소설리스트

나는 될놈이다-1686화 (1,685/1,826)

§ 나는 될놈이다 1686화

“그런 목적으로 납치한 게 아닌데….”

태현이 말해봤자 에랑스 왕국 플레이어들은 이미 각색할 준비를 끝낸 뒤였다.

“뭐, 지금 그게 중요한 게 아니니까. 그래서 굶주린 혼돈과 맞서 싸우기 위해 모인 기사들이라고?”

-예!

“성문을 열 수 있나?”

-예.

“그러면 성문을 열고 성벽도 좀 무너뜨려 놓을 수 있나?”

-예. 시간만 좀 주신다면….

“오. 그러면 성문을 열고, 성벽도 좀 무너뜨린 다음에, 병기고의 무기들을 파괴하고, 기사들을 무력화시킨 다음에 마법사들도 좀 제압할 수 있나?”

-노… 노력해 보겠습니다.

“그러면 혹시….”

[카르바노그가 너무 과한 걸 시키지 말아달라고 부탁합니다!]

* * *

“튀어! 튀어!”

“와. 저거 장난 아닌데?”

태현뿐만 아니라 원정대 플레이어들은 각자 나뉘어서 에랑스 왕국의 국경을 찔러보고 있었다.

약한 고리를 찾아서 거기부터 들어가려는 속셈이었다.

[분노한 근위기사들이 쫓아옵니다!]

“아, 거 납치할 수도 있지! 잡지도 못했는데 그만 쫓아와!”

“케인 선수. 굳이 더 도발할 필요는 없을 것 같습니다!”

물론 에랑스 왕국은 정말 만만치 않았다.

귀족 NPC를 납치하거나 공격해서 빈틈을 좀 만들어보려고 해도, 귀족 NPC 본인이 엄청나게 강하거나 혹은 강한 호위들을 데리고 있는 것이다.

솔직히 싸우면서 ‘이 정도로 강하면 굶주린 혼돈하고 싸우기나 하지 이 새끼들….’ 하는 생각이 들 수밖에 없었다.

누구는 지금 굶주린 혼돈하고 싸우느라 목숨을 걸고 있는데!

[언데드들이 전멸합니다!]

“실패했네….”

이다비와 이세연도 다른 쪽에서 퀘스트를 진행 중이었다.

언데드 정찰 부대를 보내서 뚫고 들어갈 만한 길이 없나 찾는 중이었지만, 에랑스 왕국은 정말로 만만치 않았다.

“이 정도면 그냥 굶주린 혼돈하고 싸워도 되지 않나 싶은데….”

“그러니까.”

둘은 어이가 없다는 듯이 고개를 끄덕였다.

원정대 플레이어들의 생각은 지금 다 비슷했다.

이 정도 전력이 있으면 그냥 좀 싸워라!

“주장! 저쪽에서 적들이 옵니다!”

“진정해. 충분히 대응할 수 있으니까.”

이세연은 유성 게임단 선수를 진정시켰다.

유성 게임단은 물론이고 원정대 랭커들에, 바로 불러올 수 있는 언데드 부대들까지 대기 중이었다.

얼마든지 빠져나갈 수 있었던 것이다.

[언데드 사절단이 찾아옵니다!]

“…?!”

“???”

자리에 모여 있던 플레이어들은 웅성거렸다.

언데드 사절단?

‘에랑스 왕국에 리치 영주라도 있었나?’

‘내 기억으로는 없었는데.’

다들 당황했지만, 사절단을 누가 보냈는지 곧 알 수 있었다.

-에랑스 왕국의 진정한 국왕이시자, 굶주린 혼돈과 맞서 싸우는 영웅이신 필립 3세께서 보내서 왔소! 모두들 무릎을 꿇으시오!

“???”

“에랑스 국왕?”

“살아 있었나?”

“근데 왜 언데드 사절단을?”

“…….”

진실을 아는 이다비는 침묵했다.

