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 나는 될놈이다 1646화
‘아. 아닌가?’
[카르바노그가 근처에 강이나 거대한 지하수 같은 수원(水原)이 있지 않겠냐고 말합니다.]
‘오… 확실히 그럴듯하군.’
[…카르바노그가 당연히 이렇게 생각을 해야지 피로 해일을 일으키는 생각은 대체 어떻게 한 거냐고 묻습니다.]
‘하긴.’
태현은 살짝 반성했다.
아키서스 교단에서 오래 활동하다 보니 사람이 지나치게 폭력적이 된 것 같았다.
[카르바노그가 원래 그랬…]
‘흠. 해일이라.’
카르바노그의 말은 무시하고, 태현은 생각에 잠겼다.
지금 태현이 해일을 일으킬 수가 있나?
‘어렵군. 차라리 다른 천재지변은 어떻게 될지도 모르겠는데.’
[카르바노그가 그게 정말이냐고 묻습니다.]
카르바노그는 깜짝 놀랐다.
아키서스의 천재지변들은 하나같이 ‘저걸 대체 어떻게 했어?’ 싶은 것들이었다.
<아키서스의 산맥을 무너뜨리는 지진>이나 <아키서스의 근원 역병> 같은 것들을 할 방법이 있다고?
‘지진 같은 건 산맥 밑에 닥치는 대로 폭탄을 넣은 다음 터뜨리면 되고, 근원 역병 같은 경우는 폭탄에 역병을 넣은 다음 닥치는 대로 터뜨리면 어떻게든 되지 않을까?’
[카르바노그가 왜 모든 방법이 폭탄이냐고 묻습니다.]
하지만 지금 불러내야 하는 것은 해일.
온갖 스킬들을 익히고 있는 태현이었지만 해일은 만만치 않았다.
‘비전 마법 스킬 중에 있을 수도 있겠지만 내가 지금 익히는 건 무리일 테고, 역시 내 마법 스킬은 너무 종류가 적어. 언령으로 해야 하나? 언령은 아무리 해도 해일까지는 못 만들 것 같은데.’
고민하던 태현에게 에슬라가 다가왔다.
한바탕 싸움을 끝냈는지 온통 피투성이였다.
-아키서스. 적들의 공격이 거세지고 있다. 요새를 지키고 있는 모험가들은 약해지고 있고. 구시렉을 처치하려면 지금이 괜찮을지도 모르겠군.
“에슬라. 해일을 일으킬 방법이 필요한데, 조언할 게 있나?”
태현은 에슬라의 말은 무시하고 자기 할 말만 했다.
에슬라는 태현의 질문에 골똘히 고민하더니 대답했다.
-적이 쏟은 피로 해일을 일으키기에는 너무 양이 부족하지 않나?
“…물이 있다는 가정하에.”
태현은 에슬라가 자신과 똑같은 생각을 하는 걸 보고 반성했다.
-없지는 않다.
“!”
태현은 깜짝 놀랐다. 그리고 카르바노그도 놀랐다.
[카르바노그도 놀랍니다!]
설마 정말로 쓸 만한 대답이 돌아올 줄은 몰랐던 것이다.
역시 마계 공작들 중에서도 미친놈으로 손꼽히는 에슬라답게 범상치 않은 능력을 갖고 있었다.
“뭐지? 그런 권능을 갖고 있었나?”
-아니. 내가 갖고 있는 권능이 아니다. 구시렉이 갖고 있는 권능이지.
“…….”
[……]
태현과 카르바노그는 동시에 정색했다.
에슬라의 말이 영 수상쩍게 들렸던 것이다.
“에슬라. 아무리 구시렉을 담그고 싶어도 그렇지 그런 거짓말을 하지 마라. 지금 상황이 안 보이나?”
-…아키서스. 거짓말이 아니다.
에슬라는 황당해했다.
아무리 그래도 구시렉이 악마 공작인데 너무 무시하는 것 아닌가?
