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 나는 될놈이다 1674화
-굶주린 혼돈의 하수인들이 모여 있는 곳이 곧 이 영역의 출구다.
-놈들은 굶주린 혼돈의 힘을 사용해 하수인이 아니면 찾아내지 못하게 만들었지만 우리는 놈들을 꾸준히 추적해서 찾아냈지.
“훌륭하십니다.”
태현은 진심을 담아 말했다.
여기 있는 이 고대 제국 출신 흑마법사들은 태현이 만난 NPC들 중 손꼽히게 유능한 이들이었다.
이들은 과연 기대를 버리지 않았다.
복잡한 연계 퀘스트를 잘 요리해서 태현 입에 다 떠먹여 주는 수준!
-굶주린 혼돈 때문에 스킬을 쓰는데 방해가 많이 들어올 터.
-우리가 마법을 걸어주마.
[고대 제국의 흑마법사들이 <고대 제국의 비전 가호>를 시전합니다!]
[굶주린 혼돈의 영역에서도 방해받지 않고 스킬을 사용할 수 있는 확률이 크게 올라갑니다!]
“!”
태현보다 이세연이 더 놀랐다. 이세연한테는 추가 메시지창이 떴던 것이다.
[고대 제국의 흑마법을 목격합니다!]
[흑마법 스킬이 오릅니다!]
[<고대 제국의 비전 가호>을 배웁니다!]
[……]
[……]
[……]
마법사 플레이어들 사이에서 ‘굶주린 혼돈의 방해를 뚫을 방법이 없을까?’는 꽤 예전부터 나왔던 이야기였다.
다른 근접 직업들에 비해 마법사는 저런 스킬 방해가 훨씬 더 치명적이었던 것이다.
그런데 이렇게 쉽게 방법을 얻어내다니.
…꿈인가?
퍽퍽퍽-
“?”
깜짝 놀란 이세연이 태현의 어깨를 두드리자 태현은 뭐하냐는 듯이 쳐다보았다.
이세연은 얼마나 놀랐는지 말도 제대로 하지 못하고 있었다.
“이, 이거….”
“어? 역효과 났어? 디버프 걸렸어?”
-그럴 리가 없는데??
-혹시 이상한 사파 흑마법을 익힌 것 아닌가? 우리가 익힌 게 고대 제국 정통 흑마법이라 사파 흑마법은….
“아니. 이세연도 나름 느부캇네살 계보를 잇는 정통 흑마법….”
“그게 아니라!”
이세연은 간신히 침착을 되찾았다.
“이게 지금 얼마나 대단한 건지 알아?”
“응? 아는데.”
“…….”
사실 굶주린 혼돈한테 방해를 받아도 행운 스탯으로 꽤 많이 커버가 되는 태현과, 그런 커버가 안 되는 이세연은 받아들이는 감상이 다를 수밖에 없었다.
태현에게 <고대 제국의 비전 가호>는 그냥 좋은 버프 중 하나였다면, 이세연에게 <고대 제국의 비전 가호>는 지금 원정대 마법사 플레이어들의 전력을 대폭 올려줄 사기적인 스킬이었던 것이다.
마음 같아서는 지금이라도 빨리 돌아가서 이 마법을 전부 뿌리고 싶을 정도였다.
설명을 다 들은 태현은 이세연이 왜 저러는지 드디어 이해가 갔다.
“아니. 그런 마법을 그냥 걸어줬다고?”
“그러니까…!”
이세연은 이제야 이해해 주는 태현을 보고 고개를 끄덕였다.
-흥. 딱히 네 녀석이 예뻐서 가르쳐 준 건 아니다.
-굶주린 혼돈을 상대하기 위해서라면 어쩔 수 없었던 거였지.
고대 제국의 흑마법사들은 코밑을 쓱 훔치며 말했다.
예전에도 본 적 있는 모습이었지만, 키메라 골렘으로 변신한 지금은 좀 많이 기괴한 모습이었다.
* * *
“찾아!”
“제기랄. 뭐 이리 넓어?”
놀랍게도, 굶주린 혼돈의 영역은 뉴욕 라이온즈 선수들에게도 비슷하게 괴로웠다.
[<굶주린 혼돈의 성>에서 멀어집니다!]
[굶주림과 갈증이 심해집니다!]
[<굶주린 혼돈의 표식>을 발견합니다!]
[길을 잃지 않도록 주의하십시오!]
굶주린 혼돈을 믿고 있는 덕분에 곳곳에 길을 표시한 표식과, 휴식할 수 있는 성을 사용할 수 있긴 했지만….
그 외에는 다른 플레이어들과 비슷했다.
지금 멀리 숨어버린 김태현과 이세연을 찾으려면 그들도 똑같이 고생을 해야 했던 것이다.
“어이. 그냥 내버려 두자. 원정대처럼 김태현이나 이세연도 내버려 두면 알아서 무너질 거야.”
“말도 안 되는 소리 하지 마라. 김태현이나 이세연이 평범한 랭커 같아 보이냐?”
저스틴은 동료의 말에 벌컥 화를 냈다.
