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 나는 될놈이다 1682화
“모두 관문 장악해!! 돌격!!”
케인은 그렇게 외치며 돌격했다.
태현을 따라온 랭커들은 일제히 케인의 뒤를 쫓아 달렸다.
모두가 스미스와 태현의 싸움에 정신이 팔린 지금이 바로 기회였다.
내성 관문을 차지하고 탈출구를 확보하라!
“…뭐, 뭐하고 있는 거냐?! 안 막고!?”
정신이 팔려 있던 뉴욕 라이온즈 코치들은 깜짝 놀라서 외쳤다.
코치들은 당연히 다른 플레이어들이 관문을 지키고 있을 줄 알았다. 그건 기본이었으니까.
스미스가 태현을 상대하고 있는 동안 나머지 플레이어들은 뒤에서 관문만 지키고 있으면 됐는데….
지금 중앙에 위치한 차원 관문이 텅텅 비어 있었다.
‘이런 멍청이들이!’
“빨리 가서 막아! 이 머저리들아!”
그러나 플레이어들도 할 말은 있었다.
스미스와 김태현의 일대일 결투에 홀린듯 정신이 팔리긴 했지만 그보다 더 큰 이유가 있었던 것이다.
‘스미스 놈이 우릴 제물로 쓰려고 해서잖아!’
‘지금 누구 탓을 하는 거냐!’
스미스가 아까 아군을 제물로 바쳐서 스킬 쿨타임 회복시키고 MP 회복시키는 걸 뻔히 봤는데, 스미스 가까이 있을 멍청한 놈은 없었다.
원정대만큼이나 굶주린 혼돈 쪽 플레이어들도 스미스한테서 거리를 벌리고 있었던 것이다.
그런 만큼 관문은 지금 믿을 수 없을 만큼 텅텅 비어 있었다.
‘나도 운이 좋을 때가 있구나!’
케인은 그렇게 생각하며 내달렸다.
이렇게 날로 먹을 수가 있다니!
“막아! 막….”
급히 쫓아오는 플레이어들의 비명을 등 뒤로 한 채 케인은 손을 뻗었다.
팟!
[차원 관문에 대한 권한을 획득했습니다.]
[굶주린 혼돈의 성에 깃든 힘을 부릴 수 있습니다!]
[……]
[……]
“!!”
무수히 나타나는 메시지창.
케인은 그 메시지창들을 보고 눈빛을 번뜩였다.
이 메시지창들이 뜻하는 건 하나밖에 없었다.
“김태현!!”
“?”
“이제 뭘 어떻게 하면 되냐!!!”
“…….”
태현은 순간 힘 빠져서 스미스의 공격에 맞을 뻔했다.
‘이 자식이….’
-저놈 대체 뭐하는 놈이냐??
-노예로도 못 써먹을 놈이다! 잘라!
기계공학자들도 어이가 없었는지 마검에서 투덜거렸다.
지금 태현은 웬 미친 키메라 상대로 목숨을 걸고 싸우고 있었는데, 그 정도는 알아서 해야 하지 않겠는가.
그러나 케인은 진지하게 외쳤다.
모르는 건 부끄러운 일이 아니었다.
모르는 걸 숨기는 게 부끄러운 일이었다.
“차원 관문 권한 획득했고! 성에 깃든 힘 부릴 수 있고! 어, 또….”
“우리 제외한 모든 놈들 다 쫓아내버려!”
태현은 바로 외쳤다. 케인은 앵무새처럼 따라했다.
태현을 구석에 몰아붙이다가 차원 관문 때문에 멈칫한 스미스는 케인을 먼저 죽여야 할지 태현을 먼저 죽여야 할지 모르겠다는 표정을 하다가 추방되기 시작했다.
“잠…!”
[대상이 굶주린 혼돈의 성 밖으로 추방됩니다!]
[굶주린 혼돈의 힘이 소모됩니다!]
