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 나는 될놈이다 1716화
훈훈한 사인 교환이 끝나고 나서야 상담에 들어갈 수 있었다.
태현은 매우 진지한 표정으로 경청했다.
“과연… 다샘이의 성적을 보면 지금 교내 경시대회뿐만 아니라 교외 경시대회도 진지하게 준비할 수 있겠군요.”
“바로 그렇습니다.”
“그뿐만이 아니라 국제 올림피아드까지. 그 다음에는 노벨상… 한국의 새로운 천재가….”
“…아, 아니. 그 정도까지는 벌써….”
이다비는 창피해서 시선을 피했다. 태현이 100% 진지한 게 더 창피했다.
“감사합니다. 말씀해 주신 대로 다샘이와 이야기 나눠보고, 다샘이가 하고 싶어 한다면 최대한 지원해 보겠습니다.”
“…그런데 두 분이 결혼하셨었나요?”
“?!”
* * *
“뉴욕 라이온즈와 다른 게임단들이 같이 방송을?”
“예. 판온 리그가 중단된 만큼 선수들이 모여서 인터뷰와 이런저런 이야기를 나누는 소소한 방송이라고….”
“지금 진심으로 그걸 소소한 방송이라고 생각하는 건 아니시겠죠?”
“예, 옛! 물론입니다.”
LK 갤럭시의 단장은 움찔했다.
그룹의 실세인 윤 사장의 눈빛이 타오르듯이 이글거렸던 것이다.
‘차라리 게임단에 별 관심이 없을 때가 더 나았던 거 같기도….’
원래 윤 사장은 판온에 별 관심이 없었다.
나이도 나이인 만큼 ‘무슨 캡슐에 들어가서 게임을 해’ 같은 반응을 보이는 사람이었던 것이다.
그러나 기부경매에서 유성 그룹 회장이 게임단 관련 물품 갖고 와서 다른 사람들 인기를 한 번에 모으는 것을 시작으로, 몇 번 경기를 보더니 사람이 확 뒤바뀌었다.
-우리 게임단은 왜 1부 리그가 아니라 2부 리그에 있나?
-우리 게임단은 왜 어제 졌나?
-우리 게임단은 왜 김태현 같은 선수를 영입 못하나?
…아주 적극적으로 관심을 가지기 시작한 것이다.
물론 게임단 입장에서는 본사 지원이 빵빵하게 들어오니 기쁘긴 기쁜데, 단장 입장에서는 부담되는 것도 사실이었다.
질 때마다 사장이 불러서 ‘왜 졌나?’ ‘그렇군… 그래서 졌군. 그런데 왜 졌나??’ 같은 질문을 하면 사람이 긴장이 안 될 수가 없는 것이다.
“판온 리그가 중지된 지금, 여러 게임단들이 자신들을 홍보하고 이미지를 만들려는 방송 아니겠습니까?”
소소한 방송이라고 말하는 것치고는 홍보가 어마어마했다.
뉴욕 라이온즈부터 시작해서 미국 방송 쪽에서도 대대적으로 홍보를 때리고 있었고, 당연히 한국 쪽도 마찬가지였다.
리그에 나올 게임단 선수들이 대신 나와서 떠드는 데다가 그 라인업도 전설적인 수준.
이건 아무도 홍보를 하지 않아도 자동으로 홍보가 될 수준이었다.
-김태현이 스미스 진짜로 패는 거 아니야?
-판온 리그 실사판…!
-크. 기대된다.
몇몇 미친 판온 팬들도 있었지만, 대부분은 이성적이었다.
-뉴욕 라이온즈 놈들 자기들 변명하려고 나오는 거 아님?
-더럽게 뻔뻔하네. 김태현 앞에서 변명하면 믿어줄 것 같나? 김태현은 저런 거 왜 참가해?
-리그 측에서 압박 넣었겠지. 뉴욕 라이온즈가 큰 돈줄인데 이대로 내버려 두겠어?
“그런 방송이 분명합니다. 그러면 저희 LK 갤럭시는 어떻게 해야겠습니까?”
단장은 고개를 갸웃거렸다.
그러고는 ‘아’ 하고 알겠다는 듯이 고개를 끄덕였다.
“게임단들에게 주목이 쏠리는 지금, 팬들을 위한 이벤트를 열어야겠군요. 제가 생각해놓은 게 있는데, 선수들이 아이돌 춤을 연습해서 팬들 앞에서 보여주는 겁니다.”
“…아니. 그런 거 말고, 방송에 참가해야 하지 않겠습니까?”
윤 사장은 무슨 미친 소리냐고 욕을 하려다가 참았다.
하지만 단장도 사장의 소리가 미친 소리처럼 들리는 건 마찬가지였다.
“예? 방송에 참가요?”
“제가 무슨 말이 안 되는 소리라도 했습니까?”
“아니….”
단장은 당황했다.
지금 준비되고 있는 특집이 무슨 특집인가.
