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 나는 될놈이다 1695화
그러나 몇몇 파티장들은 쑤닝의 의견을 그럴듯하게 여겼다.
“이세연 님. 물론 쑤닝이 쓰레기 같은 놈이긴 하지만, 쓰레기에게는 쓰레기만의 후각이 있습니다.”
“맞습니다. 쑤레기… 아니, 쑤닝이 수상함을 느낀 걸 보면 무언가 있을지도 모릅니다.”
온갖 인성질과 정치질, 음모로 길드 동맹의 수장이 된 사람 아닌가.
몇몇 파티장들은 쑤닝의 그 쓰레기 같은 인성을 믿었다.
원래 성질 나쁜 약탈자 플레이어들도 서로 잘 알아보지 않던가!
<필립 3세의 전언-에랑스 왕국 퀘스트>
굶주린 혼돈의 습격을 당한 필립 3세는 아키서스 교단의 교황을 급히 찾고 있다.
어떤 목적에서 찾고 있는지는 알 수 없지만, 신중하게 선택해야 할 것이다.
지금 필립 3세가 어떤 반응을 보일지는 아무도 알 수 없으니….
보상: ?, ???
‘아. 갑자기 불안해지는데.’
퀘스트창까지 보자 이세연도 살짝 불안해졌다.
무엇보다 지금 필립 3세의 상태가 불안정하다는 게 컸다.
안 그래도 언데드로 부활해서 불안정한데 암살까지 당했으니, 오늘은 인자해도 내일은 폭군이 될 수 있었다.
‘김태현한테 빨리 오라고 해서 불렀는데 갑자기 필립 3세가 공격하면 걔는 날 의심할 거야.’
눈에 선명하게 보였다.
-이… 이세연! 네가!
-아니거든!
“일단 신중하게 접근하긴 해야겠어.”
-용서할 수 없다. 폐하를 위해 복수를!
[목련꽃 기사단장이 검을 뽑아 들고 일어섭니다!]
-더 이상 참을 수 없다, 굶주린 혼돈 놈들아!
[은방울꽃 기사단장이…]
[……]
[……]
“???”
“어? 필립 3세 지금 쉬어야 하지 않아?”
자리에 있던 플레이어들은 당황했다.
물론 굶주린 혼돈의 암살에 당할 뻔했으니 저렇게 열이 받는 것도 이해가 갔다.
하지만 이제까지 정면대결을 피하고 잘 숨어 있지 않았던가.
왜 이제 와서 이래?
-폐하. 더 이상 참을 수 없습니다. 굶주린 혼돈 놈들을 모조리 베어버리겠습니다.
-기사들이 한마음 한뜻으로 일어선다면, 굶주린 혼돈에 넘어간 자들도 감히 대항하지 못할 겁니다!
-그러도록… 해라….
필립 3세는 고개를 끄덕였다. 이세연이 보기에는 아무리 봐도 정상 상태가 아니었다.
<기사들의 복수-에랑스 왕국 퀘스트>
필립 3세가 쓰러지자, 그 밑의 기사들은 더 이상 인내할 수 없게 되었다.
기사들은 깃발을 들고 굶주린 혼돈과 맞서 싸울 것이다.
에랑스 왕국의 기사들이여 일어나라!
보상: ?, ???
“퀘스트가 생각보다 커지는데….”
“위험하지 않을까요? 지금 부딪히는 건?”
이세연은 고민했다.
지금 가장 옳은 선택은?
“일단은 퀘스트에 합류한다. 위험해지면 그때 이탈해도 되니, 그때까지는 퀘스트를 진행해.”
여기 필립 3세 진영에 있는 NPC들을 그냥 버리는 건 너무 아까운 일이었다.
과연 굶주린 혼돈에 맞서서 어느 정도까지 싸울 수 있을지는 모르겠지만….
‘김태현이 굶주린 혼돈한테 효과적으로 데미지를 입혀야 하는데.’
이세연은 지금 굶주린 혼돈 공략 퀘스트를 크게 두 진영으로 나눠서 생각하고 있었다.
이세연이 있는 쪽의 원정대는 굶주린 혼돈의 공격을 받아내고 물고 늘어지는 탱커 역할.
그리고 김태현이 있는 쪽의 원정대는 그 사이 굶주린 혼돈의 급소를 파괴하고 돌아다니는 딜러 역할.
에랑스 왕국 기사단장들의 무모한 퀘스트에 참가한 데에는 저런 이유도 있었던 것이다.
‘믿는다. 김태현.’
* * *
-주인이여! 과연 이게 옳은 선택인가!?
-이런 시국에 하늘섬으로 가는 게 옳은 선택입니까!?
용용이와 흑흑이가 비명을 질렀다.
“다들 미안하다.”
[굶주린 혼돈의 괴조들이 공격을 시작합니다!]
굶주린 혼돈의 침공이 시작되고 나서 대륙과 바다로, 혹은 하늘로 연결되어 있는 곳들은 모두 이동 난이도가 급상승했다.
배를 타고 가면 바다의 괴물들이.
