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 나는 될놈이다 1647화
“물이 생각보다 많은데?”
[카르바노그가 이걸 용케 여기까지 끌어왔다고 말합니다.]
마침 물기둥도 솟구쳤겠다, 태현은 주변을 확인했다.
그렇게 많이 쓰러뜨렸는데도 계속해서 굶주린 혼돈의 하수인들이 몰려들고 있었다.
‘일단 요새에서 반대 방향으로.’
태현은 거대한 물기둥의 방향을 반대로 틀었다.
요새 쪽으로 끌고 갔다가는 대참사가 일어날 테니 일단 반대 쪽으로!
-여기 있는 놈들이 설마 수공을 하려고 물을 모아 놓은 것 아닌가?
음악공 구시렉은 의문에 찬 목소리로 물었다.
“말도 안 되는 소리 하지 마. 구시렉. 주변에 강도 없는데 수공하려고 물을 이렇게까지 끌어왔겠어? 게다가 요새 안에는 대부분이 언데드들인데 물 좀 찬다고 쓰러지진 않지.”
-하긴 그것도 그렇다.
구시렉은 납득했다.
아무리 굶주린 혼돈의 하수인들이 멍청하더라도 이런 상황에서 억지로 수공을 하려고 하진 않을 것이다.
-그렇다면 이 저수지는 대체 뭐지?
“아마 놈들이 뭘 소환하려고 준비한 거 아닐까 싶은데.”
막대한 양의 물을 모아놓아야 소환 가능한 몬스터나 정령 같은 것들.
태현은 여기 모여 있는 놈들이 그런 짓을 꾸민 게 아닌가 싶었다.
‘공성을 한심하게 해서 무슨 생각인가 했는데, 역시 속임수였나? 제법 머리를 잘 굴리는군. 그 전에 막아서 다행이다.’
[카르바노그도 동의합니다!]
팔렌스와 랭커들은 그들도 모르는 사이에 태현에게 높게 평가받았다.
* * *
-뭐냐? 무슨 일이냐?! 왜 저수지의 물이!?
-대피해라! 대피해!!
[굶주린 혼돈의 군단이 혼란에 빠집니다!]
[거대한 자연재해를 목격했습니다! 사기가 떨어집니다!]
-취익! 물난리다!
-물의 신께서 분노했다!
[굶주린 혼돈을 섬기는 야수들이 도망치기 시작합니다!]
[굶주린 혼돈을 섬기는 오크 부족들이 도망치기 시작합니다!]
[……]
[……]
저수지 뒤에서 솟구치기 시작한 거대한 해일은 굶주린 혼돈의 하수인들이 모여 있는 곳을 그대로 타격했다.
아닌 밤중에 날아온 물난리에 NPC들은 기겁하며 피하기 시작했다.
-후퇴해라! 후퇴!!
-일단 빠져나가야 한다!
꽝!!!!
[고대 거인 구룩가가 <태초의 함성>을 지릅니다!]
[사기가 올라갑니다!]
[혼란 상태에서 풀려납니다!]
[굶주린 혼돈이 고대 거인 구룩가에게 지휘의 왕관을 씌워줍니다!]
-날뛰지 마라. 멍청이들아. 각 우두머리들은 모두 내 명령을 듣는다!
구룩가는 가슴팍을 북처럼 주먹으로 두드리며 고함을 질렀다.
저 동쪽 산맥 깊숙한 곳에 있는 고대 거인족은 거인족들 중에서도 손꼽히게 강한 이들이었다.
굶주린 혼돈이 총애하는 데에는 다 이유가 있었던 것이다.
구룩가는 도망치는 오크들을 집어던지고 깔아뭉갠 다음 외쳤다.
-도망치는 놈은 용서하지 않겠다!
-구룩가! 물이 흘러오고 있다! 물의 신께서 분노하셨단 말이다!
-헛소리! 이건 아키서스의 음모다! 적들 사이에 아키서스가 있다고 들었다.
-모든 걸 다 아키서스 탓으로 할 셈이냐?
몇몇 거인들은 구룩가에게 불평했다.
지금 이 상황은 아무리 봐도 아키서스와 상관이 없어 보였는데, 그냥 다 아키서스한테 갖다 붙이다니.
쾅!!
구룩가는 불평하던 거인의 턱을 몽둥이로 날려 버렸다.
-아키서스의 음모다!
-알, 알겠다. 알겠다.
-아키서스의 음모가 맞는 것 같다.
거인들은 금세 납득했다.
듣고 보니 그런 것 같기도 하다!
-모두 움직여라! 도망치는 놈들을 다 붙잡아라!
-이 주변에서 일단 피해야 하지 않나?!
-물은 시간이 지나면 빠지고 마를 거다! 흩어지지 마라! 좀 젖는다고 죽지 않는다!
구룩가는 사납게 외치며 도망치는 오크들과 야수들을 때려잡았다.
도망치던 굶주린 혼돈의 전사들도 그 서슬에 멈춰 설 정도였다.
“…이, 이거….”
