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 나는 될놈이다 1683화
“저희도 뭔가 도와드릴까요?”
“그래주겠어? 그래주면 고맙지.”
태현은 새로 찾아온 플레이어들이 도와주겠다고 말하자 흔쾌히 수락했다.
반 굶주린 혼돈 원정대에 사람을 모으고 있는 지금, 숫자는 늘어나면 늘어날수록 좋았다.
“사실 김태현 선수. 저희는 에랑스 왕국 길드들을 대표해서….”
“잠깐. 어이! 거기는 제대로 불태워야지! 그렇게 대충 불태우면 어떡하냐!”
-죄송합니다!
“그래. 뭐라고 했었지?”
“아. 예. 저희는 사실 에랑스 왕국 길드들을 대표해서….”
[굶주린 혼돈의 전사들이 나타납니다!]
-감히 이 굶주린 혼돈께서 만드신 이 요새를 불태우려고 들다니!
-비열하고 더러운 필멸자 놈들아!
“적 나타났다! 폭탄 최대한 던지고 빠진다! 후퇴하자!”
태현은 바로 명령을 내렸다.
지금 굳이 굶주린 혼돈의 전사들과 멱살 잡고 늘어지면서 쓸데없는 싸움을 할 생각은 없었던 것이다.
“저, 김태현 선수.”
“같이 후퇴하자! 여기 남아 있으면 잡힐 테니까.”
“아, 네. 근데 그게… 저희가 에랑스 왕국 길드들을 대표해서….”
“빨리 움직여! 잠깐, 여긴 덜 탔군. <사디크의 화염 룬>!”
화르륵!
“그래. 뭐라고 했지?”
“아닙니다. 일단 돕겠습니다!”
플레이어들은 일단 태현을 도와야겠다고 생각했다.
여기부터 박살 내고 보자!
* * *
[굶주린 혼돈의 기지가 파괴됩니다!]
[명성이 오릅니다!]
[에랑스 왕국의 민심이…]
[치안이…]
[……]
[……]
태현 일행은 쫓아오는 굶주린 혼돈을 따돌리고 성공적으로 근처 숲으로 들어갔다.
드디어 한숨 돌릴 수 있게 되자 플레이어들은 준비해 왔던 말을 꺼냈다.
“김태현 선수! 저희들은 에랑스 왕국 길드들을 대표해서 이렇게 찾아왔습니다. 저희들도 김태현 선수의 원정대에 참가해서 굶주린 혼돈과 맞서 싸우고 싶습니다!”
“오….”
태현은 놀랐다.
사실 여러 길드들이 참가하지 않을 확률도 높다고 생각했던 것이다.
얼핏 보면 ‘다들 목적은 똑같은데 힘을 합치는 게 유리하지 않나?’라고 생각하겠지만, 퀘스트는 원래 아군들끼리도 경쟁하는 게 기본이었다.
태현이 진행하는 원정대에 굳이 대형 길드들이 참가할 이유가 없었던 것이다.
이세연이 호ㄱ… 아니, 특이한 거였고 다른 길드들은 참가하지 않을 수도 있다고 생각했는데.
‘놀랍군.’
[카르바노그가 기뻐합니다. 아키서스의 진심이 모험가들에게 통했다고 말합니다.]
‘무슨 속셈이 있는 것 아닐까?’
[……]
‘하긴. 무슨 속셈이 있더라도 지금은 일단 이용해야겠지.’
[카르바노그가 모험가들을 믿고 싶다고 말합니다.]
태현은 흔들리지 않고 원래 계획대로 가기로 마음먹었다.
남들이 배신을 하든 말든 태현은 태현의 길을 갈 뿐.
“참가해 줘서 고맙군. 지금 다들 굶주린 혼돈의 눈치만 보고 있을 텐데.”
“그딴 쓰레기 세력에 참가하는 놈들은 모조리 로그아웃시켜버려야 해요!”
“배신자 놈들!”
