소설리스트

나는 될놈이다-1707화 (1,706/1,826)

§ 나는 될놈이다 1707화

랭커들은 벌떡 일어섰다.

지금 굶주린 혼돈과 싸우는 플레이어들에게 있어서 김태현이란 이름이 가지는 무게감은 보통이 아니었다.

빛 그 자체!

“김태현이 에스파 왕국에 왔다면 이거 잘된 일 아닙니까?!”

약탈자 플레이어들 중 신진 랭커 한 명이 기쁜 표정으로 외쳤다.

“….”

“….”

그러나 분위기가 요상했다.

절반에 가까운 랭커들이 매우 복잡미묘한 표정을 지으며 앉아 있었던 것이다.

“왜 그러십니까, 다들? 잘된 일이죠! 굶주린 혼돈하고 싸워서 놈을 몰아낸 다음 이 땅을 도적들의 천국으로 만듭시다!”

“아니. 그렇게 단순한 이야기가 아니야.”

“??”

“저거 말하는 거 보니 판온 2부터 한 놈이네.”

“판온 1부터 한 놈만이 김태현의 무서움을 알 수 있지….”

판온 1때부터 해왔던 랭커들은 고개를 끄덕이며 공감했다.

요즘이야 김태현 이미지가 판온 최고 선수 1위, 판온 인기 선수 1위, 법 없이도 살 선수 1위 같은 느낌이었지만, 판온 1때만 해도 김태현은 그냥 망치 든 미치광이 연쇄살인마였다.

평화롭게 통행세를 걷고 있던 약탈자 랭커들이 김태현 만나서 개처럼 두들겨 맞았던 적이 한두 번이 아니었다.

차라리 전투 직업이면 쓸데없이 싸우기 싫어서 안 건드렸을 텐데, 하필이면 김태현은 제작 직업이라 약탈자 랭커들을 더더욱 끌어당겼다.

그 결과 더욱더 많이 맞았지만.

“어? 그냥 여러분들이 잘못한 거 아닙니까?”

듣고 있던 신진 랭커가 고개를 갸우뚱거리며 말했다.

아무리 약탈자 플레이어라 하더라도 바른 말을 할 때가 있는 것이다.

지금 상황만 보면 아무리 봐도 김태현 잘못이 아니라 약탈자 플레이어들 잘못 아닌가?

“지금 누가 잘못했냐 잘못하지 않았냐를 따지는 자리가 아니야, 신참!”

“맞아. 김태현 불렀다가 굶주린 혼돈한테 맞은 것보다 더 두들겨 맞을 수도 있다는 걸 명심해라.”

“그건 여러분들 이야기 아닙니까? 전 김태현 선수하고 별 악연 없는데요?”

빠르게 손절을 시도하는 신진 랭커들의 말에, 판온 1 때부터 해왔던 약탈자 플레이어들은 격분했다.

“저 저… 저래서 뉴비들은…!”

“하여간 뉴비 놈들이 판온을 망친다니까!”

김태현하고 딱히 부딪힌 적 없는 랭커들 반.

김태현한테 맞은 기억 있는 랭커들 반.

숫자가 팽팽하게 나뉘니 의견이 하나로 좁혀지지 않았다.

‘아니. 그보다 여기 있는 전원 중 절반이 맞았다는 게 더 웃기네. 말이 되는 거야?’

신진 랭커, 메이미는 지금 상황이 어이가 없었다.

굶주린 혼돈한테 몰려 있는 지금 상황을 생각해 보면 무조건 김태현 손을 잡는 게 맞지 않나?

그런데 김태현한테 맞은 기억 때문에(그것도 절반이나) 저런다니.

“그냥 따로 놉시다!”

“안 돼! 너희들 나가면 김태현한테 우리 위치 고발할 생각이지!”

“무슨 미친 개소립니까, 그게?”

“김태현 놈이 너희들을 포섭할 거야! 너희들을 매수할 거라고!”

“저 사람 진짜 정신 나간 거 아니에요?”

요새 지하는 순식간에 아수라장이 되었다. 태현한테 하도 당한 탓에 편집증 비슷한 게 생겨 있었던 랭커들은 한참이 지나고 나서야 간신히 진정할 수 있었다.

“후욱. 후욱. 알겠어. 김태현한테 가서 한번 물어보라고.”

“우리 위치나 전력 절대 먼저 말해주지 말고. 김태현이 유도신문 해도 넘어가지 마. 대답은 최소한만으로 해.”

“아니, 대답을 그냥 하지 마.”

“뭔가 수상하다 싶으면 무조건 입 다물고 로그아웃해.”

“거기 갔다 올 때 미행 붙었나 확인해.”

“김태현하고 대화 끝나면 장비도 벗어. 장비에 뭔가 붙여서 추적할지도 몰라.”

“….”

다다다다 늘어놓는 랭커들의 모습에 다들 경악했다.

미친 거 아니야 진짜?

“저… 근데 질문이 있습니다.”

“뭐지?”

