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 나는 될놈이다 1668화
“근데 갑옷과 검을 빨리 완성하려면 네가 좀 도와줘야 해.”
“….”
이세연은 미소 짓다가 떨떠름한 표정으로 바뀌었다.
물론 같은 원정대고 굶주린 혼돈과 맞서 싸워야 하는 상황이니 도와달라면 도와줄 테지만….
이런 상황에서 저런 말을 들으니 좀 떨떠름한 게 사실이었던 것이다.
“…그래… 뭐… 도와줄게.”
이세연은 참고 말했다. 1:1 결투 해주겠다는데 이 정도야….
“저희도 도와드리겠습니다.”
“맞습니다.”
다른 유성 게임단 선수들도 달려와서 말했다.
안 그래도 평소 존경하고 있었는데, 장비까지 강화받거나 수리받았으니 존경심이 더 높아질 수밖에 없었다.
“주장은 가만히 쉬고 계셔도 됩니다!”
“주장은 여기서 앉아 계십시오!”
“아, 아니. 괜찮….”
“아닙니다!”
유성 게임단에 새로 들어온 선수들은 빠릿빠릿하고 각이 잡혀 있었다.
하늘 같은 주장인 이세연을 시키는 것보다는 그들이 나서서 해야 한다!
그리고 무엇보다….
-주장은 김태현 선수 싫어하시잖아.
-맞아. 우리가 대신 나서자. 괜히 두 분이 싸우기라도 하면 퀘스트가 꼬일 거야.
새로 들어온 선수들이 보기에 이세연과 태현의 사이는 그리 좋지 않아 보였다.
이세연은 입만 열면 태현에 대해 투덜거렸던 것이다.
-이 정도 군세 이끌고 왔으면 다른 길드였으면 길마가 직접 와서 감사 인사를 하거나 했을걸. 근데 김태현은 오지도 않잖아. 사람이 그렇다니까?
-결투하기로 해놓고 말 없는 거 보면 지금 설마 까먹은 거 아니야? 만약에 까먹은 거면 진짜….
…이런 말들을 들으면 신인 선수들은 걱정이 될 수밖에 없었다.
붙여놨다가 둘이 싸우면 안 그래도 어려운 퀘스트가 더 어려워진다!
“저희가 하겠습니다!”
“김태현 선수! 무엇이든 시켜만 주십시오!”
“아니. 괜찮은데.”
이세연은 당황해서 선수들을 말리려고 했다.
일단 주장이라고 다른 사람 일하는 동안 혼자 쉬는 건 성격에 맞지도 않았고….
김태현하고 같이 일하는 게 딱히 어렵지도 않았던 것이다.
굳이 도움받을 필요 없는데!
“흠. 하긴. 이세연까지 시키긴 좀 그렇겠군.”
태현은 고개를 끄덕이며 납득했다.
생각해 보니 이세연은 유성 게임단의 주장이자, 저만한 규모의 언데드 군세를 이끌고 온 사람이었다.
별생각 없이 평소처럼 대하긴 했지만 잘 생각해 보니 좀 더 귀한 대접을 해줘야 할 것 같긴 했다.
만약에 저게 케인이거나 쑤닝이었으면 ‘나를 왜 이렇게 대접 안 해주냐 이놈’ 같은 반응을 보였어도 이상할 게 없었으니까.
“그래. 그러면 너희들 도움만 받자. 주장은 쉬게 하고.”
“예!”
“무엇이든지 부탁하십시오!”
“….”
이세연은 강제로 의자에 앉혀진 다음 팔짱을 끼고 다리를 꼬았다. 누가 봐도 매우 심기가 불편해 보였다.
지나가던 플레이어들은 사악한 죽음의 기운을 뿜어내는 이세연의 모습에 깜짝 놀랐다.
“왜 저러시지? 무슨 일이라도 있나?”
“바보야. 지금 원정대 플레이어들이 굶주린 혼돈한테 끌려갔잖아.”
“아아…! 그것 때문에 저렇게 걱정을…!”
“판온 선수들 중에서 저렇게 흠잡을 곳 없는 선수가 어디 있겠어!”
* * *
에랑스 왕국의 2왕자, 토마스.
말이 왕자였지 자식 여럿 낳은 중년의 왕자였다.
원래라면 정정한 에랑스 국왕 밑에서 즐겁고 행복한 왕자 생활을 했어야 했지만, 반란 사건이 터지고 나서 왕가의 모든 왕자들은 그 지위를 잃어버렸다.
사실 2왕자도 억울할 만했다.
국왕이 죽어서 자기가 왕관 쓰겠다고 나선 건데 죽은 국왕이 언데드로 다시 돌아올 줄이야 어떻게 알았겠는가.
언데드로 변한 에랑스 국왕은 배은망덕한 자식새끼들을 전부 죽여 버리겠다고 기사들에게 체포 명령을 내렸고, 왕자들은 잡히거나 튀었다.
그리고 2왕자 토마스는 에랑스 왕국으로 도망친 왕자였다.
태현과 손을 잡고 자식을 맡긴 다음, 다시 에랑스 왕국으로 들어가 귀족들의 협력을 받아 왕위에 오르겠다!
