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 나는 될놈이다 1718화
“어쩐지 이 총독이 수상하다고 생각했습니다!”
태현은 검을 뽑아 들며 외쳤다.
지금은 일단 곰 수인족들의 장단을 맞춰줘야 했다.
-읍읍읍읍!
안다탑 총독은 마치 연인에게 버림받은 것 같은 표정으로 태현을 쳐다보았다.
곰 수인족한테 갑작스럽게 붙잡혀 온 지금, 믿을 수 있는 사람은 태현밖에 없었던 것이다.
태현은 친밀도가 떨어지기 전에 다급하게 속삭였다.
“당연히 거짓말입니다. 제가 총독 전하를 버릴 리가 있겠습니까?”
-읍읍읍…!
[안다탑 총독의 친밀도가 오릅니다!]
[안다탑 지역의 평가가…!]
[안다탑 총독에게서 관직을 받을 수 있습니다!]
‘나는 왜 이런 놈들한테만 인기가 많은 건지 모르겠군.’
태현은 새삼 속으로 생각했다.
판온에서 정직하고 능력 있는 NPC보다는 뭔가 타락하고 능력 없는 NPC들한테 인기가 많은 기분이….
-역시 모험가도 그렇게 생각했나?
-저자 말고 아키서스의 후계자라고 할 만한 자들이 없지.
곰 수인족 전사들은 고개를 끄덕이며 납득했다.
주술사 한 명이 의아하다는 듯이 말했다.
-모험가들 중에 아키서스의 후계자가 있을 수도 있지 않나?
-무슨 말도 안 되는 소리를!
곰 수인족 전사들이 코웃음을 쳤다.
-아키서스의 후계자는 그 선조들에 걸맞게 긍지 높은 전사일 터. 그런 자가 기껏해야 도둑질이나 하는 새끼일 리가 없지 않나!
“…….”
“…….”
“…….”
태현은 물론이고 뒤에 있던 다른 약탈자 플레이어들도 안색이 어두워졌다.
아니 너무하네!
물론 그들이 약탈을 즐겨 하는 도적 떼들이 맞긴 했지만 이렇게 면전에서 저런 말을 들으면 상처받을 수밖에 없었다.
‘지들도 약탈하면서….’
“너무 마음 쓰지 마라. NPC들이잖아.”
“고… 고맙다. 김태현.”
약탈자 플레이어들은 코밑을 쓱 훔치며 고마워했다. 태현한테 이렇게 위로를 받을 거라고는 생각도 하지 못했었다.
-아키서스의 후계자라면 더 이상 기다릴 것도 없다. 놈에게 죽은 우리 선조들이 몇 명이던가! 죽이자!
-아니다! 주술사들의 징조를 무시하는 건가! 후계자와 손을 잡고 싸워야 한다!
-어처구니없는 소리! 아키서스의 후계자와 손을 잡는다고? 아키서스의 후계자가 우리와 손을 잡을 것 같으냐? 놈은 절대로 길들여지지 않는 포악한 맹수다!
곰 수인족 전사는 그렇게 말하며 총독을 가리켰다.
총독은 필사적으로 고개를 흔들었다.
-읍읍읍읍!
-봐라! 놈도 절대 굴복하지 않겠다고 하고 있지 않느냐!
‘아무리 봐도 굴복하겠다고 하고 있는데.’
[카르바노그도 동의합니다.]
태현은 재빨리 총독의 재갈을 풀어주었다. 입이 풀린 총독은 다급히 외쳤다.
-손을 잡겠다! 손을 잡자!
-…!
-!!!
안다탑 총독의 외침에 곰 수인족 전사들은 멈칫했다.
그들은 총독의 추한 모습에 수군거렸다.
-저놈 정말 아키서스의 후계자 맞나? 아키서스의 후계자가 왜 저런 모습을 보이지?
-위장이라고 하더라도 너무 추한데.
-손을 잡자니까!! 이놈들!
안다탑 총독은 분한 목소리로 외쳤다.
기껏 고귀한 신분인 총독이 양보해 줬더니 저 야만족 놈들이!
[곰 수인족들이 의견을 놓고 다투기 시작합니다!]
[이들의 의견에 따라 퀘스트 참가가 결정됩니다!]
-아키서스의 후계자가 저렇게 말한 이상 손을 잡고 싸우는 것도 나쁘지 않을 것이다. 굶주린 혼돈 놈들이 얼마나 위험한지 느끼지 않았나!
-하지만 굶주린 혼돈보다 아키서스가 더 위험하다면? 우리가 아키서스에게 속고 있는 거라면??
‘아니 말이 너무 심하네 이 자식들.’
태현은 발끈했다.
지금 대륙이 박살 나기 직전인데 뭐가 어쩌고 저째?
하지만 지금은 분노를 참고 놈들을 설득해야 할 때였다.
-굶주린 혼돈은 선조들의 기록에도 남아 있듯이 위험한 놈들이다.
