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 나는 될놈이다 1676화
케인은 발끈했다.
“난 첩자랑 상관이 없거든?”
하지만 다른 사람들은 케인의 반응에 오히려 당황스러워했다.
팀 KL 동료들 말고 뒤에 있던 파티장들이 놀란 목소리로 물었다.
“하, 하지만 케인 선수….”
“케인 선수는 첩자 전문가시잖습니까.”
“맞아요. 첩자의 달인으로 알고 있었는데.”
“?!”
케인은 의외의 칭호에 당황스러워했다.
뭐의 달인이라고?
“내… 내가 뭐?”
“저번에 굶주린 혼돈의 진영에도 잠입하셨고, 또 다른 퀘스트 때도 잠입을 자주 하셨는데….”
“케인 선수 아니면 누가 첩자에 대해서 말할 수 있겠습니까?”
“저도 나름 도적 랭커긴 하지만, 케인 선수만큼 할 수는 없을 겁니다.”
파티장들의 칭찬 세례에 케인의 입꼬리가 올라가기 시작했다.
평소 동료들에게 칭찬 못 받은 만큼 이런 칭찬은 달달하기 그지없었던 것이다.
‘저거 저렇게 당하고도 아직 정신을 못 차리는군.’
‘내버려 둡시다. 당해봐야 정신을 차릴 겁니다.’
최상윤과 정수혁은 안타깝다는 듯이 케인을 쳐다보았지만 말리지는 않았다.
원래 케인이 저렇게 부추겨져서 좋은 꼴을 본 적이 별로 없었는데….
“이번에도 혹시 첩자로 들어가실 생각이십니까?”
“야. 그걸 물어보면 어떡해? 다 생각이 있으시겠지.”
“아차. 내가 그걸 모르고….”
‘응?’
케인은 파티장들이 수군거리는 것에 살짝 놀랐다.
어?
‘내가 첩자로 들어가는 게 확정인가?’
왠지 모르게 분위기가 그런 것 같…?
“들어라!”
“!”
성벽 위에서 뛰어내린 플레이어가 입을 열었다.
“저거 발론이잖아?”
“발론? 신진 랭커였나?”
“어. 뉴욕 라이온즈 코치로 들어갔다는데.”
“케인 선수. 어떻습니까? 첩자입니까?”
“…….”
케인은 당황했다.
쟤가 첩자인지 아닌지 보는 것만으로 어떻게 안단 말인가.
하지만 모인 사람들은 진심으로 케인이 맞힐 수 있다고 믿고 있었다.
“…첩자다!”
“첩자랍신다!”
“공격! 공격해!”
* * *
발론의 계획은 간단했다.
태현과의 일대일 결투였다.
-김태현과 일대일 결투를 하겠다고? 미쳐 버린 거냐?
-어차피 이기려고 하는 게 아닙니다.
발론도 태현 상대로 일대일을 붙어서 이길 확률이 낮다는 건 알고 있었다.
일대일 결투만 따지고 보면 판온 1에서부터 명성이 자자한 결투사 아닌가.
저번에 스미스를 포함한 뉴욕 라이온즈 선수들을 갈아 마신 걸 보면 아직도 숨겨 놓은 스킬들이 여럿 있을 수 있었다.
하지만 발론도 호락호락 질 생각은 없었다.
‘이길 생각을 버리고 무조건 버티기만 한다면 의외로 김태현에게도 허점은 있다.’
김태현은 변칙적이고 예상하기 힘든 스킬 콤보를 구사하는 폭발적인 근접 딜러.
방어력이나 HP가 낮은 플레이어에게는 저승사자였지만, 단단한 탱커는 비교적 상대하기 수월했다.
발론은 그 점에 주목했다.
‘폭발 데미지 감소 주문서, 물리 공격력 데미지 감소 주문서… 방어구와 장신구도 공격은 포기하고 무조건 방어에 올인했다. 김태현 특화 세트.’
어마어마한 자금력을 자랑하는 뉴욕 라이온즈인 만큼, 이미 대(對) 김태현 공략 방법은 어느 정도 확립되어 있었다.
매번 상황이 예상과 달라져서 그렇지.
그러나 이번에는….
‘버틴다. 물고 늘어진다. 시간만 끄는 거다.’
발론은 이길 생각이 없었다.
최대한 시간을 끄는 것!
발론이 김태현 상대로 일대일을 붙는다면 누구나 김태현의 승리를 예상할 것이다.
하지만 의외로 오래 걸린다면?
-의외로 잘 버티잖아?
-김태현 놈 생각보다…?
-저번에는 그냥 아껴뒀던 스킬빨로 날로 먹은 거였나?
분위기가 뒤집어질 때까지만 버티면 발론의 승리였다.
서로의 기대치가 너무 다르기에 가능한 전략!
태현은 발론 상대로 압살을 해버리지 않으면 무조건 손해인 것이다.
“김태현! 일대일….”
“공격! 공격해!”
“???”
발론은 갑자기 사방에서 튀어나오는 원정대 랭커들의 모습에 기겁했다.