에랑스 왕국 플레이어들은 어지간히 맺힌 게 많았는지 씩씩댔다.
“김태현 선수. 지금 원정대 플레이어들은 언제 다시 모입니까? 저희 길드도 참가하고 싶습니다.”
태현을 비롯해서 원정대 랭커들, 파티장들이 모이는 회의 자리.
에랑스 왕국 길마들도 거기에 참가해 이야기를 나누고 공략 방법을 공유할 생각이었다.
“앗… 미안하군. 지금 각자 다 흩어져서 퀘스트 중이라 회의는 좀 걸릴 텐데.”
“아닙니다. 당연히 다들 바쁘시겠죠.”
“그 정도야 예상하고 있었습니다. 저희도 퀘스트 끝날 때까지 돕겠습니다.”
길드에서 온 플레이어들은 놀라지 않았다.
태현이 지금 이렇게 따로 활동하고 있는 걸 보면, 원정대 플레이어들도 잘게 쪼개져서 에랑스 왕국을 공격하고 있을 가능성이 높았다.
조급해하지 말고 태현과 같이 퀘스트를 깨다가 회의가 다시 열리면 그때 참석하면 된다.
길드에서 온 플레이어들은 별다른 걱정 없이 그렇게 생각했다.
…구성욱을 제외하고는.
‘미, 미친놈들이!’
구성욱의 얼굴이 파르르 떨렸다.
왜 많고 많은 방법 중에 하필이면 김태현 퀘스트를 끝까지 돕는다고 말한단 말인가.
원정대들이 모여 있는 오스턴 왕국 수도로 향하거나, 아니면 돌아가서 좀 기다리거나, 그도 아니면 아예 다른 파티들을 도우러 가도 되지 않는가.
김태현은 솔직히 안 도와줘도 정말 알아서 잘 해먹을 사람인데!
“구성욱 씨는 왜 그러세요?”
뭔가 이상함을 느꼈는지 같이 온 플레이어가 물었다. 그러자 아까 구성욱과 이야기한 사람이 대신 대답했다.
“저분, 김태현 선수 어마어마한 팬이라서 저러시는 거예요. 쑥스러워서 저러는 거죠.”
“아아… 잘됐네요! 이렇게 같이 퀘스트도 하게 됐고.”
“어? 내 팬이었나?”
태현은 의아하다는 듯이 구성욱을 쳐다보았다.
저번에 검 관련 퀘스트 때문에 개고생했던 검은 바위단 출신 랭커 아닌가.
그런데 태현의 팬이었다니.
‘퀘스트를 너무 힘들게 하지 않았나 생각했었는데 내 팬이었다니. 오히려 좋아했겠군.’
태현은 일말의 죄책감도 가지지 않고 이번 퀘스트 난이도도 올려야겠다고 다짐했다.
* * *
“지금 나하고 다른 사람들은 에랑스 왕국 국경지대에 은신처들을 만들면서 이동하고 있다.”
태현은 공격을 개시하기 전에 밑작업을 진행 중이었다.
당연히 굶주린 혼돈이 있는 성이나 도시에 그대로 들이받았다가는 피해가 어마어마하게 날 테니, 최대한 상대를 약하고 정신없게 만들어야 했다.
“길드 동맹에게 했던 것처럼 말이군요!”
“그래. 그것처럼. 근데 어디 가서 그런 말은 하지 말도록. 길드 동맹이 그 말을 들으면 발작하니까.”
계획을 세울 때 길드 동맹 간부들은 실제로 발광했다.
-예전 오스턴 왕국에서 했던 것처럼 위장, 은신, 폭탄, 독 등등을 활용해서 최대한 치안을 낮추고….
-이 자식 그런 짓도 했었냐?!?!
“그리고 에랑스 왕국 귀족 NPC들도 찾아야 해.”
“과연… 까다롭고 오만한 놈들이지만 김태현 선수라면 포섭할 수 있으실 겁니다.”
