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 나는 될놈이다 1661화
팔이 원래 안으로 굽는다지만 어떻게 저렇게 뻔뻔한 말을?
카르바노그는 그렇게 생각했지만 태현은 조금도 아랑곳하지 않았다. 카르바노그는 속으로 투덜거렸다.
[카르바노그가 그런데 주교가 낀 반지는 뭐냐고 묻습니다.]
‘아. 이다비가 준 아이템이야. 효과 좋던데.’
[카르바노그가 그거…]
“아. 쑤닝이 왔군.”
[…??]
카르바노그가 고개를 갸웃거렸다.
어, 베레타르바 교단의 반지면….
* * *
“쑤닝! 환영한다! 너와 네 동료들이 열심히 도와준 덕분에 퀘스트를 끝낼 수 있었지. 이런 널 못 알아보고 구박하는 사람들이 있다니. 정말 안타까운 일이야.”
태현의 반응에 길드 동맹 간부들은 살짝 흔들리는 표정을 지었다.
원래 평소 못되게 굴던 놈이 가끔가다가 따뜻한 말 한 마디 던져주면 괜히 더 사무치는 게 있었다.
하물며 지금 태현처럼 무서운 거 하나 없이 독주하고 있는 놈이 저렇게 따뜻하게 말해주니 기분이라도 좋았다.
“역시 김태현 선수야.”
“정말 훌륭하다니까.”
“아까 어떤 놈이 김태현 선수가 아레네 시를 불태웠다는 헛소리를 해가지고 싸웠다니까? 어떻게 그딴 헛소리를 할 수가 있지?”
옆에 지나가던 길드 동맹 출신 플레이어들도 고개를 끄덕이면서 그렇게 말했다.
그들이 보기에 길드 동맹 간부들을 모조리 처형하지 않고 저렇게 친절하게 대해주는 태현은 정말로 대인배였다.
“나였다면 바로 처형했다.”
“솔직히 지금이라도 처형해야 안 찝찝하지.”
“입장 바꿔서 생각해 봐. 길드 동맹이 김태현 저렇게 붙잡았으면 살려뒀겠냐? 조리돌리면서 죽였지.”
“쑤닝 저놈 길드 하우스에 김태현 조각상 세워놓고 검술 연습대로 쓰지 않았어?”
“…….”
“…….”
역시 욕도 같은 편이었던 사람이 하는 게 훨씬 더 정확하고 구체적이었다.
길드 동맹 출신 플레이어들이 떠드는 소리에 간부들은 눈을 부라렸지만, 이제 와서 종이호랑이 꼴이 되어버린 간부들을 두려워할 길드원들은 아무도 없었다.
“뭘 봐 이 자식아. 야. 난 길드 가입비만 내고 혜택은 못 봤어!”
“저번에 광산 하나 들어가려고 했는데 순서 꽉 차서 못 들어갔단 말이다! 너희들이 운영을 못해서 말아먹었잖아! 환불해!”
“이… 이 자식들이….”
“어허! 다들 방해하지 마세요!”
파워 워리어 길드원들이 후다닥 달려와서 플레이어들을 밀어냈다. 길드 동맹 간부들은 치욕스러운 표정으로 고개를 숙였다.
이게 무슨 꼴이란 말인가!
“그래서 쑤닝. 오스턴 왕국을 다스리기 위해서 도움이 필요한데.”
“하. 지금 설마 오스턴 왕국의 NPC들 명단 같은 걸 나한테 달라는 거냐?”
쑤닝은 어이가 없다는 듯이 코웃음을 쳤다.
그건 정말 말도 안 되는 부탁이었다.
왕국의 NPC들 명단을 달라니.
지금 원래 이 오스턴 왕국은 길드 동맹의 땅 아니었던가.
그걸 남이 차지한 상황인데, 저건 ‘내가 네 땅을 점령했으니 혹시 집문서와 땅문서도 좀 건네주지 않겠니?’ 같은 말이었다.