…는 야심찬 계획이었지만 태현은 사실 그렇게 크게 기대하지 않았다.
‘잡혀서 죽을 가능성이 더 높아 보이는데.’
그런데 놀랍게도 토마스가 찾아왔다.
거대 대장간에서 튀어나온 악령을 유성 게임단 선수들과 함께 때려잡고 있던 태현은 깜짝 놀랐다.
[에랑스 왕국의 2왕자, 토마스가 방문합니다!]
-여기 아탈리 왕국의 국왕이자 아키서스 교단의 교황이 계시오?
태현의 지위가 그사이 많이 상승했는지 토마스의 태도는 꽤 공손해져있었다.
태현은 검을 휘두르며 외쳤다.
“그래! 잠시만 기다리도록!”
-…???
토마스와 토마스를 따라 나온 기사들은 황당한 표정으로 쳐다보았다.
대장간 안쪽에서 웬 악령들이 비명을 지르며 덤벼들고 있었던 것이다.
대장간이….
맞나?
[치명타가 터졌습니다!]
[마검에서 기어나온 고대 제국의 망령이 사라집니다!]
-크악! 경쟁에서 패배한 대장장이들의 원한은 다시 돌아올 것이다, 기계공학자여!
“죽어라!”
[마검이 진정합니다!]
[작업이 계속됩니다.]
태현은 간신히 진압을 끝낸 다음 고개를 돌렸다. 2왕자와 기사들은 꽤나 충격을 많이 받은 표정이었다.
“다들 놀랐나 보군. 걱정하지 마라. 이건 별로 위험한 이벤트가 아니었으니까.”
‘위험한 이벤트가….’
‘아니었다고…?’
“그보다 반갑군! 죽… 아니, 벌써 돌아올 줄이야.”
‘죽은 줄 알았는데’라고 말하려다가 태현은 멈칫했다.
2왕자는 헛기침을 하더니 대답했다.
-그사이 그렇게 많은 일이 있었는데도 폐하께서 이렇게 무사한 걸 보니 기쁠 뿐이오. 나 또한 왕국에서 많은 것을 해냈소.
“어? 정말인가?”
태현은 놀랐다.
뭘 해냈길래?
혹시 에랑스 왕가의 왕관이나 기타 아이템들이라도 갖고 나왔나? 보물 창고라도?
“뭘 얻었지? 검? 왕관? 열쇠? 지팡이?”
-그보다 더 좋은 것!
“오오…!”
[카르바노그가 기대합니다!]
-바로 귀족들의 지지요.
“오오….”
[카르바노그가 실망합니다.]
태현은 대번에 시큰둥해졌다.
귀족 NPC들의 지지?
‘정말 쓸모없는 거지.’
아탈리 왕국에 있을 때 태현이 얼마나 귀족 NPC들에게 쓴맛을 많이 봤었던가.
지지한다고 해봤자 일 터지면 자기네 영지 지키느라 도와주지도 않고 세금 내라고 하면 ‘아니! 귀족의 권리를!’ 하며 시비나 걸고….
-내 예상대로, 귀족들은 부왕 폐하께 많은 불만을 품고 있었소. 그렇게 타락하셨는데 불만을 품지 않으면 그게 이상한 거지. 나는 왕가의 명예를 위해, 부왕을 영원한 안식으로 돌려보낼 것이오.
‘그냥 왕위 앉고 싶어서 아버지 죽이겠다는 말을 참 멋지게 하려고 노력하는군.’
[카르바노그가 절대 입 밖으로 내지 말라고 말합니다.]
“그런데 지금 에랑스 왕국 상황이 별로 안… 좋지 않나?”
태현도 귀가 있는 만큼 에랑스 왕국 상황은 알아서 듣고 있었다.
에랑스 왕국은 각 영주나 성주 NPC들이 워낙 강해서 버티고 있는 곳들이 많긴 했지만, 굶주린 혼돈의 군세가 영토 대부분을 휩쓸고 다니는 건 마찬가지였다.
에랑스 왕국 플레이어들은 필드 밖으로 나가는 게 거의 불가능할 정도로.
국왕 실종에 각종 기사단들도 움직이지 않고 있으니….
-그렇소. 게다가 부왕께서도 실종되셨소. 아직까지 연락이 없는 걸 보니 내 생각에는 굶주린 혼돈에게 당하신 것 같소.
“숨어 계신 거 아니야?”
-아니오. 부왕께서는 그러실 분이 아니시오. 분명 당했을 거요.
‘자기가 믿고 싶어서 그러는 것 같은데.’
-그래서 나는 생각했소. 지금이야말로 당당히 세상 앞에 나서서 내가 부왕의 왕관을 이어받을 자라는 걸 선포해야 할 때라는 것을!
“오오….”
[카르바노그가 괜찮을지 걱정합니다.]
‘나도 사실 의심 중이다. 깊게 엮이진 말자.’
에랑스 왕국의 귀족들이 2왕자가 나타났을 때 ‘오오 2왕자님! 기다리고 있었습니다!’라고 반응할지, ‘권력이란 대중으로부터 위임받는 것이지 택도 아닌 왕관 탈취 의식에서 나오는 게 아니야’라고 반응할지 솔직히 태현도 예상할 수가 없었다.