* * *
‘음. 확실히 맞는 말이야. 구시렉도 악마 공작이었지.’
에슬라의 설명을 듣고 난 태현은 고개를 끄덕이며 납득했다.
구시렉이 근접 전투에 능숙하지 못한 탓에 이런저런 추한 모습들을 많이 보여주긴 했지만, 사실 구시렉도 엄연히 악마 공작이었던 것이다.
<음악공의 노래-아키서스 권능 스킬 퀘스트>
음악공 구시렉이 마계의 잊혀진 옛 노래들을 수집해서 확보하고 있다는 건 공공연한 사실이다.
광기공 에슬라의 증언에 따르면, 그 노래들 중에 아키서스의 해일을 묘사한 노래가 있다고 한다.
그 노래를 듣고 진위를 확인해라!
그렇게 한다면 아키서스의 천재지변에 한 걸음 더 가까이 다가갈 수 있으리라.
보상: ?, ???, ????
‘저번에 아키서스 관련된 노래를 연주한 것도 그렇고 은근히 알고 있는 게 많단 말이지.’
일종의 노래주머니 같은 악마 공작이 바로 구시렉이었다.
[카르바노그가 어떻게 설득할 거냐고 묻습니다.]
카르바노그는 구시렉이 설득 가능한지 의문이었다.
하물며 지금처럼 사방에서 공격이 진행되고 있는 급박한 상황에서는 오래 걸리는 설득은 불가능할 텐데….
‘최선을 다해봐야지.’
쾅!
성벽 위에서 달려오는 오크들을 음악으로 쓸어버리던 구시렉은 갑자기 나타난 태현의 모습에 고개를 돌렸다.
-뭐냐, 아키서스? 이쪽 성벽은 아직 멀쩡할 텐데.
“구시렉. 에슬라와 기계 에다오르에게 죽든지, 아니면 알고 있는 노래를 털어놓든지. 둘 중 하나를 선택해라!”
-…….
구시렉은 경악했다.
[카르바노그도 경악합니다!]
카르바노그도 경악했다.
어떻게 설득하나 궁금하긴 했었지만 이렇게 당당하게 협박할 줄은 몰랐던 것이다.
진짜 막 나가는구나!
-지… 지금 뭐라고 한 거냐? 앞에 적들이 있는데? 내분을 일으켜도 무사할 것 같나!?
“아. 시끄럽고. 노래 내놔라!”
[최고급 화술 스킬을 갖고 있습니다!]
[명성이 높습니다!]
[……]
[……]
[마계 대회의…]
[……]
[협박이 성공합니다!]
유성 게임단 선수들은 웅성거리며 태현이 하는 모습을 쳐다보았다.
악마 공작 상대로 당당히 다가와서 ‘야! 노래 안 내놓으면 죽여 버린다!’라고 삥을 뜯는 모습이 너무나도 믿기지 않았던 것이다.
저게….
저게 통하나??
‘아무리 생각해도 무리수 아닌가요?’
‘나도 그런 거 같은데.’
선수들은 걱정스러운 표정이었다.
아무리 태현이라지만 이번은 좀 너무 과감했던 것 아닌가 싶은 것이다.
지금 당장 성벽 아래에서 적들이 몰려오고 있었는데 악마 공작이 고분고분히 넘어갈까?
-…노래를 내놓으면 되는 것 아니냐…!
구시렉은 촉촉하게 젖은 목소리로 대답했다.
여러 악마 공작들이 사라진 지금, 구시렉 혼자서 버티기에는 상황이 너무 좋지 않았다.
모스락처럼 먹히거나, 푸르네우스처럼 봉인되거나, 에다오르처럼 기계 악마 공작이 되거나, 에슬라한테 죽거나.
모두 다 끔찍한 결말이었다.
구시렉이 굴복할 수밖에 없는 상황인 것이다.
“고맙다. 구시렉. 네 목숨은 넘어가도록 하지.”
