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 나는 될놈이다 1690화
“그러기로 했었지. 잊고 있었군.”
“그걸 어떻게 잊…?”
“적당히 지면 되겠지. 다들 가자고.”
파티장들은 태현의 뒤를 쫓아가면서 생각했다.
‘그런데 지는 척은 어떻게 하는 거지?’
‘그러게?’
채집, 토벌, 수색, 발견, 설득 등 온갖 퀘스트를 해온 랭커들이었지만 지는 척을 하는 퀘스트는 또 처음이었다.
이런 퀘스트는 어떻게 해야 잘 했다고 소문이 나는 걸까?
“저기 적들이 보입니다! 앗. 적이 아니라 이세연 선수.”
“편하게 말해도 듣는 사람 없는데 뭘.”
태현은 멀리서 다가오는 이세연 쪽 원정대 플레이어들을 쳐다보았다.
숫자가 숫자인 만큼 위압감이 상당했다.
[카르바노그가 진짜 공격하는 거 아니냐고 묻습니다.]
‘…이세연이 그럴 사람은 맞긴 한데 아니야.’
[카르바노그가 왜 더 불안해지게 그러냐고 묻습니다.]
* * *
-이런 상황에 아키서스 교단의 교황을 붙잡는 게 과연 맞는 겁니까?
-입 조심하시오, 기사단장! 그대의 충성심을 의심받을 수 있으니!
[목련꽃 기사단이 불만을 가집니다!]
[은방울꽃 기사단이 목련꽃 기사단을 적대시합니다!]
“자기들끼리 싸우잖아?”
“우리한테는 좋은 거겠지.”
이세연 쪽 원정대 플레이어들은 서로 싸우는 NPC들의 모습에 놀라워했다.
이렇게 자기들끼리 싸울 줄은 몰랐던 것이다.
하지만 NPC들 중에서 이쪽 편을 들어주는 NPC들이 나오는 건 나쁘지 않았다.
어떻게든 도움이 되겠지!
“그런데 이세연 선수. 그, 가짜로 싸우는 건 어떻게 해야 합니까?”
“살살 때려야 하나?”
“살살 때릴 수가 있나?”
“좀 안 좋은 장비 끼고 휘두르거나….”
“그냥 대충 이겼다고 하면 안 되나?”
“NPC들 눈이 있는데 그걸로 속이는 건 무리지.”
이쪽도 가짜 싸움을 어떻게 해야 하는지 혼란스러운 건 마찬가지였다.
“몇몇 랭커들께서 시범을 보여주시는 게 좋을 것 같습니다.”
“맞아요. 괜히 대규모로 부딪혔다가 크게 사고 일어날 수 있으니.”
파티장들은 고개를 끄덕이며 의견을 모았다.
원래 이런 가짜 싸움도 잘못했다가는 진짜 싸움이 될 수 있었다.
믿고 맡길 수 있는 랭커들로 벌이는 게 맞았다.
팀 KL 선수들이나 유성 게임단 선수들 같은 랭커들!
“…….”
“…….”
케인과 정수혁, 최상윤은 복잡한 표정으로 서로를 쳐다보았다.
‘진짜 패도 되나?’
‘괜히 팼다가 우리만 맞는 거 아닙니까? 유성 게임단 선수들은 다른 게임단이지만 우리는 같은 숙소인데… 캡슐 나가면 만나게 되어 있잖습니까.’
‘음. 좀 불안하긴 하군.’
“왜 그러십니까 다들?”
“태현이를 공격한다는 게 좀 부담되어서 그렇지.”
“하하하!”
유성 게임단 선수들은 그 말에 빵 터졌다.
팀 KL 선수들이 농담하는 줄 알았던 것이다.
“정말 사이가 좋으시네요. 그런 것까지 걱정할 줄이야.”
“설마 김태현 선수가 이런 것 갖고 보복이라도 하겠어요?”