역시 직접 맞아 본 적 없는 사람은 생각하는 게 다를 수밖에 없었다.
저스틴은 확신이 있었다.
‘분명히 둘은 내버려 두면 뭔가 한다! 그 전에 잡아야 해!’
아무 근거 없는 터무니없는 소리였지만, 놀랍게도 뉴욕 라이온즈에서는 저스틴의 말에 동의하는 사람들이 꽤 많았다.
“나도 그렇게 생각한다.”
“미리 싹을 잘라야지.”
심지어 가장 이성적으로 판단해야 할 코치도 동의했다.
“내버려 두면 무슨 짓을 할지 모르니 먼저 찾는 게 좋을 거 같다.”
“…….”
“…….”
태현에게 직접 맞아본 적 없는 신인 선수들은 황당해했다.
‘단체로 미쳤나?’
‘머릿속에 합리적이라는 단어가 사라졌나?’
지금 시간이 남아도는 것도 아니었다.
끌려온 원정대 플레이어 숫자가 상당한 편이라 감시하고 있다가 무너지는 순간 딱 들이쳐야 하는데, 이 망망대해 같은 황무지 어딘가에 숨어 있는 김태현과 이세연을 잡으러 돌아다녀야 한다니.
‘하도 맞아서 피해망상 걸린 거 아닌가?’
‘확실히 그럴듯해.’
이런 신인 선수들의 불온한 눈빛을 모를 리 없었다.
저스틴은 좀 더 설득을 해야 할 필요성을 느꼈다.
“…김태현하고 이세연 잡을 기회가 지금 말고 있을 것 같냐? 이렇게 굶주린 혼돈이 떠먹여 줄 때가 또 올 것 같냐고.”
“!”
단순한 불안감 때문만이 아니었다.
지금이 아니면 김태현과 이세연을 잡을 수 없다는 욕심!
코치들도 그걸 알고 있었기에 잡으라고 말하고 있었다.
‘지금 상황에서 김태현이나 이세연 둘 중 한 명만 잡으면 영웅이 된다.’
‘뉴욕 라이온즈 팬들은 물론이고 관심 없던 사람들도 관심을 가지게 될 터.’
이미 이러니저러니 해도 뉴욕 라이온즈는 지금 퀘스트에서 악당 이미지를 맡고 있었다.
악당 이미지라고 꼭 나쁜 건 아니었다. 오히려 관심을 더 받을 수도 있었다.
사람들은 이러니저러니 해도 화제가 되면 관심을 가지게 되어 있었으니까.
게임단 입장에서 가장 안 좋은 건 무관심인 것이다.
이런 악당 이미지를 밀고 나가려면 강함이 중요했다.
강하고 카리스마 있는 악당은 아무리 욕을 먹어도 팬들이 모일 수밖에 없었다.
하지만 약하면?
악당 주제에 약하면 그건 최악이었다. 비웃음만 사고 웃음거리가 될 것이다.
그런 점에서 봤을 때 지금 뉴욕 라이온즈는 상당히 위태로웠다.
스미스가 길드 동맹을 말 그대로 으깨버려서 화제를 모으긴 했지만, 하필이면 김태현 상대로 졸전을 펼친 것이다.
물론 스미스도 사정은 있었지만 대중은 그런 걸 감안해 주지 않았다.
오로지 결과만 보고 평가한다!
분위기를 뒤엎으려면 뉴욕 라이온즈도 결과를 만들어야 했다.
그리고 김태현이나 이세연을 잡는 건 넘칠 정도로 충분한 결과가 될 것이다.
“이제 알겠냐? 왜 김태현하고 이세연을 잡아야 하는지. 한 번 잡기만 하면 스미스는 신경 안 써도 돼. 수뇌부에서 밀어줄 거라고.”
“그… 그렇군.”
“하지만 어떻게 잡지?”
“생각해 내! 가만히 있는다고 김태현하고 이세연이 우리 손바닥 위로 굴러와 주겠어? 머리를 굴리란 말이다!”
저스틴의 말에 다들 고개를 끄덕였다.
가만히 있는다고 김태현하고 이세연이 찾아와 주지는 않았….
“저기다!”
-찾았다! 죽여 버려라!!
“!?!??!”
“뭐, 뭐야?!”
두두두두두-
굉음과 함께 반대편에서 한 무리의 적들이 나타났다.
굶주린 혼돈의 괴수 말고는 아무것도 없는 이곳에 대체 누가!?
[느카넷살이 <지옥의 폭우>를 시전합니다!]
[주변에 독성 비가 내리기 시작합니다!]
[느카넷살이 <카르바노그를 위한 장송곡>을 시전합니다!]
[장송곡을 들은 적들의 모든 능력치가 크게 내려갑니다!]
[카르바노그가 고맙긴 한데 왜 저기에 자기 이름을 붙이냐고…]
다시 만난 느카넷살은 여전히 강력한 흑마법사였다.
주변에 사악한 독성 비를 뿌리기 시작하더니 끔찍한 장송곡을 연주했다.
귀를 찢는 장송곡을 들은 플레이어들은 마치 머리를 두들겨 맞은 것처럼 비틀거렸다.
