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 나는 될놈이다 1684화
“에이. 퀘스트란 게 하나만 있겠어. 분명 다른 퀘스트도 있을 거야.”
“그, 그렇지?”
“자. 다 같이 김태현 선수를 도와서 성주를 납치하고 협박하러 가자고.”
에랑스 왕국 플레이어들은 말하면서도 어색함을 느꼈다.
분명 우리가 정의의 편 맞지?
* * *
“그런데 납치는 어떻게 하는 겁니까?”
태현은 그 질문에 깜짝 놀란 표정을 지었다.
“뭐? 납치를 해본 적이 없어??”
“예….”
“죄, 죄송합니다.”
에랑스 왕국 플레이어들은 태현의 반응에 살짝 억울해졌다.
판온 대다수 플레이어들이 납치를 해본 적이 없을 텐데….
“허어. 납치를 해본 적이 없다니. 놀랍군.”
-애송이들 같으니. 나 때 모험가들은 납치 정도는 기본적으로 할 줄 알았는데.
-하긴 그때와 지금이 같나.
태현뿐만 아니라 태현의 마검도 플레이어들을 구박했다.
그러자 플레이어들은 진심으로 혼란스러워지기 시작했다.
어, 어라?
그런가?
우리가 너무 퀘스트를 온실 안의 화초처럼 해왔던 건가??
‘다른 사람들은 다 NPC 납치 할 줄 아나?’
“뭐, 그럴 수도 있지. 누구든 처음 퀘스트가 있는 법이니까.”
태현은 고개를 끄덕였다.
모르는 건 잘못이 아니었다. 배우면 됐다.
“NPC 납치 관련해서 어떻게 하는지 알려주지. 나도 잘하는 편은 아니지만….”
-아니. 후계자 정도면 잘하는 편이지.
-겸손할 필요는 없다고.
겸손해했지만 아무리 봐도 태현은 프로가 맞았다.
아까 남작 납치해서 데리고 튀는 것만 보면 무슨 전문가 중의 전문가가 따로 없었던 것이다.
“일단 NPC 납치의 절반은 사전준비다. NPC 납치를 하기 전에 뭘 준비해야 할까?”
“스킬이나… 주문서? 쓰러뜨려서 제압해야 하니까요?”
“탈것? 데리고 도망쳐야 하잖습니까.”
“그래. 좋은 부분을 짚었군. 하지만 은신처와 도주 경로를 빼먹었어. NPC를 납치하면 보통 NPC의 호위들이 쫓아오거든. 놈들을 따돌리려면 준비가 필요하지. 나는 보통 바꿔치기를 자주 쓰는데.”
“바꿔치기요?”
“아. 미안. 모르겠군. 이런 퀘스트들 하는 사람들한테는 많이 쓰이는 단어인데….”
‘그런 사람들이 있어?!’
‘유명한 말이었다고!?’
“NPC를 마차에 태운 다음에, 비슷한 마차를 여러 대 준비해서 쫓아오는 놈들을 혼동시키는 거야. 그런 다음에 NPC는 아예 다른 탈것으로 은신처로 갖고 가고.”
“…….”
“…….”
담담하게 말하는 태현의 모습은 전문가 그 자체였다.
대체 이런 퀘스트를 몇 번 한 건지 짐작도 가지 않았다.
-다 준비됐습니다. 교황 성하!
“고맙다. 다들.”
아키서스 교단 성기사들은 영차영차 마차들을 꺼내왔다.
각자 마부로 위장해서 마차를 하나씩 몰고 근처로 끌고 갈 것이다.
“성주를 납치한 다음에는 이제 이 마차들이 시선을 끌어줄 거야. 각자 실감나는 연기를 하도록.”
“어, 어떤 연기요?”
“당연히 자기 마차에 진짜 성주가 있는 것처럼 연기하는 걸 말하는 거지.”
“그… 그런 것까지 합니까?”
화술 스킬은 초보 시절에 상인한테 할인 받는 정도로만 써봤던 랭커들에게, 태현의 퀘스트 방식은 어지러움 그 자체였다.
“그런 거라니? 당연한 거잖아?”
“그, 그렇군요. 알겠습니다. 해볼게요.”
“그래. 다들 너무 어렵게 생각하진 말라고. 일단 성주만 손에 넣으면 반은 성공이니까. 그 다음부터는 어떻게든 할 수 있어.”
* * *
[카리야스 성주가 나타납니다!]
[카리야스 근위기사단이 주변을 호위합니다.]
[가까이 접근할수록 발각될 확률이 높아집니다!]
과연 성주답게 호위하는 기사들이 제법 있었다.
강력한 마법과 축복이 걸려 있는 갑옷에 무기들.
보고 있던 플레이어들의 등에 땀이 한 방울 흘러내렸다.
‘생각보다 강해 보이는데?’
‘이거 잘못하면….’
‘뚫고 들어갈 수 있나?’
에랑스 왕국 기사들답게 레벨 5,600은 기본에 700 넘어 보이는 기사들도 있어 보였다.
