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 나는 될놈이다 1717화
마음 같아서는 김태현 멱살이라도 잡고 싶었지만, 오늘 방송 목적을 생각해 보면 그럴 수도 없었다.
“자. 자리에 앉으세요.”
“이거 자리 어떻게 나눈 거지?”
“이쪽이 굶주린 혼돈에 가입한 선수들이고, 이쪽이 굶주린 혼돈에 가입 안 한 선수들이에요.”
“…….”
“…….”
뉴욕 라이온즈 선수들의 표정이 창백하게 물들었다.
아니….
너무 심하잖아!!
“미친 거 아니야? 우리 쪽에서 준비한 방송인데 왜 저런 짓을?!”
뉴욕 라이온즈가 가장 먼저 주도하고, 가장 많이 돈을 쓰긴 했지만, 주최하는 방송사 쪽에서도 욕심이 없을 수가 없었다.
이왕 선수들이 이야기할 거면 직관적으로 보이게 갈라놓자!
“…어차피 굶주린 혼돈 가입한 거 모르는 사람도 없는데 뭘.”
“아무리 그래도 그렇지 이렇게 반으로 갈라놓으면 여기가 완전히 악당 칸이잖아.”
뒤늦게 들어온 유성 게임단의 이세연은 뉴욕 라이온즈 선수들이 한쪽에 모여 있는 걸 보고 의아해했다.
“뭐야. 악당들이라고 한쪽에 모여 있는 거야?”
“아니야!”
* * *
시작 전의 잡음과 별개로, 방송 자체는 꽤 매끄럽게 굴러갔다.
사회자는 영상과 함께 이런저런 질문을 던져가며 분위기를 훈훈하게 만들었다.
그러나 방심하기에는 일렀다. 방송은 이제 막 시작했을 뿐이었으니까.
“그러면 뉴욕 라이온즈 선수들에게 질문을 드리고 싶습니다. 지금 팬들 사이에서는 ‘다른 게임단도 아니고 뉴욕 라이온즈 같은 게임단이 굶주린 혼돈에 가입하는 게 맞냐, 일반 플레이어들 게임도 못하게 만드는데’ 같은 지적이 나오고 있는데….”
“푸훕.”
뉴욕 라이온즈 선수들은 당황해서 마시던 물을 뿜을 뻔했다.
이렇게 바로 들어올 줄이야.
굶주린 혼돈에 가입하지 않은 선수들은 고개를 끄덕이며 소곤거렸다.
“맞지. 맞아.”
“저 자식들이 하늘섬을 떨어뜨렸다니까.”
뉴욕 라이온즈 선수들은 콜록이며 대답했다.
“물… 물론 그런 비판은 가능합니다. 하지만 선한 플레이가 있다면 악한 플레이가 있듯이, 악한 플레이도 판온을 즐겁게 만드는 요소 중 하나라고 생각합니다. 굶주린 혼돈이 강해진다고 하더라도 판온이 끝나는 건 아니고, 또 그 나름대로 판온의 새로운 모습이 찾아올 거라고 생각해 주시면 감사하겠습니다.”
판에 박힌 듯한 모범적인 대답.
그러나 다른 게임단 선수들은 그걸 가만히 두고 보지 않았다.
애초에 다들 굶주린 혼돈한테 원한들이 있는 데다가, 이번 방송에서 최대한 이목을 끌어서 나쁠 게 없었던 것이다.
“공식 계정에 올라온 적도 있는 아주 판에 박힌 변명 잘 들었습니다! 하지만 과연 그게 옳은 말인지는 의문입니다!”
“저, LK 갤럭시 선수들? 질문을 하실 때는 허락을 받고….”
“굶주린 혼돈이 강해져서 대륙을 지배하면 그냥 길드 동맹이 지배하는 거랑 다른 게 없는데 길드 동맹은 왜 비판하셨나요? 길드 동맹이 판온 지배하는 것도 새로운 모습 아닌가요?”
“그렇게 길드 동맹 비판하셔놓고 굶주린 혼돈에 가입하다니 너무 낯짝이 두꺼운 거 아닌가요? 하늘섬에서 활동하던 플레이어들은 지금 집이고 뭐고 다 날아갔는데 그것도 새로운 모습인가요?”
“오….”
“대단한데?”
태현 일행은 작정하고 칼을 갈고 나온 선수들의 공격에 감탄했다.
케인은 무의식적으로 아이템창에 손을 넣고 팝콘을 꺼내려고 할 정도였다.
“선수 여러분들, 진정을….”
“이번에는 제가 질문하겠습니다!”
“아니! 내가!”
“아니야! 내가 질문하겠어!”
이곳저곳에서 벌떡벌떡 일어나는 선수들.
사회자가 당황하면서 말리려고 해도 소용이 없었다.
물론 스튜디오 안은 난장판이었지만 그 밖은 매우 열광적이었다.
-판온 리그보다 더 박진감 넘친다!
-선과 악의 살벌한 싸움 ★★★★☆
-야 이러다가 진짜 안에서 싸우는 거 아니냐? 어떤 미친놈이 김태현이 현피뜬다고 해서 무시했었는데….
