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 나는 될놈이다 1645화
랭커들은 팔렌스의 눈치를 보며 목소리를 낮췄다.
하지만 막막해진 건 사실이었다.
지금 요새 함락도 중요했지만 더 중요한 건 랭커들이 공적치 포인트를 쌓는 일 아닌가.
그런데 믿었던 팔렌스 놈이 삽질만 연속으로 해대고, 그 와중에 정신 차리지 못하고 김태현하고 승부를 보겠다고 하니 더 걱정이 될 수밖에 없었다.
‘그냥 이 자식 손절하고 내 퀘스트를 해야 하나?’
‘공성전 버리는 건 아까운데….’
랭커들이 그렇게 꿍꿍이를 품고 있는 사이 팔렌스는 다음 계획을 완성시켰다.
“좋아. 이번 건 확실하다.”
“과연 그럴까? 팔렌스? 확실해?”
“다시 한번 생각해 보는 건 어때?”
“지금 너무 성급하게 시도하는 건 아닐까?”
“…….”
동료란 새끼들이 참 기운 넘치는 응원을 하자 팔렌스는 울컥했다.
하지만 지금은 저런 놈들이라도 필요했다.
[계속된 실패로 인해 오크들이 당신을 믿지 않습니다!]
[계속된 실패로 인해…]
[……]
[……]
몇 번 실패했더니 굶주린 혼돈 쪽 NPC들이 명령을 거부하기 시작한 것이다.
-네놈의 지휘를 들을 바에는 저기 꿀꿀거리는 돼지 놈 지휘를 듣겠다!
-고블린 놈들보다도 지휘를 못하는 얼간이 놈! 저리 꺼지지 못해!
“…잘 들어봐라. 우리가 실패했던 건 이 북쪽 구역에 김태현이 있다는 걸 몰랐기 때문이야. 하지만 지금은 그걸 알고 있지.”
“그런가?”
“알았어도 달라졌을 것 같지는 않은데?”
“닥치고 들어. 이번 계획은 김태현이 알고서도 막을 수 없는 계획이다. 바로 물로 공격할 거니까.”
“!”
수공!
거대한 물줄기를 요새 쪽으로 돌려서 지독한 독으로 가득 찬 구덩이를 메꿔버리고 성벽을 무너뜨리려는 과감한 전법이었다.
물의 힘은 그만큼 어마어마한 것이다.
…물론 물이 있어야 하지만.
“근데 물이 없지 않나?”
“강에서 끌어와야지.”
“…강이 멀리 떨어져 있지 않나?”
“그러니까 잘 끌어와야지.”
“…….”
“…….”
랭커들은 시선을 교환했다.
‘아무래도 정신이 나간 거 같지?’
‘그래. 몇 번 실패하더니 맛이 간 거 같다. 그냥 버리자.’
근처에 있는 강이면 모를까 한참 떨어져 있는 강 상류에서 물을 끌어다가 공격하겠다니.
미친놈이나 할 발상이었다.
“…명령이다!!”
[굶주린 혼돈의 군단 소속, 팔렌스가 명령을 내립니다!]
[명령을 거절할 경우 군단 내에서 평판이 크게 떨어집니다!]
[……]
[……]
“아니 이런 미친놈이?!”
“야! 뭐하는 거야!”
다른 랭커들은 팔렌스의 행동에 기겁했다.
말로 잘 해도 모자랄 상황에 명령이라니.
거절할 경우 페널티 받으란 소리 아닌가.
“성공하게 되면 네놈들도 고마워할 거다.”
“…죽여 버릴까 진짜!”
“참아! 여기서 싸우면 망한다고!!”
* * *
“괜찮으십니까!?”
유성 게임단 선수 몇 명이 태현이 있는 쪽을 향해 달려왔다.
지금 사방에서 공격이 날아오고 있어서 모두가 정신이 없었지만, 그래도 태현 쪽에 있었던 일을 듣고 아무런 지원도 하지 않을 수는 없었다.
“괜찮아. 잘 막고 있다.”
태현은 별로 당황하지 않았다.
물론 상대방이 이것저것 시도를 해오긴 했지만, 그 시도가 너무 속 보이는 시도들이었던 것이다.
“대단하십니다!”
“역시 김태현 선수는 다른 분들과 차원이 다르십니다.”
유성 게임단에 새로 들어온 신인 선수들은 존경 가득한 눈빛으로 태현을 쳐다보았다.
안 그래도 평소부터 존경해 왔었는데 이렇게 보게 되자 더욱더 눈부셨다.
“저희가 뭐라도 도와드리고 싶습니다!”
“뭐든지 시켜만 주세요!”
“어….”
태현은 머뭇거렸다.
‘잘 할 수 있을지 걱정이군.’
혼자서 막을 때는 별걱정이 없었지만, 처음 보는 파릇파릇한 선수들과 같이 손발을 맞춰야 한다니 역으로 걱정이 됐다.