저런 기사들한테 잘못 포위당하면 아무것도 하지 못하고 그대로 로그아웃당하는 수가 생겼다.
“오. 운이 좋군.”
“?!?”
“기사들을 별로 안 데리고 왔는데.”
“아, 아니… 저게요?”
“그렇지 않나?”
에랑스 왕국 플레이어들은 태현의 표정을 다시 한번 훑어보았다.
아무리 봐도 진심이었다.
“그럼 슬슬 시작해 볼까.”
태현은 신호를 보냈다. 그러자 반대 쪽에 숨어 있던 아키서스 성기사들이 튀어나왔다.
-남작님을 구해야 한다! 남작님을 구해야 해!
-빨리 구조 요청을 보내라!
-무슨 일이냐!?
카리야스 성주는 갑자기 튀어나온 성기사들의 모습에 깜짝 놀랐다.
게다가 원래 여기서 만나기로 했던 남작의 이름까지 부르면서 도망치고 있다니.
무슨 일이라도 생긴 것인가?
-앗! 도와주십시오! 남작님이 숲에서 튀어나온 괴물한테 잡혀갔습니다!
-무슨?! 말도 안 되는 소리 하지 마라, 굶주린 혼돈은 나와 내 친족을 건드리지 않기로 맹세했거늘!
-그건 잘 모르겠고, 정말입니다!
-어떻게 생긴 괴물이냐!
-머리 셋에 팔 여섯 개 달린….
아키서스 성기사들은 태현이 미리 준비한 거짓말들을 늘어놓았다.
에랑스 왕국 플레이어 같은 초보자들은 몰랐지만, 이런 거짓말도 태현이 섬세하게 준비한 요소 중 하나였다.
케인 같은 플레이어는 적에게도 소문이 돌았을 가능성이 있는 것이다.
-그놈인가! 기사들은 당장 숲으로 들어가서 남작을 구해라!
-예!
카리야스 성주의 명령이 떨어지자마자 기사들은 창을 들고 숲 안으로 돌진하기 시작했다.
거슬리는 나무나 바위는 그대로 박살내고 돌진하는 그 모습은 움직이는 요새 같았다.
‘아…!’
‘이걸 노리고!’
보고 있던 사람들은 감탄했다.
처음에는 무슨 짓인가 했는데, 너무나도 간단한 속임수 하나만으로 기사들을 절반 넘게 줄여 버린 것이다.
이게 노련함인가!
“다음으로 들어가라.”
“네? 다음도 있어요?”
“당연히 다음이 있지. 저 상태에서 납치하라고?”
이번에는 다른 방향에서 오크 전사들이 튀어나왔다.
오크들은 반쯤 박살이 난 모습으로 울부짖었다.
-췩! 숲에 괴물이 있다! 머리 셋에 팔 여섯 개 달린 괴물이 있다!
-인간 귀족 제물로 바쳤으니 못 쫓아올 거다! 도망친다!
-저 오크 놈들이 뭐라고 지껄이는 거냐!?
카리야스 성주는 대경실색했다.
기사들을 보낸 방향과 다른 곳에서 오크들이 도망쳐 나오다니.
그 짧은 사이에 머리 셋에 팔 여섯 개 달린 괴물이 이동이라도 했단 말인가?!
-으악! 기사들이다! 도망쳐라!
-오크들을 쫓을 시간 없다! 기사들은 저쪽으로 들어가라! 놈이 움직인 모양이다!
태현은 다시 한번 기사들을 확 줄여 버렸다.
칼 한 번 휘두르지 않고!
‘이게… 납치의 정석…!’
‘납치의 교과서!’
‘근데 이걸 우리끼리 다시 할 일이 있나?’
“이제 돌격하면 됩니까?”
“아니. 돌격하면 안 되고. 부드럽게 접근해야지.”
“??”
“보고 있어라.”
태현은 복장을 빠르게 갈아입고 가면으로 얼굴까지 바꾼 다음, 다른 방향에서 접근했다.
“성주님!”
-!!
“남작님께서 보내서 왔습니다! 이걸 보십시오!”
태현은 이멜 남작을 협박해서 뜯어낸 <이멜 남작의 반지>를 들었다.
그 반지를 본 카리야스 성주는 고개를 끄덕였다.
-그 반지는 남작의 반지군!
[설득에 성공합니다!]
[화술이 오릅니다!]
[악명이…]
[……]
[……]
“저를 따라오십시오! 남작님이 지금 위험하십니다!”
-알겠네!!
-성, 성주님. 성주님께서 지금 숲에 들어가시면 위험할 수도 있습니다. 호위의 숫자도 줄어들었는데….
-그걸 지금 말이라고 하나? 조카가 위험에 빠져 있는데! 내 몸 하나 지킬 실력은 있네!
“어서요! 급합니다!”
-알겠다! 안내해라!
태현은 손쉽게 카리야스 성주를 데리고 숲 안으로 끌고 들어갔다.
