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 나는 될놈이다 1660화
“수습을 시작해야겠군.”
태현은 완전히 텅 비어버린 아레네 시를 보며 말했다.
그렇게 번영했던 도시였지만 지금은 이제 몇몇 부서진 기둥과 반석 정도만 보일 뿐.
“정말 참혹하군요.”
“이게 전쟁의 무서움이지.”
“굶주린 혼돈의 비열함 때문이야.”
옆에 있던 플레이어들도 한 마디씩 던졌다.
그 대화에 길드 동맹 간부는 속으로 생각했다.
‘과거로 가서 불 지른 건 김태현 너잖아 이 새끼야….’
다른 사람들이 전부 분위기에 취해 있어도 길드 동맹 간부들까지 속지는 않았다.
1차 원인은 분명히 태현이었던 것이다.
거기에 2차 원인은 포병대 끌고 와서 도시 위를 신나게 때려버린 태현….
이쯤 되면 그냥 김태현 때문 아닌가?
하지만 간부들은 입을 다물었다.
여기서 그런 말을 꺼냈다가는 수많은 플레이어들의 몰매를 맞을 테니까.
-너는 지금 어! 김태현 선수가 세계를 지키려고 하는데 그딴 소리나 하고 있냐!
-그러니까 스미스한테 지고 길드 말아먹었지! 이런 멍청한 놈들!
-그렇게 투자를 받고도 말아먹을 수가 있냐! 그것도 재주다!
“수습할 방법이 있나?”
이세연이 다가오면서 물었다.
언데드들을 대충 주변에 배치시켜 놓고 돌아온 이세연은 니팅거스를 보고 깜짝 놀랐다.
“리치 드래곤이 왜 여기 있어!?”
“이야기하자면 길어지는데. 어쨌든 한 걸음씩 수습을 해야지.”
지금 태현이 진행하고 있는 퀘스트 중 하나가 바로 <고대 제국 부활> 퀘스트였다.
제국의 후계자 스탯이 생겨난 것도 이런 이유 때문.
덕분에 굶주린 혼돈의 손아귀에서 오스턴 왕국을 해방시키고, 통치 권한을 얻은 뒤 여러 NPC들이 찾아오게 되었다는 메시지창까지 떴다.
드넓은 오스턴 왕국을 다스리는 데에 이런 NPC들의 도움은 언제나 고마웠다.
문제는….
‘NPC들이 왔다가 수도 꼴을 보면 뒷목을 잡고 쓰러질 확률이 높다.’
태현도 지금 왕국 NPC들이 태현을 만나면 어떤 반응을 보일지 확신이 가지 않았다.
협력해 주면 좋겠지만 울거나 미치거나 분노해서 날뛸 수도….
“지금 여기 있는 플레이어들에게 재건 퀘스트를 부탁할 생각이야.”
“좋은 생각이네.”
이세연은 태현의 말에 고개를 끄덕였다.
원래라면 여기 모인 랭커들에게 이런 잡일에 가까운 퀘스트를 시키는 건 말도 안 되는 일이었다.
판온을 갓 시작한 초보자면 모를까 랭커씩이나 되어서 바위 자르고 나르는 잡일을 할 이유가 없었으니까.
하지만 지금 여기 모인 랭커들은 굶주린 혼돈과 싸우기 위해 태현 밑에 뭉친 사람들.
보증을 서달라고 해도 높은 확률로 통과될 가능성이 높아 보였다.
“그렇지? 그러면 부탁해.”
“??”
“네 언데드 군세.”
“…….”
이세연은 할 말을 잃었다.
플레이어‘들’에 이세연 본인도 들어가고 있었던 것이다.
“혹시 언데드들을 그렇게 부리는 건 힘든가?”
“힘들진 않아. 힘들진 않은데… 음… 그래… 아니다. 그냥 도와줄게.”
이세연은 뭐라고 말하려다가 한숨을 푹 쉬고는 손을 내저었다.
어차피 하게 될 일 같아 보였던 것이다.
여기서 말 안 들어주면 이다비도 와서 설득할 테고 그러면 결국 넘어갈 테니 시간 낭비하는 것보다는 그냥 해야겠다….
“엇. 주장. 그 반지 못 보던 반지인데 어디서 난 겁니까?”
“싸우기 전에 받았어.”
“그렇군요.”
벌써 건축 자재 짊어지고 지나가던 유성 게임단 선수들은 멈칫했다.
응?
김태현 선수도 똑같이 생긴 반지 끼고 있지 않았나?
* * *
[아레네 시 건축이 시작됩니다!]
[오스턴 왕국에서 가장 역사 깊고 아름다웠던 대도시, 아레네 시는 왕국의 수도이자 자존심이었습니다. 수많은 전란으로 파괴된 아레네 시가 어떻게 회복되느냐에 따라 왕국의 상태가 달라질 것입니다.]
[현재 플레이어들이 매우 많습니다! 작업에 추가 보너스를…]
[현재 언데드들이 일꾼으로 참여하고 있습니다. 추가 보너스를…]
[현재 오크들이…]
[……]
[……]
‘흠. 살면서 이렇게 많은 노동력을 손에 넣었던 적이 있었던가?’