광활한 평원 위에 물이 차오르는 걸 본 팔렌스와 랭커들은 겁에 질렸다.
워낙 황당해서 랭커들은 팔렌스에게 화를 낼 정신도 없었다.
지금 같은 상황에 어떻게 대처해야 할지 그들도 알 수 없었던 것이다.
튀어야 하나?
아니면 뭘 어떻게든 수습해야 하나?
“우… 우리 잘못이 아니잖아! 침입자가 들어와서 터뜨린 건데…!”
“그거 제대로 본 거 맞아? 진짜 김태현이 들어왔다고?”
“김태현이었다니까!”
“그게 말이 돼? 김태현이 뭔 재주로 저 저수지의 물을 터뜨리는데?”
“무슨 짓이든 했겠지! 그러면 멀쩡한 저수지 물이 왜 저러겠냐!”
“관리 잘못해서 아닌가?”
“아까 거인들이 물의 신이 분노해서라고 하던데….”
랭커들은 우왕좌왕하며 고민에 잠겼다.
튀는 것도 찜찜하고, 그렇다고 남아 있는 것도 찜찜하고….
-아키서스의 음모다! 도망치지 말고 버텨라!!
“!”
그때 고대 거인 구룩가의 외침이 랭커들의 귀에 들려왔다.
-군단장! 우두머리! 부족장! 다 내 명령에 복종해라! 이건 아키서스의 음모다! 버티기만 하면 이 물은 곧 사라질 것이다!
“아키서스의 음모라잖아!”
“진짜 김태현이었나??”
“아니…. 아무리 그래도 그렇지….”
랭커들은 혼란스러워하면서도 일단 안심했다.
굶주린 혼돈의 군단에 <이 모험가들을 죽이시오> 같은 명령이 내려올 줄 알고 걱정했던 것이다.
그런 상황이 아니라면 도망칠 필요가 없었다.
“김태현을 쫓아볼까?”
“지금 이 난리에서? 오크로 변장하고 숨어 있으면 죽어도 못 찾겠다.”
“그래. 그냥 버티고 있다가 혼란 좀 마무리되면 다시 공격하자고. 괜히 이상한 짓 하지 말고. 정공법이 제일이야.”
랭커들의 구박에 팔렌스는 발끈했지만, 지금 상황이 상황이라 할 말이 없었다.
“…잠깐.”
“뭘 또 잠깐이야. 팔렌스. 넌 계획 내지 마라. 너 때문에 이 난리가 났는데.”
“…듣기나 해! 물이 더 차오르지 않았냐?”
“아직 저수지 안의 물이 남았나 보지.”
“…….”
팔렌스는 불안한 표정으로 기다렸다.
그러나 물이 차오르는 속도는 멈추지 않았다.
“…!!”
* * *
“아니. <아키서스의 해일> 생각보다 별로잖아?”
태현은 불평했다.
기세 좋게 물기둥을 솟구치게 하고 한 번 파도를 치게 한 건 좋았는데, 생각보다 그 효과가 밋밋했던 것이다.
모여 있던 적들이 우왕좌왕하면서 흩어질 줄 알았는데 별 피해도 없이 다시 뭉쳤다.
이대로라면 그냥 물장구 좀 치고 끝 아닌가.
옆에서 구시렉이 자신도 모르게 변명했다.
-상황과 장소에 따라 그 위력이 달라질 수도 있는 것 아니겠나? 게다가 주변이 바다도 아니고….
“실망이군. 노래는 그렇게 웅장했는데.”
-다른 곳에서 다시 쓰면 좀 더 강한 효과가 나올지도 모른다.
애써서 변명하던 구시렉은 멈칫했다.
그런데 내가 왜 아키서스의 권능을 변명해 주고 있냐?
[연주된 <아키서스의 해일>이 저수지의 물을 다시 차오르게 만듭니다.]
“?!”
촤아아아아악!
어마어마한 소리와 함께 저수지에서 다시 한번 물이 솟구치더니 파도가 치기 시작했다.
또다시 주변을 휘몰아치는 물의 장벽!
“오… 그래도 한 번 하고 끝은 아니군.”
태현은 살짝 풀린 목소리로 말했다.
하긴 한 번 때리고 끝이면 천재지변치고는 너무 조촐하지 않은가.
태현 옆에 있던 구시렉은 갑자기 불길한 표정을 지었다.
-…잠깐만.
“왜 그러지?”
-내 기억이 맞으면 아키서스의 해일은 적들을… 완전히 물속에 가라앉혀서 익사시켰다고 들었는데.
“그렇군. 가사 좋은데?”
-그게 아니라! 그러면 계속 물이 나오는 거 아니냐?
“그게 말이 되나? 몇 번 치면 끝이겠지.”
[연주된 <아키서스의 해일>이 저수지의 물을 다시 차오르게 만듭니다.]
[파도가…]
[<아키서스의 천재지변> 퀘스트가 갱신됩니다!]
[아키서스가 당신을 돕습니다!]
“…….”
-…….
태현과 구시렉은 슬슬 불길해지기 시작했다.