“무슨 말을 하나 했더니 어이가 없군. 내가 그런 부탁에 응할 것 같으냐?”
-처리? 처리?
옆에 있던 기계 에다오르가 묻자 태현은 손을 내저었다.
“아니. 그거 부탁하려는 게 아니고.”
“허세 부리지 마라. 필요할 텐데. 오스턴 왕국의 수많은 NPC들을 파악하고 있는 사람은 우리 길드 동맹밖에 없다.”
쑤닝은 자신만만했다.
실제로 맞는 말이었다.
오랫동안 오스턴 왕국을 다스리면서 NPC 하나하나 확인하고 퀘스트 확인하고 정보를 정리해 온 길드 동맹이 아니라면, 저런 명단을 갖고 있을 수가 없는 것이다.
더군다나 지금은 왕국이 반쯤 초토화가 되어서 NPC들이 사방으로 사라지고 이동한 상황이었다. 이제 와서 새로 찾는 건 불가능에 가까웠다.
“그래서 너희가 갖고 있는 정보 챙겨서 확인했다고.”
“…???”
쑤닝은 귀를 의심했다.
뭐가 뭐라고?
“무… 무슨 말도 안 되는 소리냐? 그건 나하고 핵심 간부 몇 명만 접근 가능한 정보인데. 허세 부리지 마라.”
“이제 와서 하는 말이지만 너희 길드에 보낸 첩자들한테 시켜서 명단 빼왔다. 별로 안 어렵던데.”
“…….”
쑤닝은 하늘이 무너지는 것 같은 충격을 받았다.
이 새끼가 대체 언제 어떻게 그걸 빼돌린 거야!?
‘아니, 그걸 빼돌릴 수 있을 정도면 거의 모든 정보에 접근할 수 있었을 텐데? 이놈 허세 부리는 거 아닌가? 아니, 지금 허세를 부릴 이유가 있나? 허세 부릴 이유가 없을 텐데??’
“어쨌든 쑤닝. 그 명단은 필요 없고. 혹시 너만 알고 있는 비밀 던전들이나 비밀 창고 같은 거 있냐? 털어놔 봐라.”
“…….”
태현이 부른 이유는 쑤닝이 생각했던 것보다 훨씬 더 노골적이고 어이없는 이유였다.
일반 길드원들이나 간부들한테는 공개되지 않은 비밀 던전.
이런 던전들은 쑤닝만 알고 있거나 혹은 몇몇 랭커들한테 포상으로 주어졌다.
그만큼 가치 있는 던전들이라는 거였다.
그런데 그걸 알려달라니.
NPC 명단도 안 알려줬는데 그걸 알려줄 리가 있나?
“내가 알려줄 것 같냐?!”
“굶주린 혼돈과 싸우기 위해서 협조한다면서?”
“스미스 놈 낯짝에 주먹을 갈기기 전까지 협조한다고 했지 언제 내가 길드 동맹 재산을 통째로 넘기겠다고 했냐!”
“으음. 어쩔 수 없군. 일단 간부들한테도 물어봐야겠다. 혹시 너희들만 아는 비밀 던전이나 창고 없나? 같이 공유 좀 하자.”
“…….”
태현의 질문에 간부들은 쑤닝과 마찬가지로, 어이없다는 듯이 침묵했다.
지금 그걸 누가 대답해 준단 말인가.
“서로 신경 쓰여서 그런 걸 수도 있겠군. 따로 한 명씩 데리고 가서 물어보자.”
“알겠습니다.”
“질문에 대해 제대로 대답해 주는 놈은 새 오스턴 왕국의 영지를 주고 영주 자리를 줄 수도 있다.”
“야 이….”
쑤닝은 붉으락푸르락하는 얼굴로 외쳤다.
태현의 수작이 너무 비열했던 것이다.
“그런 식으로 간부들을 포섭하다니. 비열한 놈 같으니!!”
