소설리스트

나는 될놈이다-1687화 (1,686/1,826)

§ 나는 될놈이다 1687화

“빨리 달려!”

“시간 내에 도착해야 한다!”

모처럼 잠잠했던 국경지대에 새로운 폭풍이 불기 시작했다.

이제까지 크게 문제를 일으키지 않고 조심스럽게 돌아다니던 원정대 파티들은 태현의 연락을 받고 빠르게 모이기 시작했다.

산에서, 강에서, 평야에서, 지하에서 뛰쳐나와 구름처럼 모이는 파티들.

태현이 이끄는 원정대의 놀라운 점은 이만한 규모인데도 모이는 데에 별로 시간이 걸리지 않는다는 점이었다.

대형 길드를 굴려본 사람이라면 누구나 알았다.

사람들을 모으는 게 얼마나 귀찮고 어려운 일인지.

-길드원 여러분! 적들의 침공으로 인해 공성전을 해야 합니다! 수비를 위해 XX일 XX시까지 모여 주십시오!

-아 내 퀘스트 해야 하는데!

-모이면 골드 주나요?

-이번에도 우리 화살받이 시키고 또 랭커들만 꿀빠는 거 아니야? 저번 길드 방송도 랭커만 나오던데.

-참가하는 게 호구라니까. 야. 참가하지 말자.

-…참가 안 하는 놈들은 모조리 로그아웃시켜버릴 테니까 참가해라.

-옳지! 역시 시커먼 속셈을 드러내는구나 저 길드 간부 놈들!

온갖 협박과 애원으로도 사람들을 모으는 건 쉽지 않았다.

게다가 모인다고 한 놈들이 멋대로 이탈하거나 지각하거나 ‘여기가 아닌가 봐’ 하며 다른 쪽으로 찾아가면 이제 그때부터는 적보다 아군이 더 증오스러워지는 것이다.

그런데 놀랍게도 태현이 이끄는 원정대 파티들은 한 치의 오차도 없이 빠르게 모여들었다.

모두의 뜻이 하나로 일치했기 때문이었다.

-이제 우리가 공격할 때다!

“저기 파티들 보인다!”

“수레까지 갖고 왔냐?!”

“공성전이잖아. 무조건 필요할 거라고.”

길드 동맹 출신 길드원들이 신나서 수레를 끌고 달려가는 모습을 보고, 예전 길드 동맹 간부들은 황당해했다.

아니 이 새끼들…?

“이 자식들 저번에 공성전을 그렇게 열심히 하지!!”

“공성병기를 줘도 안 싸우던 놈들이 자기 돈으로 무기를 사갖고 와!?”

수레에 넉넉하게 특제 화살과 공성전용 포션을 담아 갖고 온 모습에 간부들은 어이가 없었다.

예전에 그렇게 싸웠으면 몇 번은 더 이겼겠다!

“뭐래. 거둬간 길드비나 내놔.”

“맞아. 그렇게 거둬가 놓고 길드가 망했는데 돌려줘야 하는 거 아니야?”

“회사 망했다고 먹고 튀는 놈들하고 뭐가 달라?”

“…….”

“…….”

이번에는 간부들이 할 말이 없었다.

“모두 모이세요!!”

“앗. 공성전 시작하나 보다.”

간부들은 허겁지겁 말을 돌렸다.

* * *

공격대의 주요 전력은 다음과 같았다.

먼저 이런 공성전의 스페셜리스트인 아키서스 포병대가 있었다.

본진을 지키느라 전부가 다 오진 못했지만, 악마 공작들까지 합류한 아키서스 포병대의 위력은 살벌했다.

거기에 동부에서 흘러나온 오크 부족들이 계속해서 합류했다.

김태산과 길드원들이 영지 개발이나 테크트리를 올리는 대신 무식하게 숫자만 늘린 덕분에 오크 부족들의 숫자는 정말 상상을 초월했다.

카리야스 성 안에 있던, 굶주린 혼돈 쪽에 가입한 플레이어들은 압박이 될 수밖에 없었다.

어느새 주변을 채워버린 녹색 물결.

동부에서나 볼 수 있다는 오크 웨이브를 에랑스 왕국에서 이렇게 목격하게 될 줄이야.

게다가 이 오크들이 숫자에만 의존하는 게 아니었다.

원정대 대장장이들이 계속해서 만들어 놓은 공성병기들이 쉴 틈 없이 공급되고 있었다.

그뿐만이 아니었다.

원정대에 참가한 랭커 파티들은 각자 오크 부족 전사들을 맡아서 추가로 이끌었다.

자칫하면 난장판이 되기 쉬운 지휘 상황인데도 벌써 성을 빠르게 포위하는 숙련된 움직임을 보여주고 있었던 것이다.

“…항, 항복해야 하나?”

“항복 같은 소리 하고 있네! 굶주린 혼돈한테 페널티 받고 싶냐? 돌연변이 되고 싶어?”

“성벽 끼고 버텨! 여기가 오스턴 왕국인 줄 알아? 에랑스 왕국이라고! 가만히만 있어도 이길 수 있어!”

