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 나는 될놈이다 1714화
펄리는 당황했다.
어째서지?!
동양의 사람들은 이런 경조사를 하나하나 챙기는 것에서 신뢰가 생긴다고 들었는데, 그가 착각한 것일까?
‘아니면 혹시 우리 뉴욕 라이온즈의 속셈을 눈치챈 것일까?’
뉴욕 라이온즈가 일단 친밀해진 다음 이런저런 제안을 하려는 걸 원천차단하려고??
“저… 이사님. 말하려다가 말았는데, 선수 동생이 시험 잘 봤다고 선물 보내는 건 조금 스토커 같습니다.”
“…?!”
* * *
뉴욕 라이온즈 측에서 열심히 오해를 풀고 나서야, 자리에 모인 사람들은 이야기에 들어갈 수 있었다.
“요리 나왔습니다.”
“아. 먹고 이야기합시다.”
펄리는 손을 내밀었다.
당연히 한국 선수들을 대접하는 자리인 만큼, 한국에서도 손꼽히는 한식 레스토랑을 예약해 놓았던 것이다.
차례대로 나오는 한식 코스 요리에 뉴욕 라이온즈 사람들은 감탄했다.
“오오… 이것이 한국의 맛…!”
“?”
태현과 이다비는 고개를 갸웃거렸다.
에피타이저로 나온 키조개나 비빔밥이야 뭐 한식이라고 칠 수 있겠지만….
그 다음에는 랍스터랑 캐비어가 나오고 있는데 ‘한국의 맛’이 맞나?
“으음. 이 랍스터. 한국의 맛이군.”
“세계에도 통하는 전통의 맛이군요!”
뉴욕 라이온즈 사람들은 메뉴가 나올 때마다 칭찬을 늘어놓았다.
하지만 그런 억지 칭찬은 태현과 이다비 눈에 좀 이상한 사람들로 보이게 만들 뿐이었다.
‘이 사람들 설마 랍스터랑 캐비어가 한국 전통 요리에도 있다고 생각하는 건 아니겠지.’
태현은 말하려다가 말았다.
중요한 건 아니었으니까!
“그래서 무슨 일로 부르신 겁니까?”
“김태현 선수. 판온 리그가 중지된 걸로 많은 사람들이 피해를 받고 있습니다.”
태현은 고개를 끄덕였다.
이미 많이 들었던 이야기였다.
-판온 리그 중지, 게임단들 악재에 비명….
-판온 운영 측은 ‘바꿀 생각 없다’ ‘이제 우리가 건드리지도 못한다’ 밝혀… 게임단들 불만….
굶주린 혼돈 때문에 리그가 중지되었는데 혼란이 없을 리 없었다.
특히 대형 게임단들이 단체로 아우성을 치지 않았던가.
그러나 판온 측은 뚝심 있게 버텼다.
우린 모른다! 알아서 해라!
배째라!
결국 눈물 머금고 물러서게 된 건 게임단 측이었다. 배째라는데 정말 배쨀 수는 없지 않은가.
“저희 선수들이 굶주린 혼돈에 가입하게 된 것도 어떻게 보면 이 리그 중단 때문입니다.”
“음… 그런 것치고 스미스는 너무 열중하던데.”
“…….”
태현의 말에 뉴욕 라이온즈 사람들은 시선을 피했다.
사실 그렇게 말하면 할 말이 없긴 했다.
억지로 가입했다고 말하기에는 너무 굶주린 혼돈에 적응을 잘 하고 있었으니까.
“물, 물론 저희 선수들이 익숙치 않은 악역을 연기하느라 이런저런 실수가 있긴 했습니다. 하늘섬 추락 같은 건 진짜 저희가 의도한 게 아니었습니다.”
원래 나쁜 짓도 평소 하던 놈이 잘 하는 법이었다.