-약속은… 지켜라!
[음악공 구시렉의 친밀도가 떨어집니다!]
[악명이…]
“걱정하지 마라. 구시렉. 내가 누구냐? 아키서스 교단의 수장 아니냐? 그런 내가 거짓말이라도 할 것 같냐?”
-당연히 하… 지 않을 것 같다. 믿는다.
구시렉은 원래 하려던 말을 삼켰다.
주먹은 가깝고 마계는 먼 이상 조심해야 할 필요성이 있었던 것이다.
언제나 당당한 악마 공작이 축 늘어진 어깨로 시무룩하게 고개를 끄덕이는 모습은 매우 희귀한 광경이었다.
다른 선수들은 충격받은 얼굴로 속삭였다.
“지금 악마 공작이 삥 뜯긴 거 맞죠?”
“그, 그렇군.”
유성 게임단 선수들은 지금 이걸 생중계하지 못한 게 매우 아쉬워졌다.
이걸 그들만 보다니.
나중에 어디 가서 말하면 누가 믿어줄까?
* * *
무식한 사람이 신념을 가지면 무서울 때가 있었다.
바로 팔렌스가 그랬다.
“자. 잘 들어봐. 저기 상류에 있는 강에서 여기까지 땅을 파서 물을 끌어온 다음, 둑을 쌓아서 잘 비축한 다음에 터뜨려서 저 요새를 공격하는 거야.”
“…물양이 부족하지 않나?”
“그래서 지하를 파서 지하수도 끌어와야지.”
랭커들은 ‘그걸 누가 다 하냐’라고 말하려다가 말았다.
그들이 하지 누가 하겠는가.
“그래도 물양이 부족할 거 같은데.”
“너희가 아직 모르고 있는 게 있구나.”
“?”
팔렌스가 거들먹거리며 설명에 나섰다.
“수공의 장점은 꼭 물로 한 번에 쓸어버리지 않더라도 적들에게 타격을 줄 수 있다는 점이지. 저 요새가 물에 잠기면 온갖 페널티가 들어가지 않겠어?”
도시가 물에 잠기면 식량이 줄어들고 불만도가 올라가고 심하면 역병까지 도는 것처럼, 요새라고 다를 것 없었다.
“근데 저 요새는 언데드 요새잖아? 물 좀 잠긴다고 페널티가 생기나?”
“…….”
팔렌스는 말문이 막혔다.
“물양만 충분하면 상관없지.”
‘이 자식 점점 불안해지는데.’
“자자! 빨리 땅을 파라!”
-미친 모험가 놈 때문에 우리가 고생한다.
-모험가 놈 죽이고 싶다.
[오크들의 친밀도가…]
[평판이…]
[……]
[……]
이런 대공사가 플레이어들만으로 굴러갈 리 없었다.
팔렌스는 결국 굶주린 혼돈의 군단 중 쓸만한 일꾼들을 추려내서 강제로 일을 시키기 시작했다.
평판이나 친밀도가 뚝뚝 떨어졌지만 어쩔 수 없었다.
[<요새 공략을 위한 저수지>가 완성됩니다!]
[건축 스킬이…]
[……]
[……]
그래도 숫자가 깡패라 작업 속도 자체는 빨랐다.
찰랑거리며 고인 물의 양을 보자 불평하던 랭커들도 입을 다물었다.
이 정도면 뭔가….
될 것 같기도 하고…?
-모험가 놈 지휘 머저리 같이 한다. 저거 만들어봤자 못 쓸 것 같다.
-다른 군단장이 직접 지휘를 해야 한다.
“시끄러운 오크 놈들! 저리 꺼져라! 내가 뭔가 보여주고 나서 후회하지나 마라!”
-머저리 모험가 놈 같으니라구.
-누가 저 모험가 놈에게 지휘권을 준 건가? 대전사가 줬나?