-가라, 뛰어난 흑마법사여! 우리가 지원해 주겠네!
“데스 나이트 소환!”
이세연의 최정예 데스 나이트들이 허공에서 차원문을 찢고 튀어나왔다.
굶주린 혼돈의 방해가 없어서인지 훨씬 더 빠르고 강력했다.
그 모습에 키메라 골렘으로 변한 고대 제국 흑마법사들은 후배를 칭찬….
…하는 대신 잔소리를 늘어놓았다.
-어허… 데스 나이트가 조금 아쉽군.
“…….”
-나라면 창기병의 숫자를 조금 더 줄이고 궁기병을 넣었을 거야.
-갑옷이 너무 물리 방어력에 치중한 것 아닌가? 물론 데스 나이트가 물리 방어력이 중요하긴 하지만 마법 방어력도….
-나라면 흑요석을 사용해서 상태 이상 저항력을….
이세연은 태현을 쳐다보았다. 니 친구니까 니가 책임지란 눈빛이었다.
태현은 못 본 척했다.
* * *
-이대로 성까지 치고 들어간다!
-적들에게 대응할 시간을 주지 마라!
태현 일행은 말 그대로 질풍처럼 내달렸다.
원래 이런 퀘스트에서 시간을 주면 안 된다는 걸 태현은 잘 알고 있었다.
“이세연! 원정대한테 연락해 줘!”
“알고 있어!”
이세연의 데스 나이트 몇 기가 원정대에 소식을 전하기 위해 내달렸다.
고대 제국의 흑마법사 덕분에 길을 찾는 방법을 알게 된 지금, 데스 나이트를 보내서 원정대를 부를 수 있게 된 것이다.
“김태현…! 도대체 넌 뭐냐!!”
‘정말 좋은 질문이야.’
울분에 차서 덤벼드는 뉴욕 라이온즈 선수의 외침에, 이세연은 무심코 동의했다.
얼마나 억울할까!
굶주린 혼돈이 직접 만들어 준 영역에 맨몸으로 던져놨는데 또 어디서 자기 동료들을 꾸역꾸역 찾아서 데리고 나오다니.
뉴욕 라이온즈 선수들 입장에서는 정말 피눈물이 날 게 분명했다.
“성 안으로 들어가!”
“별거 아닐 수도 있잖아! 별거 아닐 수도 있다고! 차라리 싸우자!”
“멍청한 짓 하지 마! 저 괴물들은 평범해 보이지 않아!”
-뭐? 괴물?
-이 건방진 핏덩이 모험가들이! 누가 누구보고 괴물이라는 거야!
-굶주린 혼돈과 붙어먹은 네놈들이 괴물이다!
고대 제국 흑마법사들은 씩씩댔지만 뉴욕 라이온즈 선수들은 무시하고 성 안으로 들어가 버렸다.
태현은 아쉽다는 듯이 입맛을 다셨다.
“덤벼줬으면 했는데 그러진 않는군.”
“가면을 좀 더 쓰고 있을 거 그랬나….”
“이세연 넌 가면 써도 스킬 때문에 티가 날걸.”
‘너 말한 거잖아…!’
이세연은 황당해했다.
지금 설마 저기 선수들이 이세연만 보고 도망갔겠는가!
솔직히 태현의 지분이 더 크면 컸지….
“너 보고 도망간 거지.”
“아니. 너 보고 도망간 거겠지.”
“아니라니까?”
“그러면 불러서 물어보자고.”
“해볼 수 있으면 해봐.”
“저. 두 분…?”
뒤늦게 도착한 원정대 플레이어들이 쭈뼛거리며 말했다.
소식을 듣고 너무 반가워서 호다닥 달려왔는데 태현과 이세연이 말다툼을 하고 있어서 끼어들 엄두가 나지 않았다.
대체 무슨 주제로 싸우고 있었던 거지?
“무슨 일인진 모르겠지만 두 분이 화해를 하시는 게 좋지 않을까요…?”
“?”
“!”
태현과 이세연은 동시에 무슨 소리를 하는지 깨달았다.
“아. 싸우는 거 아닌데.”
“저희 친해요.”
원정대 앞에서는 서로 싸워도 싸웠다는 소리를 하면 안 됐다.
태현과 이세연은 고개를 끄덕이며 뜻을 교환했다.
“그렇습니까? 근데 무슨 대화를 그렇게?”
“…성을 어떻게 공략할지 잠시 의견 차이가 있어서.”
“아아!”
플레이어들은 감탄했다.
그들을 구출하기 위해 여기까지 뚫고 온 것도 이미 넘칠 정도로 감동이었는데, 거기서 멈추지 않고 성을 바로 공략할 준비를 하고 있다니….
‘우리는 행운아야!’
‘이런 사람들이 이끄는 퀘스트에 참가하고 있다니…!’
플레이어들은 감격한 표정으로 둘을 쳐다보았다. 그걸 본 이세연은 문득 걱정이 됐다.
‘…공성전 잘 할 수 있겠지?’
이렇게 기대시켜놓고 실패하면 그건 그거대로 망신인데….