“…….”
“…….”
케인은 ‘하지 않을까?’라고 말하려다가 멈칫했다.
유성 게임단 선수들이 듣고서 바로 태현한테 일러바칠 수도 있었던 것이다.
“너희는 좋겠다….”
“??”
“공격 시작!! 다들 움직입시다! 팀 KL 선수분들! 김태현 선수를 맡아주세요!”
랭커들이 움직이기 시작했다. 태현 쪽에서도 신호를 받고 달려나왔다.
케인은 마음이 무거운 표정으로 태현을 향해 스킬을 조준했다.
“…노예의 쇠사슬!”
촤르르륵!
“??”
태현은 아예 빗나가게 쏘는 케인의 모습에 의아해했다.
‘이 자식은 이것도 못 맞추나?’
-너 지금 이것도 빗나간 거냐?
-아, 아니야! 일부러 빗나가게….
-말도 안 되는 소리 하지 말고 제대로 쏘지 못해?
“이익…!”
케인은 다시 <노예의 쇠사슬>을 썼다.
‘어차피 맞춰도 안 통할 거면서!’
그러나 스킬은 또 빗나갔다. 태현이 피한 것이다.
케인은 황당하다는 듯이 물었다.
-야 왜 피해!
-그냥 맞아주면 너무 티 나잖아.
-…….
케인은 할 말을 잃었다.
저기 멀리 있는 NPC 놈들이 그런 것까지 신경을 쓴다고??
그런 말도 안 되는….
-빨리 제대로 맞춰라.
“아오! 멈추라고! 움직이지 말라고!”
케인은 <노예의 쇠사슬>뿐만 아니라 각종 스킬을 던져가면서 태현을 맞추려고 노력했다.
그 모습에 다른 쪽에서 싸우는 시늉을 하고 있던 랭커들은 감탄했다.
“와. 실감 나는데?”
“우리도 저렇게 싸워야 하는데.”
스킬이 다 빗나간 케인은 울컥했는지 무기를 들고 달려들었다.
몇 번이고 휘둘러댔지만 당연히 태현에게 통할 리 없었다.
“…저거 진짜로 공격하는 거 아닌가?”
“그럴 리가 없잖아. 너 바보냐?”
“그, 그렇지?”
“한 대만 맞으라고!! 한 대만!! 야! 다들 도와줘! 한 대만 때리게!”
* * *
태현이 이끄는 원정대가 에랑스 왕국 공략을 시작하자, 이제까지 자신만만했던 굶주린 혼돈 플레이어들도 슬슬 흔들렸다.
-굶주린 혼돈 뭐하냐?? 군단 빨리 다 소환해서 김태현 놈 안 막고?
-김태현 놈 막으러 오면 튈걸. 지금 다른 곳에 있는 군단 이쪽으로 빼면 엄청 손해임.
-알 바냐고! 빨리 김태현 놈 막으라고! 그 자식이 지금 어디로 올 줄 알고!
-진정해. 에랑스 왕국이 무슨 동네 마을도 아니고 그렇게 쉽게 무너지겠어? 지금 성하고 도시들이 몇 개인데. 기껏해야 국경지대 성 한두 개 날아간 거잖아.
-이 자식 판온 하루이틀 하냐?! 김태현이 그런 식으로 방심시켰다가 돌격해서 성공한 게 몇 번인데!
-난 굶주린 혼돈 탈퇴한다. 잘 있어라!
-나도 굶주린 혼돈 탈퇴함.
-지금 굶주린 혼돈 탈퇴하는 놈들은 굶주린 혼돈 게시판에서 모조리 탈퇴시켜! 분위기 흐리고 있어!
-지금 솔직히 호들갑 떠는 거라니까.
-네가 김태현을 모르니까 호들갑 떤다는 소리가 나오지! 저번에 뉴욕 라이온즈 놈들 개처맞듯이 처맞은 건 머릿속에서 지워버렸냐?