사실 에랑스 국왕은 예전에 죽고 언데드로 부활했었지만, 이 사실을 아는 사람은 많지 않았다.

-어허! 빨리 무릎을 꿇지 못할까!

“무릎 같은 소리 하고 있네.”

이세연은 퉁명스럽게 대답했다.

에랑스 왕국에서 퀘스트를 깰 것도 아니고, 아쉬운 입장도 아닌 만큼 저런 말에 응해줄 이유가 없었던 것이다.

당장 태현도 국왕이고 이세연도 국왕인데 뭐하러 무릎을 꿇는단 말인가.

게다가 지금 김태현이 고대 제국 퀘스트 진행하고 있는 걸 보면 에랑스 국왕보다 지위가 높아지면 높아졌지 낮아지지는 않을 것이다.

[언데드 사절단의 친밀도가 떨어집니다!]

[필립 3세의 친밀도가…]

[……]

“본론만 말해. 이쪽은 굶주린 혼돈과 싸우느라 바쁘니까.”

-감… 감히!

언데드 사절단은 씩씩대며 분노했지만, 상황이 상황인지라 그냥 돌아가지는 않았다.

-폐하께서는 굶주린 혼돈과 싸우기 위해 뛰어난 모험가들을 모으고 계시오. 여기 있는 모험가들은 폐하께서 높게 평가하셨으니, 영광으로 알고 참여하시오!

<필립 3세의 저항군-에랑스 왕국 퀘스트>

에랑스 왕국의 국왕, 필립 3세는 굶주린 혼돈의 마수에서 탈출해 저항군을 모으고 있다.

뛰어난 모험가라면 이 저항군에 참가해 굶주린 혼돈과 맞서 싸워라!

그리한다면 국왕의 후한 보상이 기다리고 있으리라.

보상: ?, ???

“어떻게 하지?”

“참가하는 게 좋을 거 같은데….”

이세연의 질문에 이다비는 신중하게 고민했다.

필립 3세한테 비굴하게 굴 필요는 없었지만, 그렇다고 거절할 필요는 없었다.

에랑스 왕국 NPC들을 어떻게든 하나라도 더 거느리고 싶은 건 이쪽도 마찬가지였던 것이다.

‘이용하는 게 최선이겠지?’

“그러면 참가해야겠네. 알겠어. 이쪽도 참가하도록 하지.”

-잘 생각했소! 하지만 폐하 앞에서 그런 무례한 태도는 삼가는 게 좋을 것이오.

“그냥 공격할까요?”

“건방지게….”

예전이었다면 에랑스 국왕의 사절이라면 어지간한 랭커들도 껌뻑 죽었을 것이다.

에랑스 국왕이라는 위치는 그만큼 대단했으니까.

하지만 지금, 굶주린 혼돈으로 판온 전체가 흔들리고, 원정대에 참가해서 계속 싸워 온 플레이어들은 이제 그런 것에 휘둘리지 않았다.

에랑스 왕국이 별거냐!

굶주린 혼돈하고 싸우지도 않으면서!

“다들 진정하세요.”

“그렇게 말하신다면….”

“다들 진정하고 저쪽의 빈틈을 엿본 다음에 기습해서 포로로 붙잡아도 되니까요.”

“아하!”

원정대 파티장들은 이다비의 말이 아주 마음에 쏙 들었다.

정말 좋은 방법 같다!

“그나저나 국왕 쪽에서 접촉해 왔으니, 다들 이쪽으로 모이라고 해야겠네요.”

이다비는 따로 움직이고 있는 각 파티장들에게 연락을 보냈다.

필립 3세를 찾았으니 이쪽 중심으로 움직이는 게 나을 것 같았다.

-태현 님. 필립 3세 쪽에서 연락 왔어요.

-앗. 그래? 잘했어.

-제가 잘한 게 아니라 같이 있는 플레이어들이 잘한 거죠.

