 잔뼈가 굵은 약탈자 플레이어들도 여기는 처음 와봤을 정도로.
-늑대 부족 놈들은 야만스럽고 거칠고 더러운 놈들이다.
-맞아. 놈들은 협조란 걸 모르고 같이 싸우는 방법도 모르지.
‘니들이 그런 소리를 하면 안 되지….’
태현은 어이가 없었다.
여기까지 곰 부족들 데리고 오면서 얼마나 속이 터졌던가.
‘저 정도 순찰대는 잡고 가도 된다!’ ‘우리가 왜 숨어야 하나!’ ‘우리를 너무 약하게 보는 거 아니냐!’ 같은 말을 1분마다 해대는데, 차라리 악마 공작들이 그리워질 정도였다.
악마 공작들은 최소한 머리라도 돌아갔지…!
“늑대 부족 설득도 힘들 것 같네요.”
이다비가 한숨을 쉬었다.
보아하니 벌써부터 퀘스트가 얼마나 어려울지 짐작이 갔다.
곰 부족들도 진상 중의 진상이었는데 늑대 부족은 또 얼마나 힘들까?
-받아들이겠다. 굶주린 혼돈 놈들을 계속 내버려 둘 수는 없으니.
[설득에 성공합니다!]
[화술 스킬이 오릅니다!]
[보상을 받았습니다!]
[아이템, <오래된 늑대 수인족 부족의 검술서>를 얻습니다.]
[……]
[……]
[……]
[……]
“?”
“??”
태현 일행은 당황했다.
늑대 부족 전사들은 왜 그러느냐는 듯이 일행을 쳐다보았다.
“어, 모험가들의 접근을 싫어하고 그러지 않았나?”
-그렇다 하더라도 지금 같은 상황은 어쩔 수 없지. 굶주린 혼돈은 강대해서 부족 혼자의 힘으로 상대할 수 없다. 모험가들의 힘을 빌릴 수 있다면 빌리는 게 맞는 일이다. 미련하게 협력을 거절하는 놈들과는 다르지.
-지금 우리를 모욕하는 거냐, 이 늑대 놈들아!
-그렇게 들렸으면 미안하군. 돌려서 말하는 데에는 재주가 없어서.
두 부족이 더 싸우기 전에 태현이 끼어들었다.
“정말 잘 생각했다. 이런 상황에 니 편이니 내 편이니 서로 다투는 건 우스운 일이지. 과거의 원한은 잊고 서로 협력할 줄 알아야 한다.”
곰 부족 전사들은 아직도 분했는지 씩씩대며 말했다.
-우리는 심지어 아키서스의 후계자와도 손을 잡고 있다! 가만히 있다가 우리가 찾아오고 나서야 손을 잡은 놈들이 감히!
-…뭐?
늑대 부족 전사들은 동시에 고개를 들었다.
-아키서스의 후계자와 손을 잡았어?
“…그럴 수도 있지 왜 그래. 과거의 원한은 잊고 서로 협력하자니까.”
-잠시만 기다려봐라.
늑대 부족 전사들은 갑자기 안으로 다시 들어가더니 한참 동안 자기들끼리 이야기를 나눴다.
일행이 매우 초조해질 무렵 늑대 부족 전사들이 다시 나타났다. 서로 얼마나 격렬하게 다퉜는지 몇몇 전사들은 피를 흘리며 절뚝거리고 있었다.
-우리는 그래도 협력하기로 결정했다.
“…고맙다 그래.”
* * *
수인족 부족들을 하나씩 설득해서 모으고, 동시에 검술 스킬도 하나씩 추가해 나가는 상황.
물론 요약하면 간단하게 들렸지만 퀘스트 자체는 살벌하고 난이도가 높았다.
굶주린 혼돈의 순찰대 눈을 피해서 에스파 왕국을 누비고 다녀야 했으니까.
하지만 그만한 보람이 있었다.
“설득했어! 비버 부족이 신성하게 여기는 나무를 부활시켰어!”
“고생했다. 이쪽도 퀘스트 끝냈어.”
태현 일행은 서로서로 칭찬했다.
모두가 힘을 합친 덕분에 까다로운 부족 설득 퀘스트를 이렇게 진행할 수 있었던 것이다.
“…….”
“…….”
물론 약탈자 플레이어들은 슬슬 뭔가 이상하다는 걸 깨닫고 있었다.
지금 한창 이곳저곳 털 시기에 열심히 부족들을 설득해서 에스파 왕국을 지키는 퀘스트를 하고 있지 않은가.
뭔가….
뭔가 이상해!
“저, 김태현 선수? 이게 근데 지금… 퀘스트가 좀… 저희가 필요한 퀘스트인가요?”
“무슨 소리를 하는 거야? 같이 굶주린 혼돈을 몰아내자고 했잖아.”
태현은 어이가 없다는 듯이 정색했다.
일단 태현이 정색하면 약탈자 플레이어들의 1/3 정도 되는 랭커들은 판온 1 때 기억 때문에 PTSD가 찾아왔다.
