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 나는 될놈이다 1681화
“넌 지금 잘못된 길로 가고 있어!”
태현이 어지간하면 남 플레이에 훈수를 두는 사람은 아니었지만, 지금 스미스의 모습은 지적을 안 할 수가 없었다.
아무리 생각해도 저 모습은 올바른 길이 아니었다.
‘쟤는 대체 왜 볼 때마다 점점 이상한 길로 가냐?’
처음 만났을 때는 판온에서 손꼽히는 전설 직업 랭커로서 흠잡을 곳 하나 없는 놈이었는데, 어떻게 된 게 만날 때마다 나사가 하나씩 빠져가는 것 같았다.
다른 건 몰라도 키메라 종족은 좋은 선택이 아니었다.
당장 케인이 늘어난 머리통과 팔을 컨트롤하기 위해 얼마나 고생을 했던가.
그리고 솔직히 지금도 컨트롤이 많이 부족했다.
원래 두 팔 갖고 있는 사람이 여섯 팔 움직이는 건 쉬운 일이 아닌 것이다.
‘겉으로 보면 강해 보이지만 키메라 종족은 종족 특성도 구린 데다가 나중에 무슨 문제가 튀어나올지도 모르는 쓰레기 종족인데….’
굳이 시한폭탄 같은 종족을 고를 이유가 하나도 없었다.
그러나 스미스는 태현의 충고를 오해한 모양이었다.
“김태현 선수가 그런 말을 하니 웃기기 그지없습니다. 지금 제가 잘못된 길로 가고 있다니. 김태현 선수도 판온 1 때 이런 식으로 플레이를 하지 않았습니까?”
“…?”
태현은 순간 뭔 소린가 싶었다.
그리고 뒤늦게 깨달았다.
‘아니 이 미친놈이 뭘로 알아들은 거야?’
태현은 지금 스미스가 굶주린 혼돈 쪽에 섰다고 비난하는 게 아니었다.
하다보면 굶주린 혼돈 쪽에 설 수도 있었다.
게임하는데 악 성향 플레이를 할 수도 있는 것 아니겠는가. 굶주린 혼돈이 보상만 잘 챙겨준다면 그쪽에 서는 것도 한 가지 방법이었다.
하지만 키메라로 종족 변환하는 건 멍청한 짓이 맞았다.
태현은 지금 그걸 하지 말라고 말한 거였는데….
“나는 그런 뜻이 아니라….”
“스미스, 뻔뻔하고 추하구나! 김태현 선수를 자기 수준으로 끌어내리려고 하다니!”
“김태현 선수는 판온 1 때도 약한 플레이어들을 위해 싸웠던 사람이다!”
“????”
태현은 뒤에서 달려온 랭커들의 외침에 당황했다.
안 그랬는데?
‘지금 보는 눈이 몇개인데 이렇게 당당하게 왜곡을 한다고?’
“김태현 선수는 너하고 다르다! 너 혼자 레벨 좀 올리겠다고 굶주린 혼돈으로 갈아탄 주제에 김태현 선수를 비난할 생각은 하지도 마라!”
“뻔뻔하고 더러운 놈!”
“아니. 지금 그런 이야기가 아니라 키ㅁ….”
“더 이상 듣고 싶지 않습니다! 어차피 결과가 우리를 판단해 줄 겁니다. 제가 승리하고 나면 사람들이 어떻게 변할지 보십시오!”
“흥. 악은 선을 이기지 못한다, 스미스! 죽어라!”
‘분위기가 적응 안 되는군.’
랭커들과 스미스가 뜨거운 설전을 벌이자 태현은 좀 소외감을 느꼈다.
태현은 그냥 스미스하고 ‘야 너하고 나하고 누가 더 센지 붙어보자 이긴 놈이 법이다’ 같은 식의 싸움을 벌일 생각이었는데….