하지만 그것과 별개로 지금이 유리한 상황이긴 했다.
국왕 사라지고 구심점은 필요한 상황이니….
2왕자가 정말 말한 것처럼 귀족들을 열심히 설득하고 다녔다면 꽤 가능성이 있을지도 몰랐다.
“그래서 왜 여기 온 거지?”
-나를 도와주시오. 내가 에랑스 왕국에 들어가서 선언하는 순간 타락한 굶주린 혼돈은 이 대륙의 모든 영웅 중 나를 가장 먼저 죽이려고 찾아올 테니까!
[카르바노그가 화신이 있는 이상 절대 그럴 리는 없다고 단언합니다.]
나도 그렇게 생각하긴 하는데, 굳이 그걸 말해줄 필요는 없어.
“도움이라는 건 구체적으로 어떤… 폭탄 좀 주면 되나?”
-병력을 빌려주시오.
태현은 정색했다.
감히 어디서 누구 병력을?
그 정색을 2왕자도 눈치챘는지, 2왕자가 다급하게 말했다.
-잘 생각해 보시오. 내가 왕위에 오르면 폐하를 얼마나 도와주겠소? 게다가 내 딸들도 폐하에게 있지 않소.
태현은 고개를 돌렸다.
아키서스 포병대 우리에서 거인들과 같이 대포를 끌고 있던 메카 바실리스크, 낭티오네가 쉿쉿거리며 고개를 흔들었다.
그러다가 태현과 눈이 마주치자 표정을 붉혔다.
‘공주님을 내가 기계공학으로 개조했다고 하면 에랑스 왕국 귀족들이 날 죽이려고 할지 고마워할지 모르겠군.’
사실 에랑스 왕국으로 진격하긴 해야 했다. 굶주린 혼돈이 계속 가만히 있진 않을 테니까.
태현도 준비가 끝나면 진격할 생각이었는데….
문제는 어떻게 하느냐였다.
‘괜히 병력 내줬다가 2왕자가 날려먹으면 아까운 병력만 날아가는데. 차라리 그냥 우리에 가둬버릴까?’
오스턴 왕국의 왕족 혈통을 이은 NPC를 우리에 가두고, 고대 제국의 황자도 우리에 가둔 것처럼, 의외로 아키서스 포병대는 고위 NPC들이 많이 머무르는 장소였다.
악마 공작부터 황족 왕족 다 있는 사랑방 같은 장소랄까?
게다가 지키는 사람들도 많고 암살자들도 ‘설마 여기에 왕족이 있겠어?’ 하고 넘어가는 만큼 안전성도 높았다.
-이것까진 말하지 않으려고 했는데, 이걸 보시오. 내가 귀족들을 설득할 수 있다는 걸 증명하겠소.
“?”
2왕자의 말에 태현은 의아해했다.
뭐지?
‘아키서스의 세뇌 반지 같은 거라도 찾았나?’
[카르바노그가 그 전설의 반지를 찾은 거라면 가능성이 있다고 깜짝 놀랍니다!]
‘뭐? 진짜 그런 게 있어??’
[카르바노그가 그냥 농담해 봤다고 말합니다.]
‘…신전 압수해 버릴까….’
[카르바노그가 미안하다고 엉엉 웁니다!]
-바로 이것이오.
2왕자가 꺼낸 반지는 놀랍게도 아키서스의 세뇌 반지보다 더 대단한 아이템이었다.
[고대 제국 황실의 반지를 목격합니다!]
[명성이 크게 오릅니다!]
[제국의 후계자 스탯이 크게 오릅니다!]
[….]
[….]
[….]
[현재 고대 제국 부활 퀘스트를 진행 중입니다! 반지를 뺏을 수 있습니다!]
[제국의 후계자 스탯이 상대보다 높습니다. 반지를 뺏을 수 있습니다!]
지금 토끼 앞에서 당근을 꺼냈다는 걸 모르는 2왕자는 의기양양하게 입을 열었다.
-이 반지가 내 손에 들어왔다는 게 무엇을 의미하겠소?
“음. 모르겠군. 무엇을 의미하지?”
태현은 2왕자 뒤편의 기사들을 훑어보았다.
이다비가 옆에 있었다면 그 눈빛이 어떤 눈빛인지 알아차렸을 것이다.
견적을 내는 눈빛이었다.
‘레벨 500에서 600 정도인가…. 유성 게임단 선수들 부르고 랭커들 부르고… 갑옷이 아쉽긴 한데 어렵지는 않겠고….’
-이 내가! 에랑스 왕가의 왕관은 물론이고 고대 제국의 왕관까지 이어받을 계승자라는 암시요! 이 굶주린 혼돈의 난동에 맞서서! 그렇지 않다면 이 반지가 왜 내 손에 왔겠크악!!!
푹!
2왕자는 뒤에서 날아온 공격에 피를 토했다. 태현은 깜짝 놀랐다.
‘아직 아무것도 안 했는데?!’