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 나는 될놈이다 1715화
뉴욕 라이온즈 사람들은 펄리 이사의 능력에 강한 신뢰를 보냈다.
한 번 태현을 설득한 만큼, 다시 설득할 수 있으리라!
* * *
“아, 작작 좀 하십시오! 몇 번을 전화하는 겁니까!”
“!!!”
케인은 토끼처럼 깜짝 놀랐다.
태현이 전화로 저렇게 화난 듯 말을 하는 건 처음 들었던 것이다.
케인은 그 즉시 들고 있던 핸드폰을 내려놓고 청소기를 들어 올렸다.
“뭐하냐?”
“청… 청소?”
“아까 했잖아?”
“먼… 먼지가 또 보여서?”
“허. 해가 서쪽에서 뜨겠군.”
태현은 신기해하며 지나갔다.
케인은 안도의 한숨을 내쉬었다.
‘화가 난 건 아니구나.’
“무슨 일인데? 혹시 초등학교 때 연락 끊겼던 친구가 보증 서달라고 전화 왔어? 아니면 보험 좀 들어달라고?”
“그런 전화가 올 리가 없잖아.”
“난 오던데….”
“…….”
순간 어색한 침묵이 돌았다.
“저번에 말한 뉴욕 라이온즈 선수들 방송 있잖아. 자꾸 전화가 와서 ‘제발 부탁드립니다’ ‘저희 선수들을 잘 부탁합니다’ ‘심한 말은 하지 말아주십시오’라고 계속 반복을 하는데, 뭐하자는 건지 모르겠군.”
태현은 정말로 ‘스미스 새끼 저거 순 나쁜 새끼에요’ 같은 말을 할 생각이 없었다.
근데 자꾸 저러니까 슬슬 귀찮아졌다.
이 자식들 날 얼마나 못 믿는 거야?
“과연… 그럴 때는 하지 말라는 짓을 해서 교훈을 주는 건 어때?”
“무슨 말도 안 되는 소리를 하는 거냐?”
“…….”
케인은 억울했다.
다 너 보고 배운 건데…!
* * *
“아, 작작 좀 하세요! 몇 번을 전화하는 건데요!”
이다비는 화를 내며 전화를 끊었다.
차라리 이다비 본인한테 ‘실언 조심하십시오’ ‘실언하시면 안 됩니다’ ‘뉴욕 라이온즈 잘 부탁드립니다’ 이랬다면 화라도 나지 않았을 것이다.
그런데 ‘김태현 선수가 제발 심한 말을 하지 않게 옆에서 잘 부탁드립니다’ 같은 말을 하니 화가 났다.
그건 김태현 선수가 심한 말을 할 거라고 의심하는 것이나 마찬가지 아닌가!
물론 태현이 열받으면 생방송에서도 ‘스미스 이 쑤닝 같은 놈아 굶주린 혼돈 가입해서 약한 놈들 패고 다니니까 좋냐’ 같은 소리를 할 수 있는 사람이긴 했지만, 이번은 정말로 순수한 선의를 가지고 하는 일이었던 것이다.
그런 사람의 선의를 의심하다니.
“너희는 뭐해?”
“청… 청소?”
“아까 했잖아?”
“먼… 먼지가 또 보여서?”
이다비의 동생들은 청소기를 하나씩 들고 시선을 피했다.
언니가 전화로 저렇게 화난 듯 말을 하는 건 오랜만에 들었던 것이다.
다행히 언니는 그렇게 화가 난 것 같지 않았다. 곧 표정을 풀더니 원래대로 돌아왔다.
‘다행이다. 저번에 태현 오빠 사인 받아서 학교에 갖고 간 거 안 들켰나 봐.’
‘그런 짓을 했어?!’
‘쉿. 조용히 해.’
이다비의 동생들은 고민했다.
어떻게 하면 분위기를 바꿀 수 있을까?
“참. 나 학교에서 부모님 상담….”
“야…!”
이다샘의 말에 이다솔은 기겁해서 말했다.
하필이면 무거워질 수 있는 주제를 왜 지금 꺼낸단 말인가!
이다비는 멈칫하더니 물었다.
“무슨 상담?”
“저, 저번에 경시대회에서 성적 좋게 나왔다고… 부모님 뵙고 진지하게 이야기 나눠보고 싶다고….”
“아. 그런 건 좋지.”
이다비의 얼굴이 밝아졌다.
사고를 쳐서 상담 받는 게 아니라면 뭐 나쁠 게 있겠는가.
“내가 갈게.”
이다비가 기쁜 표정으로 계획을 잡고 일어서자, 이다솔은 이다샘의 옆구리를 꼬집었다.
“넌 그 정도는 네가 알아서 해야지…! 굳이 선생님이랑 언니가 면담 따로 안 해도 되는 거였잖아!”
“그, 그렇긴 한데 떠오르는 게 이거밖에 없었어… 미안해….”
이다비 동생들은 이다비가 학교 오는 걸 그리 좋아하지 않았다.