지금 분위기는 스미스가 완전히 악당이고 태현이 무슨 정의의 편이 된 것 같았다.
“큭… 힘이 전부라는 걸 알려주마!”
“판온이 뭔지도 모르는 놈들이!”
분위기에 휩쓸렸는지 뉴욕 라이온즈 선수들도 악당 같은 표정을 하고 악독한 눈빛을 보냈다.
태현은 더 이상 말하는 걸 포기했다.
‘그래. 키메라 된 걸 어쩌겠냐. 지 인생이지.’
나중에 ‘키메라 생각보다 안 좋은데? 케인 놈 뭐지? 사실 안 좋은 거였나?’ 이런 후회를 해봐야 정신을 차릴 것이다.
[굶주린 혼돈의 힘이 내성을 물들이기 시작합니다.]
[고대 제국의 백기사가 폭주합니다!]
스미스의 직업, 고대 제국의 백기사가 메시지창에 나오더니 그 덩치가 폭발적으로 커지기 시작했다.
안 그래도 키메라로 종족 변환을 한 탓에 인간 같지 않은 형태를 하고 있었는데 그 위압감이 몇 배로 강해졌다.
“스미스. 진짜 어디까지 갈 셈이냐!”
태현은 그렇게 외치며 검을 뽑았다. 제국의 기계공학자들이 다급하게 외쳤다.
-저 맛이 가버린 미친 기사 놈을 조심해라! 보통 미친놈이 아니다!
기계공학자들이 보기에도 스미스는 제정신이 아니었다.
고대 제국의 백기사라는 명예로운 직위를 이어받은 놈이 굶주린 혼돈에 갈아탄 데다가 이제는 키메라까지?
보통 미치는 걸로는 할 수 없는 일이었다.
우드득!
마치 거인처럼 거대해진 스미스가 팔을 채찍처럼 휘둘렀다.
금속의 건틀렛으로 보호 받고 있는 팔이 거대해지자 그것만으로도 살벌한 흉기였다.
꽝! 꽝! 꽝!
[굶주린 혼돈의 기운이 폭발합니다!]
주먹이 작렬할 때마다 바닥이 일그러지고 기운이 폭발했다.
평범한 공격 하나하나가 광역기 수준!
“조심해! 보통이 아니다!”
위험하다는 걸 깨달은 랭커들은 맞서는 대신 거리를 벌렸다.
뭘 잘못 먹었는지 거대 키메라로 변한 스미스는 이제까지와는 차원이 다른 압박을 보여줬다.
“케인 선수! 어떻게 공략해야 합니까?”
“저 스킬은 어떤 식으로 공략해야 하나요!”
원정대 탱커 플레이어들은 케인을 보며 외쳤다.
어떤 사기적인 스킬이든 간에 패턴이 있고 약점이 있었다.
그 약점을 파고드는 것이 공략의 기본.
…물론 케인은 지금 스미스의 공격 패턴을 어떻게 깨야할지 전혀 감이 오지 않고 있었다.
‘나보고 어쩌라고!?’
같은 키메라라고 물어보는 것 같았는데 알 리가 없었다.
그냥 드는 생각은 스미스가 엄청 무섭다는 것뿐!
‘저 자식 진짜 왜 이렇게 세냐? 아니. 김태현한테 처맞았으면 김태현한테 화를 내야지 왜 우리한테까지….’
저번에 한 번 밀린 게 그렇게 분했는지 스미스는 정말 작정하고 나온 것 같았다.
굶주린 혼돈의 힘은 물론이고 키메라 종족 변환까지.
같은 키메라로서 케인은 저런 움직임이 얼마나 어려운지 알고 있었다.
심지어 지금 스미스는 거인에 맞먹는 크기로 덩치를 늘리지 않았는가.
그 상황에서 여러 팔을 닥치는 대로 휘두르면서 저렇게 주변을 박살 내다니.
대단하긴 대단하다!