-싸워라! 싸워라!
평소 판온에서 선수들이 싸우는 것만 보던 팬들이었지만, 이렇게 실제로 날선 목소리로 치고받는 모습도 매우 흥미로운 건 마찬가지였다.
판온 리그 아쉽지 않은 박진감!
“승리가!”
“?”
“승리가 중요한 겁니다.”
스미스가 입을 열었다. 다른 뉴욕 라이온즈 선수들은 허를 찔린 표정을 지었다.
사실, 뉴욕 라이온즈 선수들은 스미스가 말을 많이 하는 걸 그리 내키지 않아 했다.
안 그래도 게임단 내에서 인기를 독점하고 있는 만큼 내버려 둬서 좋을 게 없었던 것이다.
다행히 스미스는 입을 다물고 있었는데 이렇게 갑자기 열 줄이야.
“길드 동맹은 패배했으니 비웃음을 당하는 거고, 저희는 지금 이기고 있습니다. 그게 차이죠.”
“그게 뭔 개 풀 뜯어먹는 소리….”
“여러분들도 불만이 있으시다면 이기시면 됩니다. 굶주린 혼돈한테 맞서서요.”
“…….”
“…….”
케인은 속으로 생각했다.
케인이 이미지 마케팅이나 그런 걸 잘 모르긴 하지만, 일단 지금 스미스가 한 말이 엄청나게 어그로를 끌고 있다는 것 정도는 확신할 수 있다고!
“그걸 말이라고 하냐!!!”
“우우우!”
“여러분! 물병 던지지 마세요! 물병 던지지 마세요!!”
이곳저곳에서 일어난 선수들이 야유를 퍼붓고 스미스를 욕했다. 스미스는 아랑곳하지 않았다.
“이렇게 말하시는 분들 중에 굶주린 혼돈에 맞서 싸운 분들은 있지도 않잖습니까! 숨어 있다가 여기 와서 입을 여는 꼴이라니!”
-스미스 말 잘한다!
-굶주린 혼돈 만세!
-나는 믿을 거야. 굶주린 혼돈 믿을 거야.
이미지와는 별개로 스미스의 말에 환호하는 팬들도 꽤 있었다.
굶주린 혼돈에 가입한 사람들은 스미스의 발언에 속 시원하다면서 환호했다.
실제로 지금 눈치 보느라 어느 쪽에도 끼지 않은 게임단 선수들이 여럿이었던 것이다.
“굶주린 혼돈 가입하고 나서도 김태현한테 진 놈이 뭐라는 거야!”
“김태현 선수는 가만히 있는데 그쪽은 왜 김태현 선수 이름을 팔아먹습니까? 쪽팔리지도 않습니까?”
“안 쪽팔리는데?? 그러는 너는 그 전력 데리고 말아먹어서 안 쪽팔리냐? 뉴욕 라이온즈 선수들 전원 1분컷 당했는데?”
“전장에 나오지도 않은 선수한테 그런 말 들어봤자….”
“그만! 그만! 여러분, 그만하십시오!”
사회자가 도저히 말릴 수 없자 아예 스태프들이 우르르 들어와서 선수들 사이에 끼어들었다.
태현 일행은 흥미진진하게 지켜보다가 당황했다.
“어? 이대로 끝인가요?”
“그러면 이대로 어떻게 진행하겠습니까!? 일단 중단하겠습니다!”
* * *
<판온, 선과 악의 대립… 누가 이길 것인가?>
<스미스, ‘승자가 곧 정의다’… 일갈에 선수들 발끈!>
<최고 시청률 돌파… 판온의 열풍은 어디까지인가??>
…….
…….
‘흠. 뉴욕 라이온즈가 좋아할지 싫어할지 모르겠군.’
방송 끝나고 나오는 뜨거운 반응들에 태현은 궁금해졌다.
뉴욕 라이온즈는 과연 만족하고 있을까?
일단 관심은 화끈하게 불러 모을 수 있었다. 한동안 잊혀져 있던 선수들도 신나게 나서면서 관심을 모을 수 있었고.
뉴욕 라이온즈도 무시무시한 악역 이미지를 확실하게 다잡았다.
판온 굶주린 혼돈 가입 플레이어들이나, 강함으로 압도하는 플레이를 좋아하는 사람들은 환호하며 응원할 정도로.
…근데 이게 사람들 눈에 너무 나쁜 새끼 같아 보이지 않을까가 문제였지!
‘뉴욕 라이온즈는 좀 악역 이미지를 탈피하고 선을 긋고 싶어 하는 것 같았는데 오히려 이러면 역효과 같은데….’
악 성향 플레이어들이 총집합되는 현상.
어쨌든 태현이 알 바는 아니었다. 뉴욕 라이온즈가 알아서 할 일이었지.
“자. 경매를 마저 진행해 보자.”
“네. 진행할게요. 안다탑 지역 나왔습니다. 안다탑 지역 나왔습니다. 더 없습니까?”
태현과 이다비는 지금 경매를 진행 중이었다.