“일대일! 일대일!!”
“뭐라는 거야?”
“속지 마! 저놈이 우리를 현혹시키려고 한다!”
“듣지 말고 공격해!”
[불타는 마력의 창이 작렬합니다!]
[환희의 성가가 당신을…]
[분산 사격이 방어력을 약화…]
“일대일 하자고! 김태현하고 일대일…!!”
발론은 절망적으로 외쳤지만 이미 시작된 공격에 허무하게 묻혀버렸다.
* * *
“뭐였지?”
“첩자라던데?”
“첩자가 왜 저렇게 와?”
“글쎄…? 나도 모르겠어.”
태현과 이세연은 고개를 갸웃거렸다.
당당하게 뛰어내린 것부터 영 이해가 안 가는 상대였던 것이다.
“일단 괜히 머리 쓰지 말고 공격 개시 명령부터 내리자.”
“알겠어.”
[공성전이 시작됩니다!!]
[최고급 전술 스킬을 갖고 있습니다.]
[칭호…]
[……]
[……]
[이 모든 대규모 지휘에 보너스를 받습니다! 전장에 있는 아군이 추가 보너스를 받습니다!]
어떻게 보면 화술 스킬보다 더 희귀한 게 이 전술 스킬이었다.
심지어 여기 있는 전원을 페널티 받지 않고 명령 내릴 수 있는 레벨의 전술 스킬은 더더욱!
[제국의 후계자 스탯을 갖고 있습니다.]
[고대 제국의 후계자 중 하나입니다.]
[고대 제국의 영혼들이 당신에게 힘을 빌려줍니다.]
[아군들이 추가 보너스를 받습니다!]
[아키서스가 당신을 응원합니다!]
[……]
“공격 개시!!!”
명령이 떨어지자마자 원정대들은 함성을 지르며 달려들기 시작했다.
고대 제국 흑마법사들은 모험가들을 보호하기 위해 가장 앞에 섰다.
-애송이들아! 뒤로 물러서라!
-너희같이 이마에 피도 마르지 않은 애송이들은 앞에 서선 안 된다!
“뭐 이런 재수 없….”
플레이어들 입장에서는 고마우면서도 재수 없는 소리였지만, 흑마법사들은 확실히 실력으로 증명했다.
-제국 공성 키메라 소환!
-제국 공성 키메라 소환!
굶주린 혼돈의 성벽 앞이 푹푹 꺼지더니 그 위에서 키메라들이 튀어나왔다.
성벽 위에 있던 굶주린 혼돈의 전사들이 이를 갈며 외쳤다.
-빌어먹을 흑마법사 배신자 놈들! 갈가리 찢겨 죽었어야 할 놈들이!
-하하! 굶주린 혼돈의 개들이 아주 잘 지껄이는구나! 굶주린 혼돈이 너희를 버리기까지 얼마나 남았겠느냐!
꾸어어어어어-
마치 장수풍뎅이 같은 형태를 가진 제국 키메라들이 사납게 성벽을 향해 돌진했다.
차이점이 있다면 머리 앞에 매달린 거대한 뿔로 성벽을 후려갈긴다는 점!
지상만 공격이 아니었다. 하늘에서도 수십 마리의 와이번 키메라들이 소환되어서 성벽 위를 공략했다.
“대단하다…!”
“시체도 없는 곳에서 어떻게 이 정도 규모를….”
흑마법사 랭커들은 감탄할 수밖에 없었다.
좀 미치광이 늙은이들처럼 보이긴 했지만 실력은 진짜였구나!
느카넷살은 흑마법사 사이에서 외쳤다.
-카르바노그 키메라 소환!
“??”
태현은 당황했다.
저런 게 있었나?
[카르바노그도 놀랍니다!]
쿠구구궁-
말 그대로 거대한 토끼가 전장 한복판에 소환되었다.
“????”
“뭐여 저게?”
아군도, 적군도 당황했다.
저 토끼는 대체?
-캬아아아악!
카르바노그 키메라는 눈을 붉게 빛내더니 그대로 마력포를 쏘아냈다.
동시에 입에서는 지옥의 산성 액체를 토해냈다. 직격을 맞은 굶주린 혼돈의 성벽이 순식간에 녹아내렸다.
-저 저 미친…!?
굶주린 혼돈의 전사가 기겁하는 사이 카르바노그 키메라가 두 발로 일어섰다.
그러고는 성문을 후려갈겼다.
콰아아아아앙!!
자리에 모인 사람들은 토끼가 무서울 수 있다는 걸 처음 깨달았다.
‘근데 저쯤 되면 토끼가 아닌….’
아무리 봐도 토끼 형태에 뭔가 이것저것 다 쑤셔넣은 것 같은데?
“지금이다! 성벽을 타고 올라라!”
“와아아아아아아아!”
고대 제국 흑마법사들이 벌어준 틈을 타고, 플레이어들이 각자 맡은 구역에서 돌진을 시작했다.
태현도 그 사이에 섞여서 달려들었다.