그냥 토끼 수인족들 데리고 막으면 안 되나?
‘토끼 수인족들만 있어도 충분히 든든한데.’
하지만 신인 선수들의 눈빛은 매우 초롱초롱하고 간절했다.
게다가 앞으로 적들이 북쪽으로 더 몰려올 경우, 도와주는 사람이 더 필요한 것도 사실이었다.
‘확실히 앞일이 어떻게 될지 모르긴 하지.’
[카르바노그가 화신이 적들의 원한을 좀 많이 사지 않았을까 추측해봅니다.]
‘고맙다. 카르바노그.’
카르바노그 말대로 태현이 어그로를 끈 만큼 북쪽으로 더 올 가능성도 충분했다.
“좋아. 그러면 간단하게 손발을 맞춰보자고.”
“예!!”
태현은 기본적인 파티 플레이가 가능하도록 손발을 맞춰 볼 생각이었다.
서로 빠르게 신호를 보내고 동작이 잘 맞아떨어져야 급한 상황을 이겨낼 수 있었으니까.
“자. 내가 싸우다가 왼손을 들고 이렇게 손짓하면….”
“그쪽 방향이 뚫렸으니까 가서 탱킹하라는 뜻입니까?”
“…?!”
태현은 놀랐다.
어?
“그러면 내가 이런 식으로 손짓하면….”
“일단 후퇴한 다음에 뒤에서 다시 모여라?”
“…….”
태현은 조금 더 놀랐다.
“이걸 어떻게 알지?”
“보통 파티 플레이 할 때 이런 신호들 쓰지 않나요?”
“저도 인터넷에서 보고 배웠습니다만?”
“…….”
태현은 감탄했다.
예전 파티는 각자 신호 보내는 방법도 달라서 서로 익히는 것도 오래 걸렸는데 요즘은 다 이렇게 같은 신호를 쓰나?
‘케인 놈 신호 매번 헷갈리던데 본받으라고 하고 싶군.’
흐뭇해하던 태현은 뭔가 이상함을 느꼈다.
“…응? 잠깐. 나하고 같은 식으로 신호 보내는 파티가 있나? 겹친 건가?”
“아. 아뇨. 김태현 선수가 신호 보내는 영상 보고 배웠다는 건데요.”
“다들 그 영상 보고 신호 많이 배웠을걸요.”
“…!!”
어쩐지 익숙하다 했더니, 태현이 공략하는 걸 보고 따라 배운 것이었다.
어떻게 보면 당연한 일이었다.
판온에 대해서 누군가를 보고 배울 때 가장 유명한 랭커를 보고 배우는 건 당연하지 않은가.
‘편하긴 한데 좀 민망하군.’
태현은 살짝 민망함을 느꼈다.
그게 뭐 그리 대단하다고….
“그런데 김태현 선수. 한 가지 여쭤봐도 되겠습니까?”
“뭐지?”
“이 손 동작은 뭔가요? 리플 보면 다 의견이 갈려서….”
“아. 맞아. 나도 그거 궁금했어.”
“제 생각에는 아껴둔 스킬을 쓰라는 신호 같은데, 맞나요?”
“아니야. 신중하라는 신호 같아. 그거 보내고 나서 신중하게 움직이더라.”
“아니… 근데 내가 본 부분에서는 이 신호를 받더니 아껴둔 스킬을 꺼냈다고.”
“…….”
태현은 할 말을 잃었다.
저 손 동작은 케인이 실수해서 구박할 때 하는 손동작이었던 것이다.
“그건 비밀이다.”
“헉!”
‘뭔가 대단한 건가 보다!’
‘남들이 알면 안 되는 스킬을 쓰는 신호인가?’
* * *
유성 게임단의 선수들은 다들 탄탄한 실력을 갖고 있었다.
덕분에 북쪽 요새 벽 방어는 더욱 수월해졌다.
“7번 뚫렸다!”
“막았습니다!”
“잘 했다! 저주 날아온다! 뒤로 피해!”
“피했습니다!”
“잘 했다!”
[오크 부족들이 물러납니다!]
공성전은 계속 싸움만 하지 않았다. 도중에 서로 물러나면서 휴식을 취하는 순간도 있었다.
잠시 상대가 빈틈을 드러내자, 태현은 재빨리 이세연 쪽으로 향했다.
‘의식이 얼마나 진행됐지?’
“의식은?”
“절반 정도! 그쪽은 괜찮겠어? 공격이 많이 들어오고 있다고 하는데?”
“할 수 있는 데까지 해봐야지. 상대방이 자꾸 속임수를 쓰는데, 너무 얕아서 좀 의심스러워.”
태현의 말에 이세연이 시선을 집중하던 마법진에서 눈을 떼고 천천히 고개를 돌렸다.
“얕은 속임수를 쓴다고? 그러면 확실히 의심스러운데.”
“그렇지?”
태현이나 이세연이나 남들 의심하는 것만 치면 판온에서 손꼽히는 사람들이었다.
