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 나는 될놈이다 1650화
‘아니. 아무리 봐도 아키서스 때문이 아닌데?’
아키서스가 여러모로 행운에 버프를 주는 신이긴 하지만 지금 믿기 시작한, 교단 계급으로 따지면 브론즈 이하인 놈한테 저렇게 버프를 줄 신은 아니었다.
굶주린 혼돈의 저주라면 저주 중에서는 손꼽힐 정도로 강하고 지독한 저주일 텐데….
[카르바노그가 우연 아니냐고 묻습니다.]
‘그렇겠지? 아무래도 저런 저주는 좀 복불복이 강하니.’
태현이 보기에 저건 아키서스 때문이 아니라 그냥 운이었다.
이런저런 종족 변화 페널티 중 그나마 좀 약한 걸 뽑은 걸 테니….
“김태현…! 고맙다!!”
그러나 사정을 모르는 팔렌스는 눈물을 글썽거리며 외쳤다.
당연히 감동할 수밖에 없었다.
지금 굶주린 혼돈 세력과 반 굶주린 혼돈 세력의 대립은 극심했다.
전성기 길드 동맹과 다른 길드들의 대립도 이 정도는 아니었을 정도로.
-굶주린 혼돈 만세!! 굶주린 혼돈의 시대가 온다!
-아직도 굶주린 혼돈 가입 안 한 놈들 없지??
-굶주린 혼돈에 가입한 놈들은 판온 왜 하냐? 길드 동맹에 가입한 놈들이랑 똑같은 놈들임.
-굶주린 혼돈하고 길드 동맹하고 차이가 있나? 굳이 따지면 길드 동맹 놈들이 더 짜증 난다는 점이 있긴 한데….
굶주린 혼돈에 가입한 플레이어들은 ‘대세도 모르고 착한 척하는 놈들’이라면서 상대방을 비웃었고, 반 굶주린 혼돈에 가입한 플레이어들은 ‘판온 노잼으로 만드는 변절자 놈들’이라면서 상대방을 공격했다.
그중 특히 태현은 반 굶주린 혼돈 원정대의 수장이나 마찬가지인 사람.
굶주린 혼돈에 가입한 플레이어들이 좋게 보일 리가 없었다.
그런데도 이런 친절을 베풀어주다니!
“나한테도 이런 기회를 주다니!”
“그래. 알면 됐다.”
태현의 대답에 이세연이 귓속말로 속삭였다.
“진짜 기회 준 거야?”
“아니. 그냥 아키서스 교단이나 강제 가입시키려고 한 건데 얻어걸린 거야.”
“그럴 것 같았어.”
지금 상황을 보고 있는 팬들에게 둘의 대화는 들리지 않았다.
팬들에게 지금 상황은 그저 감동적인 장면처럼 보일 뿐!
-정말 감동이다. 저걸 용서해 주네.
-야. 길드 동맹 놈들도 데리고 다니잖아.
-내가 보기에 뭔가 오해가 있는 것 같은데. 김태현 놈 성격에 저런 걸 봐줄 리가 없는데….
└네가 뭘 안다고 그래?
└꼭 이런 놈들이 나오더라. 김태현한테 당해서 그런 듯.
└김태현 잘 알지도 못하는 놈들이 맨날 트집만 잡아.
-…내가 판온 1 때부터 김태현 놈과 상대했는데 너희보다는 잘 알아!
└그러시겠지. 나도 판온 1에서 김태현하고 싸워봤는데 김태현만큼 정정당당한 사람 없음. 결투하고 나서 나한테 좋은 싸움이었다고 미안해하더라.
└맞아. 나도 판온 1에서 김태현 만난 적 있는데 팬서비스 좋더라.
-개소리하지 마!! 니들 판온 1에서 김태현 만난 적 없지! 애초에 판온 1에서 김태현이 팬서비스를 왜 하는데!!
-와. 김태현은 판온 1 때부터 팬서비스가 좋았군요?
-아니라고! 속지 말라고 외국인들아!
-야. 근데 아키서스 교단 가입하면 굶주린 혼돈 페널티 안 받고 나올 수 있냐?
-아무래도 그런 거 같은데?
-굶주린 혼돈 가입했는데 생각보다 별로여서 탈퇴할까 싶은데 아키서스 교단에나 가입할까.
-내 친구도 굶주린 혼돈 가입했다가 아키서스 교단 가입으로 탈퇴했는데 페널티 안 받았다더라.
-진짜?? 네 친구 이름이 뭔데?
-케… 케이.
* * *
-잔악한 굶주린 혼돈 놈들. 왕국을 이렇게 파괴하다니.
교단의 주교들은 잿더미가 된 주변을 보며 분개했다.
대륙의 왕국 중 가장 많은 전쟁이 있었지만, 그럼에도 불구하고 오스턴 왕국은 발전하고 번영한 왕국이었다.
그 왕국이 이렇게 초토화되다니.
굶주린 혼돈의 잔악함에 분노할 수밖에 없었다.