-그래. 이다비 네가 잘했어.

-아니… 제가 잘한 게 아니라….

-이다비 네가 잘했다고.

케인을 상대하면서 자기 할 말만 하는 것처럼, 태현은 이다비를 칭찬할 때 자기 할 말만 하는 게 중요하다는 걸 알고 있었다.

-그런데 난 지금 바로 움직일 수가 없어.

-무슨 일이라도 있나요?

-귀족들 납치하다 보니까 이쪽 비밀결사가 날 초대하더라고.

-잘 됐네요! 그걸 이용하면 카리야스 성주의 조카를 납치할 수 있겠어요!

-아. 조카는 납치했어.

-더 잘 됐네요. 그걸 이용하면 카리야스 성주도 납치할 수 있겠네요.

-성주도 납치했어.

-…혹시 공성전 하실 거면 지금 지원 갈까요?

-응. 필요하면 부를게.

이다비는 연락을 끝내고 일어섰다. 이세연이 궁금하다는 듯이 쳐다보았다.

“김태현은 뭐하고 있대?”

“성주 납치했다는데요.”

“?!”

* * *

[카리야스 성의 수비대장이 설득됩니다!]

[화술 스킬이 오릅니다!]

성 내에 암약하고 있던 비밀결사.

이 비밀결사에 가입한 기사들은 열심히 설득했다.

물론 태현이 원한 것처럼 성문을 열고 성벽을 무너뜨리고 방어 마법을 해제시키고 기사, 마법사들을 전멸시키는 정도까지는 아니었지만….

이 정도만 해도 정말 대단한 능력이었다.

‘이 정도면 정말 공격해도 될 것 같군.’

태현이 언제쯤 공격하면 좋을까 생각하고 있을 때, 비밀결사 소속의 기사 한 명이 입을 열었다.

-폐하.

“?”

-드릴 말씀이 있습니다.

“이제 와서 못 한다고 하는 건 용납할 수 없다.”

-…그런 게 아니라. 국왕 폐하에 대한 말씀입니다.

“아. 그렇군. 무슨 일이지?”

-폐하께서 보시기에… 저희 국왕 폐하께서는 어떠십니까?

‘언데드지.’

당연히 태현은 진실을 알았지만, 그걸 대답해 줄 수는 없었다.

“왜 그걸 묻는 거지?”

-폐하께서는 굶주린 혼돈 전부터 이상해지셨습니다. 제 생각에는, 굶주린 혼돈의 사악한 음모에 흔들리신 게 아닌지….

“그런…!”

“확실히 일리가 있어.”

플레이어들은 그 말에 웅성거렸다.

필립 3세의 성질이 난폭해지고 거칠어졌다는 건 에랑스 왕국 플레이어들 사이에서 꽤 유명한 일이었다.

처음에는 왕자들이 국왕을 죽이려고 해서 그런가 싶었지만, 그걸 감안해도 너무 변화가 심했다.

하지만 그게 굶주린 혼돈의 음모라면?

그럴듯하다!

‘아니. 언데드 때문인데.’

진실을 아는 태현은 생각했다.

굶주린 혼돈도 조금 억울할 것 같다고!

[카르바노그가 꼬우면 대륙 오지 말았어야 했다고 말합니다.]

“굶주린 혼돈에게 당했다면 어쩔 거지?”

-죄송스러운 말이지만, 지금 같은 상황에서 굶주린 혼돈의 힘에 오염된 분을 모실 수는 없습니다. 왕국의 백성들을 위해서는 더 나은 분이 필요합니다! 더 나은 분을 찾을 때까지 폐하께서 왕국을 대신 이끌어주십시오.

[명성이 매우 높습니다!]

[고대 제국의 후계자입니다!]

[에랑스 왕국 왕자의…]

[……]

[……]

[……]

기사들이 무릎을 꿇고 간청하자, 보고 있던 플레이어들은 깜짝 놀랐다.