태현처럼 평소에 나쁜 짓을 하던 사람은 알아서 선을 조절해 가며 적당히 나쁜 짓을 하지만, 평소에 나쁜 짓을 해본 적 없던 사람이 나쁜 짓을 하게 되면 선을 모르고 팍팍 달리다가 실수를 하게 되는 것!
지금 하늘섬 추락도 대표적인 예시 중 하나였다.
-아무리 악역 컨셉을 잡아도 그렇지 하늘섬을 통째로 추락시키는 건 심하지 않냐?!?!
└스미스가 미친놈이라니까.
└지가 무슨 쑤닝인 줄 알아. 또라이 새끼.
하늘섬 플레이어들+그 밑의 에랑스 왕국 플레이어들 모두를 적으로 돌려버리는 미친 짓!
안 그래도 지금 이미지와 관심 사이를 아슬아슬하게 줄타기하고 있던 뉴욕 라이온즈인 만큼 저런 사건은 민감할 수밖에 없었다.
“믿습니다.”
“…김태현 선수!!”
뉴욕 라이온즈 사람들은 감동했다.
태현이 설마 믿어줄 줄은 몰랐던 것이다.
‘그래! 일류끼리는 통하는 게 있지…!’
스포츠에서 일류 선수들은 공만 교환해도, 혹은 손만 교환해도 서로의 생각을 읽어낼 수 있다는 말이 있었다.
마치 그런 것처럼 태현도 스미스의 진심을 읽어낸 게 분명했다.
게임 내에서는 서로 목숨 걸고 치열하게 싸우지만 밖에서는 이렇게 신뢰를 쌓아나가는 것.
이것이 스포츠 아닐까?
‘뉴욕 라이온즈 놈들도 하늘섬이 정확히 왜 떨어졌는지는 모르는구나. 다행이군.’
하긴 알 리가 없었다.
굶주린 혼돈이 대부분을 파괴하긴 했지만 막타를 친 건 태현이었으니까!
“김태현 선수. 저희는 이번 기회에 좀… 이미지를 갈고 닦으려고 합니다. 솔직히 말씀드리겠습니다. 그 과정에는 김태현 선수가 꼭 필요합니다.”
뉴욕 라이온즈가 하려는 건 이미지 희석이었다.
-스미스나 다른 뉴욕 라이온즈 선수들은 진짜 미친 새끼들이 아니었어요! 게임 밖에서는 다들 서로 친하답니다!
지금 사람들은 뉴욕 라이온즈 선수들에게 ‘앞뒤 못 가리는 미친놈들’이라며 욕을 퍼붓고 있었다.
하지만 뉴욕 라이온즈 선수들과 팀 KL 선수들이 따로 스튜디오에 모여서 웃고 떠들면서, 서로 편하게 욕도 좀 하고 누가 이길지 기싸움도 하고 그런다면?
사람들은 ‘아, 뉴욕 라이온즈 선수들이 앞뒤 못 가리고 시비 거는 미친놈들이 아니라 누가 이길지 정정당당하게 맞붙는 놈들이구나!’라고 생각하게 됐다.
‘그냥 미친 새끼들’에서 ‘악역 맡은 선수들’로 이미지를 희석시키는 것.
그게 바로 뉴욕 라이온즈의 목표였다.
물론 그게 쉽진 않았다. 지금 안 그래도 욕 먹고 있는데 뉴욕 라이온즈 선수들만 스튜디오 보내서 ‘하하 팬들이 저희 욕 많이 하네요’ ‘뭔가 오해가 있는 것 같은데~’ 같은 소리를 했다가는 진짜 욕을 넘어서 벽돌이 날아올 수가 있었다.
악역 맡은 이미지를 굳히려면 선역이 있어야 하는 법.
팀 KL 선수들 중 최소한 태현은 무조건 스튜디오에 있어줘야 했다.
그래야 뉴욕 라이온즈 선수들과 주고받으며 이미지를 연출할 수 있었으니까.
“그렇군. 하긴 스미스가 좀 심하긴 했어.”