‘1부 리그’ 게임단들이 모이는 자리 아닌가.
물론 LK 갤럭시가 이번 승강전에서 아슬아슬하게 패배한, 팬들 대부분이 ‘다음에는 1부 간다!’고 기대하고 있는 강팀이긴 했다.
하지만 2부 리그의 강팀이었다.
그런데 1부 리그 게임단들 모이는 곳에 ‘저희도 참가할게요 ㅎㅎ’ 하면 다른 게임단들이 ‘아이고 기다리고 있었습니다’ 하고 길을 열어주겠는가?
‘나 같아도 다른 게임단하고 손잡고 길 막는다.’
기본적으로 이런 방송은 나오는 사람이 적을수록 좋았다. 관심을 나눠 받지 않아도 됐으니까.
그런데 2부 리그 게임단을 굳이….
“알겠습니다. 해보겠습니다.”
하지만 단장은 고개를 끄덕일 수밖에 없었다.
사장 앞에서 어떻게 거절을 하겠는가.
안 되더라도 일단 나중에 안 된다고 해야지…!
* * *
“허락해 주지 않으면 뉴욕 라이온즈가 국내에서 하는 모든 행사에 보이콧을 하겠다고 하면 어떨까요?”
“…….”
“허락해 준다면 뉴욕 라이온즈 선수들에게 LK 전자에서 나오는 핸드폰을 지급해 준다고….”
“이미 유성 쪽 핸드폰 쓰던데요.”
단장 휘하로 수많은 쓰레기 아이디어들이 나왔다.
LK 갤럭시를 강팀으로 만든 인재들이었지만, 이런 상황에서는 방법이 없었다.
“김태현 선수한테 부탁해 보면 어떨까요? 제가 소문으로 들었는데, 오사카 드래곤즈 게임단이 원래는 참석 못했는데 김태현 선수한테 간절히 부탁해서 들어갔다고….”
“무슨 말도 안 되는 소리를 하는 건가!”
단장은 결국 참다 못해 터졌다.
원래 이런 아이디어 회의 시간에는 자유로운 아이디어를 허락해 줘야 해서 참고 있었지만, 해도 너무하지 않은가.
“아무리 김태현 선수가 대단해도 그렇지 선수 개인이 그런 걸 허가해 줄 수 있겠나!”
“죄, 죄송합니다.”
“저기. 단장님.”
“?”
다른 직원이 화면을 띄웠다.
토론토 메이플베어즈 공식 계정 화면이었다.
-토론토 메이플베어즈 참가 확인… ‘김태현 선수한테 감사드린다. 덕분에 방송에 참가할 수 있게 되었다’….
“…….”
“…….”
직원들은 아무 말 없이 단장을 빤히 쳐다보았다. 단장은 결국 사과했다.
“내가 미안하네.”
* * *
“김태현 선수. 정말 감사합니다.”
스튜디오 앞에서 LK 갤럭시 스태프들은 연신 감사를 표했다. 태현은 별 거 아니라는 듯이 손을 흔들었다.
“별로 어려운 일도 아니었습니다.”
‘어려운 일이었는데요….’
보통 겸손으로 커버가 되는 일이 있고 안 되는 일이 있었다.
태현이 이번에 한 일은 확실히 후자였다.
-뉴욕 라이온즈 맞습니까? 이번에 저희 LK 갤럭시 참가 건으로 연락을 드렸습니다만….
-LK 갤럭시가요? 확인된 게 없습니다만… 무슨 말씀이신지….
-김태현 선수께서 저희 선수들과 같이 가고 싶다고 하셨습니다.
-…잠시만요. 확인 좀 해보겠습니다. …알겠습니다! 알겠어요!
그 깐깐하고 고집 센 뉴욕 라이온즈 담당자들이 한숨 한 번 푹 쉬더니 항복 선언을 한 것이다.
“최근에 리그가 쉬는 탓에 선수들 시간이 남는다는 오해를 자주 받는데, 사실 요즘 더 바쁜 감이 없잖아 있습니다. 김태현 선수도 그렇지 않습니까?”
“아무래도 그런 편이죠.”
태현은 고개를 끄덕였다.
“김태현 선수도 큰일이십니다. 게임단 운영까지 같이 하시면서 선수로서의 커리어를 유지하시다니….”
“저 혼자만의 힘이 아니죠.”
“역시 케인 선수나 다른 선수들이 많이 도와주시나요?”
“아뇨. 걔네들은 별로 안 도와주고 이다비만 도와줘요.”
“…….”
“…….”
스태프들은 침묵했다.
그랬구나…!
‘아니 너무하네 진짜. 집안일도 잘 안 하면서 일도 안 도와줘?’
집안일은 이제 잘 하지만, 한 번 생긴 선입견은 쉽게 사라지지 않았다.
케인은 은퇴할 때까지 ‘넌 집안일도 안 하면서 성적도 그 모양이냐’의 굴레를 짊어지고 가야 했던 것이다.
