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 나는 될놈이다 1649화
유성 게임단 선수들은 감탄했다.
안 그래도 요즘 주장이 점점 사람의 탈을 벗어난 능력을 보여주는 것 같았는데, 이제는 가만히 앉아 있어도 천 리 밖의 일을 꿰뚫어 볼 정도로 레벨업하신 건가?
“그런 짓 할 사람이 몇 명이나 되겠어. 가자.”
이세연은 지팡이를 들고 발걸음을 옮겼다.
어이가 없었지만 일단 태현을 직접 만나서 상황을 들어야 할 것 같았다.
“그런데 이세연 님. 의식 준비하던 건….”
“다 됐지.”
“그렇군요! 그러면 이제 적들을 쓸어버리기만 하면 되겠습니다!!”
선수 한 명이 뛸 듯이 기뻐하며 말했다.
그 의식을 위해 지금 요새를 만들고 버티지 않았던가!
“…적이 없잖아?”
“앗.”
다른 선수의 지적에 말을 꺼냈던 선수는 머쓱해졌다.
그… 그런가?
“안 쓰면 좋은 거지. 힘을 아낄 수 있는 거잖아.”
“맞아. 주장도 그렇게 생각할 거야.”
새로 들어온 선수들은 그렇게 이야기하며 이세연의 뒤를 따라갔다.
그 때문에 이세연의 눈썹 끝이 파르르 떨리는 것은 보지 못했다.
‘아오….’
* * *
전투가 끝난 요새.
이세연과 태현은 요새 성벽 위에서 서로 대면했다.
별다른 특수효과도 없는 평범한 만남이었지만, 그 뒤에 있던 선수들은 전율했다.
저게 바로 세계에서 손꼽히는 선수들만이 보여줄 수 있는 위엄인가?
‘너무 멋지다!’
‘아무 말 없이 가만히만 있는데도 저렇게 위엄이 넘치다니.’
선수들뿐만 아니라 방송으로 보고 있는 팬들도 비슷한 생각을 하고 있었다.
과연 저 두 선수는 무슨 이야기를 하고 있을까?
-둘이 같이 힘을 합쳐서 스킬을 쓴 거겠지?
-그렇겠지. 그렇지 않고서는 설명이 안 돼.
-이세연이 어쩐지 요새 밖에 안 나타난다 했는데, 안에서 대마법 준비하고 있었나 봐.
-아무리 준비를 했어도 그 정도 홍수를 만들어내는 게 가능해?? 내가 보기에는 마법이 아닌 것 같은데.
└네가 뭘 안다고?
└네가 이세연보다 판온 잘 해?? 김태현보다 판온 잘 해??
“아주 잘… 했네.”
“앗. 혹시 의식 준비하고 있었는데 지금 내가 해일을 일으킨 탓에 쓸 일이 없어져서 화가 난 건가?”
“…….”
정곡을 찌르는 태현의 말에 이세연은 정색했다.
‘얘는 눈치가 너무 빨라.’
둘 다 부정하겠지만 둘의 사고방식은 상당히 비슷했다.
태현이 이세연의 무표정한 얼굴만 보고 무슨 생각을 하는지 알아맞힐 수 있었던 것도 당연했다.
“미안하군. 내가 일부러 일으킨 게 아니라서.”
[카르바노그가 홍수를 일부러 일으킨 게 아니라고 말하니까 더 이상하게 들린다고 말합니다.]
카르바노그의 말처럼 이세연은 어이없어하고 있었다.
그럼 홍수를 일부러 일으킨 게 아니면 뭐 실수로 일으켰니?
“…어쨌든. 일단 적들을 다 쓸어버렸으니까 잘 됐어.”
“그렇게 받아들여주니 고맙군.”
“이대로 계속 움직여서 동부에 위치한 굶주린 혼돈의 관문을 모두 파괴할 생각인데, 같이 움직일 거지?”
“그래. 동부부터 끝내야지.”