“어. 지금 통한다고 말한 건가? 나도 확신이 없었는데 고맙군.”
“…아니. 통한다는 게 아니라 수작 자체가 비열하다는….”
쑤닝은 뒤늦게 깨닫고 변명했지만 간부들의 눈빛은 슬픔이 가득했다.
쑤닝은 발끈해서 말했다.
“솔직히 네놈들 가슴에 손을 얹고 이야기해 봐라! 네놈들 중에 영주 자리 주겠다는데 배신자가 한 명도 안 나온다고? 그게 말이 될 것 같냐?”
“확실히 그건 그렇긴 합니다.”
간부들도 솔직히 그건 말이 안 된다고 생각했는지 고개를 끄덕였다.
다 망해가는 길드 동맹 붙잡고 같이 망하기 vs 새 권력자 밑에서 영주 자리 얻고 잘 먹고 잘 살기.
여기서 전자를 고르면 멍청한 놈이었다.
“다들 말해줘서 고맙군. 자! 데리고 가!”
“안 돼!”
쑤닝의 비명에도 불구하고 간부들은 줄줄이 한 명씩 따로 상담을 받기 위해 끌려갔다.
쑤닝은 한숨을 내쉬었다.
‘빌어먹을. 다 거덜 나겠군.’
비밀로 숨겨놓은 재산들 중 몇 개가 날아갔을지 짐작도 가지 않았다.
“쑤닝. 아직도 협조할 생각이 없냐?”
“다 필요없다.”
쑤닝은 반쯤 포기한 목소리로 말했다.
원래 반 굶주린 혼돈 퀘스트에 참가해서 일발역전을 노리고 있던 쑤닝이었다.
거대 규모의 전설 퀘스트는 그것 자체로 기회였으니, 아무리 불리한 상황이라도 역전할 수 있을 거라고 생각한 것이다.
하지만 막상 참가해 보니 생각했던 것과는 전혀 달랐다.
특히 태현이 쌓아올린 위치와 이끄는 플레이어들의 규모를 보니 말도 나오지 않았다.
어떤 길드도 세우지 않고 어떤 투자도 받지 않고 이런 규모의 원정대를 이끌다니.
쑤닝은 내심 느끼고 있었다. 길드 동맹이 있었을 때도 이기지 못했는데 길드 동맹이 모래성처럼 사라진 지금에는 더더욱 힘들 거라고.
제카스나 도동수 같은 놈은 아직도 뭔가 해보겠다고 미련을 붙잡고 있는 모양인데, 쑤닝이 보기에는 한심하기 그지없었다.
‘아무래도 안 될 것 같다.’
그 둘과 태현은 생각해 보면 체급차가 너무 났다.
아무리 비비고 비벼도 안 되는 건 안 되는 것.
“그래? 스미스하고 싸울 때 같이 껴주려고 했는데 싫으면 어쩔 수 없지. 알겠다. 가봐라.”
“…!!”
쑤닝은 움찔했다.
예상치 못한 이름이 튀어나온 것이다.
스미스!
‘스미스 이 새끼…!’
다 포기하고 늘어져 있던 쑤닝의 눈에 불꽃이 튀었다.
다른 건 몰라도 스미스는 용서할 수가 없었다.
“그놈하고 싸우게 해주겠다고?”
“그래. 그 정도야 해줄 수 있지.”
“…좋다.”
“!”
태현은 쑤닝이 정말 넘어오자 신기해했다.
‘이 자식은 스미스한테 왜 이렇게 원한을 품고 있는 거지?’
솔직히 태현이 할 소리는 아니었지만, 길드 동맹에 입힌 피해만 놓고 보면 태현>스미스 같은데….
“넌 스미스를 왜 그렇게 싫어하냐?”
“그 자식은 선량한 척은 다 해놓고서 비겁하게 게임단에게 투자 받은 돈으로 기습이나 하는 놈이다. 그딴 식으로 플레이하는 놈 때문에 길드의 발목이 잡히다니… 절대 용서할 수 없지!”