‘어…. 이거 태현 님이 싸우다가 불 질렀던 거 같은데.’
이다비는 속으로 생각했다.
태현이 과거로 돌아가서 오스턴 왕국에서 날뛴 건 이미 들어서 알고 있었다.
수도는 물론이고 근처 주변까지 다 박살 내고 돌아왔다고 들었었는데…?
-어떻게 생각하십니까? 주교님?
“정말 간악하네요!!”
이다비는 재빨리 대답했다.
이런 나쁜 굶주린 혼돈 놈들!
“어? 이다비 님. 이거 김… 컥컥.”
-조용히 시켜.
-알겠습니다!
옆에서 눈치 없게 입을 열던 파티장 한 명이 파워 워리어 랭커들한테 끌려갔다.
-그런데 길마님. 적들이 이상하게 안 보입니다. 설마 도망친 걸까요?
-으음….
이다비는 고민에 잠겼다.
원래 이다비가 이끄는 골짜기 파티들과 교단 정예 전력이 목표로 하고 있는 곳은 아레네 시였다.
한때 오스턴 왕국의 수도였고, 길드 동맹의 수도였던 아름다운 대도시!
…그 도시에 불을 지른 게 태현이긴 했지만 어쨌든 그건 지금 중요하지 않았다.
당연히 그쪽으로 진격하면서 이런저런 공격이 있을 거라고 예상했는데, 생각보다 적의 반응이 시원치 않았던 것이다.
-아레네 시가 다 부서져서 후퇴한 거 아닐까?
-그런 거면 좋겠는데.
파워 워리어 랭커들은 희망을 담아서 그렇게 말했다.
굶주린 혼돈과 싸우지 않고 도시를 탈환한다면 그것만큼 좋은 게 없는 것이다.
-그럴 리는 없다!
그러나 고대 제국의 황자, 페르소텔턴은 다르게 생각했다.
-굶주린 혼돈의 하수인들은 빚쟁이나 고리대금업자만큼이나 끈질긴 놈들. 그리 쉽게 물러날 리가 없다.
“정말 설득력 있는 비유군요!”
이다비는 바로 납득했다.
확실히 그 정도로 끈질기다면….
-놈들은 지금 함정을 파고 있을 가능성이 높다. 전력이 줄어든 만큼 아레네 시 안에 숨어 있을지도 모르겠군.
페르소텔턴은 생전에 굶주린 혼돈과 치열하게 싸웠던 만큼, 굶주린 혼돈의 전술에 능숙했다.
아레네 시가 부서지고 파괴됐다면 그 안에 숨어서 발톱을 준비하고 있는 게 굶주린 혼돈인 것이다.
이다비와 골짜기 파티장들, 그리고 각 교단의 주교들은 모여서 머리를 맞댔다.
“지금 도시 안에 함정이 있을 수 있다고 하는데….”
-상관없소! 나와 내 망치기사단이 앞장설 것이오.
파이토스 교단, 망치기사단 단장 아크락스가 ‘쾅’하고 탁자를 치며 외치자 다른 대주교들이 크게 한숨을 내쉬었다.
저 저 또라이…!
비교적 온건한 베레타르바 교단과 데메르 교단의 대주교들이 조심스럽게 말했다.
-도시 안에 매복이 있으면 피해가 커질 텐데.
-모험가들을 희생시키는 것보다는 좀 더 안전한 방법을 찾는 것도 나쁘지 않겠습니다.
[파이토스 교단 망치기사단 단장, 아크락스가 분노합니다!]
[더 이상 아크락스는 참을 생각이 없습니다!]
[설득에 실패합니다!]
-아! 싫소! 싫단 말이오! 우리끼리라도 돌격하겠소!
-….
-….
‘…태현 님 보고 싶어지는데.’
이다비는 진심으로 태현이 그리워졌다.
태현이 이 자리에 있었다면 지금 이 날뛰는 NPC들을 따끔하게 훈계했을 텐데.
원래 든 자리는 몰라도 난 자리는 안다고, 케인도 없으면 ‘어? 케인 없어졌냐?’ 이러는데 태현이 없는데 그 빈 자리가 안 느껴질 리 없었다.
특히 이런 대규모 퀘스트에서 태현의 능력은 거의 절대적인 수준이었다.
단순히 화술 스킬이 높아서, 명성이 높아서, 국왕이나 교황 작위를 갖고 있어서가 아니었다.
순간순간 변하는 상황과 추가되는 퀘스트들을 받고 빠르게 대응하는 임기응변 능력!
그건 정말 어떤 랭커들도 따라갈 수 없는 능력이었다.
이다비도 나름 파워 워리어를 관리하고 화술 스킬도 높고 황금주교 직업을 갖고 있었지만, 이 대규모 퀘스트를 관리하는 건 정말 피가 마르고 신경이 날카로워지는 업무였다.
특히 가장 중요한 전력인 대주교들의 성격이 다 달라서….
“저. 아크락스 님. 이게 위험하잖아요.”