“그, 그게. 그러니까 저희가 굶주린 혼돈을 몰아내자고 했던 건… 저희 영역 주변에 있던 굶주린 혼돈 몰아내는 거 이야기였거든요.”
굶주린 혼돈 때문에 장사가 안 되어서 다들 손잡고 태현을 찾아오긴 했지만, 다들 속으로 하는 생각은 비슷했다.
-꼭 뭐 에스파 왕국에서 굶주린 혼돈을 완전히 몰아낼 필요 있겠어? 내 지역만 멀쩡해지면 나는 도적질하러 돌아가야지.
처음에는 김태현이 굶주린 혼돈을 참 기막히게 팼다.
총독 궁전도 털고 야만부족들도 동원하고 등등.
그래서 이제 자기네 영역에서 좀 털기 수월해지겠다 싶었는데 갑자기 다른 곳 가서 또 싸우고 부족들 끌어들이고….
점점 스케일이 커지니까 약탈자 플레이어들 입장에서는 살짝 당황스러워졌다.
우린 이쯤에서 슬슬 빠져서 약탈하러 가면 안 되나?
“무슨 말도 안 되는 소리를 하는 거야!”
“이런 뻔뻔하고 은혜도 모르는 자식들!”
다른 약탈자 플레이어들이 분노해서 외쳤다.
아직 자기 영역이 굶주린 혼돈한테 점령당해 있는 약탈자 플레이어들이었다.
같은 약탈자 플레이어인 만큼 무슨 속셈인지 뻔하게 느껴졌다.
‘이 새끼들 지들 영역 좀 괜찮아졌다고 빠져서 도적질 하려고!’
‘그 꼴을 내버려 둘 것 같냐!’
심지어 새로 참가한 돌레로도 의아해했다.
“왜 지금 빠지려고 하십니까? 지금 퀘스트는 잘 진행되고 있습니다. 조금만 더 열심히 하시면 에스파 왕국에서 굶주린 혼돈을 몰아내는 대전쟁에서 승리할지도 모르는데요.”
“…….”
그야 우리가 그게 목표가 아니니까 그렇지!
돌레로는 아직도 이 플레이어들이 약탈자 플레이어들인 걸 모르고 있었다.
태현은 서로 싸우는 모습에 인자하게 웃으며 고개를 끄덕였다. 꼴을 보아하니 앞으로 몇 번은 더 써먹을 수 있을 것 같았다.
“자자. 다들 싸우지 마라. 물론 지금 빠지고 싶은 생각이 있겠지. 뒤지고 싶으면.”
“…….”
“농담이야.”
“…농, 농담이지? 그치?”
“그래. 내가 설마 너희들을 계속 붙잡아두겠니? 이다비. 내가 그런 사람으로 보여?”
“절대 그런 사람이 아니시죠. 그렇게 오해하는 사람이 있으면 솔직히 굶주린 혼돈 첩자 아니에요?”
“…….”
태현과 이다비의 호흡은 약탈자 플레이어들을 빡치게 만들었다.
아오!
“너희들이 지금 불만이 많은 걸 안다. 그래서 너희들을 위한 방법을 하나 생각해 봤어.”
“…그게 뭡니까?”
“참가하지 않은 다른 약탈자 플레이어들도 불러 모아.”
“…….”
“…???”
“너희들이 열심히 굶주린 혼돈과 싸우는 동안 꿀만 빠는 놈들이 싫지 않냐?”
에스파 왕국의 모든 약탈자 플레이어들이 태현 밑으로 모이진 않았다.
물론 꽤 많은 약탈자 플레이어들이 모이긴 했지만 눈치 보면서 참가하지 않은 약탈자 플레이어들도 있었던 것이다.
쥐죽은듯 웅크리고 있으면 모를까, 이 약탈자 플레이어들은 요즘 상황이 괜찮은 것 같자 슬쩍슬쩍 나와서 꿀을 빨고 있었다.
김태현 밑에서 일하고 있는 약탈자 플레이어들 입장에서는 열이 받을 수밖에 없었다.
-아니 아무리 우리가 산적에 해적 집단이라지만 상도덕이 있지 양심이 없나?!
-저 새끼들이 레벨 낮고 장비 약하다고 징징대서 내버려 뒀더니 감히!
“싫… 긴 하죠.”
“그래. 그런 놈들을 모두 불러 모으라는 거다. 그런 놈들이 오면 너희들이 얼마나 편하겠냐.”
“…!”
약탈자 플레이어들은 솔깃했다.
도움을 떠나서 약탈자 플레이어들은 자기가 일하는데 남들이 꿀 빠는 걸 참지 못하는 정의로운 성격을 갖고 있었다.
“…그건 확실히 불러야겠군.”
“그런데 부른다고 올까?”
“어떻게든 속여야지. 너무 너무 꿀이라고 속이는 거다.”
“그래도 안 오는 놈들은?”
이다비가 친절하게 조언을 했다.
“찾아가서 죽여 버리면 되죠. 몇 명 죽고 나면 알아서 올 걸요?”
