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 나는 될놈이다 1722화
물론 눈앞의 사람이 진짜 스미스일 리는 없었다. 스미스는 지금 여기 있을 수 없었으니까.
하지만 돌레로는 다른 식으로 이해했다.
눈앞의 플레이어가 멍청한 가명을 댄 돌레로를 배려해서 똑같이 멍청한 가명을 댄 것이라고!
‘정말 친절한 사람이구나.’
판온에는 나쁜 사람만 있는 게 아니었다.
가끔 이렇게 선한 사람들을 만날 때, 돌레로는 판온에서 감동을 느끼곤 했다.
서로 경쟁하고 다투는 게임이지만 그래도 이렇게 믿고 의지할 수 있는 사람이….
“다들 감사합니다. 사실 굶주린 혼돈에 가입하면서 걱정이 많았거든요. 제가 잘 어울릴 수 있을까, 악명 높거나 약탈자 플레이어들만 가입할 텐데… 이렇게 말입니다.”
“…….”
“…….”
자리에 있던 약탈자 플레이어들은 복잡한 표정을 지었다.
우리 약탈자 플레이어 맞아!
“하지만 이렇게 친절한 분들을 만나니 제가 잘못 생각했단 걸 알았습니다. 굶주린 혼돈에 가입한 플레이어들이라고 꼭 나쁜 분들은 아니라는 걸요.”
“하하. 굶주린 혼돈에 가입한 사람들은 대부분 쓰레기들이니 그런 오해를 할 수 있지.”
약탈자 플레이어들은 ‘지금 뭐하세요?’ 하는 시선을 태현에게 던졌지만, 태현은 무시했다.
“하지만 우리는 굶주린 혼돈에 가입했지만 의리를 아는 그런 사람들이지. 음지에서 일하지만 양지를 쫓는달까?”
“과연… 잠깐. 그런데 왜 굶주린 혼돈에 가입을?”
“그건 깊은 사정이 있지. 너무 묻지 말라고.”
“앗. 죄송합니다.”
돌레로는 고개를 숙였다.
그를 고발하지 않고 받아준 것만으로도 고마운데, 괜히 아픈 기억을 건드릴 건 없었다.
태현은 그 뒤로도 대화를 나눴다.
원래 이런 상황에서 가면 쓰고 상대방의 호감을 사는 말을 늘어놓는 건 태현의 특기나 마찬가지였다.
대화를 나누면 나눌수록 돌레로는 푹푹 빠져들었다.
굶주린 혼돈에 가입했을 때는 ‘이게 잘하는 짓이 맞나? 내가 멍청한 실수를 저지르는 게 아닐까?’ 하고 고민하던 돌레로였지만, 이렇게 친절한 사람들이 있다면 한 번 해볼 수 있겠다고 생각이 바뀔 정도로!
“그래서 지금 에스파 왕국에 있는 굶주린 혼돈 사원이 여기란 거군.”
“네.”
“베이징 파이터즈 선수들한테 물어봐서 지금 위치 알아냈나?”
“그런데 제가 베이징 파이터즈 선수들과 안 친해서….”
“아니야. 넌 할 수 있어. 힘내라. 쑤닝.”
“그, 그런가요?”
“그래. 넌 할 수 있다. 널 믿어!”
“그래! 널 믿어! 쑤닝!”
약탈자 플레이어들도 뒤에서 돌레로를 응원했다.
응원에 힘입어 돌레로는 친하지도 않던 베이징 파이터즈 선수들에게 연락했다.
-아, 예. 저도 굶주린 혼돈에 가입했는데 궁금해서 여쭤봤는데… 아하. 지금 거기 계시다고요? 감사합니다. 언제 한번 만나서… 예. 예.
그리고 돌레로는 놀랍게도 해냈다.
이미 알고 있는 굶주린 혼돈 정보는 물론이고, 친하지도 않던 굶주린 혼돈에 가입한 다른 선수들 위치까지 캐낸 것이다.
만약 연락해 온 게 태현이나 케인이었다면 다른 게임단 선수들도 의심했을 것이다.
하지만 돌레로는 평소에 워낙 이미지가 괜찮아서 의심하는 사람이 별로 없었다.
“위치 알아냈습니다!”
“그래. 고맙군. 알려주겠어?”
“예. 여기….”
의심 없이 알려주던 돌레로는 무언가 이상해서 고개를 갸웃거렸다.
“그런데 이런 건 왜 물어보십니까?”
“다 필요해서 묻는 거지.”
초조하게 기다리고 있던 약탈자 플레이어들은 일이 대충 끝난 것 같자 물었다.
“슬슬 튀어야 하지 않냐? 아까부터 계속 굶주린 혼돈 놈들이 돌아다니는데….”
“그래야겠지.”
“그… 계속 스미스라고 불러야 해?”
“아니. 다 끝났으니까 편하게 불러도 돼.”
“휴. 다행이야. 김태현. 스미스라고 부르다가 말실수할까 봐 긴장했잖아.”
“…….”