“요즘 그럼 쉬실 시간도 없으셨겠습니다.”
“아. 그래도 뭐 할 건 다 합니다.”
“그래요? 혹시 최근에 어디 놀러가셨습니까? 저희는 선수들끼리 캠핑을 했는데 그렇게 좋아하더라구요.”
“저는 흠….”
태현은 잠깐 생각하더니 말했다.
“이다비하고 같이 학부모 상담을 받으러 학교에 갔는데, 학생들 중에 팬들이 많아서 고마웠었죠.”
“그렇군요. …예?????”
무심코 넘어가려던 LK 갤럭시 관계자는 기겁하고 고개를 들었다.
뭐가 뭐라고?
“팬들이 많아서 고마웠다고요.”
“그, 그거 말고… 그, 그, 그….”
“김태현 선수! 잠시 이쪽으로 와주시겠습니까!”
스튜디오 앞쪽에서 스태프들이 와서 태현을 불렀다.
태현이 그쪽으로 가버리자 LK 갤럭시 스태프들은 속으로 비명을 질렀다.
‘안 돼!!!’
‘대답해 주고 가요!!’
대체 무슨 일이 있었던 건데!
* * *
뉴욕 라이온즈 선수들은 불편하고 어색한 자세로 태현을 기다리고 있었다.
사실, 오늘 방송에서 가장 불편하고 어색한 건 뉴욕 라이온즈 선수들이었다.
-잘 들어라. 김태현하고 방송하게 됐다.
-오오오오…!
-대체 무슨 능력으로??
-김태현 머리에 총 겨눴나?
-먼저 김태현하고 이야기할 때, 김태현 심기 거스르지 마라.
-…….
-…….
뉴욕 라이온즈 선수들은 황당해했다.
아니 그게 무슨 말도 안 되는 소리야?
-뭔 말도 안 되는 소리를 하시는 겁니까? 리그 때도 경기 앞서서 서로 도발했는데!
-도발하고 전패하긴 했지만, 어쨌든 서로 경쟁하는 사이에 그런 걸 어떻게 챙겨줍니까?
선수들끼리 서로 도발하는 것도 쇼맨십의 일종이었다.
이런 라이벌 구도를 만드는 건 팬들을 위한 일이기도 했던 것이다.
…물론 이러고 지기만 하면 보통 팬들도 싫어했다.
‘그냥 조용히 져라!’나 ‘입만 살았냐!’ 소리가 괜히 나오는 게 아니었다.
임원들은 선수들의 항의에 고개를 끄덕였다.
-좋은 질문이다. 자. 여기 너희 계약서가 있다.
-그렇습니다.
-여기 연봉이 있다.
-?
-이 연봉을 우리가 준다. 그렇지?
-예…?
-그러면 하라는 대로 해라. 김태현 심기 거슬렀다가 방송에서 꼴리는 대로 서로 욕했다가는 내가 너희들의 멱살을 잡기 전에 투자자들이 너희 멱살을 잡고 여기 빌딩 밖으로 던져 버릴 테니까.
-…….
-…….
선수들은 납득했다.
그렇구나! 연봉을 받아야겠구나!
뉴욕 라이온즈 이미지 세탁하려고 하는 방송에 태현과 드잡이질을 벌였다가는 정말 더 이상 세탁 불가능할 수준으로 지하에 처박힐지도 몰랐다.
물론 머리로는 알아도 선수들이 그렇게 자세가 휙휙 바뀌진 않았다.
태현이 들어오는 걸 발견한 뉴욕 라이온즈 선수들이 어색하게 인사를 던졌다.
“김… 태현! 힘세고… 좋은 아침이야! 반가워!”
“오, 한국은 놀라워! 이렇게 아름다운 나라라니! 나를 환영해 주는 수많은 사람들을 봐!”
“…….”
태현은 미친놈들 보듯이 한심하게 뉴욕 라이온즈 선수들을 쳐다보았다.
“술 먹고 왔냐?”
“아니야!!”
뉴욕 라이온즈 선수들은 기겁해서 부정했다.
하필 오해를 해도 그딴 오해를 하다니!
“우린 그저… 이렇게 좋은 날, 한국처럼 아름다운 나라에서 이렇게 좋은 기회를 잡아 너와 같이 방송에 나올 수 있다는 사실이 기뻤을 뿐….”
“…….”
이제는 태현뿐만 아니라 다른 팀 KL 선수들도 미친놈 보듯이 쳐다보기 시작했다.
진짜 왜 저러는 거야 저놈들?
뒤늦게 스튜디오 안쪽으로 들어온 다른 게임단 선수들은 분위기를 보고 의아해했다.
“왜 이래?”
“뉴욕 라이온즈 선수들이 술 마시고 들어왔나 본데.”
“뭐?! 술을 마시고?”
“아니라고!!”
“선수 여러분들. 설마 정말로….”
“…….”
뉴욕 라이온즈 선수들은 울고 싶었다.
김태현 이놈 진짜…!