날아서 가면 하늘의 괴물들이.
그나마 하늘섬은 중앙 대륙보다는 좀 상황이 낫긴 하지만 굶주린 혼돈의 세력이 날뛰는 건 마찬가지였다.
지금도 하늘섬으로 가는 공중의 길목마다 몬스터들이 득시글거리고 있었다.
[굶주린 혼돈의 비명이 용용이를 타격합니다!]
[이동 속도가 느려집니다!]
[용용이의 마법에 페널티가…]
[……]
지상에서의 싸움과 공중에서의 싸움은 그 성격 자체가 달랐다.
발을 땅에 붙이고 싸울 때는 어지간한 공격은 다 피하거나 무시하고 들어가도 됐지만, 공중에서 싸울 때는 태현보다 태현의 탈것을 먼저 생각해 줘야 했다.
즉 용용이나 흑흑이에게 날아오는 공격을 태현이 막아줘야 했던 것이다.
“큭!”
[급소를 파고드는 깃털이 시전됩니다!]
[신성 권능으로 저항에 성공합니다!]
[……]
[……]
태현은 흑흑이에게 날아오는 공격을 그냥 자기 몸으로 막았다.
어차피 회피력에 각종 아이템, 스킬까지 있으니 흑흑이가 맞는 것보다 태현이 맞는 게 더 나았다.
-주인님!
감동한 흑흑이가 외쳤다. 태현은 곧바로 화답해줬다.
“넌 인마 왜 이렇게 못 피해!”
-…죄송합니다.
거대한 대머리독수리처럼 생긴 굶주린 혼돈의 괴조들은 영악하게 움직였다.
구름에 숨어 있다가 튀어나오는 놈들부터 시작해서 태양을 등지고 날아오는 놈들까지.
무리를 지어서 사냥감을 노리는 데에 아주 특화된 놈들이었다.
“태현 님. 같이 싸우게 해주세요!”
뒤에 있던 이다비가 다급하게 외쳤다. 그러나 태현은 고개를 저었다.
“아니. 오지 마!”
지금 태현은 가장 앞에서 떨어진 채로 움직이고 있었다.
만약 적들이 나타날 경우 태현이 어그로를 끌기 위해서였다.
원래라면 이 역할은 케인이 맡아야 할 역할이었지만, 이번에는 태현이 맡았다.
공중에서의 싸움은 워낙 변수가 많았기에 불안했던 것이다.
태현이 워낙 딜러로서의 이미지가 강하긴 했지만 마음만 먹으면 탱킹도 충분히 가능했다.
이렇게 태현한테 어그로 끌린 상황이 차라리 통제하기 쉬웠지, 뒤에 있는 일행까지 싸움에 들어가면 그때부터는 진짜 앞일을 알 수 없는 난전이 벌어졌다.
“하지만… 그러면 케인이라도 보낼게요!”
“?!”
옆에 있다가 갑자기 들어가게 된 케인은 기겁해서 이다비한테 속삭였다.
“잠, 잠깐. 나 자신 없는데….”
지금 사방에서 현란하게 위아래로 오고 가며 덮치는 괴조들 상대로 김태현처럼 싸우는 건 눈이 여섯 개 달려도 부족한 일이었다.
괴조 공격 피하고, 맞아줘도 될 건 맞아주고, 동시에 반격해서 떨어뜨리고, 너무 위험하다 싶으면 광역기 쓰고….
“케인은 둔해서 안 돼!”
“…야!”
케인은 울컥했다.
물론 케인이 여기서 가장 무거운 갑옷을 입고 있긴 했지만 말이 너무 심하잖아!
“나도 할 수 있어! 할 수 있다고!”
“정말이냐?”
“그래!”
“그러면 와라! <아키서스의 축복>!”
태현은 케인이 참가할 수 있도록 권능을 걸어줬다.
케인은 그 권능의 효과가 끝나기 전에 바람같이 달려들었다.
뭔가 보여주리라!
‘어? 잠깐. 나 왜 들어가고 있냐?’
-끼에에에에엑!
괴조들이 새로운 먹잇감을 발견하고 갑자기 달려들기 시작했다.
날쌔고 날카로운 발톱을 갖고 있는 태현보다, 뭔가 둔해 보이고 먹을 거 많아 보이는 케인에게 몰리는 건 당연한 일이었다.
타고난 탱커의 재능!
“용용아! 케인을 지원해 줘라!”
태현은 용용이 위에서 뛰어서 흑흑이 위로 갈아탔다.
케인한테 오라고 했지만, 태현은 케인이 얼마든지 떨어질 수 있다는 걸 알고 있었다.
용용이가 백업을 해줘야 했다.
-알겠다. 주인이여!
[용용이가 골드 드래곤 고이오노스의 가르침을 떠올립니다.]
[용용이가 힘을 사용해 덩치를 더욱 부풀립니다!]
[<골드 드래곤 현현>을 시전합니다!]
[<골드 드래곤의 위엄>으로 인해 괴조들이 떨기 시작합니다!]
[……]
[……]
콰드득!