“과연…!”
돌레로는 당황하며 물었다.
“너, 너무 과격한 방법 아닙니까?”
“하하. 걱정하지 마십시오. 알아서 다 올 겁니다. 그냥 농담 삼아서 한 말입니다.”
“그렇죠? 농담이죠??”
* * *
-김태현하고 같이 하는 퀘스트 미쳤다!
-너희 총독 궁전 털어봤냐?? 총독 인질로 붙잡아봤냐?? 약탈자 플레이하면서 총독 궁전도 안 털어보면 진짜 인생을 손해 본 거다.
-난 김태현을 만나기 전까지 살아 있어도 살아 있던 게….
약탈자 플레이어들은 뜨겁게 글을 썼다.
의심 많은 약탈자 플레이어들도 솔깃할 수밖에 없는 열정이었다.
게다가 진실에 거짓을 살짝 섞은 게 더 효과적이었다.
실제로 총독 궁전을 약탈하고 총독을 납치한 건 사실이었으니까!
-혹시 지금이라도 참가할 수 있나요?
-아… 참가시키기 싫은데….
-제발 부탁드립니다! 골드라면 내겠습니다!
-하. 어쩔 수 없지. 진짜 내가 같은 왕국 약탈자 플레이어라서 받아주는 거다.
물론 이렇게 다 모이지만은 않았다.
모이지 않는 약탈자 플레이어들도 있었다.
-저기 가봤자 하도 사람 많아서 나한테까지는 안 떨어질듯.
└에이. 아니야. 진짜 보상 넉넉해서 다 돌아가고도 남는다니까.
-솔직히 약탈자 놈들을 어떻게 믿어?
└김태현이 있잖아!
-그래도 안 갈래.
└너 어디 사냐?
-…???
에스파 왕국의 약탈자 플레이어들은 서로 몇 다리 건너면 알 수밖에 없었다.
산적이든 해적이든 약탈자 플레이가 기본적으로 어느 정도는 뭉쳐야 했던 것이다.
훔친 물건을 비밀리에 팔려면 어디서 팔아야 하고, 마을에 못 들어갈 때 어디서 쉬어야 하고….
그런 만큼 안 들어가고 개기던 약탈자 플레이어들은 곧바로 응징을 당했다.
-나와 이 새끼야! 오랄 때 올 것이지!
-이, 이게 무슨 짓이야! 김태현한테 신고한다!?
-김태현이 하라고 했어 이 새끼야! 어디서 지금 에스파 왕국을 위한 위대한 투쟁에 참가하지 않고 이기적으로 굴어!
* * *
‘부족 두 개. 늦어도 세 개만 돌면 완성될 가능성이 높겠군.’
태현은 완성되어가는 검술 스킬을 보며 뿌듯해했다.
에스파 왕국의 야만부족들을 설득하면서 동시에 완성되어가는 <아키서스 전쟁의 검>.
속도를 봤을 때 부족 두 개나 세 개만 더 설득하면 완성될 가능성이 높았다.
<에스파 왕국의 의적들-에스파 왕국 퀘스트>
에스파 왕국의 깃발이 사라지고 왕국 사람들은 굶주린 혼돈의 탄압으로 신음 받고 있지만, 아직 남아 있는 정의로운 도적들은 왕국 사람들의 희망이 되어주고 있다.
굶주린 혼돈의 군단은 이런 당신과 의적들을 완전히 토벌해서 뿌리를 끊어버리려고 한다.
몰려오는 토벌을 격퇴하고 이 땅에 새로운 희망으로 자리잡아라!
보상: ?, ???
‘어디부터 지적해야 할지는 둘째 치고, 지금 토벌이 몰려오고 있다고?’
태현은 긴장했다.
나름 피한다고 피했는데 아무래도 부족들을 모으고 하다 보면 굶주린 혼돈이 눈치를 안 챌 수가 없었다.
“토벌 시작됐다! 다들 대비시켜!”
“토벌 시작됐단다!”
태현의 외침에 약탈자 플레이어들은 각자 연락을 돌렸다.
아직까지만 해도 플레이어들은 침착했다.
굶주린 혼돈의 추적은 몇 번이고 당해봤던 것이다.
지금 숨어 있는 산맥 밖에 나가 있는 사람들한테도 연락하고….
“…어, 김태현 선수.”
“?”
“산, 산맥 전체가 지금….”
이곳저곳에서 들어오는 급한 연락에 상황을 파악한 약탈자 플레이어들의 얼굴이 창백해졌다.
드넓은 산맥의 전후좌우 모든 방향으로 굶주린 혼돈의 군단이 몰려오고 있었던 것이다.
“괜찮다. 걱정할 거 없어.”
“진짜입니까? 휴. 다행이네.”
‘튈 수 있으려나?’
태현은 튀어서 남은 부족 몇 개만 따로 어떻게 챙겨볼 수 있을까 고민했다.
굶주린 혼돈은 약탈자 플레이어들 잡으면 만족하지 않을까?