-저번에 스미스 무서워서 도망갔잖아?
-그게 도망간 거냐? 그냥 상대를 안 해준 거지.
-그거면 도망간 거지!
-여기서 김태현 갖고 떠드는 놈들은 다 멍청한 놈들임. 머리 좋은 놈들은 그럴 시간에 자기 퀘스트 깨고 있다. 이번에 굶주린 혼돈 시련 퀘스트 깨고 있는 사람?
-나 깨고 있다. 그거 너희들도 빨리 깨라.
-그거 난이도 너무 높지 않나? 그걸 깬다고? 그냥 던전이나 필드 도는 게 나아 보이던데.
-그럼 넌 깨지 마라.
-맞아. 깨지 마. 진짜 하나도 안 좋음.
-???
굶주린 혼돈이 도시와 성들을 장악한 덕분에, 그 주변의 필드와 던전들은 플레이어들의 차지가 되었다.
당연히 굶주린 혼돈 쪽 플레이어들은 이때다 싶어서 미친 듯이 던전과 필드를 돌며 경험치를 긁어모으고 있었다.
그런데 시련 퀘스트가 더 낫다고?
-정보 좀 더 풀어봐. 진짜 시련이 더 낫나?
-어떻게 공략하는데??
-야. 에랑스 왕국 대책 세워보자니까… 나 무섭다. 지금 김태현이 점령하고 있는 성이 코앞이야….
-아, 지금 그게 중요해? 퀘스트가 있다잖아! 퀘스트가!
* * *
“김태현 선수! 굶주린 혼돈 쪽에서 수상쩍은 퀘스트가 있습니다!”
“오… 잠깐. 그걸 어떻게 알았지?”
“제가 퀘스트 깨다가 탈퇴했습니다!”
“…….”
태현은 상대방의 당당한 말에 살짝 당황했다.
굶주린 혼돈에서 이탈하는 플레이어들이 꽤 있다고 들었지만, 이렇게 탈퇴해서 원정대까지 가입할 줄은 몰랐던 것이다.
‘아니. 왜 탈퇴하지?’
태현이 할 소리는 아니었지만, 태현이 보기에 이상할 수밖에 없었다.
지금 굶주린 혼돈을 탈퇴할 이유가 별로 없었던 것이다.
하지만 탈퇴한 사람 앞에서 ‘왜 탈퇴함? 굶주린 혼돈이 더 좋지 않음?’ 같은 질문을 던지는 것도 무례하게 들리기 마련.
태현은 고개를 끄덕이며 넘어갔다.
“그래. 무슨 퀘스트인지 말해주겠나?”
<굶주린 혼돈의 시련-굶주린 혼돈 퀘스트>
대륙을 지배한 굶주린 혼돈은 자신을 강하게 섬길 수 있는 권속들을 찾고 있다.
지금부터 당신은 시련을 통과하면서 굶주린 혼돈을 만족시켜야 한다.
힘들고 고된 길이지만 그 끝에는 어마어마한 보상이 있으리라!
보상: ?, ???
‘흔한 퀘스트인데?’
태현은 의아해했다.
악신 교단이든 어디든 가입하면 저런 식으로 나오는 퀘스트들이 종종 있었다.
이것저것 퀘스트 깰 때마다 보상 주고 스킬 주고 하는 식의 퀘스트.
이걸 수상쩍다고 할 이유가 있나?
“퀘스트 보상이 보통이 아닙니다. 이게 난이도가 높긴 한데, 그걸 감안하더라도 막 <굶주린 혼돈의 사원>이나 <굶주린 혼돈의 궁전> 같은 곳들을 연결해서 보내주거든요. 그래서 지금 굶주린 혼돈에 가입한 사람들 중에는 이 퀘스트에 뭔가 있는 게 아니냐는 말이 많습니다.”
세력에 가입하면 나오는 퀘스트들은 기본적으로 수십 개가 넘었다.