태현은 고개를 끄덕이며 이세연의 제안에 동의했다.
굶주린 혼돈의 군단이 동부에 얼마나 남았는지는 몰라도, 그만한 숫자가 싹 쓸려나간 이상 타격이 꽤 심할 것이다.
이 때 동부에 설치된 굶주린 혼돈의 관문을 전부 제거해 버리고 땅을 되찾아와야 했다.
“여기! 여기 첩자 잡아왔습니다!!”
“!”
* * *
팔렌스와 랭커들은 홍수가 터지자 뒤늦게 헤엄치며 도망치기 시작했다.
처음에는 ‘아 이거 저수지 만들자고 한 거 우리인데 뒷감당을 어떻게 하지?’ 정도의 걱정이었지만, 시간이 점점 흐르자 그게 문제가 아니라는 걸 깨달았다.
후방은 물론이고 앞에서 요새 공격하고 있던 굶주린 혼돈의 군단들이 모두 다 물살에 떠밀려가기 시작한 것이다.
-취익! 부족들, 통나무를 타고 도망친다! 여기는 종말이다!
-굶주린 혼돈 놈! 물 하나 관리를 못해서!
조금이나마 정신이 있는 NPC들은 허겁지겁 홍수에서 최대한 멀어지려고 도망쳤지만 랭커들은 그것보다 훨씬 늦었다.
[물살이 빠르게 휘몰아칩니다!]
[헤엄에 페널티를 받습니다!]
[이동 속도가 느려집니다!]
[다시 한번 물살이 몰려옵니다!]
[해일이…]
[……]
“어… 어푸!! 어푸푸!!”
“뭐 이 미친… 어푸푸!”
랭커들은 설마 이 레벨 먹고 익사로 로그아웃을 경험하게 될 거라고는 생각지도 못했었다.
그것도 바다도 아닌 땅 위에서!
“뭐… 뭐라도 해봐! 뭐라도 해보라고!”
“얼음을 불러내서 그 위로 올라타자!”
콰직!
“얼음이 못 버텨!!”
“나무라도 붙잡아서 올라가보자!”
콰직!
“…이 자식은 뭐 맞는 말을 하는 게 하나도 없냐!!”
“그러면 네가 의견을 내놓던가!”
“그만해! 지금 우리끼리 싸우면 어쩌자고!”
“내가 틀린 말 했냐! 이놈이 미친 소리 해가면서 공성하겠다고 나댄 탓에 이 꼴이 된 거 아니야!”
“그게 나 때문이냐! 날 제대로 못 도운 네놈들 탓이지!”
랭커들은 서로 추하게 다투며 아웅다웅거렸다.
간신히 올라탄 나무도 순식간에 부서졌다.
촤아악-
-저기 모험가들이 있다!
-모험가들을 붙잡아 와라!
“!!”
그렇게 다투는 사이, 뼈로 된 나룻배들이 빠르게 주변을 포위하기 시작했다.
요새에서 나온 언데드들이었다.
“저놈들을 잡아라!”
뼈 함선 위에 있던 류태수도 모험가들을 발견했다.
아무리 봐도 NPC가 아닌 플레이어!
무조건 붙잡아야 했다.
“길드 동맹은 왼쪽으로 돌아라! 우리는 이쪽으로 돌겠다!”
“알고 있다! 몇 번이고 말할 거 없어!”
쑤닝은 간부들과 함께 왼쪽으로 돌았다.
팔렌스는 길드 동맹 간부들의 얼굴을 알아보고 깜짝 놀랐다.
“길드 동맹 놈들이잖아?!”
“망한 게 아니었나?!”
“…….”
작은 목소리였지만 길드 동맹 간부들의 귓가에는 똑똑히 들어왔다.
“저 새끼들이…?”
“그냥 쏴버릴까?”
그런 간부들의 속마음도 모르고 랭커들은 입을 열었다.