“김태현 선수가 우리하고 손을 잡는 건 확실한 건가요? 우리가 그… 이미지가 좋은 편은 아니잖아요.”

“….”

“….”

그러게?

* * *

“밤까지 기다리자.”

“진짜 굶주린 혼돈의 하수인이 많은데?”

태현과 일행의 이동속도는 생각보다 많이 느렸다.

에스파 왕국은 굶주린 혼돈이 확실하게 지배한 지 오래인 상태.

오스턴 왕국이나 에랑스 왕국보다도 훨씬 상태가 엄격했다.

굶주린 혼돈의 병사들이 주기적으로 순찰을 돌다가 무언가 발견하기라도 한다면 바로 지원을 불렀다.

잠깐의 싸움이라도 벌어지면 상황이 위험해질 수 있으니 더욱더 조심할 수밖에 없었다.

그래도 다행히 휴식할 곳이 없는 건 아니었다.

[<사자자리 도적단의 마을>에 입장합니다!]

[도적들의 마을입니다. 안에서 공격받을 수 있습니다.]

[악명이 높습니다! 추가 보너스를 받습니다!]

[…]

[…]

[…]

어디든 간에 이렇게 숨을 만한 곳은 또 따로 있었던 것이다.

굶주린 혼돈이 지배하고 있는 지금, 이런 도적 마을은 들려서 정보를 얻고 퀘스트를 깨기 좋은 장소였다.

“다들 여관 가서 쉬고 있어. 난 NPC들 돌면서 정보 좀 캐올 테니까.”

태현은 일행을 내버려 두고 나섰다.

전설을 노리는 최고급 화술 스킬을 갖고 있는 데다가 명성/악명 모두 판온에서 따라오기 힘들 정도로 찍은 태현이었다.

눈빛만 마주쳐도 NPC한테서 정보를 얻어낼 자신이 있을 정도였다.

‘근데 야만 부족들 위치를 알고 있는 놈들이 없군. 도적놈들이라 그런가?’

귀족 NPC들을 상대하다가 도적 NPC들을 상대하니 좀 정보의 질이 많이 떨어졌다.

-야만 부족? 처음 들어보는데. 그보다 네 장비가 비싸 보이는… 허억! 악명이… 제가 사람을 몰라보고 죽을죄를 지었습니다!!! 대륙 제일의 악당이시군요!

-야만 부족? 물론 알지. 이 지도를 사라고. 이 지도에 위치가… 허억!!! 악명이!! 제가 사람을 몰라보고 죽을죄를 지었습니다! 가짜 지도를 드려서 죄송합니다!!!

물론 정보 얻는 것 자체는 별로 어렵지 않았지만 계속 이래서야….

“김태현 선수. 김태현 선수.”

“!”

태현은 뒤에서 말을 걸어오는 플레이어의 모습에 놀랐다.

“뭐야. 플레이어도 있었나? 여기 다 NPC만 있는 줄 알았는데.”

“굶주린 혼돈을 피해서 도망친 선량한 플레이어들도 이 주변에 많습니다!”

“그래?”

태현은 의아해했다.

‘선량한 플레이어들이 보통 이런 곳에 들어오나?’

선량한 플레이어들이면 다른 곳에 숨지 굳이 이런 도적 마을에 들어갈 것 같진 않은데….

애초에 악명 스탯부터 시작해서 도적 마을에서 지낼 수 있는 건 나름 거기에 어울리는 사람뿐인 것이다.

“저희는 지금 김태현 선수와 함께 굶주린 혼돈과 맞서 싸우려고 모여 있습니다!”

“오, 그래? 고맙군. 그럼 오스턴 왕국으로 가서 합류하지.”

“아닙니다! 저희는 여기! 여기 에스파 왕국에서 싸우고 싶습니다! 에스파 왕국의 땅 한 뼘도 굶주린 혼돈에게 내주고 싶지 않습니다!”

“에스파 왕국 영주도 아니지 않나?”

태현은 더욱더 의아해했다.

영주면 자기 땅 같은 소리가 나올 법한데, 플레이어면 에스파 왕국 영주도 아닐 거고….

“에스파 왕국 플레이어로서 말입니다!”

“그래? 대단하군. 보통 자기 왕국을 그렇게까지 아끼는 사람은 드문데.”

‘휴.’

약탈자 플레이어는 안도의 한숨을 내쉬었다.

일단 1차는 어떻게든 성공한 것 같았다.

-우리 이름은 절대 말하지 말고, 에스파 왕국에 있는 랭커들이라고 해.

-야! 도적들인 것도 빼! 도적이 뭐가 좋다고!

-그냥 의로운 플레이어들이라고 하자!

약탈자 랭커들은 태현에게 접촉하기 전, 자기들의 계획이 가진 문제점을 깨달았다.

그건 바로 태현이 OK 해줄지 알 수 없다는 것이었다.

절반 넘게 김태현한테 맞은 적 있는데 ‘우리 같이 싸우자!’ 하면 김태현 입장에서는 ‘어디서 개수작이냐’ 같은 반응이 나오는 게 당연하리라.

