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 나는 될놈이다 1667화
“이다비도 끌려갔어?”
“예? 팀 KL 선수들이 갔으니까 당연히….”
“이런 멍청한 놈들!”
태현은 팀 KL 선수들에게 분노했다.
끌려갈 거면 자기들만 끌려갈 거지 이다비는 왜 데리고 간단 말인가.
“!”
태현이 드물게 화내는 모습을 보자 주변 사람들은 깜짝 놀랐다.
“너, 너무 그러지 마시죠. 기습당해서 어쩔 수 없었는데.”
“맞아요. 아직 전멸한 것도 아니고 그냥 이동한 겁니다.”
“변명은 필요 없어! 결과로 말해야지.”
태현의 말에 주변 사람들은 웅성거렸다.
“왜 저렇게 화를 내시는 거지? 아직 상황이 그렇게 최악도 아닌데?”
“일반 플레이어들을 끌고 들어가서 그런가 봐.”
“아아…!”
사람들은 고개를 끄덕였다.
팀 KL 선수들만 갔다면 상관이 없었다.
하지만 원정대를 돕기 위해 온 플레이어들까지 같이 날아가지 않았는가.
책임감 강한 태현에게 그런 상황은 매우 미안하고 책임감 느껴지는 상황이리라.
그래서 팀 KL 선수들에게 화를 낸 거구나!
“아닙니다! 괜찮습니다! 김태현 선수!”
“다들 이해해 줄 겁니다!”
“…뭐가 괜찮다는 거지?”
태현은 어이가 없었다.
이다비가 사라졌다는데 지금….
* * *
“비겁한 새끼들!”
“스미스! 나와라! 여기 케인 선수가 널 따끔하게 혼내줄 거다!”
굶주린 혼돈의 영역으로 날아간 원정대는 전혀 겁먹지 않았다.
오히려 단단히 분노했다.
굶주린 혼돈 쪽에 가입한 것도 화나는 일이었는데 이런 비겁한 잔수작이나 부리다니.
역시 뉴욕 라이온즈가 저번에 진 데에는 다 이유가 있어!
“나와라! 스미스! 안 나오면 겁먹은 걸로 알겠다!”
“여기 케인 선수가 일대일을 기다리고 있다!!”
원정대 플레이어들은 고래고래 소리를 질렀다.
방송으로 그 광경을 보고 있던 사람들은 감탄했다.
-스미스가 겁먹은 거 맞지?
-겁먹은 거 맞지. 안 그러면 저렇게 유리한 상황에서 왜 안 나오겠어.
-스미스 완전히 퇴물 다 됐네.
-스미스는 사실 처음부터 퇴물이었지.
-스미스는 뉴욕 라이온즈 운으로 들어간 거 아님? 첫 번째 시즌 때 왜 안 나왔겠어. 거품 꺼질까 봐 안 나온 거지.
-이게 판온에서는 레벨빨 스킬빨 아이템빨로 버티더라도 투기장에서는 거품 드러나잖아.
-앞으로 케인>스미스다.
뉴욕 라이온즈 팬들이 보면 뒷목 잡을 소리였지만, 원래 여론이란 것은 빠르게 바뀌었다.
지금 나오지 않는 걸 보면 스미스는 케인한테 겁을 먹은 게 맞다!
…물론 케인한테는 심장이 오그라드는 헛소리였다.
“저, 저기. 너무 그러지 마.”
“예? 스미스 그 자식 존중해 주실 필요 없습니다. 케인 선수! 스미스 놈에게 무슨 명예가 있다고!”
“스미스는 그냥 아이템하고 직업으로 버틴 추잡한 놈입니다! 케인 선수가 그 자식을 일대일로 발라버려야 해요!”
“…….”
“…….”
다른 팀 KL 선수들은 안쓰럽다는 눈빛으로 케인을 쳐다보았다.
어쩌다가 저런 함정에 빠져가지고….
“그… 그게 지금 소리 크게 냈다가 다른 적이 올까 봐… 그리고 어! 상대를 너무 모욕하고 싶진 않거든!”
“아하. 그렇군요.”
“역시 케인 선수….”
모여 있던 플레이어들은 케인의 말에 감동을 받았다.
이런 상황에서 상대의 명예까지…!
역시 일류는 달라도 뭔가 달라!
“그런데 진짜 왜 적이 안 오지?”
최상윤은 수상하다는 듯이 말했다.
지금 상대는 매우 유리한 상황이었다.
여기는 굶주린 혼돈의 영토 중 하나일 터.
적진 한가운데에 떨어진 상황인 만큼 얼마든지 공격해도 됐다.
그러나 적들은 어떤 공격도 없었다.
대체 왜?
“으으음….”
이다비도 그걸 눈치챘는지 고민에 빠졌다.
왜일까?
그 답은 얼마 지나지 않아 나왔다.
[굶주린 혼돈의 영역이 당신을 목마르게 만듭니다.]
[갈증이 심해집니다.]
“각자 물 있지?”
“예. 있습니다.”
“앗. 저는 없는데….”
