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 나는 될놈이다 1704화
스미스는 경악했다.
다른 플레이어들도 경악했다.
팀 KL 선수들도 경악했다.
‘아니 태현아 이건 좀 너무한 거 아니냐!?’
물론 스미스가 지금 필립 3세의 목을 따면 엄청나게 위험해진다는 것 정도는 다들 알고 있었다.
안 그래도 막강해진 스미스였다.
필립 3세의 목을 따서 굶주린 혼돈한테 보상을 받으면 얼마나 강해질지 상상도 가지 않았다.
…그렇지만 그래도 그렇지 진짜 이렇게 망설이지 않고 자기가 필립 3세를 푹푹 찔러버릴 줄이야!
‘보고 있는 사람들이 태현이 본색 알아차리는 거 아니겠지?’
최상윤은 괜히 불안했다.
물론 필립 3세가 어그로를 끌었던 걸 생각해 보면 태현이가 안 찌를 리가 없었다.
하지만 그래도 그렇지 지금 같은 상황에서 찌를 건 없지 않은가.
남들 안 볼 때 몰래 찔러도 되는데…!
‘이미지 신경 좀 쓰자! 야! 너 때문에 불리해도 굶주린 혼돈에 안 가입하고 원정대 가입하는 놈도 있는데…!’
“김태현 선수 미치신 거 아닙니까!?”
스미스가 격노해서 따졌다.
이런 짓은 쑤닝이나 스미스 같은 사람이 할 일이지 태현이 할 일이 아니었다.
어떻게 저런 비열한 짓을!
“저한테는 굶주린 혼돈에 가입했다고 욕하면서 김태현 선수도 하는 짓이 똑같지 않습니까!”
“아니. 그건 다르지 새끼야. 선 넘지 마라.”
옆에서 듣던 팀 KL 선수들이 어이없어했다.
정확히 말하자면 스미스가 굶주린 혼돈 가입해서 욕한 게 아니라, 굶주린 혼돈에 가입해서 ‘큭큭 대륙의 모든 놈들을 정복해 주겠다’ 같은 짓을 하니까 욕하는 것 아닌가.
퀘스트 깨려고 NPC 죽이냐 안 죽이냐는 문제는 아무런 상관이 없었다.
“다들 오해하지 마라.”
태현은 손을 뻗으며 말했다.
“내가 멋대로 찌른 게 아니라, 필립 3세가 부탁했다.”
“…….”
“…….”
최상윤과 케인은 할 말을 잃었다.
‘케인이나 할 법한 변명을 하네.’
‘나도 저런 변명은 안 하겠다.’
스미스도 어지간히 어이가 없었는지 무기를 휘두르는 걸 잊고 빤히 쳐다보았다.
-오해하지 마라… 모험가들이여. 내가 부탁한 게 맞다.
필립 3세가 희미해져가는 목소리로 말했다. 누가 봐도 생명이 얼마 남지 않았다는 게 느껴졌다.
“!!!”
“진… 진짜였어?”
“뭐냐. 케인. 지금 내 말 의심한 거냐?”
“아, 아니. 의심한 게 아니라.”
케인은 급히 변명했다.
* * *
스미스가 왕족을 제물로 바쳐서 만든 장막을 펼치고 선수들을 압도하고 있을 때, 필립 3세는 태현을 불렀다.
-아키서스 교단의 교황이여.
“지금 절 찌르셔봤자 아무런 이득이 없다는 걸 명심하셔야 합니다.”
-…그 정도로 정신이 나가진 않았네. 쿨럭.
필립 3세는 다행히 태현을 찌르지 않았다.
사람이 죽기 직전이 되면 욕심이 없어지고 정신이 명료해지기 때문일까.
자신의 왕관을 누군가 노리고 있다고 길길이 날뛰던 필립 3세였지만, 죽음을 앞두자 명석한 판단력이 돌아왔다.