[저주받습니다!]
[이미 저주 받은 종족입니다. 종족이 변화하지 않습니다!]
[……]
[……]
케인은 메시지창을 보고 떨떠름한 표정을 지었다.
키메라가 뭐가 어때서…!
팟! 팟! 팟!
“케인 이 새끼야!”
“너!”
“죽…!”
플레이어들은 말이 끝나기도 전에 죽죽 쫓겨났다.
태현은 스미스와 싸우느라 지칠 대로 지쳤지만 멈추지 않고 지시를 내렸다.
“원정대 전부 내성 안으로 불러와!”
“원정대 전부 내성 안으로!”
[대상이 굶주린 혼돈의 내성 안으로 이동합니다!]
[굶주린 혼돈의 힘이…]
[저주받습니다!]
[……]
[……]
팟! 팟팟팟!
외성 성문에서 치열하게 싸우고 있던 원정대 플레이어들이 빠르게 내성 안으로 이동하기 시작했다.
“무, 무슨 일이야?”
-성의 힘을 뺏었구나!
느카넷살은 설명하지 않았는데도 바로 알아차렸다.
굶주린 혼돈의 힘이 깃들어 있는 성소나 신전 같은 곳들은 그 힘을 뺏어서 사용할 수도 있었다.
적들이 지금 모두 외성 성문 밖으로 추방된 것도 저 힘을 사용한 것이리라.
-훌륭하다! 하지만 시간이 없다. 굶주린 혼돈이 남긴 힘은 무한하지 않으니, 남은 힘을 낭비하지 않아야 한다. 어서 대륙으로 돌아가는 문을 열어라!
“그, 그렇군! 어떻게 하면 되지?”
말을 들은 케인은 태현한테 다시 물었다. 태현은 황당하다는 듯이 대답했다.
“방금 한 것처럼 문을 열라고.”
“…아!”
“…….”
“…….”
원정대 랭커들은 뭔가 이상함을 깨닫고 고개를 갸웃거렸다.
케인 선수가 생각했던 것보다 좀….
칠칠맞다?
“원래 저랬나?”
“겸손해서 저러신 거지.”
“웃기려고 그런 걸 거야. 우리의 긴장을 풀어주려고.”
플레이어들의 말에 태현은 신기해했다.
어떻게 저렇게 친절하게 해석해 줄 수가 있지?
* * *
<검은 바위단> 길드.
<진군> 길드.
<풍림화산> 길드.
<아카시아> 길드….
…….
땅을 확보하고 영지를 경영하는 길드들도 있었지만, 그냥 길드 하우스로 만족하고 퀘스트와 레벨업 위주로 진행하는 길드들도 많았다.
가장 번영한 에랑스 왕국에 특히 그런 길드들이 많았다.
대형 길드들부터 시작해서 소수정예 길드까지.
그리고 이런 길드들은 굶주린 혼돈의 침공이 터지자 선택의 기로에 서게 됐다.
굶주린 혼돈의 편에 설 것이냐, 아니면 맞설 것이냐?
놀랍게도 꽤 많은 길드들이 불리한 상황에도 불구하고 굶주린 혼돈에 맞섰다.
-스미스 미친놈이 지가 뭐라고 길드 동맹처럼 굴어?
-여기가 오스턴 왕국인 줄 아냐?
-게임 접으면 접었지 니 밑으로는 안 들어간다!
…손익 계산보다 자존심이 중요한 길드들이 생각보다 많았던 것이다.
이런 길드들은 서로 손을 잡고 은밀하게 맞서 싸웠다. 상대가 상대인 만큼 당연한 일이었다.
검은 바위단의 대표적인 랭커, 구성욱은 쌍검을 들고 휘둘렀다.
[검이 소름 끼치게 울부짖습니다!]
[적들이 쓰러집니다!]
‘대단하다!’
다른 길드원들은 구성욱의 신들린 듯한 칼춤을 보며 감탄했다.