“일… 일단 시간을 끌자! 놈도 지칠 거야!”
“과연!”
당연한 소리였지만, 사람들도 워낙 다급해서 그런지 고개를 끄덕였다.
사실 맞는 말이긴 했다.
어떤 적도 계속해서 스킬을 쓸 수는 없었으니까. 쓰다 보면 지치는 게 당연한 것이다.
“스미스! 잘한다!”
“쓸어버려라!!”
굶주린 혼돈 쪽 플레이어들은 물론이고 불만 많던 뉴욕 라이온즈 선수들까지 환호성을 터뜨리며 스미스의 이름을 연호했다.
밖에 나오지도 않고 성 구석에 박혀서 뭘 준비하나 했었는데 이런 걸 준비하고 있었구나!
겉모습이 좀 많이 괴물 같아지긴 했지만 상관없었다. 이길 수만 있다면 뭐가 중요하겠는가.
“스미스! 스미스!”
[고대 제국의 백기사가 제물을 요구합니다!]
“오오!”
“뭘 주면 되지?”
스미스는 대답 대신 가까이 있던 뉴욕 라이온즈 선수 한 명을 붙잡았다.
그러고는 그대로 로그아웃시켜버렸다.
[굶주린 혼돈에게 제물을 바칩니다!]
[고대 제국의 백기사가 다시 그 힘을 회복합니다!]
“…….”
“…….”
방금까지 달아올랐던 분위기가 싸늘해졌다. 굶주린 혼돈 쪽 플레이어들이 경악한 눈빛으로 스미스를 쳐다보았다.
“미… 미친놈아!! 뭐하는 거야!”
스미스는 이제 대꾸하지도 귀찮다는 듯이 무시했다. 그리고는 다시 공격을 시작했다.
“스미스! 무시하지 마! 미친놈아!”
“장난하냐고!”
항의가 커지자 스미스 친위대가 대신 일갈했다.
“조용히 해라! 이 멍청한 놈들.”
“너희 같은 놈들을 이용해서 이길 수 있게 만들어주시는 스미스 님에게 감사하란 말이다!”
“…돌았냐?!”
“이 새끼들 길드 동맹한테서 못된 것만 배워 가지고…!”
스미스가 폭풍처럼 날뛰는 사이 뒤에 있는 적들이 같이 달려들었다면 아무리 태현이라도 위험했을 것이다.
혼자서 원정대 플레이어들을 다 지킬 수는 없었을 테니까.
하지만 적들은 서로 헐뜯으며 싸웠고, 덕분에 태현은 귀중한 시간을 벌 수 있었다.
“아니. 같은 키메라인데 케인하고 너무 차이 나는 거 아닌가?”
“태현 님. 지금 그런 소리 할 때가 아닌 거 같아요!”
이다비는 거리를 벌리면서 외쳤다.
가끔 덩치 큰 몬스터는 그 덩치 때문에 느린 게 아닌가 하는 편견이 있었지만, 그건 착각이었다.
강한 몬스터는 덩치가 크고 빠르기까지 했다.
지금 스미스가 딱 그랬다.
거인에 맞먹을 정도로 부풀린 덩치. 굶주린 혼돈의 갑옷으로 보호받고 있는 방어력. 평타가 광역기 수준으로 터져 나오는 공격력.
‘탱커가 저 정도 공격력을 가지면 사기 아닌가?’
하지만 불평해 봤자 달라지는 건 없었다. 태현은 지금 상황을 분석했다.
스미스가 아마 저런 힘을 발휘하는 건 이 지형의 특수성도 있는 게 분명했다.
‘방어력이나 키메라 종족 변환은 그렇다 쳐도, 공격력은 굶주린 혼돈의 기운이 크지.’
지금 스미스의 겉모습 때문에 다들 충격에 빠져서 눈치채지 못하고 있었지만, 스미스의 공격력은 지금 비정상적이었다.