성주와 기사들은 초조한 표정으로 태현의 뒤를 쫓았다.
-얼마나 더 가야 하는가?
“다 와갑니다!”
태현은 목표로 한 장소를 보고 고개를 끄덕였다.
그리고 함정이 작동되었다.
[섬광 폭탄이 작동합니다!]
[연막 폭탄이…]
[……]
[……]
[……]
“아키서스 사제들은 가능한 디버프를 전부 걸어버려라! 성기사들은 기사들의 발목을 잡아! <아키서스의 저주>!”
태현은 바로 성주에게 아키서스의 저주를 걸어버렸다.
각종 스킬의 성공 확률을 극악으로 내려버리는 사악한 저주, 아키서스의 저주!
방심한 상태에서 그대로 기습을 당한 성주는 당황해서 반응하지 못했다.
-이런 말도 안 되는… 카리야스의 불타는 검!
[카리야스의 불타는 검이 실패합니다!]
[……]
-놈의 다리를 부숴버려라!
-아니야! 일단 팔을 꺾어!
마검의 외침에 따라 태현은 성주에게 덤벼들었다.
기사들이 각종 상태 이상으로 괴로워하고 있을 때가 바로 기회였다.
[기계공학자들이 제국 마비침을 발사합니다!]
촤르륵 늘어나는 마검의 칼날에서 마비침이 튀어나갔다.
[치명타가 터졌습니다!]
[성주의 움직임이…]
[……]
-크… 크아아악! 감히 나를 죽이려고 해?! 굶주린 혼돈 이놈!
“?”
태현은 검을 휘두르면서 카리야스 성주의 움직임을 깎아내다가 의아해했다.
아키서스 사제와 성기사들이 덤벼들고 있는데 뭐라는 거야?
[카르바노그가 지금 굶주린 혼돈의 하수인들이 변장했다고 오해하는 것 같다고…]
‘아. 그렇군.’
굶주린 혼돈 같은 악 세력들의 문제점.
그건 서로 믿기 힘들다는 점이었다.
카리야스 성주도 일단 살기 위해서 굶주린 혼돈한테 무릎을 꿇었지만, 내심 ‘굶주린 혼돈이 날 치워버리고 자기 하수인을 보내는 것 아닐까?’ 하는 의심을 하고 있었을 터.
그런 상황에서 이런 기습을 당했으니 굶주린 혼돈을 의심하는 것도 당연했다.
상대가 오해해 준다면 감사할 뿐.
태현은 이 우연을 활용하기로 마음먹었다.
“그렇다! 눈치가 빠르구나. 성주 놈. 굶주린 혼돈 님에게 반기를 들고도 무사할 줄 알았느냐?!”
-내가 언제 반기를 들었느냐! 네놈이 하라는 대로 다 했거늘!
“하하! 네놈 마음속에 불만이 있다는 걸 모를 줄 알았냐!”
-이… 이놈이 감히! 내가 배신을 당하고도 가만히 있을 줄 알았나!
[카리야스 성주가 괴력을 발휘합니다!]
콰드득!
카리야스 성주는 각종 디버프에 걸린 상황에서도 괴력을 발휘했다.
자신의 몸을 휘감은 마검을 힘으로 뜯어내려고 시도한 것이다.
-아야야야야! 아야야야야야!
-후계자! 빨리 때려! 빨리 제압해라!
기계공학자들은 마검의 칼날이 비명을 지르는 소리에 기겁했다.
[마검의 내구도가…]
[……]
“굶주린 혼돈을 섬기는 모험가들! 빨리 튀어나와!”
“앗, 예!”
대기하고 있던 플레이어들은 허겁지겁 달려 나와서 성주한테 공격을 꽂아 넣었다.
온갖 화려한 효과와 함께 스킬들이 터져나왔다.
퍼퍼퍼퍼퍼퍽!
에랑스 왕국 플레이어들은 태현에게 배운 대로 열심히 연기를 했다.
“우… 우와와! 굶주린 혼돈에게 받은 이 검을 받아라!”
“굶주린 혼돈에게 받은 이 창을….”
“굶주린 혼돈에게 받은 이 성스러운….”
“야. 그건 무리지!”
-크아악. 굶주린 혼돈… 이놈! 이놈!!
[카리야스 성주가 쓰러집니다!]
[포로 상태로…]
[악명이 오릅니다!]
[……]
[……]
“잡았다! 튀자!”
태현은 바로 카리야스 성주를 든 다음 달리기 시작했다. 플레이어들은 그 뒤를 허겁지겁 쫓았다.
-성주님! 성주님!!
-이 굶주린 혼돈의 잡놈들아! 너희를 용서하지 않겠다!!
아직 함정에서 빠져나오지 못한 기사들의 비통한 외침이 숲을 울렸다.
그 외침에 에랑스 왕국 플레이어들은 왠지 모르게 자신들이 악당이 된 기분이었다.
…우린 정말 정의의 편인데!!