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 나는 될놈이다 1675화
“확실히 지금 공성에는 불리한 상황이긴 해.”
태현은 이세연의 걱정에 동의했다.
아키서스 포병대부터 시작해서 쟁쟁한 공성부대들을 다 두고 온 것이다.
하지만 불운이 있으면 행운도 따라오는 법.
“하지만 대신할 것들이 있지.”
느카넷살을 필두로 한 고대 제국 흑마법사들.
거대 언데드 괴수들을 닥치는 대로 불러올 수 있는 이들의 능력을 생각해 보면 공성부대가 없어도 공격 방법은 있었다.
게다가….
“아이고. 태현이 왔냐!”
“니 아버지 따라다니다가 말라 죽을 뻔했다!”
오크 아저씨들이 각자 오크들을 데리고 합류하기 시작했다.
워낙 데리고 다니는 오크들이 많아서 아직 다 모이지 않았는데도 벌써 규모가 상당했다.
“끌려 온 원정대 규모도 상당하니까.”
“…그렇군.”
이세연은 알겠다는 듯이 고개를 끄덕였다.
굶주린 혼돈은 내부에서 분열을 일으키고 분란을 유도하기 위해 사람들을 많이 데리고 왔지만, 이런 상황에서는 역으로 작용했다.
뭉칠 수만 있다면 그것만큼 위험한 일도 없는 것이다.
“좋아. 그렇다면 지금 가장 먼저 해야 하는 건 뭐지? 공성용으로 골렘 강화? 새 언데드 소환?”
“아니. 요리부터 할 건데.”
태현은 허리춤에 차고 있던 토왕이를 들어서 거꾸로 탈탈탈 털고 있었다.
안에 있던 각종 식재료들과 냄비들이 쏟아져 나왔다.
지금 가장 먼저 해야 할 건 원정대 플레이어들의 회복!
…이 논리적으로 맞긴 했지만, 김이 빠지는 건 어쩔 수 없었다.
* * *
“이 새끼, 도대체 일처리를 어떻게 하길래 김태현 한 명을 못 잡고 상황을 이 꼴로 만드는 거냐?”
“네가 해보던가! 네놈은 원정대 하나 못 잡고 기다리다가 이 꼴을 만들어놓고 무슨 말을 지껄이는 거냐!”
성 안의 분위기는 그야말로 개판이었다.
방금까지 좋았던 분위기가 이렇게 한 번에 뒤집힐 거라고 어느 누가 예상했겠는가.
원래라면 절대 찾을 수 없는 곳에 위치한 굶주린 혼돈의 성.
그 앞에 수많은 원정대가 질서정연하게 포위망을 구축하기 시작했으니 당연한 반응이었다.
대체 어떻게??
“여길 어떻게 찾아낸 건데! 굶주린 혼돈이 절대 찾을 수 없다고 했잖아!”
“굶주린 혼돈 이 새끼 진짜 너무 무능한 거 아니냐? 내가 예전에 사디크 교단에도 가입한 적 있었거든? 근데 이 정도로 무능하진 않았었어.”
[굶주린 혼돈이 분노해서 저주를 내립니다!]
“해봐, 이 무능한 새끼야! 할 줄 아는 건 아군 팀킬밖에 없냐! 니가 이럴수록 플레이어들은 더 튈 거다! 내가 사디크 교단에 가입했을 때도 지금처럼 후회하진….”
[굶주린 혼돈이 분노해서 더 강한 저주를 내립니다!]
굶주린 혼돈은 건방진 모험가들에게 철퇴를 휘둘렀지만, 악에 받친 플레이어들이 가만히 있을 리 없었다.
어디 한번 해볼 테면 해보라는 듯이 날뛰었다.
“김태현 데리고 올 거면 레벨 1 정도로 만들고 데리고 와야 하지 않냐? 근데 이세연에 이상한 NPC 동료까지 다 붙여서 데리고 왔어!”