그 중 가끔 특수한 목적을 가진 퀘스트들이 있었다.
겉으로 보면 평범해 보여서 다들 관심을 가지지 않지만, 깨다 보면 숨겨진 비밀을 찾게 되고 어쩌다 보면 전설 직업으로 전직도 하게 되는 그런 히든 퀘스트!
[카르바노그가 아키서스의 화신이 되는 것 같은…]
‘시끄럽다.’
“확실히 그건 수상한데.”
“예! 그걸 깨는 다른 놈들을 김태현 선수께서 모조리 처리하면 좋을 것 같습니다!”
굶주린 혼돈에서 탈퇴한 플레이어는 아주 노골적이었다.
내가 탈퇴한 이상 거기 가입한 놈들에게 모조리 엿을 먹이겠다!
태현은 그 정신에 감탄했다.
‘하긴 고맙긴 하군.’
그렇게 좋은 퀘스트면 막는 게 맞았다. 굶주린 혼돈 플레이어들한테 좋은 일 해줄 이유가 없지 않은가.
게다가 지금은 움직일 시간도 있었다.
새로 얻은 성 재정비하고, 에랑스 왕국 NPC들 충성 맹세받고 배치시키고, 이세연이 이끄는 원정대하고 짜고 치면서 시간 끌고 보상받아내고….
이 아슬아슬한 줄타기가 언제까지 갈지는 몰랐다. 필립 3세가 먼저 눈치채고 덤비거나 혹은 굶주린 혼돈 쪽에서 참지 못하고 공격을 시작할지도 몰랐다.
하지만 아직까지는 괜찮다!
“퀘스트 시작 위치가 어디지? 가서 좀 잡아봐야겠군.”
* * *
<악마들의 무덤>.
흉흉한 이름에 걸맞게, 뒤틀린 차원의 틈으로 각종 악마들이 나타나고 언데드들이 일어나는 곳이었다.
랭커 아니면 잘 가지도 않는 곳.
정보에 따르면 굶주린 혼돈의 시련 퀘스트는 여기서 시작된다고 했다.
“여기 오는 플레이어들을 잡으면 되는 거지?”
“그래.”
태현은 팀 KL 선수들을 데리고 매복 중이었다.
원래 일반적으로 퀘스트를 깨는 것보다 이런 PK를 더 잘하는 게 태현이었다.
굶주린 혼돈 시련 퀘스트에 참가하려는 플레이어들을 족치다 보면 알아서 퀘스트를 피하게 되리라.
“저번에 내가 그, 못 때린 건 내가 놀아서가 아니라 혹시라도 맞아서 다칠까 봐… 알지?”
“알겠으니까 조용히 해.”
케인이 주절주절 변명하자 태현은 입을 다물게 했다.
저번에 케인뿐만 아니라 팀 KL 선수들이 전원 살벌하게 달려들어서 태현을 한 대라도 때리려고 했던 모습은 모든 플레이어들의 감탄을 샀다.
저렇게 실감 나게 싸울 줄이야!
물론 연기가 아니었다. 하도 태현이 피하니까 ‘이번 기회에 한 대만 때려보자!’ 하고 다들 눈이 돌아간 것뿐.
파아앗!
[굶주린 혼돈의 조각을 갖고 있습니다.]
[퀘스트에 참가할 수 있습니다!]
<굶주린 혼돈의 시련-굶주린 혼돈 퀘스트>
대륙을 지배한 굶주린 혼돈은 자신을 강하게 섬길 수 있는 권속들을 찾고 있다.
지금부터 당신은 시련을 통과하면서 굶주린 혼돈을 만족시켜야 한다.
힘들고 고된 길이지만 그 끝에는 어마어마한 보상이 있으리라!
보상: ?, ???
“…???”
태현은 퀘스트창에 의아해했다.
…왜 나한테도 뜨냐?