-자네가 해줘야 할 일이 있네. 나를 찌르게.
“알겠습니다.”
푹!!!
태현은 필립 3세가 마저 설명할 시간도 주지 않고 행동에 나섰다.
굶주린 혼돈이 감탄할 정도로 과감한 결단력이었다.
필요하고 해야 한 일이라면 1초도 고민하지 않는 행동력!
* * *
-…쿨럭. 잘 했네. 아키서스 교단의 교황이여.
필립 3세는 희미해져가는 목소리로 말했다.
-저 타락한 굶주린 혼돈의 기사한테 내 목을 주느니, 자네가 내 숨통을 끊는 게 맞아….
“다들 들었겠지?”
“태현아. 제발 보는 눈 많으니까 그렇게 당당하게 검 들고 그러지 마라….”
최상윤은 안절부절못하며 말했다.
너무 당당하게 외치면 옳은 일을 해도 미친놈 같아 보일 때가 있는 것이다.
-생각해 보면 많은 일들이 있었다. 내 자식들은 배은망덕하게도 날 배신하고 내 왕관을 뺏으려고 했지. 하지만 이제 와서 보니 내가 너무 가혹한 게 아닌가 싶군….
“아니. 그건 아니죠. 폐하를 암살하려고 했는데.”
[설득에 성공합니다!]
[필립 3세의 친밀도가 오릅니다!]
[왕국 내 평판이…]
[……]
죽어가는 와중에도 필립 3세는 태현의 말에 흐뭇해했다.
-그렇지? 그놈들이 잘못한 거지?
“굶주린 혼돈의 힘을 받아들이는 것부터 시작해서 그 정도면 무조건 처벌을 해야죠.”
-그래… 하지만 죽음을 거부하고 언데드로서의 삶을 받아들인 것은 내 과욕이었다. 왕국을 혼란에 빠뜨릴 수 없어서 언데드로서의 삶을 받아들였지만, 오히려 왕국을 더 고통에 빠뜨렸으니.
“뭐 이러니저러니 했어도 왕국은 똑같았을 것 같은데….”
태현은 중얼거렸다.
필립 3세가 쓰러졌어도 왕국은 비슷하게 혼란스러웠을 것이다.
왕자들부터 시작해서 귀족들이 서로 내가 왕이니 네가 왕이니 하며 싸웠을 테니까.
-굶주린 혼돈과 맞서 싸워야 하는 위중하고 긴급한 시기에, 내 탐욕으로 일을 망친 것에 대해 사과하겠네.
[필립 3세가 당신에게 에랑스 왕가의 영광을 계승합니다.]
[에랑스 왕가의 권리가 당신에게 이어집니다.]
[<에랑스 왕가의 핏줄>이…]
[<에랑스 왕가의 가호>가…]
[……]
[……]
파아아아앗!
태현은 바로 용서했다. 용서를 하지 않을 수가 없는 버프였다.
“용서하겠습니다.”
-고맙네….
[용서로 인해 명성이 크게 오릅니다!]
[에랑스 왕국 내 평판이…]
[……]
[……]
-마지막으로 부탁하겠네. 굶주린 혼돈을 왕국에서 몰아내주게. 저 타락한 자들이 왕국의 백성들을 괴롭히지 못하도록 해주게!
<왕의 유언-에랑스 왕국 퀘스트>
유력한 왕족들과 귀족들이 쓰러지고, 마지막 왕인 필립 3세마저 쓰러진 지금, 에랑스 왕국은 그 어느 순간보다 어두운 운명이 기다리고 있다.
남은 영주들이 굶주린 혼돈에게 무릎을 꿇더라도 결코 항복하지 말라. 왕의 유언을 짊어지고 나아가라!
보상: ?, ???, ????
<왕가의 보물-에랑스 왕가 퀘스트>
왕가에 내려오는 보물들은….
…….
…….