앉아 있던 돌레로는 당황했다.
으응?
“잠시만요. 새로운 가명인가요?”
“아니야. 이 사람은 김태현 맞아.”
약탈자 플레이어들은 안쓰럽다는 듯이 돌레로를 쳐다보았다.
다들 태현한테 당한 적 있는 만큼 돌레로의 심정이 손에 잡힐듯 이해가 갔다.
어안이 벙벙하겠지!
“말도 안 되는 소리 하지 마십시오. 김태현 선수는 굶주린 혼돈에 가입하지 않습니다.”
“널 속인 거야.”
“…그럼 절 왜 구해준 겁니까?”
“널 속이려고….”
“…….”
돌레로는 그제야 현실을 파악했다. 돌레로는 경악해서 태현을 쳐다보았다.
“아, 아니… 어떻게 사람을 이렇게 속일 수가 있습니까!? 어떻게!?”
“뭐가? 살려주면 뭐든지 하겠다면서.”
“…….”
자기가 한 말이 돌아오자 돌레로는 말문이 막혔다.
“그래도 김태현 선수 정도 되는 분이 어떻게…!”
“김태현한테 뭘 기대한 건데?”
약탈자 플레이어들은 어이없다는 듯이 말했다.
김태현이니까 오히려 더 이런 거지!
돌레로가 억울해하거나 말거나 태현은 냉정하게 말했다.
“난 먼저 말한 대로 했을 뿐이야. 마음에 들면 떠나도 좋다고.”
“그럴 겁니다. 지금 다른 선수들한테 연락해서 사과를….”
“안 그러는 게 좋을걸.”
“??”
“네가 알려줬다는 걸 말하는 순간 어떤 선수들도 가만히 있지 않을 테니까.”
아무리 돌레로가 ‘오해가 있었습니다 제가 속아 넘어가서 여러분의 정보를 김태현 선수에게….’라고 해명해 봤자 그걸 믿을 사람은 없었다.
‘돌레로 이 새끼가 김태현한테 넘어갔다!!’라고 기억하지.
“맞아. 우리가 생각하기에도 그거 말하는 건 좀 위험하다.”
“그냥 말하지 마.”
약탈자 플레이어들도 조언을 던졌다. 그들이 보기에도 좀 아니었던 것이다.
말하는 순간 공적이 될 가능성이 100%!
“하, 하지만….”
[굶주린 혼돈의 순찰대가 나타납니다!]
“자. 다들 이동하자. 쑤닝.”
“…쑤닝이 아니라 돌레로입니다.”
“그래. 돌레로. 거기 계속 있는 것보다 따라오는 게 좋지 않겠어? 잘 생각해 봐라. 굶주린 혼돈 플레이어들을 배신한 건 딱히 잘못이 아니야. 굶주린 혼돈 플레이어들이 판온을 얼마나 망치고 있는지 봤잖아.”
‘저 새끼 저거 진짜 악마의 혓바닥 아니냐?’
‘완전 미친놈 같아….’
약탈자 플레이어들은 경악했다.
사기 친 놈 상대로 추가 사기를 시도하는 저 모습을 보라.
도저히 믿기지가 않았다.
“하, 하지만… 저도 굶주린 혼돈에 가입했….”
“누구나 가끔은 실수를 할 수 있는 법이지. 하지만 돌레로. 난 평소부터 네가 괜찮은 사람이라고 생각했었다. 스미스나 쑤닝 같은 놈하고는 전혀 다른 사람이라고 생각했었지.”
‘이름도 모르셨잖아요….’
이다비는 속으로 어이없어했다.
“돌레로. 선택해라. 한 번 저지른 실수 때문에 끝까지 옳은 선택을 하지 않을 것인지, 아니면 한 번 실수를 저질렀어도 그걸 극복하고 옳은 길로 나아갈 것인지.”
“…김태현 선수. 김태현 선수께서 해주신 말 덕분에 머리가 맑아진 것 같습니다. 저도 굶주린 혼돈에 가입하고서 계속 부끄럽고 고민했었는데, 김태현 선수께서 해주신 말을 들으니 결심이 섰습니다!”
“그래.”
“지금 당장 굶주린 혼돈 탈퇴를….”
“아니야. 아니야. 그러다가 저주받는다고.”
“아. 그렇군요.”
“내가 적당한 때를 마련해 줄 테니까 그때 탈퇴해.”
“알겠습니다.”
“그리고 들어가 있는 동안 굶주린 혼돈 관련 정보 좀 캐내봐. 특히 랭커들 위주로.”
“예. 그렇게 하겠습니다!”
약탈자 플레이어들은 고개를 절레절레 흔들었지만, 돌레로의 영혼은 순수한 빛으로 가득 찼다.
여기 있는 정의로운 플레이어들과 같이 굶주린 혼돈에 맞서 싸우리라!
* * *
“암살자들이 왜 이렇게 정확하게 찾아오는 거야? 누가 정보 흘리나??”
“이 새끼들 설마 남의 정보 팔아넘긴 거 아니야?”