* * *
즉석에서 만든 사다리였지만 태현을 포함한 여러 대장장이들이 감독한 덕분에 사다리의 성능은 충분했다.
오크들은 순식간에 기어올랐다.
물론 대다수는 굶주린 혼돈의 전사들의 칼질에 튕겨 나가고 박살 났지만, 오크들은 원래 질을 양으로 압도하는 이들.
부수고 부숴도 계속 사다리를 걸고, 혼란을 틈타 한둘씩 올라오는 오크들은 적을 질리게 만들었다.
그리고 태현도 그 사이에 있었다.
‘숫자 많으니까 편하긴 하군.’
매번 숫자 적은 입장에서 싸우다가, 이렇게 숫자가 많은 공격 입장이 되니 솔직히 편했다.
지금 태현이 변장하고 오크들 사이에 있는데도 적들은 아직 눈치를 못 채고 있지 않은가.
“태현아!”
“무슨 일입니까?”
얼굴 아는 오크 아저씨들이 다가오자 태현은 의아해하며 물었다.
도움이라도 필요하신 건가?
“지금 누가 위험에 빠지기라도 했습니까?”
“아니, 그건 아닌데….”
우물쭈물하는 오크 아저씨들의 모습에 태현은 더욱 의아해졌다.
뭐지?
“그게… 에잇. 됐다! 공격 들어가자!”
“???”
태현은 궁금했지만 일단 사다리를 타고 성벽 위로 올라갔다.
나중에 물어도 될 일이니까!
[굶주린 혼돈의 성벽 통로에 입장했습니다!]
[……]
[……]
성벽 위에 도착했지만 여전히 갈 길은 멀어 보였다.
굶주린 혼돈의 성은 그 자체로 미궁 같은 곳이었다.
성벽 하나 넘는다고 끝이 아닌, 그 아래에도 소형 요새들과 작은 성벽들이 설치되어 있는 미궁.
성벽을 뺏긴 굶주린 혼돈의 전사들은 뒤로 후퇴해서 바로 다시 싸울 준비를 하고 있었다.
-적들이 성벽에서 내려온다! 쏴라!
“방패 앞으로! 성벽을 내주지 마!”
“사다리 계속 걸쳐서 올라오게 해!”
“저기 앞을 뺏자!”
“불을 질러버려!”
서로 찌르고 찔리기를 반복하는 난전.
태현은 성벽 양옆에서 몰려오는 적들을 한 번 밀어낸 다음 생각했다.
‘성의 핵심인 곳이 있을 텐데.’
태현은 이런 성일수록 중심부가 중요하다는 걸 알고 있었다.
굶주린 혼돈의 힘으로 유지되는 만큼, 어딘가 그 힘의 중심부가 있을 것이다!
-신의 예지!
[굶주린 혼돈의 힘이 권능을 방해합니다!]
앞에 두 갈래 길이 나타났다. 고대 제국의 흑마법사가 가호를 걸어줬음에도 불구하고 굶주린 혼돈의 힘이 워낙 강해서 혼동이 온 것이다.
그 순간 마검이 외쳤다.
-왼쪽! 왼쪽!
“!”
태현은 놀랐지만 일단 시키는 대로 했다. 오크들을 데리고 성벽에서 내려와 왼쪽으로 내달렸다.
고대 제국의 기계공학자들이 보기에, 이 성에 숨겨진 비밀이 있는 걸까?
[카르바노그가 그럴지도 모른다고 말합니다!]
[굶주린 혼돈의 지하 계단을 발견합니다!]
[성의 지하 통로를 발견합니다!]
“지하 통로다! 이쪽에 지하 통로가 있다!”
“지하 통로를 확보해야 해! 성벽 넘은 플레이어들은 다 이쪽으로 오라고 해!”
지금 성을 한 뼘씩 뺏는 소모전을 벌이기보다는 중요한 곳부터 손에 넣어야 했다.
태현의 명령에 성벽을 넘은 플레이어들이 한쪽으로 모이기 시작했다.
-지하 통로가 발각됐다!!
-놈들이 지하 통로를 찾아냈어!
-막아라! 저기는 넘겨줘서는 안 된다!
유연하게 물러서던 굶주린 혼돈의 하수인들도 더는 안 된다고 생각했는지 갑자기 매섭게 덤벼들었다.
아군 쪽 키메라 괴수들과 적 쪽 키메라 괴수들이 부딪히고, 사방에서 오크들과 굶주린 혼돈의 전사들이 어깨를 부딪히며 함성을 질러댔다.
태현은 닥치는 대로 보이는 적들에게 공격을 넣으며 물었다.
“그런데 아까 어떻게 왼쪽인 걸 안 거지? 혹시 설계도 같은 걸 갖고 있나?”
-아니!
“그러면?”
-직감으로!
-훌륭한 기계공학자라면 직감이 좋아야 하지!
“…….”
태현은 순간 욕을 할 뻔했다.
이런 미친놈들이…!
‘마검 말은 앞으로 걸러서 들어야겠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