“맞는 말씀이십니다. 사실 제가 에랑스 왕국에서 왔는데, 굶주린 혼돈 놈들 때문에 아주 왕국이 개판이 났더군요. 심지어 하늘섬까지 추락시켰답니다!”
[화술 스킬이 매우 높…]
[곰 수인족 전사들이 참전으로 기웁니다!]
-하지만 아키서스도 마찬가지로 위험한 놈들이잖나. 얼마나 난폭하고 사나운지….
“…사실 아키서스가 사납다는 건 좀 왜곡된 게 있습니다. 원래 고대 제국 시절에 난폭한 놈들을 다 아키서스로 싸잡아서 부르다 보니까 이게 오해가… 요즘 아키서스 교단은 부드럽고 상냥한 편이죠.”
-그래?
-아키서스 교단이 부드럽고 상냥하다니 그건 아키서스 교단이 아니잖아!
몇몇 곰 수인족 전사들은 분노를 터뜨렸다.
아무리 적이라 하더라도 그들이 아는 아키서스 교단은 정정당당한 맞수였다.
그런 적이 저렇게 약해졌다니.
‘아오 설득해 줘도 난리네.’
태현은 한 대 때리고 싶은 걸 참아야 했다.
[곰 수인족 전사들이 참전을 결정합니다!]
[화술 스킬이 크게 오릅니다!]
‘최고급 화술 7, 97%!’
태현은 속으로 주먹을 쥐었다.
곰 수인족 전사 놈들은 성가시고 까다로운 놈들이었지만, 화술 스킬을 올리는 데에는 제격이었던 것이다.
<야만부족들의 통합-굶주린 혼돈 토벌 퀘스트>
붉은 태양 곰 부족들이 굶주린 혼돈과 맞서기 위해 아키서스의 후계자와 손을 잡은 건 놀라운 일이다!
에스파 왕국 곳곳의 척박한 땅에는 숨어 있는 야만부족들이 남아 있다.
이 남아 있는 부족들을 모두 끌어내서 싸움에 참전시켜라!
보상: ?, ???
‘어차피 <아키서스 전쟁의 검> 퀘스트를 깨긴 해야 했지.’
야만족들의 검술을 모아서 원형 스킬을 완성시키는 검술 퀘스트.
그 검술 퀘스트를 위해서 어쨌든 다른 부족들을 모두 돌아야 했다.
그걸 감안한다면 이 퀘스트는 같이 해서 나쁠 게 없는….
콰콰콰콰콰쾅!
-굶주린 혼돈의 공격이다! 굶주린 혼돈이 우리들의 영역을 공격하고 있다!
-건방진 굶주린 혼돈 놈들!
[대전사 니테렐로가 <붉은 태양>의 영역을 공격합니다!]
[……]
[……]
총독 친위대들과의 싸움을 끝낸 니테렐로가 부하들을 이끌고 영역을 찾아낸 것이다.
‘좋지 않다!’
태현은 빠르게 머리를 굴렸다.
<붉은 태양>의 곰 부족들도 매우 강한 전사들이긴 했지만, 작정한 굶주린 혼돈의 군대를 막을 정도는 아니었다.
그 정도로 막을 수 있었다면 에랑스 왕국의 기사단들이 눈물을 머금고 성을 버리지는 않았을 터.
‘후퇴를 시켜야 하는데….’
험준한 골짜기 속에 위치한 만큼 후퇴는 그리 어렵지 않았다.
문제는 곰 수인족 놈들이 말을 듣지 않는다는 것!
[<붉은 태양> 곰 수인족 부족의 장로, 우르가누가 부탁합니다.]
[곰 수인족들을 설득해서 후퇴해 달라고…]
[퀘스트가 추가됩니다!]
‘…받았을 때는 몰랐는데, <만물의 소리를 들어라> 이 스킬 은근히 좀 성가시군.’
태현은 떨떠름한 표정을 지었다.
스킬 설명만 보면 무슨 세계에 남은 목소리들을 다 들을 수 있는, 최고급 화술 스킬 후반에서야 얻을 수 있는 강력한 권능 스킬이었는데….
실제로 벌어지는 효과는 세계 곳곳에 있는 놈들의 부탁을 들어주는 심부름꾼 퀘스트에 가까웠다.
‘그나마 보상은 나와서 망정이지….’
“도망치죠 슬슬?”
약탈자 플레이어들은 굶주린 혼돈이 공격해 왔다는 소식에 즉각 반응했다.
강약약강에 어느 누구보다도 진심인 이들!
태현이나 에랑스 왕국 기사단도 막지 못한 굶주린 혼돈의 군단장을 그들이 직접 상대할 생각은 조금도 없었다.
“안 돼.”
“예? 왜요?”
“지금 도망치면 안다탑 지역에서 굶주린 혼돈을 몰아내기가 힘들어지잖아. 곰 부족을 도와줘야지.”
“앗… 그렇군요.”
약탈자 플레이어들은 고개를 끄덕였다.
확실히 그건 맞는 말이었다.
“그런데 저 군단장 놈은 원래 여기 주변에서 활동하는 놈이 아니니까, 도망치면 언젠가 돌아가지 않을까요?”