같이 굶주린 혼돈과 싸우는 상황이니 강력한 귀족 NPC들의 도움을 받을 수 있다면 더할 나위 없을 것이다.
게다가 에랑스 왕국의 NPC들은 전체적으로 강력하고 수준 높은 것으로 유명하지 않은가.
문제는 이들이 국왕처럼 뿔뿔이 흩어지고 사라져서 찾기 힘들어졌다는 점이었다.
‘과연 어떻게 찾으실 생각인 거지?’
‘국왕 작위가 있으니까 그걸 사용해서 찾을 생각인가?’
에랑스 왕국 플레이어들은 눈빛을 빛내며 기대했다.
대부분 작위를 얻지 못하는 일반 플레이어들에게, 귀족 NPC와 같이 하는 퀘스트는 그것 자체로 로망이었다.
화려한 성과 궁전. 그 안을 빛내는 온갖 예술품들과 장식들.
판온에서 손꼽히는 국왕 작위를 갖고 있는 김태현인 만큼, 이 귀족 NPC들과 어울릴 방법을 갖고 있는 게 분명했다.
보고 싶다!
[아키서스 교단의 임시 은신처에 입장합니다!]
바스락-
길도 없는 숲의 나무를 헤치고 안으로 들어가자, 잘 위장된 교단의 임시 은신처가 나타났다.
에랑스 왕국 플레이어들은 그 은신처의 모습에 감탄했다.
작지만 있을 건 다 있었다.
간이 대장간, 함정 폭탄, 화덕, 위장 폭탄, 재봉소, 정교한 연계 폭탄, 신전 등등.
폭탄이 좀 많은 것 같긴 했지만 안전을 위해서라면 당연한 일일지도 몰랐다.
-읍! 읍읍읍읍읍!
“아직도 마음을 안 바꿨나?”
“???”
태현이 은신처로 들어가자마자 공터 안쪽에 묶여 있는 NPC 상대로 말을 걸자, 뒤에서 따라온 에랑스 왕국 플레이어들은 당황했다.
이게….
이게 뭔 상황이지?
“자. 이멜 남작. 자네는 지금 굶주린 혼돈에게 속고 있네. 어서 타락에서 빠져나오란 말이야. 굶주린 혼돈을 버리고 아키서스를 믿게!”
-싫… 싫소! 지금 나보고 성주님을 배신하고 성문을 열라는 거 아니오!
“어허! 아직도 굶주린 혼돈에게 단단히 속고 있군. 사제들!”
“예!”
-크아아아아악!
붙잡힌 남작은 아키서스 사제들의 신성 마법에 비명을 질렀다.
굶주린 혼돈의 힘을 받아들인 자들에게 신성 마법은 카운터 그 자체였던 것이다.
“지, 지금 이게 어떻게 되어가고 있는 건지 물어봐도 되겠습니까?”
“아. 이거. 별거 아닌데.”
태현은 별로 재미도 없는 이야기를 굳이 해야 하나 싶은 표정이었다.
하지만 에랑스 왕국 플레이어들은 너무 너무 궁금했다.
대체 왜 에랑스 왕국 귀족을 납치해서 고문을…?
“지금 공략하려는 성 중 하나가 카리야스 성인데, 거기 성주의 조카가 여기 이멜 남작이더군. 그래서 이멜 남작을 납치해서 굶주린 혼돈한테서 구해주려고 하고 있지.”
“…….”
“…….”
플레이어들은 들으면서도 태현의 말을 따라가지 못했다.
“이멜 남작을 설득할 수만 있다면 성주를 협박하거나 함정에 빠뜨려서 성을 쉽게 공략할 수 있을 거야.”
“대체 어떻게 납치….”
“아니, 지금 그게 중요해? 혹시 어떻게 설득….”
“그보다 어떻게 공략….”
에랑스 왕국 플레이어들은 하나하나 다 궁금해서 어쩔 수가 없었다.