절대 이다비가 부끄러워서가 아니었다.
이다비가 학교 오면 보통 다음과 같은 일들이 벌어지는 것이다.
‘앗 부모님 대신 언니가… 앗, 이거 죄송하게 됐습니다’ 같은 말을 학교 쪽에서 꺼내서 분위기 어색해지고, 분위기 어색해지면 이제 이다비는 집에 돌아와서 ‘애들아 언니가 미안해’하며 괜히 미안해하고….
동생들은 정말 조금도 신경 안 쓰는데!!
“언니 혼자 또 미안해하면서 구석에 쭈그릴 거 아니야!”
“힝… 어떡하지?”
“…오빠한테 연락해서 언니 약속을 잡아버리자.”
이다솔은 천재적인 계획을 짜냈다.
태현이 약속을 잡고 이다비를 부른다→이다비는 태현이 부르면 거절하지 못한다→그러면 학교 약속도 자연스럽게 미뤄진다→그걸 핑계로 면담도 무산됐다고 한다→완벽!
“천재야 너?”
“내가 천재긴 해.”
띵동!
-알겠어. 그런 거라면 내가 이다비하고 같이 갈게.
“…….”
“…….”
어라?
이다솔과 이다샘은 서로 쳐다보았다.
뭔가 서로 오해가 있었던 것 같았다.
‘언니가 학교에 오면 슬퍼할까 봐 걱정되는데 약속 잡아주세요!’라고 보냈는데, 태현은 ‘응 알겠어 같이 갈게’라고 이해한 것이다.
…이거 어떡하지?
“네가 언니한테 말할래?”
“절대 죽어도 싫어…!!”
* * *
“앗. 태현 님. 무슨 일로 오셨어요?”
이다비는 1층에 앉아서 동생들과 같이 밥을 먹는 태현의 모습에 의아해했다.
사실 따지자면 남의 집에 자연스럽게 들어와서 밥 차려주고 밥 먹는 모습부터 지적을 해야 했지만, 그건 이제 너무 자연스러워져서 이 집의 누구도 이상함을 느끼지 못했다.
“오늘 학교 가?”
“네. 어떻게 아셨어요?”
“잘 됐네. 나 평소에 중학교 구경하는 게 소원이었는데 같이 가자.”
“…….”
이다비는 잠시 고민했다.
응?
저게 무슨 소리지?
“…너희!!!”
이다비의 고개가 홱 돌아갔다.
이다비의 동생들은 기겁해서 태현의 뒤로 숨었다.
“너희 진짜 혼날래!??!”
“우, 우리는 아무것도 몰라요.”
“그냥 우연의 일치일지도….”
“맞아. 우연의 일치야.”
태현이 말했지만 이다비는 믿지 않았다.
이른 아침부터 태현이 이렇게 찾아와서 동생들과 같이 있을 이유가 우연일 리가 없지 않은가.
“무슨 말도 안 되는 부탁을 하고 있어! 너희 이리 안 와?! 당장 와!”
“살, 살려주세요.”
“저희 나가면 죽어요.”
이다비의 동생들은 껌딱지처럼 태현의 등 뒤에 바싹 붙었다.
마치 보스 몬스터의 스킬 판정처럼, 태현 밖으로 나서서 이다비의 시선을 마주하는 순간 죽는 것이다.
“이다비. 이러다가 학교 늦잖아. 같이 가자.”
“아니…! 안 돼요!”
이다비는 단호하게 말했다.
동생들이 언니 혼자 가는 게 초라해 보여서 태현을 부른 게 분명했다.
하지만 이건 태현을 부른다고 해결될 일이 아니었다.
아무리 초라하고 부끄러워도 이건 동생들 스스로 감당해야 할 일인 것이다.
“혹시 내가 부끄러워?”
“…아니요?!”
“그러면 같이 가자.”
“…….”
이다비는 어이가 없었다.
평소 안 그러던 사람이 질척거리면 몇 배로 당황스럽기 마련.
특히 태현이 이러니 아예 뭐라고 말을 해야 할지 모를 지경이었다.
“그래. 언니. 같이 가자.”
“같이 가고 싶으시대.”
“…너희 진짜 두고 보자.”
이다비는 빠득 이를 갈며 동생들을 노려보았다.
동생들은 태현에게 속삭였다.
“저희 혹시 학교 끝나면 숙소로 가도 돼요?”
“나는 괜찮은데, 그러면 진짜 이다비가 화낼 것 같아서 안 되겠다.”
“언니 절대 오빠 앞에서는 화 안 내잖아요.”
“언제나 처음이 있는 법이지. 지금도 사실 이다비가 화낼까 봐 걱정되거든?”
이다비 슬퍼한대서 왔지만 태현이라고 걱정을 안 하는 건 아니었다.
‘나중에 이다비가 진짜 화내면 동생들을 제물로 바쳐야지.’
동생들은 생각지도 못했지만, 태현은 그런 흉계까지 꾸미고 있었다.