서부에 있던 김태산의 오크 부족들과 이세연의 언데드 군세. 거기에 일반 플레이어들까지.
차라리 아탈리 왕국이었다면 이 노동력을 쏠쏠하게 써먹었을 수 있었다는 후회가 생겼다.
[카르바노그가 어떤 도시로 만들 거냐고 묻습니다.]
‘나도 지금 그게 고민이야.’
지금 태현이 오스턴 왕국을 손에 넣고 지배자 역할을 하고 있었지만, 이건 안정적이지 않았다.
굶주린 혼돈이 언제 반격할지도 모르고 오스턴 왕국의 NPC 세력들도 여럿 남아 있는 데다가 교단들도 있고….
[카르바노그가 너무 걱정하는 거 아니냐고 묻습니다. 화신이 오스턴 왕국을 구원한 영웅인데 어느 누가 발목을 잡겠냐고 묻습니다.]
카르바노그는 태현의 걱정이 과하다고 생각했다.
물론 오스턴 왕국이 아탈리 왕국처럼 안정적인 상황은 아니고 사방팔방에서 공격당하기 좋은 위치긴 했지만, 그래도 태현이 당장 뺏길 정도로 위험하진 않은 것이다.
그러나 태현은 설득되지 않았다.
‘음. 역시 최대한 실용적으로 가야겠다.’
절제와 실용의 극한.
누가 뺏어도 아쉽지 않고, 누가 뺏으면 바로 다시 도시를 불태워버릴 수 있는 그런 도시.
“참. 이번에 참가한 교단들도 좀 챙겨주긴 해야겠군. 파이토스 교단, 베레타르바 교단, 타이란 교단, 데메르 교단 신전들도 넣어주고.”
[카르바노그가 아키서스 교단도 잊지 말라고 말합니다.]
“당연하지. 신전 구역에서 가장 중심으로 놓고, 카르바노그 네 신전도 크게 세워줄게.”
노동력이 땅에서 솟아나는 만큼 태현의 마음도 매우 너그러웠다. 카르바노그는 뛸 듯이 기뻐했다.
[카르바노그가 신전 구역을 이 정도로 늘리자고 말합니다.]
“그래? 좀 많이 커진 것 같은데.”
[카르바노그가 어차피 모여 있는 영웅들의 힘을 합치면 이 정도는 금방이라고 말합니다.]
‘설득력이 있군.’
태현은 카르바노그의 말에 고개를 끄덕였다.
별로 어려운 일도 아니었다.
“그러면 그대로 전해야겠다.”
* * *
태현은 뛰어난 지휘관이자 협상가, 테러ㄹ…였지만 뛰어난 건축가는 아니었다.
그런 만큼 이런 도시의 재건축을 담당하게 되는 건 건축가 랭커들이었다.
골짜기 출신 랭커들은 물론이고, 골짜기 출신이 아닌 랭커들도 몰려왔다.
이 정도 되는 도시를 맡을 수 있는 것 자체가 어마어마한 기회인 것이다.
골드 하나 안 줘도, 아니, 오히려 골드를 내고 맡고 싶을 정도로!
“요즘 굶주린 혼돈 때문에 건축할 일이 없어서 있던 거 부수고 새로 짓고 하고 있었는데….”
“알지, 알아! 얼마나 힘들었냐!”
“이런 기회가 언제 다시 오겠어?”
<오스턴 왕국 재건-오스턴 왕국 퀘스트>
고대 제국의 후계자인….
퀘스트창 설명이 뜨고 건축가 랭커들은 설명을 읽었다.
대충 요약하자면 ‘최대한 대충, 빠르게, 필요한 것만 넣고 짓자’였다.
“으음.”
“으으음.”
건축가 랭커들은 그 퀘스트창에 아쉬운 신음 소리를 냈다.
물론 건축가들은 의뢰주의 요구를 만족시키는 게 최우선이긴 했다.
하지만….
하지만 이렇게 많은 노동력을 가지고서 그냥 이렇게 끝내기에는 너무 아쉬웠다.
조금 정도는 더 해도 되지 않을까?
“이 성벽은 하급 벽돌 구워서 빠르게 쌓으려고 하는데 어떻게 생각하십니까?”
“그래도 하급 벽돌은 좀… 여기가 원래 수도였고, 지금 굶주린 혼돈에 맞서 싸우는 새로운 상징 같은 게 될 것 같은데, 수많은 건축가 플레이어들이 하급 벽돌로 쌓은 성벽을 보고 어떻게 생각하겠나? ‘아, 역시 반 굶주린 혼돈 세력은 별거 없구나’라고 하지 않겠나?”
“헉. 확실히 그렇습니다.”
물론 절대다수의 플레이어들은 성벽을 채운 게 하급 벽돌인지 상급 벽돌인지 축성된 암석인지 구분하지 못했지만, 건축가 랭커들은 단호했다.
“그러면 상급 벽돌을 구워서 빠르게 쌓아보죠?”