참가자는 에스파 왕국의 약탈자 플레이어들. 비밀주점에서 진행되는, 은밀한 경매였다.
처음에는 사실 이렇게까지 할 생각이 없었다.
-김태현. 여기 돈주머니가 떨어져 있던데… 곰 수인족들이 약탈할 장소로 여길 골라줘.
-김태현. 여기 아이템 떨어져 있던데 네 거 아니야? 참. 곰 수인족들이 약탈할 장소는 여기가 좋을지도….
-김태현. 여기 땅문서….
그러나 약탈자 플레이어들의 뇌물 공세가 생각보다 너무 심해진 것이다.
이쯤 되자 정상적인 진행이 힘들 정도.
태현은 그래서 깔끔하게 결정을 내렸다.
-뇌물로 승부보지 말고, 경매로 승부를 보자! 승자한테 약탈지 정할 권리를 주겠다!
-어? 그러면 우리가 바친 뇌물은…?
-뭔 뇌물? 아까 떨어져 있는 아이템이라면서?
-…….
도중에 한몫 바친 약탈자 플레이어들 입장에서는 매우 억울했지만, 어쩔 수 없었다.
꼬우면 하지 말던가!
“필라 항구에 돈주머니 하나 더!!”
“그거 받고 용병단 건다! 무조건 청색 산맥 요새!!”
“아 이 멍청한 놈들 같으니! 지금 그런 깡촌이 뭐가 중요하다고! 무조건 안다탑 지역부터 해방해야 한다고!!”
“아, 아니라고! 청색 산맥 요새가 더 중요하다고!”
약탈자들은 추하게 다퉜다.
다투다 못해 아예 따로 팀을 짤 정도였다.
“안다탑 지역 약탈자들 여기로 모여라!”
“청색 산맥 약탈자들 이쪽으로!”
약탈자들이 갖고 있던 재산이 거의 탈탈 털릴 정도로 치열한 경쟁 끝에, 경매는 안다탑 지역으로 결정이 됐다.
태현은 속으로 생각했다.
‘그냥 가만히 있었으면 안다탑 지역에 보냈을 텐데….’
가만히 있었으면 태현이 알아서 안다탑 지역 보냈을 텐데, 괜히 지들끼리 경쟁하느라 서로 재산 털고 바치고….
아주 황당한 놈들이었다.
“알겠다. 안다탑 지역 털어달라고 부탁하도록 하지.”
[<붉은 태양> 곰 수인족 주술사들의 구역에 접근합니다.]
[명예가 오릅니다!]
[마법 스킬이…]
태현은 주술사들의 구역에 머무르고 있는 전사들에게 찾아갔다.
전사들은 수인족 주술사들에게 각종 버프를 받으며 나갈 준비를 하고 있었다.
-아니, 이럴 수가! 이런 불길한 징조가…!
“?”
태현은 의아해했다.
뭔 징조가 나왔길래?
-이 징조는 틀림이 없다!
-말도 안 되는 징조다. 무언가 실수가 있었을 거다.
“약탈 장소 정하러 왔습니다.”
-너, 인간 약탈자! 이리 와봐라! 너는 이 징조를 어떻게 생각하느냐?
-인간 약탈자가 그걸 어떻게 안다고 그러는 거냐!
곰 수인족 전사들은 자기들끼리 투닥투닥 다퉜다.
이쯤되자 태현도 슬슬 궁금해졌다.
‘뭔 징조가 나왔길래 저러는 거야?’
그냥 위치만 찍어주고 빨리 나간 다음 다른 수인족 부족들 돌면서 검술 스킬 완성할 생각이었는데….
-봐라! 인간 약탈자! 이 불길하기 짝이 없는 징조를!
[곰 수인족 주술사들의 징조를 목격합니다!]
[마법 스킬이 오릅니다!]
[지혜 스탯이 영구적으로 오릅니다!]
[징조가 뜻하는 바를 읽어냅니다!]
징조는 이렇게 말하고 있었다.
<찾아온 아키서스의 후계자와 손을 잡고 굶주린 혼돈과 싸우면 길할 것이다!>
“…….”
[…….]
태현과 카르바노그는 동시에 굳었다.
‘아니 더럽게 신통하군.’
태현은 가슴이 철렁 내려앉는 걸 느꼈다. 태현이 여기 온 걸 추측해 낼 줄이야.
-아키서스의 후계자가 여기 있다니. 그게 말이 되나? 그랬다면 이 부족이 벌써 무너졌겠지!
-나는 의심가는 놈이 있다! 내가 예전부터 의심가는 놈이 있다고 했잖나!
“…….”
태현은 슬금슬금 손을 허리춤에 뻗었다.
기계공학자들이 마검 속에서 빨리 뽑으라고 속삭였다.
-아니라니까! 저런 멍청한 놈이 어떻게 아키서스의 후계자겠냐!
-놈은 위장을 한 거다! 봐라!
곰 수인족 전사는 손가락으로 태현을 가리켰다.
아니, 정확히 보니 태현이 아니었다.
…곰 수인족 전사가 가리킨 건 붙잡힌 안다탑 총독이었다.
“…….”