그러나 굶주린 혼돈에 가입한 플레이어들은 쉽게 무너지지 않았다.

오스턴 왕국이나 다른 왕국과는 전혀 다른 곳.

그게 바로 에랑스 왕국이었다.

왕국 자체가 근본 있는 만큼 성벽에 대한 자신감도 차원이 달랐던 것이다.

‘다 망해가는 길드 동맹 성하고 에랑스 왕국 성하고는 차원이 다르지!’

‘성주부터 시작해서 기사단이 있는데 그렇게 쉽게 뚫을 수 있을리가 있나.’

[카리야스 성 공성전이 시작됩니다!]

[수비 쪽 플레이어들은 각자 위치로 이동하십시오!]

[공적치 포인트를 쌓을 때마다…]

[……]

[……]

[……]

뿌우우우우-

나팔과 함께 병사 NPC들이 척척척 움직이고 마법사 NPC들이 탈것을 타고 성 위를 날아다니기 시작했다.

굶주린 혼돈 쪽 플레이어들은 잔뜩 굳은 표정으로 달려 나갔다.

어디 한번 와봐라!

[남쪽 성문이 파괴됩니다!]

[남쪽 성벽이 파괴됩니다!]

[남쪽 병사 휴식소가 파괴됩니다!]

[……]

[……]

[……]

“?!?!?!?”

“뭐야 X발?!”

플레이어들은 기겁했다.

전투 시작한 지 3초 만에 바로 남쪽 전역이 그대로 개박살이 난 것이다.

이건 정말 말도 안 됐다.

세상에 어떤 공성전이 이렇게 개판으로 굴러간단 말인가.

“어느 놈이 막았어? 아니, 뭔 공격을 했는데 성벽이 무너져?!”

“성벽에 있는 마법사들은 뭘 했는데!!”

비명을 지른다고 상황이 달라지진 않았다.

적들이 벌써 함성을 지르며 남쪽을 향해 달려오고 있었다.

“침착해! 다들 남쪽으로 가라! NPC들과 같이 웨이브 막으면 돼!”

“잔해물 많으니까 몰아낸 다음에 다시 설치해! 건축가들 있으니까 재건 가능하다고!”

“방어 시설 많아! 충분히 해볼 만해!”

[침입자 격퇴 마법진이 파괴됩니다!]

[침입자 격퇴 마법진이 파괴됩니다!]

[마법 대포가 파괴됩니다!]

[마법 대포가 파괴됩니다!]

[……]

[……]

“…….”

“…첩, 첩자 있냐?! 첩자잖아 이거!”

“첩자가 있어도 이건 무리지!!”

판온의 공성전에도 당연히 첩자가 있었다.

서로 도적 플레이어들이 몰래 성벽을 넘고 뒤로 우회해서 시설들을 파괴하는 전술은 정석 중의 정석인 것이다.

…그렇지만 어느 누구도 이 정도로 광범위한 파괴 공작은 본 적이 없었다.

도적의 신이 와도 이 정도 파괴를 하지는 못할 것이다.

대체 어떻게?

“NPC 새끼들이 다 배신한 거 아냐?!”

“미친 소리 하지 마! 기사들이 왜 배신을 해! 기사들이 배신하는 거 봤냐?”

“그건 그렇지….”

플레이어들은 황당한 와중에도 NPC들은 의심하지 않았다.

다른 NPC도 아니고 에랑스 왕국의 귀족 NPC들 아닌가.

이들이 배신할 리가 없었다.

[사기가 내려갑니다!]

[병사들의 사기가…]

[페널티…]

[……]

“이봐요! 빨리 성주님 오라고 해!”

“빨리! 이러다가 무너지게 생겼어!”

플레이어들은 근처에 있는 하급귀족 NPC들을 붙잡고 외쳤다.

이렇게 된 이상 성주가 기사들을 이끌고 나타나는 것 정도밖에 답이 없었다.

안 그러면 진짜 공성전 벌이기도 전에 병사들이 도망치는 말도 안 되는 상황이 벌어질 수도 있었다.

-성, 성주님이 아직….

“왜 안 부르는데!”

-성주님께서 대답이 없으십니다! 곧 오실 테니 다들….

“아니! 지금 곧 온다는 말이 무슨 개소리야! 밖에 적들 안 보여??”

와아아아아아아아아-!

수많은 플레이어들이 신이 나서 달려드는 소리가 천지를 진동시키고 있었다.

굶주린 혼돈 쪽 플레이어들은 환장할 노릇이었다.

-여기 카리야스 성주가 있다! 여기 카리야스 성주가 있다!

“?!??”

성 안의 플레이어들은 이제 뭘 봐도 놀라지 않을 것 같은 기분이었다.

남아 있는 관측탑 위로 뛰쳐 올라가자, 원정대 가운데에 위치한 아키서스 포병대가 웬 귀족 NPC 하나를 장대에 매단 채 접근하고 있었다.

그건 놀랍게도 카리야스 성주였다.

<굶주린 혼돈을 믿어서 죄송합니다>라고 쓰인 팻말을 걸고 있는 카리야스 성주는 읍읍대며 장대 위에서 흔들렸다.