<왕가의 핏줄-에랑스 왕가 퀘스트>
굶주린 혼돈은 남은 왕가의 핏줄들을 완전히 제거하려고 하고 있다.
이들을 보호해서 원정대에 안전하게 참가시킨다면….
…….
…….
[에랑스 국왕, 필립 3세가 영원한 안식에 빠져듭니다!]
[레벨 업 하셨습니다!]
[레벨 업 하셨습니다!]
[레벨 업 하셨습니다!]
‘잠깐. 국왕 죽였다고 오른 거 아니지?’
[카르바노그가 지금 왕가의 마지막 의무와 영광을 이어받아서 그런 거라고 말합니다.]
‘휴. 다행이군.’
필립 3세 찔러서 레벨 업 한 거였으면 좀 기분이 미묘해졌을 것 같았다.
[제국의 후계자 스탯이 크게 오릅니다!]
[대륙의 왕관들 중 세 개를 모았습니다. 당신의 명성이 더욱 더 퍼져나갑니다.]
[굶주린 혼돈이 당신을 최우선적으로 노리기 시작합니다.]
‘…슬슬 게임이 숨막힐 정도로 어려워지기 시작하는군.’
[화술의 극한 퀘스트가 갱신됩니다!]
<화술의 극한-최고급 화술 스킬 퀘스트>
전설적인 경지에 이르는 것은 어떤 스킬이든 쉽지 않지만, 화술 스킬이라면 특히 그렇다.
당신은 수많은 존재들을 속이고, 분노에 빠뜨리고, 설득하면서 혀의 달인이 될 수 있었다.
하지만 전설적인 경지가 되기 위해서는 더욱더 위대한 업적들이 필요하다.
다음과 같은 적들 상대로 어려운 난이도의 화술 스킬을 성공시켜라!
(악마 공작: 1/1)
(드래곤: 1/1)
(굶주린 혼돈의 군단장: 1/1)
(상급천사: 1/1)
(국왕: 1/1)
보상: ?, ???
“…….”
태현은 놀랐다.
‘아니, 이걸 깼네?’
스스로도 잊고 있었던 미친 난이도의 전설 퀘스트.
화술 스킬 직업 퀘스트였지만, 그 상대가 너무 어마어마해서 ‘이건 미뤄둬야겠군’ 하고 잊었던 것이다.
그런데 오늘, 필립 3세를 상대로 마지막 목표를 달성해 버렸다.
태현 스스로도 놀라울 수밖에 없었다.
[최고급 화술 스킬이 크게 오릅니다!!]
[스킬 <만물의 소리를 들어라>를 얻습니다.]
[잊혀진 존재의 목소리들이 더욱 더 강해집니다. 당신이 들을 수 있는 확률이 올라갑니다.]
[명성이…]
[……]
[……]
‘최고급 화술 7, 92%!’
어마어마하게 올라가는 화술 스킬 경험치와 함께 다음 퀘스트가 태현 앞에 나타났다.
<화술의 극한-최고급 화술 스킬 퀘스트>
화술 스킬에 대해 잘 모르는 자들은 화술 스킬이 혀를 화려하게 놀리는 기술이라고 생각한다.
하지만 진정한 화술 스킬은 말하는 것이 아니라 듣는 것에 있다.
당신은 이제까지 많이 말해왔지만, 이제는 들을 시간이다.
먼 옛날부터 존재했던 자들의 목소리를 들어라!
보상: ?, ????
‘특이한 스킬에, 특이한 퀘스트군.’
<만물의 소리를 들어라>
잊혀진 존재들의 소리를 들을 수 있는 확률이 올라갑니다.
이번에 전설 퀘스트를 깨고 얻은 보상은 상당히 특이했다.
패시브 스킬에, 화려하지도 않고, 얼핏 보면 시시하기까지 했다.
거기에 이어지는 퀘스트도 알쏭달쏭한 감이 강했다.