“멍청한 새끼! 저런 새끼가 던전 만들면 1층부터 약한 놈 배치해서 차근차근 성장할 기회 줄걸!”
“야! 내가 만들었어도 너보단 잘 했겠다!”
[굶주린 혼돈이 분노해서 저주를 내립니다!]
[굶주린 혼돈이 분노해서 저주를 내립니다!]
[굶주린 혼돈이 분노해서 저주를 내립니다!]
폭발한 플레이어들의 처벌이 대충 끝나고, 이제 잃을 게 너무 많아서 입 다물고 있는 플레이어들만 남았다.
그중 가장 발언권이 강한 뉴욕 라이온즈 코치들이 입을 열었다.
선수들이 입을 열지 않은 이유는 하나였다.
이미 서로 너무 많이 싸웠던 것이다.
“…분위기가 이상하게 흘러갔지만 아직 수습 가능하다. 굶주린 혼돈의 퀘스트는 이 성을 지키고 지하에 있는 외부 통로를 지키는 것. 원정대가 공격하는 걸 잘 받아치고 허점이 보이면 그대로 쓸어버리기만 해도….”
“퍽이나 그게 되겠습니다.”
“받아치러 가봤자 김태현한테 썰리기나 하겠지.”
쑤닝이 만약 이 자리에 있었다면 매우 놀랐을 것이다.
-저건… 예전에 본 적이 있는 모습인데?! 데자뷰인가?!
예전 길드 동맹에서도 본 적 있었던 모습.
‘어차피 우린 안 될 거야’의 패배감!
태현은 한 번 싸울 때 상대를 그냥 쓰러뜨리지 않고 정신적 충격까지 같이 주는 방식으로 싸웠다.
실제로는 아슬아슬하게 이겼다 하더라도 상대가 ‘이렇게 말도 안 되게 지다니…!’라고 생각한다면, 그 다음에 싸울 때 훨씬 더 수월해지는 것이다.
상대의 머릿속에 공포가 남아 있는 한 그건 태현의 손바닥 위에서 놀아나는 것이나 마찬가지였다.
뉴욕 라이온즈 선수들도 지금 분위기가 비슷했다.
한 번도 아니고 여러 번 깨진 지금 먼저 가봤자 또 깨질 거라는 우울한 확신이 서로 퍼진 것이다.
물론 태현도 갖고 있던 밑천을 닥치는 대로 털어서 상대한 것이었지만….
뉴욕 라이온즈 선수들은 그걸 알지 못했다.
“김태현도 이제 갖고 있던 스킬들이 바닥났을 거다!”
“저번에도 그 소리 했다가 당했잖습니까.”
“직접 가시던가 하십쇼.”
“김태현은 저번 아레네 시 공방전에서 드래곤 키메라에게 저주를 받았다! 그 저주가 언제 터질지 모르는데 정말 안 싸울 거냐?”
“그래서 믿고 갔다가 두 명 죽었잖습니까.”
“김태현 놈 엄청나게 쌩쌩하덥니다.”
선수들의 시큰둥한 반응에 코치들은 분노했다.
이 연봉 받아가는 놈들이 진짜!
“닥치고 싸우지 못해!? 위에 보고하기 전에 일어나!”
“예. 예. 알겠습니다.”
“하여간 제대로 된 공략 방법도 짜내지 못하면서 다그치는 것만 잘 하고….”
선수들은 투덜거리면서 회의실 밖으로 싸우러 나갔다.
코치들은 심각한 표정을 지었다.
그들도 당연히 저 분위기를 느끼고 있었다.
싸우기 전에 벌써 지고 들어가는 저 분위기!
“어떻게 좀 방법이 없나?”
“굶주린 혼돈이 일처리를 이렇게 했는데 어떻게 합니까. 아니. 미친 놈 아닙니까? 뭔 원정대를 이만한 숫자를 끌고 왔어요?”