“길드 동맹!! 지금 뭐하는 거냐! 그렇게 당해놓고 김태현을 돕다니!”
“너희들이 그러니까 호구 취급을 받는 거지! 지금이라도 정신을 차려서… 어푸! 어푸푸푸!”
“죽여 버려 그냥!”
“이봐! 붙잡으라니까!!”
멀리서 류태수가 허겁지겁 배를 몰고 달려왔다.
* * *
류태수가 물에 젖은 생쥐 꼴이 된 랭커들과 길드 동맹 놈들을 데리고 오자, 태현은 의아해하며 물었다.
“길드 동맹 놈들이 본색을 드러내서 붙잡은 건가?”
“…아니다!!”
“이 자식들이 멍청하게 굴어서 같이 빠졌습니다.”
류태수는 한심하다는 듯이 랭커들과 간부들을 쳐다보았다.
길드 동맹 간부들은 부끄러움에 시선을 피했다.
새로 들어 온 유성 게임단 선수들은 의심스럽다는 목소리로 말했다.
“저놈들 수상하지 않습니까? 포로로 붙잡으라고 했는데 그냥 죽이려고 하다니… 내통하는 거 아닐까요?”
“무슨 개… 개소리를?! 죽이는 게 어떻게 내통이야! 죽는 것보단 포로가 무조건 낫지!”
쑤닝은 펄쩍 뛰었다.
“포로로 붙잡히는 것보다 한 번 죽어서 여길 벗어나면….”
“그걸 말이라고 지껄이냐?!”
“저렇게 화를 내는 거 보면 더 수상한데.”
“…….”
쑤닝은 진심으로 유성 게임단 선수들에게 이를 갈았다.
한국 놈들 진짜….
“그만. 말을 좀 들어보자. 굶주린 혼돈 세력에 가입한 플레이어들이겠지?”
이세연은 랭커들을 보며 물었다.
랭커들은 대답 대신 침묵했다.
그래도 나름 자존심이란 게 있는데, 붙잡혔다고 바로 다 털어놓을 수는 없는 것이다.
“하나 던져버려.”
이세연은 귀찮다는 듯이 말했다. 유성 게임단 선수들은 우르르 달려가 붙잡힌 랭커 한 명을 요새 밖으로 던져버렸다.
풍덩!
“…….”
“…….”
팔렌스와 남은 랭커들은 새파랗게 질렸다.
몇 마디 정도는 대화를 할 줄 알았는데 그런 것도 없이 그냥 던져버릴 줄이야?
“다시 물어볼게. 굶주린 혼돈 세력에 가입한 플레이어들이 맞아?”
“…맞습니다!!”
“그래. 탈퇴할 생각은 있고?”
“…….”
잠시 침묵이 이어지자 류태수가 한 명을 들어서 다시 던져버렸다.
이세연은 살짝 놀란 표정으로 말했다.
“던질 생각은 없었는데.”
“헉… 그렇습니까?”
“괜찮아. 던질 수도 있지.”
“…….”
옆에서 듣고 있던 태현은 유성 게임단의 살벌한 분위기에 살짝 놀랐다.
‘와. 무시무시한데.’
이세연이 원래 성격이 살벌하다는 건 알고 있었지만 주장을 맡아서 활동하는 게임단에서는 더욱 살벌했다.
“탈퇴할 생각은….”
“있습니다! 탈퇴하겠습니다!”
“탈퇴할 수 있어?”
“예! 해보겠습니다!”
랭커 중 한 명이 벌떡 일어서더니 굶주린 혼돈과의 계약을 파기 시도했다.
[굶주린 혼돈에 대한 믿음을 저버리고 세력에서 탈퇴합니다!]
[막대한 페널티가 있을 수 있습니다!]
[굶주린 혼돈이 분노합니다!]
콰르륵!
“!??!”
“!!”
자리에 있던 플레이어들은 모두 깜짝 놀랐다.