키메라 종족으로 변하고 덩치를 키운다고 해서 공격 하나하나가 저렇게 광역기가 되지 않는 것이다.
굶주린 혼돈의 기운을 사용하고 있는 게 분명했다.
‘문제는 여기가 거의 무한에 가깝게 쓸 수 있다는 건데.’
꽝!
게다가 스미스는 부족하면 다른 놈들을 제물로 바쳐서 배터리 충전하듯 써먹고 있었다.
고민 끝에 태현은 빠르게 결론을 내렸다.
‘스미스를 쓰러뜨리는 것보다 빠져나가는 거에 집중해야겠군.’
사람들은 태현과 스미스의 화끈한 2차전을 기대하고 있겠지만 태현에게는 알 바 아니었다.
남 유리할 때 왜 싸워준단 말인가.
저번에 싸운 건 태현이 유리했기 때문이었다. 이번에는 태현이 불리했기 때문에 피할 생각이었고.
“이다비. 시간 끌어볼 테니까 뒤에 차원 관문 노려볼 수 있겠어?”
“네. 가능은 한데요… 어떻게 시간을 끄시려구요?”
이다비는 걱정스럽다는 듯이 태현을 쳐다보았다.
이 상황에서 시간을 끄는 건 꽤 위험할 수 있었다.
원정대를 이끄는 팀 KL 선수로서 할 말은 아니었지만 이다비는 차라리 다른 사람들을 시키고 싶었다.
“스미스! 일대일로 붙어보자!”
“…….”
이다비는 방금까지 걱정되던 마음이 사라지고 황당함을 느꼈다.
아니…!
‘지금 상황에서 굳이 그런 제안을 받을 리가 없지 않나요…?’
“…좋습니다. 어디 한번 덤벼보십시오!”
“!?”
그러나 놀랍게도 스미스는 받아들였다. 태현은 그럴 줄 알았다는 듯이 고개를 끄덕였다.
이다비는 이해하지 못하겠지만 원래 최상위권 랭커들은 자존심 빼면 시체 같은 놈들이었다.
지금 입 꾹 다물고 있었지만 스미스에게 저번의 패배가 얼마나 쓰라렸겠는가.
태현이 일대일로 다시 설욕할 기회를 꺼낸 이상, 그건 너무 달콤한 유혹이었다.
‘…여기서 또 속았다는 거 알면 스미스 선수 진짜 배신감 크게 느낄 것 같은데….’
이다비는 랭커들에게 몰래 귓속말을 하면서도 살짝 미안해졌다.
스미스 선수가 이렇게 타락한 데에는 이쪽 책임도 조금은 있었던 것 같았다.
* * *
뉴욕 라이온즈 코치, 로나는 두근두근 떨리는 눈빛으로 앞을 지켜보았다.
김태현과 스미스의 2차전이라니!
이건 판온 역사에 길게 남을 명승부가 될 것이다.
‘김태현, 실수했군! 스미스는 이번에 절대 지지 않는다!’
저번 결투에서 태현이 갖고 있던 스킬들을 빼놓은 건 물론인 데다가, 이번에 스미스가 준비한 게 너무 많았다.
여기서도 스미스가 진다면 그건 진짜 말이 되지 않는 상황이었다.
“스미스! 압도적으로 끝장내버려! 전 세계가 널 지켜보고 있다!!”
그 외침을 들었는지 스미스의 움직임이 더욱더 정교해지고 예리해졌다.
손에 들린 거대한 방패가 바닥을 쓸듯이 휘감고 지나갔다.
단순한 견제의 공격인데도 태현은 피하기 위해 전력을 다해 스킬을 써야 했다.
‘구석에 몰았다! 이제 못 빠져나가!’
누가 봐도 스미스가 몰아붙이고 있는 상황.
그 순간 로나는 뒤에서 뭔가 이상함을 깨달았다.
‘적들이 왜 안 보이지?’