요즘 검은 바위단의 구성욱이 랭커들 중에서 잘나간다고 말은 많이 들었지만, 실제로 보니 장난이 아니었다.
만약 검은 바위단이 규모만 조금 더 컸었더라면 훨씬 더 유명했을 놈이었다.
“다들 괜찮으십니까!”
“덕분에! 놈들이 여기 은신처까지 찾아낼 줄은 몰랐다.”
당연히 도시나 성에서 추방되고 현상금이 걸린 에랑스 왕국의 길드들은 산으로, 숲으로, 동굴로 피했다.
임시 마을과 임시 요새를 거주지로 삼으며 돌아다니고 있었던 것이다.
물론 굶주린 혼돈도 그걸 알았기에 꾸준히 추적자들을 보냈다.
“길드 투표는 어떻게 됐습니까?”
에랑스 왕국의 길드들은 침공 초기부터 계속 고민하고 있었다.
-어떻게 해야 굶주린 혼돈을 쓰러뜨릴 수 있을까?
지금처럼 게릴라전을 펼치는 건 한계가 있었다. 결국 적에게 데미지를 줘야 했던 것이다.
그런 와중에 나온 이야기가 김태현 쪽 원정대와 연합하는 것이었다.
그러나 길마들은 섣불리 결정짓는 대신 신중하게 고민했다.
늑대를 피하려다가 호랑이를 만날 수 있는 것이다.
그 인성 좋아 보이던 스미스 놈도 갑자기 쑤닝이 씌었는지 개소리를 하고 다니는데, 김태현이라고 그러지 말란 법은 없었다.
-하지만 도움이 필요합니다. 지금 에랑스 왕국에서 전력 짜내는 것도 힘들어요.
-굶주린 혼돈이 워낙 감시를 철저하게 하고 있어서 밖에 나가는 것 자체가 힘듭니다.
-좋아. 그러면 다수결로 정하자.
길마들은 결정을 내렸다.
각자 길드에서 투표를 하고, 또 길드들끼리 투표를 해서 정하기로.
이렇게 커다란 일을 자기들 멋대로 정할 수 없다고 생각해서였다.
“결과 나왔습니다. 연합 결정입니다.”
“오…!”
구성욱은 놀랐다.
사실 구성욱도 될 거라고 생각하고 있긴 했다. 그만큼 상황이 힘들었으니까.
그래도 정말로 과반수 길드가 찬성하다니.
놀랍다!
“몇 대 몇 나왔습니까?”
“그게….”
“?”
“만장일치로 찬성 나왔습니다.”
“…?!”
구성욱은 더더욱 놀랐다.
만장일치가 나왔다고???
‘아, 아니. 말이 돼?’
모든 길드들이 김태현 쪽 원정대를 믿고 손을 들었다는 것 아닌가.
물론 구성욱도 따지자면 찬성이긴 했지만 이건 좀 이야기가 달랐다.
김태현을 너무 믿는 것 아닌가?
‘김태현하고 같이 플레이 안 해서 다들 착각하고 있는 것 같은데….’
세상 모든 팬들이 ‘김태현만 한 선수가 없죠’ ‘김태현 같은 선수가 판온에 있는 건 축복이야’라고 말을 해도 직접 같이 퀘스트를 깬 검은 바위단 길드원들은 속아 넘어가지 않았다.
-김태현하고 같이 안 해본 놈들이나 저런 소리를 하지.
-김태현하고 1주일에 192시간 같이 플레이 해봐야 ‘아 김태현이 사실은 미친놈이었구나’를 알지!
-우리가 김태현을 싫어하는 건 아니야! 다만 똑바로 진실을 알았으면 좋겠다는 거야! 부드러운 리더십 같은 소리하고 있네! 미친 듯이 쪼아대는데!
-벌레 하나 못 죽일 정도로 착한 사람이면 애초에 판온 최고 자리에 못 오른다고!