-대전사는 이래서 문제다. 지휘권은 대다수의 오크 전사 계급에게서 위임받는 거지 대전사가 멋대로 검 하나 준다고 되는 게 아닌데.
팔렌스는 오크들을 공격하고 싶은 마음을 참고 저수지를 향해 시선을 돌렸다.
이제 곧 저수지의 수문이 열리고 저 아래 쪽 요새를 향해 거대한 물살이 들이닥치리라.
촤아아아아아악!
저수지에 쌓인 물이 위로 솟구쳐 오르기 시작했다.
그 웅장한 광경에 랭커들은 감탄했다.
“제법인데?”
“그 고생을 한 보람이 있네.”
“…?”
팔렌스는 주변을 둘러보았다.
누가 뭘 열었거나 마법을 썼나 했는데 그런 게 보이지 않았다.
“너가 마법 썼냐?”
“뭔 소리야?”
“아니면 네가 썼냐?”
“??”
그 답은 곧바로 나왔다.
솟구치는 물기둥 위에 익숙한 사람의 모습이 보였던 것이다.
* * *
-노래에 따르면 아키서스는 바다 밑에서 거대한 폭발을 일으켜 해일을 만들고 바람을 불러와 해일을 조종했다고 한다.
“지금 내가 협박했다고 거짓말하는 거냐?”
[카르바노그가 뭔 말도 안 되는 소리를 하고 있냐고 합니다.]
-…정말이다!
구시렉은 분노했다.
이 아키서스 놈은 협박을 했으면 말을 듣기라도 해야지, 협박을 한 주제에 의심을 하면 어쩌자는 말인가.
“그러니까 지금 적 기지에 침입해서 밑에 폭탄을 심고… 일반 폭탄은 안 되겠지. 저 많은 물을 띄울 수 있을 정도의 폭탄을 심고, 폭발시키고, 바람을 불러와서 해일을 조종하라고? 못 믿겠군. 노래 불러봐라. 직접 들어야겠다.”
[카르바노그도 동의합니다.]
태현의 구박에 구시렉은 결국 옛 노래를 꺼냈다.
아키서스에 관한 노래를 연주하는 건 어지간하면 재수 없어서 피하고 싶었지만, 어쩌겠는가.
일단 살고 봐야지!
[<아키서스의 해일>이 연주됩니다!]
[강력한 권능으로 폭발을 일으켜 해일을 만들어 낸 아키서스에 관한 이 노래가 아키서스의 화신인 당신에게 힘을 부여합니다.]
[일시적으로 <수중 폭발>을 사용할 수 있습니다.]
[<파도 조종>을…]
[지혜 스탯이…]
[……]
[……]
[해일을 일으키십시오!]
“…가까운 강으로 움직인다!!”
태현은 바로 일어섰다.
설마 구시렉의 노래를 듣자마자 이렇게 갑자기 버프가 들어올 줄은 몰랐던 것이다.
버프가 얼마나 갈지는 알 수 없었지만 무조건 쓰고 봐야 한다!
-신의 예지!
태현은 권능 스킬을 켜고 재빨리 내달렸다.
요새 밖에는 굶주린 혼돈의 하수인들로 가득했지만, 은신하고 따돌리는 것 정도는 별일 아니었다.
다행히 멀지 않은 곳에 거대한 호수 같은 게 보였다.
태현은 주변에 있는 놈도 확인하지 않고 스킬부터 썼다. 그만큼 급했던 것이다.
-수중 폭발!
[<수중 폭발>을 사용하셨습니다!]
[물기둥이…]
[……]
[……]
물기둥을 솟구치게 만들고 나서야 태현은 주변을 확인할 여유가 생겼다.
다행히 적들이 호수 근처에 우글거리고 있었다.
-파도 조종!
명령에 따라 저수지 안의 물이 거대한 해일로 변해서 천천히 움직이기 시작했다.
그리고 자리에 있는 어느 누구도 그 파괴력을 아직 짐작하지 못하고 있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