‘니 길드 동맹은 뭐 공짜로 굴렸냐?’
태현은 어이가 없었지만 굳이 지적하진 않았다.
동족혐오인가?
굳이 차이점이 있다면 스미스는 워낙 사람이 착하고 정의로운 이미지가 있었다면 쑤닝은 맨날 욕 먹는 이미지긴 했는데….
그것 때문에 배가 아픈 걸지도 몰랐다.
“어쨌든 쑤닝. 잘 부탁한다.”
“…알겠다.”
“창고들도 좀 많이 내놓고.”
“알겠다니까.”
“내가 지금 재료가 좀 많이 필요하거든.”
“알겠다고!!”
쑤닝은 울컥했다.
대체 뭐 어디에 쓰려고 이렇게 박박 긁어모은단 말인가?
“도시를 무슨 얼마나 호화로 지으려고 이러는 거냐!”
“도시? 도시는 그냥 빠르고 간단하게 지을 거다. 애초에 오스턴 왕국을 얼마나 유지할 수 있을지도 모르는데.”
“…?”
쑤닝은 태현의 말에 혼란스러워했다.
보통 왕국을 손에 넣으면 ‘키히힛… 내 왕국… 절대 아무한테도 주지 않겠어…’ 이래야 하지 않는가?
그런데 태현은 무슨 길 가다가 돌멩이 얻은 것처럼 굴고 있었다.
오스턴 왕국에 별로 욕심이 없나?
“야. 오스턴 왕국이 얼마나 대단한 왕국인….”
“그러면 잘 정리해서 알려줘라. 난 이만 가본다.”
“…….”
쑤닝은 황당하다는 듯이 태현의 뒷모습을 쳐다보았다.
이 자식이 장난하나!
“길마님. 그런데 지금 도시가 빠르고 간단하게 지어지는 것치고는 너무 호화로운 것 같습니다만.”
“착각이겠지. 김태현이 그런 걸로 거짓말하는 놈은 아니다.”
“혹시 김태현 기준에 저게 빠르고 간단한 거 아닙니까?”
“…설마. 네가 잘못 본 걸 거다.”
쑤닝은 그렇게 말하면서도 성벽 쪽을 한 번 쳐다보았다.
길드 동맹 길마였던 만큼 성벽이 어떻게 지어지는지는 대충 알 수 있었다.
매우 비싼 소재를 매우 비싼 공법으로 진행 중!
‘…김, 김태현 놈이 재산을 대체 얼마나 모았길래… 저게 빠르고 간단한…??’
* * *
‘최고급 검술 5, 51%인가.’
태현은 갖고 있던 무기들을 하나식 점검하고 검술 스킬을 확인했다.
굶주린 혼돈의 드래곤 키메라와 싸울 때에는 너무 정신이 없어서 새로 얻은 걸 확인할 시간도 없었었다.
최고급 검술 5를 찍고 새로 열린 아키서스 검법의 스킬, 아키서스의 여섯 번째 공격.
과연 어떤 스킬일까?
<아키서스 검법>
행운의 신 아키서스의 힘을 빌려 상대를 공격하는 검법입니다. 상대의 약점을 공격할 때마다 추가적인 효과가 발동합니다.
-아키서스의 여섯 번째 공격
행운 스탯을 소모해 상대의 스탯에 영구적인 상처를 남깁니다.
“…….”
태현은 눈을 깜박이고 다시 확인해 봤다.
행운 스탯을 소모해 상대의 스탯에 영구적인 상처를 남깁니다.
이거 너무….
사악한 검술 아닌가?
[카르바노그가 굶주린 혼돈한테 쓰면 정의로운 검술이라고 말합니다.]
‘맞는 말이긴 해.’
태현은 바로 납득했다. 카르바노그의 말에는 일리가 있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