“하늘섬을 추락시키다니 너무했죠.”
“맞아. 에랑스 국왕도 죽이고. 참 좋은 분이었는데.”
“그뿐만이 아니에요. 오스턴 왕국도 멸망시켰잖아요.”
쿵짝이 맞는 태현과 이다비의 대화에 뉴욕 라이온즈 사람들은 살짝 억울했다.
‘에랑스 국왕은 네가 죽였잖아…!’
‘그리고 길드 동맹 가장 많이 팬 것도 김태현 선수면서…!’
하늘섬 추락까지야 그렇다 쳐도 에랑스 국왕이나 길드 동맹 관련된 건은 좀 많이 억울했던 것이다.
제안을 들은 태현은 팔짱을 끼고 생각에 잠겼다.
사실, 이제까지의 태현이었다면 바로 거절했을 제안이었다.
-내가 뭐하러 스미스 놈 이미지 챙겨주냐? 미쳤냐? 지 인생 지가 알아서 하라 그래.
하지만 지금의 태현은 조금 달랐다.
게임단을 만들고, 게임단을 운영하고, 선수들을 관리하고, 선수들 밥 차려주고 청소하고….
‘아니 마지막은 아니군.’
…하면서 자신 또한 이 업계의 일원이라는 생각이 조금 든 것이다.
판온 리그가 중지된 지금, 다른 게임단들을 돕는다 생각하고 은혜를 베풀어주는 것도 나쁘지 않았다.
문제는 어떤 방식으로 하느냐?
‘뉴욕 라이온즈만 부르는 건 좀 불공평하고, 다른 게임단 선수들도 부르는 게 좋겠군.’
태현은 이다비에게 속삭였다.
“다른 게임단들도 불러서 이야기하는 건 어떻게 생각해?”
“뉴욕 라이온즈 측에서 싫어하지 않을까요?”
굳이 말하지 않았지만, 뉴욕 라이온즈 쪽에서 저런 관심을 나눠 갖는 걸 좋아할 리 없었다.
자기들이 온갖 돈 투자해서 준비해놨는데 김태현까지야 그렇다 쳐도 다른 게임단 선수들 참가해서 숟가락 들이미는 꼴을 좋아할 리가 없지 않은가.
“알 게 뭐야. 쟤들도 나 하기 싫어하는데 제안한 거잖아.”
“과연 논리적이시네요.”
이다비는 엄지를 들었다.
확실히 맞는 말이었다.
“다른 게임단들…은 엄청나게 좋아하겠죠? 안 그래도 요즘 다들 홍보하느라 엄청 힘들어 보이더라구요.”
이다비는 다른 게임단 계정과 홍보 영상들을 언제나 꾸준히 확인하는 편이었다.
그리고 요즘 다른 게임단들은 정말 힘들었다.
‘굶주린 혼돈 때문에 우리 게임단 이미지 개판됐어요’라고 투덜거리는 뉴욕 라이온즈는 배부른 투정에 가까울 정도로.
일단 조회수는 확보하지 않았는가.
뒤늦게 뛰어든 다른 게임단들은 관심도 못 받고, 굶주린 혼돈에 가입하자니 늦은 거 같고, 그렇다고 또 반 굶주린 혼돈 원정대에 참가하려니 이것도 늦은 거 같고….
관심 좀 가져달라고 늪에서 허우적거리고 있었다.
-오스턴 왕국 수도, 아레네 시 재건 쇼! 텍사스 카우보이즈 선수들이 뭔가 보여드리겠습니다! 환상의 카우보이 쑈!
└…텍사스 카우보이즈 정신나감??
└홍보 담당자 잘라야 하는 거 아닌가??
“그런데 태현 님한테 이득 가는 게 있나요?”
이다비는 고개를 갸웃거렸다.
이다비가 보기에, 저거 나가봤자 태현은 그냥 시간 낭비에 가까웠다.
인기?