그런 구성욱의 내적 고민은 눈치채지 못한 채, 길드원이 입을 열었다.
“그래서 이제 곧 출발하려고 하는데, 검은 바위단에서는 그쪽이 가실 거죠?”
“아. 예. 제가 갈 겁니다.”
“잘 됐습니다. 김태현 선수와 안면이 있으시다면서요?”
“…예!”
구성욱의 ‘예’에는 그간 쌓인 깊은 한이 담겨 있었다. 상대 길드원은 살짝 움찔했다.
왜 저러시지?
“아하. 알겠습니다.”
“예?”
“김태현 선수 팬이군요? 이렇게 만나게 되어서 감격하신 거구나. 이해합니다. 힘든 길 멀리 가는데 그 정도 사심은 챙겨도 되죠.”
상대 길드원이 눈을 찡긋거리며 툭 치자 구성욱은 기겁을 했다.
“아닙니다!!”
“아니에요? 아. 그러면 케인 선수 팬인가?”
“…….”
구성욱은 그냥 막연하게 서러워졌다.
‘아, 이 세상은 어째서….’
* * *
각 길드에서 나온 플레이어들은 산 넘고 물 건너서 왕국을 주파했다.
낮에는 대로를 돌아다닐 수도 없었다. 굶주린 혼돈이 보낸 병사들이 순찰하다가 걸리는 순간 미친 듯이 지원을 불러댔던 것이다.
“저기 군대다!”
“숲 안으로 들어가서 숨읍시다!”
구성욱과 길드원들은 호다닥 안으로 들어갔다.
저 멀리서 거대한 규모의 군대가 진군하고 있었던 것이다.
“잠시만 기다립시다. 이것만 지나면 국경이니까.”
“…잠깐.”
“?”
“저거… 김태현 쪽 원정대 아닙니까?”
오크들과 언데드들로 구성되어 있어서 겉모습이 좀 많이 악당 같긴 했지만, 찬찬히 훑어보자 플레이어들이 이끄는 군대라는 걸 알 수 있었다.
“김태현 쪽 원정대가 맞아!”
“가자!!”
-크핫핫핫핫!
-모두 불태우고 파괴해 버려라!
거대 멧돼지를 탄 오크 기수들과 데스 나이트들이 사방에 불을 집어 던졌다.
굶주린 혼돈의 기지를 습격해서 파괴하기 위해서였다.
그 사이에 있던 태현은 효율적으로 지시를 내렸다.
“그쪽에 불 지르지 마라! 자원 낭비다. 데스 나이트들은 날 따라와라! 내가 폭탄을 설치했다. 1분 후에 최대 화력으로 터뜨리겠다!”
-예!
일사불란하게 이리 터뜨리고 저리 터뜨리며 치고 빠지는 태현의 솜씨는 전문가 그 자체였다.
판온 최고의 테러리스트!
길드 동맹 상대할 때부터 혼자서 남의 왕국에 불 지르고 폭탄 놓던 태현이었다.
부하들이 어마어마하게 늘어난 지금, 태현의 분탕질 규모도 어마어마하게 늘어나 있었다.
“…….”
“김, 김태현 선수?”
“아. 에랑스 왕국 플레이어들인가?”
저쪽에서 다가오는 플레이어들을 목격한 태현은 반가운 표정으로 손을 흔들어줬다.
“잠깐 기다리도록. 마저 좀 태우고.”
-저기 무기창고를 부숴! 저기 무기창고를 부숴!
-아니야, 이 머저리 놈아! 중앙 상징부터 부숴야지!
활활 불타는 기지를 뒤로한 채 오토바이 위에서 마검을 휘두르며 웃고 있는 태현.
구성욱을 제외한 모든 길드원들이 충격에 빠진 표정을 지었다.
그 모습에 구성욱은 왠지 모를 쾌감을 느꼈다.
…이제 너희들도 당해봐라!