-이 기사 놈들! 너희가 진정 충성하는 기사라면 빨리 항복해라!

-항복하지 않으면 너희 성주를 대포 안에 넣어서 쏴버린다!

아키서스 포병대는 전장을 쩌렁쩌렁하게 흔드는 커다란 목소리로 외쳤다.

[병사들의 사기가 바닥까지 추락합니다!]

[병사들이 후퇴합니다!]

-안, 안 되겠어! 성주님까지 잡혀갔잖아!

에랑스 왕국의 정예병들은 말이 병사였지, 하나하나가 기사 뺨때리는 강력한 NPC들이었다.

그런 귀중한 전력들이 그냥 뒤로 도망치기 시작했다.

[카리야스 성 수비 마법사들의 사기가 떨어집니다!]

[마법사들이 후퇴합니다!]

[……]

[……]

그리고 이런 후퇴는 도미노처럼 한 번 시작되면 다른 곳에도 영향을 끼쳤다.

마치 썰물이 빠지는 것처럼 안에 있던 NPC들이 후다닥 뒤로 물러나는 모습에, 성 안의 플레이어들은 눈을 크게 떴다.

이게… 이게 말이 되나??

[적들이 내성 중앙을 점령했습니다!]

[적들을 몰아내지 않으면 성이 점령당할 수 있습니다!]

털썩-

곳곳에서 플레이어들이 허탈한 표정으로 그냥 주저앉았다.

적들이 어떻게 들어온 건지 이제 놀랍지도 않았다.

그냥 어떻게 된 상황인지나 알고 싶다!

“어? 뭐야? 그냥 끝났어??”

“안 돼!!! 얼마나 준비를 했는데!!”

밖에서 원정대 플레이어들이 당황스러운 표정으로 성 안을 쳐다보았다.

이제 막 화끈한 전투가 시작되나 싶었는데 갑자기 성벽이 무너지고 NPC들은 도망치고 성은 함락되고….

이대로 끝이라고?

“이거 방송하려고 얼마나 준비했는데!!”

“진정해. 다음에 쓰면 되잖아.”

“너나 진정해! 지금 진정하게 생겼어?! 야! 돌아와! 돌아와서 싸우라고, 겁쟁이 놈들아!!!”

원정대 플레이어들이 그렇게 울부짖었지만 한 번 무너진 성은 돌아오지 않았다.

* * *

“다들 고맙다! 이 성을 점령한 건 나 혼자만의 힘이 아니다. 다들 같이 싸운 덕분이다!”

[카르바노그가 사실 혼자 점령한 것 같다고 말합니다.]

태현은 모인 플레이어들을 보며 반갑게 외쳤다.

그 혼란스러운 상황에도 이렇게 빠르게 모여서 지원을 와준 원정대였다.

기쁘지 않을 리가 없었다.

그러나 플레이어들의 표정은 매우 전투적이고 사나웠다.

“김태현 선수! 저희는 아직 배가 고픕니다!”

“바로 다음 성으로 진격하게 해주십시오!”

한두 명도 아니라 거의 전원에 가까운 플레이어들이 입을 모아 외쳤다.

“아니…?”

태현은 그 반응에 놀랐다.

이런 불리한 공성전을 누구보다 싫어하는 게 바로 이런 일반 플레이어들이었다.

최상위권 랭커들이야 죽을 확률 없으니 활약하지, 그들은 아차하면 박살 나는 것이다.

그런데 먼저 이렇게 나서다니.

“제발 진격합시다!”

“맞습니다! 싸우고 싶습니다!”

‘이렇게 싸우고 싶어했나?’

태현은 원정대에 참가한 사람들의 뜻을 부정할 생각이 없었다.

피해가 나오더라도 사람들이 그걸 원한다면 그 길로 가겠다!

“좋다! 그러면 이대로 쉬지 않고 공격을 퍼붓자!! 다음 성으로 진격하자!”

“와아아아아아아아아!”

“김태현! 김태현! 김태현!!”

방송국 사람들도 기쁜 목소리로 따라서 외쳤다.

“김태현 선수 만세!!”

방금 공성전이 너무 빨리 끝나서 내심 실망하고 있었는데, 누가 김태현 아니랄까 봐 바로 다음 퀘스트를 시작한 것이다.

기쁠 수밖에 없었다.

-역시 이거지! 이대로 수도까지 진격하는 거 아니야??

-김태현이라면 진짜 수도까지 진격할지도 모름.

보고 있던 전세계의 시청자들도 기쁨에 차서 떠들었다.

한동안 잠잠하던 상황이, 김태현이 칼을 뽑아들자 확 흔들리기 시작한 것이다.

드디어 움직인다!

-김태현 너무 무리하게 돌격하는듯. 에랑스 왕국 성들이 그렇게 만만하지 않은데.

-솔직히 지금은 그냥 점령한 성 다시 관리해야지. 굶주린 혼돈한테 역습당할듯.

물론 굶주린 혼돈 쪽 플레이어들은 기뻐할 수 없었다.

멀리 떨어져 있는 성인데도 무서웠다.

…저 미친놈 길드 동맹 상대할 때처럼 진격하는 건 아니겠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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