“가사 좀 다시 들려주겠나?”
-그게 그러니까….
[굶주린 혼돈의 군단이 당신들을 발견합니다!]
-저기! 저기 아키서스 놈이다! 구룩가의 말이 맞았다!
-정말 아키서스 놈의 음모였다!
저수지 물기둥 위에서 파도타기를 하며 상황을 지켜보고 있던 태현을 드디어 적들이 발견한 모양이었다.
굶주린 혼돈의 전사들은 나팔을 불며 살벌하게 달려왔다.
‘물이 넘쳐나는 덕분에 싸우기는 편하겠군.’
태현은 검을 뽑고 기다렸다.
적들이 태현이 있는 위치까지 올라오려면 거센 물살을 헤치면서 올라와야 하는 만큼 훨씬 싸우기 편했던 것이다.
오는 순간 바로 공….
[연주된 <아키서스의 해일>이 저수지의 물을 다시 차오르게 만듭니다.]
[아키서스가 당신을 돕습니다!]
촤아아아아악!
다시 한번 물기둥 속에서 파도가 솟구치더니 달려드는 굶주린 혼돈의 전사들을 날려 버렸다.
멀리서 발을 담근 정도가 아닌, 솟구친 파도를 그대로 맞은 굶주린 혼돈의 전사들은 흔적도 찾기 힘들 정도로 멀리 사라져 버렸다.
-저기 아키서스 놈이 있다! 모두 이쪽으로 와라!
-여기 아키서스… 어푸어푸!
나팔 소리 때문에 계속 굶주린 혼돈의 전사들이 몰려왔지만 그 결과는 똑같았다.
다시 쓸려나가고 쓸려나가고 또 쓸려나갔다.
그리고 그러는 사이 평원에 점점 물이 차오르기 시작했다.
오크들 가슴팍까지 물이 차오르고 야수들이 둥둥 떠서 헤엄치기 시작하자 구시렉은 조심스럽게 물었다.
-이제 위력이 있다는 걸 알았으니 슬슬 멈추면 안 되나?
“…….”
태현은 구시렉의 말에 침묵했다.
왜냐하면….
태현도 이 해일을 멈추는 방법은 몰랐던 것이다.
<아키서스의 해일> 노래로 인한 버프는 아까 끝났고, 지금 이 저수지의 물난리는 그냥 자기가 알아서 계속되고 있었다.
‘아키서스가 당신을 돕는다는 건 왜 자꾸 반복되는 거야?’
[카르바노그가 아키서스가 남겨놓은 힘이 위기 앞에 나타나 도와주고 있는 것 같다고 말합니다.]
자신이 믿는 신이 남겨 놓은 안배가, 위험 앞에 나타나서 도와주는 건 뭉클한 경험이긴 했다.
이제까지 딱히 별거 안 해주다가 물난리 일으킬 때 나타나서 계속 물 리필해 주는 건 좀 다르긴 했지만….
‘카르바노그. 멈출 방법 모르지?’
[카르바노그가 못 들은 척합니다.]
‘어쩔 수 없군.’
태현은 구시렉에게 진실을 말하려다가 멈칫했다.
생각해보니 악마 공작 놈들한테 약한 모습을 보이는 게 맞는 일일까?
‘아니. 내가 실수할 뻔했군.’
악마 공작 앞에서는 언제나 엄하고 강한 모습을 보여줘야 했다.
당장 방금 구시렉도 태현이 강하게 나서지 않았다면 숨겨 놓은 옛 노래를 꺼내놓지 않았을 터!
“구시렉. 감히 나한테 멈추라고 말하다니!”
-아. 아니… 왜 화를 내는 거냐? 그게 그렇게 나쁜 말이었나?
“나는 이 해일을 멈추지 않는다! 여기 있는 모든 적들이 잠겨서 사라질 때까지 해일은 계속될 것이다!”
-그… 그래. 알겠다.
구시렉은 태현이 화를 내자 고개를 끄덕이며 물러섰다.
[음악공 구시렉의 공포가 올라갑니다!]
[악명이…]
[……]
[……]
‘무시무시한 아키서스 놈…!’
구시렉은 속으로 혀를 내둘렀다.
여기가 마계라면 모를까 심지어 대륙 아닌가.
이런 어마어마한 해일을 일으키면서 멈출 생각이 없다니!
역시 아키서스란 이름이 괜히 붙은 게 아니었다.
[카르바노그가 기습을 조심하라고 말합니다.]
‘알고 있어. 카르바노그.’
태현은 구시렉과 대화를 나누면서 싸울 준비를 했다.
이렇게 물장난을 쳐놨으니, 단단히 열이 받은 적들이 해일을 뚫고 달려올 것이다.
어디 한번 와볼 테면 와봐라!
“…….”
-…….
긴 침묵.
어느새 평원의 흙이 보이지 않을 정도로 차오른 물밑에서는 어떤 적들도 공격해 오지 않았다.
‘…왜 안 오지?’
[레벨 업 하셨습니다!]
[레벨…]