용용이나 흑흑이는 원래 와이번 정도 크기로 돌아다녔다.
레벨 천이 넘는 드래곤의 덩치를 유지하기에는 너무 힘이 들었던 것이다.
그러나 골드 드래곤 고이오노스의 가르침으로 인해 용용이는 한층 성장했다.
일시적으로 다 자란 골드 드래곤의 모습을 불러와 변신할 수 있게 된 것이다.
공중에 위엄 넘치는 골드 드래곤이 나타나자 괴조들이 비명을 질렀다.
-크롸롸롸롸롸롸롸!
용용이는 사납게 고함을 지르며 발톱을 휘둘렀다.
다 자란 드래곤은 굳이 마법을 쓰지 않아도 육체 자체가 흉기였다.
-캬오오오!
[불불이가 자극을 받습니다!]
[불불이가 레드 드래곤 니팅거스의 가르침을 떠올립니다.]
[불불이가 힘을 사용해 덩치를 더욱 부풀립니다!]
[<레드 드래곤 현현>을 시전합니다!]
태현의 어깨 위에서 마법을 시전하던 불불이도 자극을 받았는지 날아올라서 레드 드래곤으로 변신했다.
[굶주린 혼돈의 괴조들이 쓰러집니다!]
[굶주린 혼돈의 괴조들이 도망치기 시작합니다!]
[……]
[……]
[……]
두 드래곤은 말 그대로 전장을 지배했다.
용용이가 날개를 휘두르며 괴조를 날려 보내자 불불이는 아가리를 쩍 벌리고 삼켜버렸다.
골드 드래곤과 레드 드래곤이 힘을 합쳐서 싸우는 기묘한 광경이었다.
흑흑이 위에서 그걸 지켜보고 있던 태현은 문득 깨닫고 다급하게 외쳤다.
“힘 작작 쓰고 돌아와라!!”
이제까지의 경험으로 봤을 때, 이 드래곤 소환수들은 한 번 멋지게 싸우면 그 다음부터는 한동안 후유증으로 골골댔던 것이다.
지금 저렇게 쓸 이유가 없는데!
[용용이가 <골드 드래곤 현현>을 취소합니다!]
[불불이가…]
[……]
다행히 두 드래곤들은 태현의 말을 듣고 원래 크기대로 돌아왔다.
흑흑이가 그 모습에 주눅이 든 목소리로 태현에게 물었다.
두 드래곤이 너무 활약한 탓에 흑흑이가 뭘 하기도 전에 싸움이 끝나버린 것이다.
…뭘 하지?
-주인님. 저는 뭘 해야 합니까?
“어? 지금 그냥 구경해도 되지 않나?”
-크흑…!
“아니. 네가 활약할 때는 따로 있을 거야.”
태현은 흑흑이가 울먹거리자 급히 달랬다.
땅바닥이 아니라 허공이라서 태현이 좀 더 친절했다.
“…어, 싸움 다 끝났나?”
달려온 케인도 흑흑이만큼이나 황당해했다.
잔뜩 각오하고 왔는데….
“잘했다. 케인. 네 덕분에 (용용이와 불불이가) 이길 수 있었어.”
“그, 그래? 그런 건가?”
케인은 뭔가 이상했지만 일단 칭찬을 들었으니 만족하기로 했다.
* * *
“김태현 선수를 도우러 가야 해!”
“달려라, 페가수스! 달리라고! 너한테 돈을 얼마나 냈는데!”
하늘섬에도 굶주린 혼돈에 저항하는 플레이어들은 있었다.
그런 플레이어들 중 믿을 만한 사람들에게는 파워 워리어 길드원들이 은밀히 찾아갔다.
태현이 지금 하늘섬으로 향하고 있는데 좀 도와달라고!
플레이어들 입장에서도 대환영이었다.
태현이 누구던가.
가는 곳마다 파괴를 일으키는 파괴의 달인 아닌가!
하늘섬에 온 김에 굶주린 혼돈들도 좀 박살 내주고 가면….
지에인, 삶은계란, 인생은한방 등등 내로라하는 하늘섬 레이스 플레이어들은 파티원들을 이끌고 후다닥 내달렸다.
하늘섬의 공중이 굶주린 혼돈에 의해 차단된 만큼, 태현 일행이 들어오는 것 자체가 만만치 않았던 것이다.
반드시 도와야 한다!
“아, 비켜! 느린 새끼야!”
“네가 느려서 못 뚫는 거겠지! 그러니까 나한테 경주에 지는 거다!”
“지금 말 다 했냐?!”
“그만 싸워 미친놈들아! 지금 한시가 급한데!”
쾅!
“아니 미친놈이 왜 브레이크를 밟아! 돌았냐!!”
“저, 저거 뭐냐??”
“????”
하늘섬 플레이어들은 고개를 들었다.
웬 드래곤 두 마리가 굶주린 혼돈의 괴수들을 박살 내고 있었다.
그걸 본 하늘섬 플레이어들은 자신도 모르게 입을 열었다.
“…드, 드래곤도 탈것으로 팔았나??”