“지금 그럴 시간이 없어서 미안하군. 바로 움직여야 해. 자. 그쪽도 위장하고 같이 움직이자고. 도시나 성 안을 돌아다니면서 귀족 NPC를 발견하면 바로 말을 해. 납치를 할 테니까.”
흔히 ‘에랑스 왕국 NPC들의 협력을 얻어보자!’라고 말하면, 굶주린 혼돈과 맞서 싸우는 NPC들만을 떠올리기 쉬웠다.
그러나 에랑스 왕국에는 그런 NPC들만 있는 게 아니었다.
굶주린 혼돈을 섬기는 이들도 많았던 것이다.
태현은 이들도 버리지 않고 써먹으려고 했다.
-굶주린 혼돈을 믿는 귀족들은 납치해서 다시 세뇌하면 되지 않나?
-과연…!
귀족 NPC들은 꽤 당당하게 돌아다니는 편이었으니 위치를 파악하는 건 별로 어렵지 않았다.
납치야 어렵긴 했지만 뭐….
[이멜 남작의 호위 기사들이 흔적을 찾아서 은신처 가까이 등장합니다!]
[경보가 울립니다!]
“이런. 들켰군. 이동하자! 이멜 남작 챙겨라!”
태현과 아키서스 성기사, 사제들은 숙련된 동작으로 은신처 모닥불에 물을 부어서 끄고 입구 함정을 모조리 가동시켰다.
그리고 이멜 남작을 집어 들었다.
“호위 기사들아, 들어라! 너희들이 계속 쫓아올 경우 이멜 남작의 목을 베어버리겠다!”
-ㅇ브읍읍읍으브!
-이, 이런 비겁하고 치사한 놈!
“가자!”
“예, 예!”
태현을 후다닥 쫓아가면서 에랑스 왕국 플레이어들은 속으로 생각했다.
지금 상황이 대체 어떻게 굴러가는 거지?
* * *
[아키서스 교단의 임시 은신처에 입장합니다!]
“끈질긴 놈들 같으니. 남작 하나 납치했다고 이렇게 쫓아올 줄이야.”
-아주 한심하고 어이없는 놈들입니다.
아키서스 성기사, 사제 NPC들은 맞장구를 쳤다.
이 교단 NPC들은 태현을 살아 있는 신처럼 여겼다.
물론 플레이어들이 보기에는 ‘아니 당신들 그래도 성기사, 사제인데 납치고문해도 돼…?’란 생각이 들었지만.
-으흑… 으흑흑. 알겠소. 시키는 대로 하면 될 것 아니오. 그만 괴롭히시오!
[설득에 성공합니다!]
[화술 스킬이 오릅니다!]
[……]
[……]
“잘 생각했다!”
구출도 실패하고 은신처를 몇 개나 돌아다니면서 사제들에게 괴롭힘을 받자, 이멜 남작의 마음이 드디어 꺾여버렸다.
“자. 카리야스 성주를 불러내는 편지를 쓰라고. 카리야스 성주를 어떻게 해서든 불러내는 거야. 만약에 불러내지 못한다면 넌 저번에 봤던 악마들의 우리 안으로 들어간다.”
[화술 스킬이 매우 높습니다!]
[협박이…]
[……]
[……]
[……]
[이멜 남작의 편지에 추가 보너스가 붙습니다!]
[성공 확률이 크게 올라갑니다!]
태현의 협박에 질릴 대로 질린 이멜 남작은 눈물겨운 편지를 작성했다.
이 편지를 받으면 성주도 아무 의심 없이 성 밖으로 나오리라.
“후후. 드디어 됐군. 자. 같이 성주 붙잡으러 가자고.”
“…혹시 우리 귀족 설득은 안 하고 납치만 하나…?”
그제야 슬슬 진실을 깨달은 에랑스 왕국 플레이어들이 수군거렸다.
물론 이런 퀘스트도 재밌고 신나긴 하는데…!
그들이 생각했던 아름답고 품위 있던 퀘스트는 이런 게 아니었던 것이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