[굶주린 혼돈이 분노해서 저주를 내립니다!]
“아! 해봐! 나 어차피 레벨 낮아 새끼야!”
코치 중 한 명이 발끈해서 외쳤다. 어차피 그들은 코칭 때문에 온 거지 직접 키우고 있는 게 아닌 것이다.
“굶주린 혼돈이 병력을 불러서 지원해 주겠다는데.”
“솔직히 그것도 좀 못 미덥습니다. 이제까지 불렀는데 다 깨졌잖아요.”
“그건 근데 적 라인업이 워낙 대단했던 거고. 지금 상대 라인업은 의외로 약하다고. 대주교들 다 빠졌고 성기사단장들도 다 빠졌잖아. 드래곤들도 없다고.”
코치는 솔직히 억울했다.
물론 김태현이 굶주린 혼돈의 드래곤 키메라를 쓰러뜨리긴 했다.
하지만 냉정하게 분석해 보면 그건 김태현의 능력 때문이 아니었다.
각 교단 대주교들, 성기사단장, 드래곤 두 마리, 거기에 온갖 전력이란 전력이 다 모여 있었던 것이다.
선 세력의 올스타 라인업이라고 해도 이상하지 않은데 그 전투 때문에 ‘우린 안 될 거야 김태현한테’이러는 건 비논리적이지 않은가!
…선수들한테 이렇게 말해봤자 아무 소용이 없었지만.
“스미스는?”
“지금 스미스는 역효과 납니다. 선수들 중에서 불만 품은 사람이 많아서. 본인도 자중하고 있는 것 같고. 차라리 제가 나서보겠습니다.”
“자네가??”
“예!”
다른 코치들은 새로 들어온 신인 코치의 패기 넘치는 말에 당황스러워 했다.
랭커 출신으로 실력을 인정 받고 들어온 코치긴 했는데, 설마….
“설마 김태현을 암살하려고? 아니지?”
“…아닙니다.”
* * *
가마솥 수십 개가 추가로 설치되고 파워 워리어 소속 요리사들이 닥치는 대로 재료를 손질하고 장작을 불에 집어 던졌다.
모든 가마솥마다 군침 도는 냄새가 솟아올랐다. 당근, 감자, 양파 같이 흔한 야채들을 잘라서 넣고 돼지고기나 닭고기 같은 흔한 고기들을 조리해서 넣었을 뿐이었는데 어느 랭커도 불만을 가지지 않았다.
아, 평범한 음식도 이렇게 감사한 거였다니!
“이 가마솥은 괴식 요리가 진행되고 있습니다! 괴식 요리를 드시고 싶으신 분은….”
싸아악-
플레이어들은 바로 옆줄로 대피했다. 오크 아저씨들은 투덜거리면서 그 줄에 섰다.
“이게 얼마나 몸에 좋은데….”
“어린 녀석들은 뭘 모른다니까.”
“괜찮다. 맛을 아는 사람들만 먹는 게 좋지. 다른 사람들도 먹으면 우리가 먹을 양이 줄어들잖아.”
김태산은 <데스 나이트 해골 수프>를 나무 그릇에 담뿍 담았다.
“그런데 길마님.”
“?”
“태현이 녀석이 아까 지나가는 걸 봤는데….”
지금 태현은 수많은 오크들 중에 그나마 대장장이 기술 스킬 높은 놈들을 뽑아서 즉석 공성 무기를 제작하고 있었다.
최소한 사다리라도 있어야 그 많은 숫자가 공격할 수 있을 테니까.
“아까 커플링 비슷한 걸 끼고 있더라고요.”
풉!
김태산은 먹고 있던 수프를 뱉었다.
“진짜냐??”
“누구랑?? 난 걔가 평생 혼자 살 줄 알았는데??”
아저씨들은 매우 흥미진진한 표정으로 우르르 모였다.