‘절대 들키면 안 돼!’

약탈자 플레이어들은 다들 장비를 바꿔끼고 얼굴에 변장 세트를 달고 서로 가명까지 준비할 정도로 철저하게 대비했다.

-이렇게까지 해야 하나요? 안 해도 김태현이 다 알진 못할 것 같….

-닥쳐 이 자식아! 김태현한테 당한 적 없다고 대충할 거면 자리에서 꺼져!

-알, 알겠습니다. 진정하세요. 제대로 하면 되잖아요.

어찌나 열심히 변장하는지 굶주린 혼돈 상대할 때보다 더 정성을 들이는 것 같았다.

“그러면 한번 가서 만나보도록 하지.”

“예? 지금요?”

“문제 될 게 있나?”

“아, 그건 아닌데….”

“혹시 굶주린 혼돈에 가입해 놓고 날 속이려고 하는 건 아니겠지?”

태현의 농담에 약탈자 플레이어는 고개를 붕붕 저었다.

“아닙니다! 절대!”

“그래. 안내해 달라고.”

꿀꺽-

약탈자 플레이어는 온몸을 뻣뻣하게 긴장시키며 걸어나갔다.

계획대로 태현을 섭외하는 데 성공했지만 더욱더 무서워졌다.

…만약 약탈자 플레이어인 게 들키면 김태현이 날 죽일까??

“이, 이쪽으로….”

[<골목길 지하통로>를 발견합니다!]

[<도적과 칼 비밀술집>을 발견합니다!]

도적들의 마을답게 복잡하게 나 있는 골목길 곳곳에 숨겨져 있는 식당이나 술집들이 있었다.

보통 약탈자 플레이어들은 이런 곳에서 자주 휴식을 취하곤 했다.

평소 원한을 많이 산 만큼 공공연한 곳에 있는 여관이나 술집에서 맥주 들이켜며 안주 까먹고 있으면 뒤에서 칼 맞기 쉬운 것이다.

[요리 스킬이 매우 높습니다! 자리의 요리들을 꿰뚫어 봅니다!]

[음식들의 수준이 매우 낮습니다. 먹을 경우 낮은 확률로 상태 이상…]

[음식들의 완성도가 매우 낮습니다.]

[…]

[…]

‘흠. 주인장 쫓아내고 내가 요리하겠다고 하고 싶군.’

타고난 제작 직업 플레이어답게, 태현은 비밀주점 안의 상황이 상당히 신경 쓰였다.

대장장이 랭커가 광장을 지나가다가 초보자 하는 걸 보고 괜히 오지랖 떠는 게 다 이유가 있는 것이다.

그냥 두고 보기가 힘들다!

펑!

“?”

폭죽 터지는 소리와 함께 플래카드가 비밀주점 천장에 걸렸다.

<김태현 선수 환영해요!>

“김태현 선수! 영광입니다! 팬입니다!”

“정말 모든 경기를 다 챙겨봤습니다! 저번에 그 뭐시냐! 그, 적 선수들 이렇게 저렇게 다 죽여버리고 이겼던 경기 참 좋았습니다!”

팬치고는 칭찬하는 어휘가 상당히 빈곤했다.

하지만 틀린 말은 아니었다. 대부분의 경기에서 적 선수들 이렇게 저렇게 죽이고 이기긴 했으니까.

물론 그런다고 태현이 속진 않았다.

‘얘네들은 자기들이 얼마나 수상하게 생겼는지 모르는 건가?’

약탈자 플레이어들은 아무리 아닌 척을 해도 티가 났다.

장비부터 시작해서 겉모습은 물론이고 하는 분위기까지.

선량한 일반 플레이어들 패다가 장비 벗고 ‘오해입니다! 저는 아무 짓도 안 했어요!’ 같은 소리를 해봤자 태현한테는 안 먹히는 것이다.

게다가 이런 마을, 이런 술집에서 저렇게 익숙하고 편안하게 있으면서 무슨 위장이란 말인가.

“너희 약탈자 플레이어지?”

“….”

“…무, 무, 무슨 소리세요?”

자리에 있던 사람들은 당황해서 손을 내저었다.

태현은 술집 주인 NPC한테 물었다.

“얘네 약탈자 맞지?”

‘대답할 리가 없….’

[화술 스킬이 매우 높습니다!]

[악명이 매우 높습니다!]

[…]

[…]

[…]

[설득에 성공합니다!]

-맞, 맞습니다! 약탈자들이에요!

술집 주인은 바로 약탈자 플레이어들을 배신 때렸다.

이제까지 이 가게를 애용해주면서 친밀도를 쌓아 올린 약탈자 플레이어들은 황당하다는 표정으로 술집 주인을 쳐다보았다.

“저… 저런 배신자가…!”

-나도 살아야 할 거 아닙니까!! 저는 아무것도 못 봤습니다! 저놈들을 알아서 잡아가십시오!!

술집 주인은 재빨리 몸을 숙이고 숨었다. 감탄만 나오는 반응 속도였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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