* * *
“어휴, 진짜. 너희, 진짜. 두고 보자. 진짜. 정말 내가 창피해서. 진짜.”
“…….”
“…….”
이다비의 두 동생은 대역죄인이 된 기분으로 걸어 나갔다.
1초마다 이다비의 잔소리가 등판에 꽂혔던 것이다.
아까처럼 태현 뒤에서 숨는 것도 학교 가는 길에는 불가능했다.
이다솔은 슬쩍 태현한테 메시지를 보냈다.
-도와주세요!
그러나 태현은 냉정하게 대답했다.
-미안. 너희가 버텨줘라.
-!!!
말은 그렇게 했지만 태현은 일단 화제를 돌려보기로 했다.
이대로 계속 이다비가 동생들한테 분노한다면 언젠가 그 분노의 화살이 태현 본인에게도 날아올 수 있었던 것이다.
“이다비. 오늘 날씨가 참 좋지 않아?”
“앗. 네. 날씨 좋네요.”
“이거 마실래? 아까 만든 과일 주스인데. 아침도 못 먹었잖아.”
“감사합니다.”
“어제 파워 워리어 길드 계정에 올라온 영상 웃기더라.”
“아이디어 좋았죠? 저도 괜찮았어요. 길드 동맹 쪽 길드원들이 있었던 일을 다 말해줘서 할 수 있었던 계획이긴 한데요….”
‘와. 너무 빠른데?’
‘언니 너무 쉬운 거 아니야…?’
동생들은 어이가 없었다.
물론 기분이 풀어지길 원하긴 했지만, 태현이 몇 마디 했다고 저렇게 풀어질 줄은 몰랐던 것이다.
좀 심하다!
학교가 가까워지자 슬슬 학생들이 많아졌다.
그리고 학생들은 비슷한 반응을 보였다.
“?”
“???”
“??????”
고개 돌렸다가, 앞 보고, 다시 돌렸다가, 앞 보고….
뭐지?
닮은 사람인가?
“야. 저거….”
“저거… 맞지?”
“맞는 것 같은데….”
자기들끼리 수군거리는 학생들.
한 명만 있었다면 ‘닮은 사람인가 봐’ 하고 지나갔을 텐데, 두 명이 있으니 ‘어 진짜 팀 KL 같은데’ 싶었던 것이다.
게다가 학교에 이다비 동생들 있다는 건 판온 아는 학생들한테는 나름 유명한 사실.
김태현도 온 적 있었고….
“뭐 찾아?”
“케인 선수는 없나 찾고 있었는데.”
“멍청아. 케인 선수가 있었으면 보였겠지. 팔이 몇 개인데.”
“…미친놈아 판온도 아닌데 팔이 두 개겠지.”
“…아. 그러네.”
학생들은 계속 수군거렸다. 그러다가 결국 용기 있는 학생 한 명이 다가가서 물었다.
“혹, 혹시 김태현 선수 맞으신가요?”
“응.”
“!!!”
“!!!!!!”
“사, 사, 사, 사….”
“사인.”
“네! 사인이요!”
“그래. 어렵지 않지.”
태현은 슥슥 사인을 해줬다.
선수 경력이 얼마인데 이제 예전과는 달리 매우 능숙해져 있었다.
-후문 쪽에 김태현 등장!! 후문 쪽에 김태현 등장!!!
-미친놈이 아침부터 헛소리하네.
-후문 쪽에 김태현 등장했으면 정문 쪽에는 케인 등장했을 듯.
-헉. 교장실에 보스 몬스터 등장했나 봐. 다들 가서 보스 몬스터 잡으러 왔다고 말해봐라.
코웃음을 치고 들어간 학생들은 곧 피눈물을 흘리게 됐다.
그래도 혹시나 싶어서 후문으로 호다닥 달려간 학생들은 벌써 어마어마하게 몰린 인파를 보고 눈을 크게 떴다.
저건….
저건 진짜구나!
“야, 비켜! 왜 다른 학교 놈들이 와서 줄을 서! 양심 없는 거 아니야?!”
심지어 다른 학교 학생들까지 등교 시간에 와서 모여 있었다.
* * *
“아이고, 진짜 인기가… 대단하시네요.”
이다샘의 상담을 위해 둘을 부른 교사는 진땀을 닦아냈다.
후문에 학생들이 몰린 탓에 교사들까지 와서 애들을 해산시켜야 했던 것이다.
“죄송합니다!”
“죄송합니다!”
태현과 이다비는 동시에 고개를 숙이고 사과했다. 교사는 손을 내저으며 말했다.
“아이고. 아닙니다. 애들이 그 나이에 연예인 보면 저렇게 몰리는 게 당연하죠. 덕분에 신이 났을 겁니다.”
“정말 죄송합니다.”
“그런데 혹시… 저도 딸 가져다주게 사인 좀 해주실 수 있는지….”
교사는 멋쩍은 웃음을 지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