지금도 거의 원탑이었다. 반 굶주린 혼돈 원정대의 상징 아닌가.
이미지?
스미스가 바닥을 팔수록 태현은 가만히 있어도 주가가 뛰었다. 요즘은 판온 1에서 태현한테 원한 있던 사람도 그 원한을 꺼내지 못할 정도였다.
-니가 뭘 안다고!
-니가 그래서 김태현보다 레벨 높음?? 니가 그래서 김태현보다 싸움 잘함???
…정도의 광적인 신앙!
“사실 나한테 이득은 크게 없긴 해. 그냥… 나도 이 판의 일원이니까 이 정도는 해야겠다 싶어서.”
“…!”
이다비는 깜짝 놀랐다.
태현의 입에서 이런 소리가 나올 줄이야.
이다비의 반응을 오해했는지, 태현은 망설이듯이 말했다.
“역시 해줄 필요 없나? 그냥 하지 말까?”
“아니요! 하시는 게 좋겠어요.”
이다비는 태현의 손을 꽉 잡고 말했다.
자기 자신만을 챙기는 태현의 모습도 좋았지만, 이다비는 그게 태현의 본모습이 아니라는 걸 잘 알고 있었다.
기회만 된다면 어느 누구보다도 다른 사람을 위할 수 있는 사람이 태현인 것이다.
그리고 이다비는 이런 모습을 이다비 본인뿐만이 아니라 모두가 알아줬으면 했다.
“같이 하죠! 저도 나갈게요.”
“이다비… 억지로 나갈 필요는 없는데.”
“아니요. 제가 같이 나가고 싶은 거예요.”
둘의 대화를 듣다 못한 뉴욕 라이온즈 사람들이 헛기침을 했다.
“으흠. 두 분. 저희 아직 여기 있습니다만.”
둘의 분위기 때문에 차마 끼어들기가 힘들었지만, 더 이상 참을 수가 없었던 것이다.
* * *
“아니 왜 다른 게임단을 부르나?! 정신 나갔나?!”
“김태현 선수가 안 그러면 안 한다고 해서요….”
“…그렇다면 어쩔 수 없지….”
임원진들은 빠르게 납득했다.
그건….
정말 어쩔 수 없지…!
“긍정적으로 생각하자고. 김태현 선수가 제안을 받아준 것만으로도 정말 대단한 일 아닌가?”
“그렇긴 합니다. 솔직히 놀랐습니다.”
“역시 펄리 이사가 정성을 들인 보람이 있나 보군. 아시아 전문가다워.”
어떻게 보면 남 좋은 일 해주는 것이었지만, 뉴욕 라이온즈 내부에서는 아무런 불만이 없었다.
일단 태현이 나와 준다고 약속한 것만으로도 어마어마한 일이었던 것이다.
“잠깐.”
“왜 그러나?”
“저는 김태현 선수를 잘 압니다.”
스카우트 총괄팀장으로 일하고 있는 매킨리가 입을 열었다.
태현과는 몇 번 인연이 있었던 만큼, 다른 사람들도 매킨리의 입을 주목했다.
“그래서?”
“김태현 선수가… 과연 우리 뉴욕 라이온즈를 위해 적절히 선을 조절할까요?”
“…….”
“아, 아니. 방송인데 설마.”
“방송의 선을 지키고서도 우리 뉴욕 라이온즈 선수들 이미지를 더 바닥에 빠뜨릴 수 있습니다.”
“그, 그건 안 돼!”
기껏 방송하는데 김태현 선수가 ‘여러분 뉴욕 라이온즈를 불지릅시다’ 같은 소리라도 한다면…!
“김태현 선수한테 선을 지켜주겠다고 확답을 들어야 합니다!”
“과, 과연….”
“펄리 이사한테 말해서 김태현 선수를 설득하도록 하겠네!”
“그게 가능하겠습니까?”
“이제까지 펄리 이사가 보여준 정성이라면 충분히 가능할걸세.”