“아이템을 나눠… 아니다. 사람이 많으니 해결이 안 되겠군. 물가를 찾아야겠는데.”
“일단 마법으로 해결을 해보죠.”
[<물 생성>을 시전합니다!]
[굶주린 혼돈의 영역이 물을 마르게 만듭니다.]
마법사 랭커 한 명이 자신있게 지팡이를 휘둘렀지만, 생겨난 물 덩어리는 빠르게 증발해 버렸다.
다들 웅성거리며 서로 쳐다보았다.
여기가 작열하는 사막이라면 모를까 아무것도 없는 평범한 땅인데 이게 무슨…?
“…저주가 걸려 있나? 그러면 물가를 찾자.”
몇몇 탐험가 플레이어들이 발빠르게 움직이며 주변 지도를 만들어오려고 했다.
이런 지도 만드는 데에 있어서 특화된 직업이 바로 탐험가.
[굶주린 혼돈의 영역이 당신을 헤매게 만듭니다.]
[갈증이 심해집니다.]
…그러나 통하지 않았다.
이다비는 깨달았다.
‘말려 죽이려는 거구나!’
판온에서 레벨 좀 높아지면 갈증이나 허기로 고통 겪는 경우는 드물어졌다.
워낙 HP, MP, 스탯이 빵빵한데다가 배낭에 비싼 음식 몇 개만 넣고 다니면 굶어서 힘들 일은 없는 것이다.
그러나 태현과 함께 아키서스의 미궁 같은 곳에 악마들을 가두고 굶겨 죽이기 직전까지 가는 등 이것저것 해본 이다비 입장에서는 이 전략이 얼마나 효과적인지 잘 알고 있었다.
랭커들은 들으면 어이없다고 코웃음을 칠지도 모르지만, 상황과 장소만 맞춰서 준비하면 충분히 통할 만한 것이다.
“…다들 집합.”
이다비는 파워 워리어 길드원들과 팀 KL 선수들을 불러 모았다.
깨달은 이상 대비에 들어가야 했던 것이다.
“이렇게 해서, 지금 적들은 말려 죽을 때까지 기다릴 거 같아요.”
“!!”
“그, 그럴 수가…!”
“아니 뉴욕 라이온즈 이 새끼들! 우리 길드나 할 법한 짓을 하다니!”
파워 워리어 길드원들은 분노했다.
그들은 졸렬하게 굴어도 되지만, 뉴욕 라이온즈 같은 세계 유수의 대형 게임단은 졸렬하게 굴면 안 되지 않은가!
말려 죽이기라니!
정수혁은 고개를 갸웃거리며 물었다.
“그런데 이걸 왜 공개적으로 말 안 하고 이렇게 따로 말하십니까?”
“말을 하면 혼란이 있을 테니까요.”
이다비는 한숨을 쉬었다.
이게 차라리 수십 명 정도 되는 파티면 상관이 없었다.
그 정도면 통제 가능했으니까.
하지만 수백 명이 넘어가고 NPC들도 대량으로 따라온 상황에는 이야기가 달라졌다.
식량과 식수가 부족하단 소리가 나오면 바로 자기 것부터 챙기기 시작할 것이고, 심할 경우 서로 뺏고 뺏는 상황이 벌어질 것이다.
여기 이다비 주변의 플레이어들은 전부 다 랭커였고 가장 오래 버틸 수 있다지만 다른 모든 플레이어들까지 그럴 수는 없는 법.
“그건 어쩔 수 없지 않습니까?”
“그런 일이 벌어지면… 원정대 이미지에 안 좋겠는데.”
최상윤은 인상을 찌푸리며 말했다.
솔직히 지금 태현의 이미지는 친구인 최상윤이 보기에도 너무 너무 좋았다.
가끔 판온 게시판에 국내, 해외 팬들이 올린 태현 헌정 동영상 같은 거 보면 ‘아니 얘는 대체 누구지? 다른 놈 아니야?’ 할 정도로 미화가 되어 있었으니까.
그에 비해 지금 뉴욕 라이온즈를 비롯한 대형 게임단 선수들은 뭘 잘못 먹었는지 제대로 악역에 발을 디뎌서 욕을 더럽게 먹고 있고….
태현 본인이야 ‘난 이미지 신경 안 써’라고 하지만, 친구 입장으로서는 이미지 더러운 것보다는 이미지 좋은 게 나았다.
그리고 무엇보다 지금 많은 플레이어들이 확실하지 않은 상황에서 이쪽 원정대에 참가하는 이유는 그 이미지 때문 아닌가!
“최대한 소란이 일어나지 않게 숨기고 잘 통제를 해야겠는데.”
“맞아. 파티장들한테만 이야기 전달을 하고, 식량하고 식수 조달에 나서자.”
“걱정하지 마십시오. 마침 저희가 같이 오지 않았습니까.”
파워 워리어의 요리단 단장은 자신 있게 가슴을 두드렸다.
다들 믿음직스럽다는 듯이 고개를 끄덕였다.
“어떤 재료로든 요리를 할 수 있습니다.”
“믿음직스럽군.”
“고마워.”