상대방이 자꾸 멍청한 짓을 하면 ‘저놈은 왜 저렇게 멍청할까? 사실 뭔가 숨기고 있는 게 아닐까?’ 하는 의심을 하는 두 사람!
“만약을 대비해서 북쪽에 지원을 더 남겨놓을게.”
“그래도 되나?”
“응. 데리고 온 전력 때문에 다들 고마워하고 있어.”
이세연의 말은 진심이었다.
언데드들만 있었다면 위기가 몇 번은 찾아왔을 것이다.
그러나 태현이 끌고 온 악마 공작들은 전투력 하나만큼은 확실했다. 유성 게임단 선수들이 ‘저희도 저 악마 어떻게 하나만 분양받을 수 없나요?’라고 할 정도였다.
* * *
-아키서스! 만세! 아키서스! 만세!
“…….”
“저, 저거…?”
서쪽에서 싸우고 있던 쑤닝과 길드 동맹 간부들은 지원을 온 기계 에다오르의 모습에 경악했다.
김태현이 악마 공작들과 손을 잡았다는 건 알았지만 저렇게 기괴하고 무시무시한 놈은 또 처음이었다.
-처분! 처분! 처분!
위잉거리는 소리와 함께 기계 에다오르 주변에 있던 적들이 그대로 박살이 났다.
그렇게 강한 오크 전사들도 한 합을 버티지 못할 정도로!
“도대체 김태현 놈은 저런 악마를 어디서 구한 거지?”
“그보다 저 악마 놈은 대체 정체가 뭐야? 설마 악마 공작인가?”
“대검공 에다오르란 말이 있던데.”
간부들은 정신없이 싸우던 도중에도 수군거렸다.
그만큼 기계 에다오르가 충격적이었던 것이다.
그러나 제카스는 부정적이었다.
“그건 헛소문이다.”
“그래?”
“너희 같은 놈들도 그런 헛소문을 믿다니 어이가 없군. 쑤닝, 설마 너도 그런 헛소문을 믿는 건 아니겠지?”
“…….”
쑤닝은 찔렸지만 가만히 있었다.
솔직히 쑤닝도 에다오르라고 생각했던 것이다.
“내 생각에 아마 그건 김태현이 퍼뜨린 헛소문일 가능성이 높다. 파워 워리어는 헛소문 퍼뜨리는 재주가 있고, 김태현 놈은 파워 워리어와 친하니까.”
“과연….”
“잘 생각해 봐라. 악마 공작을 저렇게 개조해서 부리는 게 말이 된다고 생각하나? 게다가 저런 이상한 갑옷까지 입고서?”
제카스의 말을 들으면 들을수록 간부들은 설득되는 기분이었다.
확실히 악마 공작이 저렇게 개조되어서 ‘아키서스 만세!’ 하면서 기계팔을 휘두르는 것보다는, 악마 공작을 닮은 악마 놈이 개조되었다는 게 더 그럴듯하게 들렸다.
“김태현 영악한 자식…!”
“그래. 김태현은 아마 진짜 악마 공작인 것처럼 소문을 흘려서 사람들을 겁먹게 만들려는 거겠지. 무서울 정도로 머리가 좋은 놈이다.”
간부들은 부르르 떨었다.
새삼스럽게 김태현의 수작에 치가 떨린 것이다.
이렇게까지 할 줄이야.
‘나중에 퀘스트를 다 깨고 힘을 회복해도 김태현 놈한테 복수를 할 수 있을까?’
‘진짜 복수한다고 하면 길드 탈퇴를 고민해야 하나….’
“오크 대전사 잡고 왔다!”
앨콧이 피를 뚝뚝 흘리면서 돌아왔다.
간부들은 앨콧에게 물었다.
“앨콧, 넌 저 악마가 에다오르라고 생각하냐?”
“어? 에다오르 아닌가?”
“후후. 멍청하긴. 잘 들어봐라. 저건 사실….”
“???”
* * *
<아키서스의 천재지변-아키서스 권능 스킬 퀘스트>
역사서에 따르면 아키서스는 거대한 해일을 일으켜 몰려오는 적들을 쓸어버렸다고 한다.
지금 당신 앞에 몰려드는 적들을 쓸어버리기 위해서는 아키서스가 일으킨 해일을 다시 한번 찾아내야 한다.
해일을 일으키고 아키서스의 천재지변에 한 걸음 더 가까이 다가가라!
보상: ?, ???, ????
“???”
태현은 눈을 의심했다.
‘드디어 아키서스가 정신이 나간 것인가?’
해일이면 최소한 바닷가에서 퀘스트가 나와야 하는데, 여기는 지금 물 한 방울 안 보이는 내륙 지방이었던 것이다.
‘설마….’
[카르바노그가 자신도 알 것 같다고 말합니다.]
‘적이 쏟은 피로 해일을 일으키는 건가? 너무 양이 적지 않나?’
[카르바노그가 끔찍한 발상에 비명을 지릅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