-그러니까 우리끼리라도 돌격하겠다고 말했잖소!
“근데 그렇게 움직였다가 각개격파 당하면 피해가 커지잖아요?”
-이기겠소. 믿어주시오!
“….”
이다비는 눈을 질끈 감았다.
대주교들을 다루는 것도 이렇게 힘든데, 태현은 대체 어떻게 악마 공작들을 다루고 있는 걸까?
* * *
“관문이다. 파괴하고 와!”
-아… 알겠다.
기가 죽은 구시렉은 악마들을 이끌고 기계 에다오르와 함께 움직였다.
그 초월적인 모습에 이세연은 눈이 흔들렸다.
저게 악마 공작이야, 아니면 악마 졸병이야?
“…내가 할 말은 아니긴 한데, 악마 공작을 저렇게 다뤄도 괜찮은 거 맞아?”
“구시렉은 저렇게 부려지는 걸 좋아해.”
“….”
“….”
이세연과 유성 게임단 선수들은 다시 한번 경악한 표정으로 구시렉의 뒷모습을 쳐다보았다.
* * *
이다비는 한숨을 쉬며 말했다.
“그러면 같이 가죠. 지원해 드릴 테니까.”
-역시…! 아키서스 교단을 믿고 있었소. 평소에는 다른 교단을 괴롭히고 속이지만, 위험한 순간이 오면 가장 적극적으로 나서는 교단이 아니겠소?
‘지금 욕하고 있네 저게.’
이다비는 살짝 발끈했지만 참았다.
상대가 악의는 없었으니까.
….열이 받기는 했지만 그래도 이 정도는….
[아크락스가 기뻐합니다!]
[교단 내 평판이….]
[친밀도가….]
-황금주교님. 아크락스 단장의 억지를 뭣하러 들어줍니까?
-들어줄 필요가 없는 억지입니다.
-계속 들어주면 더욱 오만해지고 거만해질 겁니다.
-시끄럽소! 이 겁쟁이들!
다른 대주교들의 말에 아크락스는 펄펄 뛰었다.
대주교들은 아크락스를 한 대 때리고 싶다는 표정을 지었다.
“…그래도 혼자 보낼 수는 없지 않나요?”
-저런…. 황금주교님께서는 지나치게 친절하십니다. 그냥 나가 뒤… 음음.
-그런데 아키서스 교단에서는 저런 식으로 구는 자를 가혹하게 처벌하지 않았습니까? 굳이 챙겨줄 이유가 있나 싶은데.
“….”
아키서스 교단 소문이 어떻게 난 거야 대체?
솔직히 내버려 두고 싶은 마음이 굴뚝 같았지만, 총책임자로서 이다비는 그럴 수 없었다.
‘일단 같이 가되 적당한 핑계를 대서 설득한 다음 빠져나와야 해.’
아크락스의 불만도 달래고 위험도 최소화하는 방법은 그것밖에 없었다.
-황금주교님, 다시 생각해 보시죠. 그냥 버리시는 것도 방법입니다. 교황 성하께서도 동의하실….
“…아니에요. 교황께서도 버리는 걸 원하지 않으실 거예요.”
-엥?
-그렇습니까?
-정말이오?
아크락스까지 의아해하며 이다비를 쳐다보았다. 이다비는 속으로 아크락스를 욕했다.
* * *
“함정이 있을 가능성이 매우 높은 아레네 시 안쪽으로, 아크락스와 망치기사단을 호위하며 같이 들어갈 생각 있는 파티장분 계세요?”
말도 안 되는 질문.
누가 들어도 ‘그걸 누가 참가합니까?’라는 소리가 절로 나오는 위험한 퀘스트였다.
그러나 이다비는 숨기지 않았다. 여기까지 같이 온 파티장들에게 그런 걸 숨길 수 없다고 생각했기 때문이었다.
“제가 가겠습니다.”
“저도 가죠.”
그리고 파티장들은 그런 이다비의 진심을 받아들였다.
위험하다면 우리가 먼저 가자!
“여러분!”
“길마님, 걱정하지 마십쇼. 다들 여기 참가한 이상 어느 정도 위험은 각오하고 있습니다.”
“맞습니다!”
파티장들의 뜨거운 외침에, 자리에 있던 파워 워리어 랭커들도 감동을 받았다.
“아닙니다. 저희가 앞장서겠습니다!”
-쟤네 파워 워리어 맞냐??
-쉿. 조용히 해 인마.
몇몇 파워 워리어 간부들은 황당하다는 듯이 쳐다보았지만, 비교적 들어온 지 얼마 안 되는 파워 워리어 랭커들은 매우 진심이었다.
파티장들과 랭커들은 서로 뜨겁게 악수하며 고개를 끄덕였다.
우리는 할 수 있다!
그 분위기에 골짜기에서 지원을 위해 따라온 기계공학 대장장이들도 감동을 받았다.
“저희도 앞장서겠습니다!”
“….”
“…아니. 그건 좀.”
다 같이 좋아하던 파티장들은 슬쩍 발을 뺐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