“아니. 내가 아까 확인해 보니까 군단장 놈이 한동안 남아서 통치한다더라.”
태현은 1초도 고민하지 않고 그대로 거짓말을 내뱉었다.
이쯤이면 이제 숨을 쉬는 것과 같이 거짓말을 짜낼 수 있는 경지였다.
그 반응이 하도 자연스러웠기에 약탈자 플레이어들은 어느 누구도 의심하지 못했다.
“아니! 저 군단장 자식은 왜 여기 남는다고 해가지고!”
“어떻게 하죠?!”
“타격을 주면 회복하기 위해 다른 곳에 가겠지. 그러기 위해서는 놈들에게 최대한 데미지를 줘야 해.”
“알겠습니다.”
“저기. 김태현 선수.”
“?”
약탈자 플레이어 중 한 명이 손을 들었다.
“저는 그… 안다탑 지역이 주 지역이 아닌데, 나중에 제 지역이 싸울 때 싸움에 참가해도 될까요?”
“…….”
“…….”
다른 약탈자 플레이어들이 싸늘한 표정으로 방금 말한 플레이어를 노려보았다.
모여서 싸운 지 얼마나 됐다고 벌써부터 이런 이기적인 행동이라니.
하지만 어떻게 보면 당연한 일이었다.
원래 약탈자 플레이어들이었으니까!
태현은 웃으면서 고개를 끄덕였다.
“싫다면 강요하지는 않지.”
“감사합니다!”
쾅!!!
[치명타가 터졌습니다!]
[제국 기계공학자의 마검이 추가 효과를…]
[아키서스의…]
[……]
[……]
“커헉!!!”
한 번에 HP가 50% 이상 날아가는 충격에, 약탈자 플레이어는 경악했다.
나름 PVP 전용으로 맞춰 놓은 세팅이었는데 김태현의 공격에 피가 절반 이상 깎인 것이다.
최근 굶주린 혼돈에 가입한 랭커들 때문에 놓치기 쉬웠지만 태현도 만만찮게 강해지고 있는 괴물이었다.
“이… 이게 무슨 짓입니까?”
원래라면 벌컥 화를 냈을 성격이었지만 약탈자 플레이어는 따지는 대신 조심스럽게 물었다.
상대방이 태현이었기 때문이었다.
“뭐가?”
“절, 절 방금 공격하셨잖습니까!”
“아. 오해가 있는 거 같군. 싸움에 참가하기 싫다고 해서 빠지게 해주려는 거였는데. 공격하는 걸로 보였을 수도 있겠어.”
“…….”
“…….”
자리의 분위기가 싸늘해졌다.
판온 1 때부터 해왔던 랭커들은 벌써부터 트라우마가 올라오는 표정으로 벌벌 떨었다.
저거…!
저거 슬슬 본색 올라온다!!
“오해하지 말라고. 그냥 로그아웃시키는 거니까. 자. 몇 대 남았지? 끝내줄 테니까 대라고.”
“아닙니다! 아닙니다!! 남아서 싸우겠습니다!!”
“그래? 빠져도 되는데.”
태현은 웃으면서 약탈자 플레이어들을 둘러보았다.
그리고는 말했다.
“빠지고 싶은 놈은 말해라! 빠지게 해줄 테니까. 빠지려고 하는 놈이 있으면 말해라! 아는데 말하지 않는다면 같이 빠지게 해줄 테니까. 자. 쓸데없는 소리는 여기까지다! 모두 앞으로!”
“…!!!”
-김, 김태현 선수 왜 저럽니까?
-이 새끼들아 내가 원래 저런 성격이라고 백번을 말했는데…!!!
* * *
[굶주린 혼돈의 정찰병이 절벽을 기어오릅니다!]
수직에 가까운 가파른 절벽을 아무런 장비 없이 손발로 기어오르는 굶주린 혼돈의 정찰병들.
위에서 어떤 공격이 와도 몸으로 버티면서 그대로 올라왔다.
떨어지는 놈들이 나오더라도 그 밑에서 바로 추가가 들어오니 그 기세가 상당했다.
-이 굶주린 혼돈의 개들이!
-진정한 주인도 몰라보는 야만족 놈들!
곰 수인족 전사들은 살벌하게 무기를 휘둘렀지만 절벽 곳곳에서 굶주린 혼돈에게 밀리고 있었다.
대전사 니테렐로는 함성을 질렀다.
-야만족 놈들은 도망도 칠 줄 모른다. 그대로 밀어붙여서 끝장을 내버려라!
“마을 중앙이 함락당했다! 마을 중앙이 함락당했다! 모두 후퇴해서 재집결해라!”
-잘했다! 어느 녀석이 함락시켰느냐? 내가 상을 내리겠다!!
니테렐로는 만족스럽게 주변을 둘러보았다.
그러나 부하 천인장들은 당황스러운 눈으로 서로 쳐다볼 뿐이었다.
-아직 중앙은 공격하지 않았습니다만…?
-저도 아직 공격하지 않았습니다.
-…??