판온을 하면서 한 번도 본 적이 없는 희귀한 광경이었다.

다른 나라의 기사들이 이렇게 무릎을 꿇고 플레이어한테 왕이 되어달라고 부탁하는 모습이라니!

‘우리가 지금 뭘 보고 있는 거지?’

‘이건 정말… 이건 정말….’

플레이어들은 확신할 수 있었다.

이렇게 감동적인 퀘스트를 직접 볼 수 있는 사람은 그들밖에 없을 거라고!

이제까지 길드 동맹 같은 놈들이 ‘악명 스탯 쌓이면 어떠냐! 강하면 그만이지!’라고 지껄이면서 온갖 개같은 플레이를 하는 동안, 김태현은 혼자 거기에 맞서 왔었다.

그런 사람이 이제까지 쌓은 업적으로 이렇게 보상을 받는 걸 보니 괜히 그들의 가슴이 뭉클해졌다.

“이런 걸 보다니… 정말 참가하길 잘했다!”

“처음에는 납치 퀘스트만 해서 오해했는데, 역시 김태현 선수는 김태현 선수였어.”

“김태현 선수와 같이 퀘스트를 한 사람들이 좋게 말하는 이유가 있었던 거야!”

“…….”

다들 감동하고 있는 와중에 구성욱은 갑자기 매우 배가 아파왔다.

‘아니 왜 이번 퀘스트만 이렇게 감동적이고 훈훈해??’

구성욱과 검은 바위단이 참가했던 퀘스트들은 지옥처럼 혹독했던 퀘스트들뿐이었다.

여기 이 다른 길드 플레이어들도 같이 고생하면서 환상이 깨지는 게 내심 고소했었는데….

왜 하필 이번 퀘스트만 이렇게 감동적이란 말인가!

이 플레이어들은 각자 길드로 돌아가면 ‘야 김태현이랑 퀘스트하면 감동 그 자체더라’라고 떠들 것 아닌가!

“구성욱 씨는 왜 그러세요?”

“감… 감동적이어서.”

“역시…! 김태현 선수 광팬이니까요!”

“…….”

한편 고민하고 있던 태현은 천천히 입을 열었다.

사실 에랑스 왕국의 국왕은 굶주린 혼돈한테 타락한 게 아니라는 걸 알려줘야 할까?

언데드로 변신해서 성질이 좀 괴팍해졌을 뿐 아직 멀쩡하다고 말해줘야 하는 게 옳은 것이 아닐까?

“확실히 굶주린 혼돈의 음모에 당한 걸지도 모르겠군!”

[카르바노그가 알 게 뭐냐고 말합니다!]

‘그렇지.’

물론 그런 거 없었다.

태현한테 당하기 싫었으면 미리 알아서 왕국을 잘 다스렸어야 했을 것 아닌가.

굶주린 혼돈한테 당해서 도망친 지금, 에랑스 국왕은 그 자격이 없어졌다.

어차피 고대 제국 퀘스트 깨야 하는 상황에서는 언젠가 부딪칠 수밖에 없다!

[비밀결사의 제안을 받아들입니다!]

[에랑스 왕국에 당신의 이름이 널리 퍼지기 시작합니다!]

[필립 3세가 이 소문을 들으면 매우 분노할 것입니다!]

[……]

[……]

“모두 준비해라! 바로 성을 공격해서 함락시킨다. 이 성을 함락시켜서 에랑스 왕국 전역에 저항의 뜻을 널리 알리자!”

-예!!

“밖에 있는 공격대는 성주를 데리고 있으니 그걸로 사기를 떨어뜨리겠다!”

-과연, 성이 굶주린 혼돈에게 점령당한 지금, 성 안의 사람들은 성주가 가짜일지도 모른다고 의심할 겁니다!

“아니. 성주는 진짜 납치했다. 밖에 있어.”

-…….

-…….

성주도 납치하셨습니까?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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