그러자 오크 길드원 중 한 명이 나섰다. 아저씨들은 아니었지만 이후에 새로 가입한 요리사 랭커였다.
“걱정하지 마십시오. 저도 어떤 재료로든 요리를 할 수 있습니다.”
“오오….”
“믿음직스러운데?”
‘잠깐. 저 자식 괴식 요리사 아니었나?’
최상윤은 속으로 그렇게 생각했지만, 분위기 때문에 입을 다물었다.
* * *
“김태현 선수 표정이 어두운데.”
“쉿. 넌 눈치도 없냐? 팀 KL 선수들과 원정대 플레이어들이 함정에 빠졌는데.”
“그, 그랬었지. 너무 태연하게 망치질을 하고 계셔서….”
대장간 앞에 모인 사람들은 태현의 얼굴을 보고 걱정스러운 눈빛을 보냈다.
평소와 달리 매우 심란해 보였던 것이다.
“다 됐다.”
“감사합니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태현의 작업 속도에는 변함이 없었다.
‘다 완성될 때까지는 섣불리 이동해선 안 돼.’
갑옷과 검 없이 움직이는 건 위험했다. 태현도 그걸 알고 있었다.
지금은 팀 KL 선수들을 믿어야 한다!
깡!
망치가 불꽃을 뿜어내고, 태현은 인상을 찌푸렸다.
“이런.”
“헉…!”
보고 있던 플레이어는 가슴이 철렁 내려앉았다.
대장장이가 저런 표정을 지으면 언제나 좋은 일이 없었던 것이다.
“큰, 큰일났나요?”
“실수했군.”
“어… 어떻게? 내구도가 떨어졌습니까? 성능이 떨어졌습니까? 장비가 파괴됐습니까??”
“여기 색이 잘못 칠해졌어.”
“…그, 그 정도는 별 상관 없는 것 같은데요??”
플레이어는 갑옷을 쳐다보았다. 아무리 봐도 색에 차이가 없었다.
그러나 태현은 단호했다.
“여기 색이 잘못 칠해졌다니까! 다시 칠하도록 하지. 이런 실수를 하다니.”
“아니 진짜 괜찮….”
땅, 땅, 땅-
그렇게 계속 작업이 진행되고, 광장에 모인 사람들을 한 차례 끝내자, 다른 손님이 찾아왔다.
이세연이었다.
“왔구나!”
“그래. 왜 왔는지 알지?”
이세연의 질문에 태현은 고개를 끄덕였다.
지금 물어볼 질문은 하나밖에 없었다.
“지금 이다비가 다른 곳으로 날아간 게 걱정되서 온 거겠지.”
“결ㅌ… 아. 응.”
이세연은 ‘1:1 결투’ 이야기를 꺼내려다가 흠칫하고 당황했다.
생각해 보니까 저것도 지금 매우 중요한 문제였다.
아니, 지금 같은 상황에서 1:1 결투를 하자고 하는 건 좀 이상하게 느껴질지도….
“아. 잠깐. 결투 이야기하려고 온 거였나?”
“아… 아니… 으응.”
이세연은 보기 드물게 허둥거렸다.
“결투… 하긴 해야지. 확실히.”
그러나 태현은 이세연의 걱정과는 달리 진지한 표정이었다.
이세연과 한 번 붙는 건 태현도 원했었다.
여기서 이긴 사람이 만날 때마다 평생 ‘너 개못하잖아’를 할 수 있게 된다!
그 정도로 중대한 싸움.
잊을 리 없었다.
“좋아. 갑옷하고 검이 완성되는 대로 즉시 하자고.”
태현도 지금 여유가 언제 사라질지 몰랐다.
굶주린 혼돈이 한 대 세게 맞은 탓에 힘을 회복하고 있다지만 언제 다시 퀘스트가 시작될지 모르는 것이다.
승부를 하려면 지금 해야 한다.
“…좋아.”
이세연도 그런 태현의 속마음을 모를 리 없었다.
아니, 오히려 저렇게 생각해 주는 것이 고맙기까지 했다.
다른 사람들은 이게 왜 중요한지 알지 못했다. 심지어 유성 게임단 선수들도 그랬다.
-아, 아니. 지금 결투를? 굳이 그래야 합니까?
-그 판온에 한 장밖에 없을지도 모르는 주문서를 결투하시는 데에 쓰시겠다고요??
-김태현 선수가 응할까요? 지금처럼 급한 상황에???
-그걸 대체 왜 하는 거에요?
…이런 말들.
이세연도 제대로 설명하고 싶었다. 하지만 이건 말로 설명하기가 힘든 무언가였다.
왜 지금 싸우는 것도 아닌데 굳이 시간을 내서 1:1로 결투를 해야 하나요?
“…결투하는데 이유가 어디 있어! 그냥 하는 거지!”
“응?”
“아, 아무것도 아니야.”
“아니야. 맞는 말이야. 결투하는데 이유가 어디 있겠어. 그냥 하는 거지.”
“…….”
이세연은 웃었다. 최근 들은 말 중 가장 기쁜 말이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