하지만 태현은 실망하지 않았다.
‘이게 아키서스 직업 퀘스트도 아니고, 화술 전설 후반부 퀘스트인데 쓸모없는 퀘스트일리가 없다.’
직감이 이 퀘스트의 가치를 말하고 있었던 것이다.
[화신의 길 퀘스트가 갱신됩니다.]
<화신의 길-아키서스의 화신 직업 퀘스트>
아키서스의 금제를 견뎌낸 당신의 영혼은 더욱더 순수해지고 강력해지고 있다.
하지만 아키서스의 화신이 위대하다는 것을 증명하기 위해서는 끊임없이 새로운 과업을 해내야 한다.
전설 등급 퀘스트 세 개를 해결함으로서 그 능력을 증명하라!
보상: ?, ??, ????
[퀘스트를 클리어했습니다.]
[<아키서스 축복의 룰렛>이 발동합니다.]
[퀘스트를 성공적으로 해냈습니다. 룰렛에 추가 보너스를 받습니다.]
[퀘스트의 난이도가 높았습니다. 룰렛에 추가…]
[……]
[……]
“!”
마치 도미노가 연달아서 무너지는 것처럼, 한 번 전설 퀘스트가 깨지자 막혀 있던 퀘스트들이 연달아서 달성됐다.
아키서스의 화신 직업 퀘스트인 화신의 길 퀘스트도 클리어!
촤르르르륵-
다음 메시지창을 보기도 전에 룰렛이 돌아가기 시작했다.
‘<전설 등급 검술 스킬> 한 번만 더 주면 안 되나? 스미스 놈한테 한 방 먹이고 갈 수 있을 것 같은데….’
번쩍!
놀랍게도 룰렛은 다이아몬드처럼 번쩍이는 칸에 멈췄다.
<전설 등급 검술 스킬>의 등급인 다이아몬드 칸!
“!!”
그러나 그 칸은 <전설 등급 검술 스킬>의 칸이 아니었다.
* * *
“스미스, 우냐?”
“설마 우는 거 아니지?”
“…….”
콰콰콰콰콰콰콰콰쾅!
[굶주린 혼돈의 힘이 대지를 찢어발기고 균형을 무너뜨립니다!]
“으아악! 취소!”
“야, 그런다고 죽은 왕이 살아 돌아오냐! 추하다!”
필립 3세가 태현의 손에 쓰러지고, 스미스가 충격 받은 것 같자, 플레이어들은 스미스를 도발했다.
그러나 스미스는 제대로 열이 받은 것치고는 아주 성실하고 침착하게 돌진을 재개했다.
길을 막던 랭커들은 말 그대로 전차에 짓눌리는 기분을 느끼며 뒤로 물러나야 했다.
“김태현!! 슬슬 튀자!! 필립 3세 확실히 죽었지?”
“이제 죽었으니까 튀어도 되잖아!”
“도망치게 내버려 둘 것 같습니까!!!”
스미스는 사납게 외쳤다.
평소 어지간해서는 감정 표현을 잘 하지 않던 스미스였지만 이번에는 아주 제대로 열이 받은 것이다.
‘솔직히 나였어도 열 받았겠다.’
‘부모 욕 안 나오는 게 대단한 거지.’
이렇게 된 이상 스미스 입장에서는 여기 있는 팀 KL 선수들을 최대한 많이 박살 내야 그나마 본전이었다.
죽인다!
“스미스.”
“?”
“미안하다.”
“…잠….”
그 사과에 스미스는 급격히 불안해졌다.
[<아키서스의 차원 추방>이 시전됩니다.]
[굶주린 혼돈의 힘으로 저항합니다!]
[저항에 실패합니다.]
[굶주린 혼돈의 가호가 저항합니다!]
[저항에 실패합니다.]
‘아니!’
스미스는 자신도 모르게 굶주린 혼돈한테 따졌다.
지금 장난하나?!