“으음. 그런데 놓고 보니까 조금 아쉽군. 원래 상급 벽돌은 좀 애매하잖나. 이런 말이 있을 정도로. ‘상급 벽돌로 건물을 만들 바에는 조금 더 써서 최상급 벽돌을 쓰겠다’.”
“하긴 맞는 말입니다. 그러면 최상급 벽돌로 지을까요?”
“근데 그럴 거면 그냥 축성된 암석들을 써서 짓는 게 더 좋지 않겠습니까? 이게 크고 무거워서 벽돌보다 힘들기야 하겠지만 최상급 벽돌과 그렇게 차이가 나진 않습니다.”
“그것도 맞는 말이야.”
“…….”
“…….”
옆에서 건축가 랭커들의 대화를 듣고 있던 파티들은 황당한 표정을 지었다.
저거 말려야 하는 거 아닌가?
‘괜찮은 거 맞습니까?’
‘뭐… 전문가들의 대화잖아.’
‘전문가들이 알아서 잘 하겠지. 그리고 도시 더 멋지게 지어지면 좋은 거 아닌가?’
말려야 할 플레이어들도 말리는 대신 그냥 지켜보았다.
플레이어들이 해야 할 일이 좀 늘어나긴 하겠지만, 굶주린 혼돈과 싸우는 것도 해왔는데 그 정도야 충분히 할 수 있었다.
“그렇다면 이건 어떤가? <세 번 제련되고 축성된 흑성암>으로 성벽을 짓는 걸세.”
“오오….”
“좋은 거 같습니다.”
“네 번 제련하는 건 어떨까요?”
“하하. 사람 참! 그렇게 사치스럽게 지을 수는 없지 않나! 어디까지나 빠르고 간단하게 짓는 건데!”
건축가 플레이어들의 화기애애한 웃음소리가 하늘 높이 울려 퍼졌다.
* * *
태현은 밖에서 무슨 일이 벌어지고 있는지 눈치채지 못했다.
태현은 태현 나름대로의 일로 바빴던 것이다.
바로 거대 대장간을 건설하는 일이었다.
“이다비. 굶주린 혼돈의 장비는 상당히 사기적이야.”
“거기에 맞서기 위해서 저희도 사기를 쳐야 한다는 거죠?”
[카르바노그가 좀 더 멋진 말이 있지 않냐고 말합니다.]
“그렇지. 마침 여기는 남는 게 땅이고 남는 게 지역이야. 거대 대장간을 짓자. 그걸로 새 장비를 제작해야겠어.”
태현의 말에 이다비는 굳은 표정으로 고개를 끄덕였다.
장비의 필요성은 판온 플레이어라면 언제나 느끼는 것이었다.
지금 같이 한숨 돌렸을 때 만들지 않는다면 영원히 만들지 못할지도 몰랐다.
“여기서부터 저기까지. 통째로 사용해서 대장간을 만들죠. 말씀하신 대로 재료들하고 대장장이들은 준비해놨어요.”
“오스턴 왕국의 NPC들도 필요해. 쓸 만한 대장장이 NPC들.”
“길드 동맹 쪽이 명단을 확보하고 있을 거예요. 명단 받아서 길드원들한테 찾아오라고 할게요.”
“고마워. 길드 동맹 놈들은 어때?”
태현이 묻는 길드 동맹 놈들은 일반 길드원들을 말하는 게 아니었다.
일반 길드원들은 알아서 잘 적응하고 있었다. 자기 퀘스트 챙겨가면서.
태현이 말하는 건 쑤닝과 그 밑의 간부들이었다.
언제 어떻게 욕심을 부릴지 모르는 놈들!
“감시 붙여놨는데 아직 별다른 짓은 안 하던데요?”
“정말 별생각이 없는 건가?”
“그보다는 기회가 없어서 가만히 있는 거 아닐까요? 아무리 꿍꿍이가 있어도 지금 같은 상황에는 못 꺼낼 것 같은데요.”
이다비 생각에 아무리 욕심이 많아도 지금 같은 상황에서 그걸 드러낼 수 있는 사람은 없을 것 같았다.
모든 플레이어들이 태현 아래에서 똘똘 뭉쳤는데 거기다가 ‘길드 동맹 부활! 여기 모여라!’ 하면 ‘와 미친놈인가 봐’ 같은 반응만 돌아오지 않겠는가.
“음. 쑤닝을 불러와야겠군.”
“네? 죽이시려고요? 준비할까요?”
“…아니. 그게 아니라. 협조 구하려고. 오스턴 왕국에 대해 쑤닝만큼 잘 아는 놈도 없을 테니까.”
“아아….”
이다비는 이해가 간다는 듯이 고개를 끄덕였다. 태현은 슬쩍 물었다.
“그냥 죽이는 게 나을까?”
“아뇨. 그건 뭐 언제 해도 되니까 일단 불러서 쓸 만한 것부터 건지죠.”
[카르바노그가 파이토스 교단하고 같이 다닌 것 때문에 저렇게 된 거 아니냐고 당황스러워합니다.]
‘이다비는 원래 저랬던 거 같은데.’
[카르바노그가 할 말을 잃고 화신을 쳐다봅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