원래 남의 자식 연애 이야기는 흥미롭기 그지없는 주제였다.
하물며 그게 태현이라면 더더욱.
“난 누군지 알지.”
“어? 누군데?”
“파워 워리어 길마 있잖아.”
“아. 그 팔 여섯 개 달린 친구?”
“걔가 왜 나와! 걔는 다른 놈이고!그 사제 있잖아!”
“아아. 그 친구. 그 친구면 잘 됐네. 잘 어울려 보이던데.”
“야. 야. 지방방송 꺼라. 그래서 누구랑 같이 끼고 있는데?”
요즘 젊은 플레이어들은 판온에서도 연애를 한다는 것 정도는 아저씨들도 알고 있었다.
흥미진진하다!
“그 네크로맨서 선수 있잖아요. 그 선수하고 같은 걸 끼고 있던데요.”
“허어….”
“둘이 사이 안 좋지 않았나?”
“원래 공인들은 연애할 때 겉으로는 싸우고 속으로는 사귀는 거야.”
“그랬나?”
“근데 길마님.”
다른 아저씨 한 명이 손을 들었다.
“뭐냐?”
“저도 봤다가 말을 안 한 게 있는데, 그… 태현이가 파워 워리어 길마하고 같은 반지를 끼고 있던데요.”
“…….”
“…….”
아저씨들은 정색했다.
이 새끼가?
“아니. 형님. 자식 교육을 어떻게 하고 있는 겁니까??”
“무, 무슨… 지금 확실치 않은 루머로 내 자식과 나를 공격하는 거냐? 아닐 경우 뒷감당을 어떻게 하려고?”
어지간히 당황했는지 김태산의 입에서도 논리정연한 말이 흘러나왔다. 아저씨들도 그건 맞다고 생각했는지 한 걸음 물러섰다.
“이거 기사 나면 태현이 이미지 바닥 가고 원정대가 무너지고 굶주린 혼돈이 대륙 점령하고 우리 길드 박살 나는 거 아닙니까?”
“너무 비약이 심한 것 같으면서도 그럴듯하군.”
“근데 우리도 예전에 게임할 때 버프 받으려고 우리끼리 게임 내에서 결혼했었잖아요? 그런 거 아닙니까?”
“야. 넌 쪽팔리게 왜 그런 소리를 해? 어디 가서 그런 말 하지 마라. 우리 와이프가 들으면 오해한다.”
“그리고 요즘 젊은 애들은 그런 짓 안 해. 얘네들은 반지를 끼면 사귀는 거야.”
“그… 그런가?”
“저번에 그냥 반지 버프 받으려고 같이 끼는 놈들 봤었는데…?”
몇몇 아저씨들이 의견을 제시했지만 크게 받아들여지지는 않았다.
김태산이 무거운 표정으로 고개를 끄덕이며 말했다.
“내가 가서 직접 확인해 보겠다.”
“형님! 너무….”
“아니다! 만약 너희들이 본 게 사실이라면 내 책임이다. 내가 확실하게 물어보겠다.”
김태산의 말에 오크 아저씨들은 감동했다.
저게 길마지!
‘그런데 생각해 보니까 자식 연애하는 거 일일이 캐묻는 거 너무 주책 같은데.’
생각 있는 몇 명은 그렇게 생각했지만, 불행히도 입 밖으로 꺼내지 않았다.
* * *
“공격 개시!”
태현은 적에게 시간을 줄 생각이 없었다.
배 채우는 동안 공성 병기 즉석으로 만든 다음 흑마법사들이 공성 괴수 소환하자마자 바로 공격!
그 순간 성벽 위에서 누군가 뛰어내렸다.
“?”
“미친놈인가?”
“항복하려는 거 아니야?”
“지금 항복하는 건 무조건 첩자지. 케인 봐라.”
“왜 첩자 이야기하는데 날 예시로 드냐? 응?”