일어선 랭커의 온몸이 마치 슬라임처럼 부드럽게 변하더니 온갖 형태로 변형되기 시작한 것이다.
태현은 비슷한 모습을 예전에 본 기억이 났다.
‘키메라잖아!?’
골짜기에서 잘못 걸려서 키메라 종족으로 변신하는 플레이어들이 저런 모습을 보여줬던 것 같은데….
[종족이 변화합니다!]
[저주받습니다!]
[<약화된 뼈> 페널티를…]
[힘 스탯이 약화됩니다!]
[<흉측한 외모> 페널티를…]
[화술 스킬에…]
[……]
[……]
“케, 케인 선수?”
유성 게임단 선수 중 한 명이 자신도 모르게 중얼거렸다.
가장 유명한 키메라 종족 플레이어!
원래 키메라 종족이란 게 뭐가 걸릴지 모르는 복불복 심한 종족이라서, 랭커들은 절대 피하는 종족이었다.
그런 만큼 케인 같은 선수는 키메라 업계에서 유명할 수밖에 없었다.
키메라를 보고 케인을 떠올리는 게 당연할 정도로!
“이… 이게 뭐야?!”
저주가 끝난 랭커는 기겁해서 외쳤다.
스탯 하락은 물론이고 이상한 저주까지 여럿 붙지 않았는가.
이걸 다 풀려면 한세월 걸릴 게 분명했다.
“이게 뭐냐고! 이게 어떻게 된 거야!”
“아. 굶주린 혼돈을 배신해서 저주를 받은 건가. 하긴 아무 대가 없이 풀어주진 않겠지.”
“그런 것 같네.”
태현과 이세연은 눈 하나 깜박하지 않고 대화를 나눴다.
그 모습에 붙잡혀 있던 랭커들은 분노했다.
지금 누구 때문에 이렇게 됐는데…!
“자. 다음도 탈퇴해. 빨리.”
“이, 이 꼴을 보고서 탈퇴하란 건가!? 진심으로!?”
랭커들은 어떻게든 피해보려고 애썼다.
이세연이나 김태현 정도 되는 선수면 이미지도 신경을 쓸 테니 거기에 호소하면 되지 않을까 싶었던 것이다.
하지만 이세연이나 태현이나 눈 하나 깜박하지 않았다.
“그럼 진심이지. 누가 가입하랬어? 탈퇴해. 안 그러면 죽던가.”
“탈퇴하기 전에 아키서스를 믿으면 조금 페널티가 덜해질지도 모르겠군.”
오히려 한술 더 떴다.
한 명만 있어도 끔찍했는데 둘을 붙여 놓으니 그 끔찍함이 두 배!
“자. 10초 줄게.”
“10. 5. 2….”
“…….”
‘개자식들.’
결국 랭커들은 눈을 질끈 감고 굶주린 혼돈 세력을 탈퇴하기 시작했다.
팔렌스는 그 와중에 고민하다가 슬쩍 물었다.
“정말 아키서스를 믿으면 페널티가 덜해지나?”
“물론이지.”
[카르바노그가 진짜냐고 의아해합니다.]
‘알 게 뭐야. 굶주린 혼돈에 가입한 놈인데.’
[…….]
카르바노그가 황당해하는 사이 팔렌스는 각오를 하고 갈아탔다.
어차피 도박을 할 거라면 뭐라도 해보고 하자!
[아키서스 신앙을 받아들입니다!]
[굶주린 혼돈에 대한 믿음을 저버리고 세력에서 탈퇴합니다!]
[막대한 페널티가 있을 수 있습니다!]
[굶주린 혼돈이 분노합니다!]
콰르륵!
변화가 끝나고 팔렌스는 깜짝 놀랐다.
사소한 페널티 몇 개만 받고 끝난 것이다!
“살… 살았다!! 살았어!!!”
“??”
보고 있던 태현은 눈을 의심했다.
저게 진짜 아키서스 때문 맞나??