굶주린 혼돈 랭커들은 갑작스럽게 닥쳐오는 기습에 당황스러워했다.
[함정이 작동됩니다.]
[폭발이 일어납니다!!]
[……]
[……]
굶주린 혼돈만 암살자를 보내는 게 아니었다.
오스턴 왕국 쪽에 모인 원정대도 작정하고 지금 암살자를 보내고 있었다.
우주방어에 전념하고 있는 만큼 공격은 하지 못하더라도, 남는 랭커들을 동원해 이리 찌르고 저리 찌르는 싸움은 충분히 할 수 있었던 것이다.
게다가 김태현 쪽 원정대는 이런 수작질에 매우 능했다.
당장 태현부터가 이런 부분에 스페셜리스트인 데다가, 골짜기에 있었던 건 악명 높은 기계공학 대장장이들이고, 거기에 독하기로는 소문 난 파워 워리어 길드원들까지….
이런 짜증 나는 놈들에 레벨 높고 실력 있는 원정대 랭커들까지 합쳐지니 그 짜증은 상상을 초월했다.
게다가 어떻게 된 건지 위치까지 정확히 알고 찾아왔다.
철커덕!
[함정이 작동됩니다!]
[폭발이 일어납니다!!]
“저놈이 베이징 파이터즈의 캡틴차이나다! 저놈을 잡아라!”
“미친놈들이 진짜!”
“앞으로 몰아!”
[함정이 작동합…]
[폭발이…]
캡틴차이나는 이를 악물었다.
별생각 없이 에랑스 왕국 성으로 들어가 보상 좀 받고 나오려고 했는데, 웬 미친놈들이 대로에서 함정이란 함정은 덕지덕지 깔고 대기를 타고 있었다.
처음에는 ‘내가 굶주린 혼돈의 힘까지 받았는데 이깟 놈들을 못 이기겠어?’ 했는데 이게 장난이 아니었다.
독 연기구름 함정 터지고, 연기구름 폭발 함정 터지고, 중독 상태에서 추가 데미지 주는 바늘 함정 터지고….
온갖 연계 효과란 효과는 다 때려박은 함정에 한 번 걸리니 굶주린 혼돈의 힘이고 뭐고 정신을 차릴 수가 없었다.
‘말… 말도 안 돼. 이렇게 그냥 끝날 수는….’
[HP가 0이 되어 로그아웃…]
[……]
[……]
“잡았다!!”
“튀어! 튀어!”
“튀기 전에 남은 폭탄은 다 던지고 가자!”
“불도 좀 지르고!”
원정대 암살 파티는 후다닥 도망쳤다.
선수 한 명 쓰러진 것이었지만 굶주린 혼돈 쪽 플레이어들에게 충격은 컸다.
<캡틴차이나 대낮에 에랑스 왕국 성 대로에서 암살…!>
<캡틴차이나 굶주린 혼돈 가입했었음??>
<실망이네 이 자식…>
<지금 그게 중요하냐? 어떻게 암살을 당한 거야?>
<저 자식이 멍청해서 그런 거지. 내가 저 자식 때문에 중국대표팀 예선광탈 했을 때부터 알아봤다.>
<저놈은 랭커의 자격이 없는…>
<아, 중국 팬들 시끄럽고! 지금 어떻게 저렇게 암살을 했냐가 중요한 거지!>
<캡틴차이나 정도 되는 놈이 당할 정도면 진짜 긴장해야겠는데…>
<우리는 이름 없어서 안 당할듯. 랭커들이 먼저 당하겠지?>
<이런 쓰레기 같은 놈들이…!>
아무리 그래도 캡틴차이나 정도 되면 어디 가서 꿀리는 랭커는 아니었는데 대낮에 저렇게 당하다니.
굶주린 혼돈 플레이어들 입장에서는 긴장할 수밖에 없었다.
대체 다음은 누구지?
<야 근데 어떻게 위치를 알아낸…>
<지금 그게 중요하냐??>
<어디서 뭐 기다렸다가 건졌나 보지!>
하도 충격적이라 뭐가 중요한지 제대로 파악하지 못할 정도로!
* * *
[<붉은 태양> 곰 부족의 탈출이 완전히 성공합니다!]
[굶주린 혼돈의 추적이 실패합니다!]
[<붉은 태양> 곰 수인족 부족의 장로, 우르가누가 고마워합니다!]
[부족의 친밀도가…]
[평판이…]
[……]
“다들 고생 많았다!”
“와아아아아아!”
약탈자 플레이어들은 서로 껴안고 기뻐했다.
딱히 약탈과는 상관 없는 퀘스트였지만, 원래 개고생한 퀘스트가 성공하면 기쁠 수밖에 없는 게 사람 마음.
기쁘다!
“자 그러면 다 같이 여기 부족 마을 들어가서 설득하러 가자고.”
“예!”
자연스럽게 태현의 뒤를 쫓아가던 약탈자 플레이어들은 멈칫했다.
…어?
근데 우리 언제까지 김태현 쫓아다녀야 해?