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 나는 될놈이다 1644화
“봐라. 지금 굶주린 혼돈의 세력은 무식하게 공격하고 있어.”
팔렌스는 손으로 앞을 가리키며 말했다.
사실, 무식하게 공격하느냐의 기준은 좀 애매하긴 했다.
전체 병력을 닥치고 돌진시켜서 성벽을 무너뜨리고 점령하면 그건 힘 있는 정공법이 됐다.
실패하면 무식한 공격이 됐고.
그런 면에서 굶주린 혼돈의 총공세는 아직 평가하기 이른 편이었다.
실제로 굶주린 혼돈의 공격은 안에 있는 사람들에게 타격을 주고 있었으니까.
-구덩이가 채워지고 있다! 나가서 막아야 해!
-내가 막고 올게!
-관둬! 너 HP 너무 많이 깎였어! 내가 가겠다!
-방벽이 파괴되고 있어! 포션 던져! 포션 먹고 회복해야 해!
-포기하고 물러서! 적들이 너무 많아!
사방에서 몰아치는 굶주린 혼돈의 군단은 아무리 강한 선수들이라 하더라도 압박감을 느낄 수밖에 없었던 것이다.
숨 쉴 틈도 주지 않고 계속해서 스탯과 아이템과 스킬들을 깎아 먹는 연속공격.
이게 바로 진정한 정공법이었다.
하지만 팔렌스가 보기에 이 공격은 무식해 보였다.
굳건한 수비에 돌진하는 굶주린 혼돈의 전사들은 계속 쓰러지기만 하고 있었으니까.
지금 언데드 요새 방벽 아래에 무수히 많은 시체들이 쌓여 있었다. 덕분에 이세연 휘하의 흑마법사들은 재빨리 다시 그 시체를 이용해 시간을 벌 수 있을 정도였다.
“무식한가?”
“그렇게 들으니까 무식한 거 같기도 한데.”
“내게 전략이 있다.”
“오오…!”
팔렌스는 새로 받은 부하들에게 명령했다.
“땅을 파기 시작해라!”
-??
-왜 땅을 파야 하지?
오크들과 거인들은 팔렌스를 멍청한 놈 보듯이 쳐다보았다.
적은 앞에 있는데 땅을 파라니.
혹시 좀 멍청한가?
[굶주린 혼돈 세력에서 평판이 떨….]
‘아니, 이런 개새들이!’
팔렌스는 울컥했다.
다른 건 몰라도 이번 건 지들이 멍청해서잖아!
“빨리 파!! 빨리 파라고!”
[전술 스킬이 낮습니다!]
[화술 스킬이 낮습니다!]
[페널티를 받습니다!]
[평판이….]
[친밀도가….]
오크들과 거인들은 투덜거리면서도 땅을 파기 시작했다.
-앞에 있는 놈들은 화끈하게 요새를 공격하고 있는데.
-우리는 웬 멍청이 만나서 땅이나 파고 있어야 하다니.
-참으로 슬프군.
“…….”
“야. 오크하고 거인들이 원래 저렇게 말을 잘했냐?”
다른 랭커들도 좀 놀랐는지 소곤거렸다.
[지하 땅굴 통로를 만들기 시작하합니다!]
[요새 밑으로 들어가는 통로가 진행되고 있습니다.]
[…….]
[…….]
그래도 오크와 거인들은 힘 하나는 확실했다. 순식간에 땅을 파고 들어가 통로를 만들어냈다.
“지하로 들어가려는 거구나!”
“그래. 지금 이렇게 정신없이 공격하고 있는데 설마 지하로 공격할 거라고는 예상하지 못하겠지.”
팔렌스는 자신만만하게 말했다.
이 위에서 벌어지는 무식한 공격이 팔렌스의 기발한 전략을 가려주는 연막이 될 것이다.
“계속해서 지하로 굴을 파! 완성되면 우리도 들어가자!”
* * *
팔렌스의 불행은, 태현이란 사람이 기본적으로 돌다리도 두드려 본 다음 케인 먼저 건너게 할 정도로 철저하다는 점이었다.
[기계공학 스킬이 매우 높습니다!]
[대장장이 기술 스킬이 매우 높습니다!]
[현재 지하 땅굴 통로가 만들어지고 있습니다!]
요새 성벽 위에서 싸우는 건 물론이고, 당연히 주변을 돌아다니면서 상대방이 뭔 개수작 부리나 안 부리나 보고 있는 태현의 입장에서 저런 수작을 발견하는 건 너무 쉬운 일이었다.
“놈들이 땅굴 판다.”
“예!?”
“됐어. 놀랄 거 없어. 내가 가서 막는다.”
지금 악마 공작들은 각자 위치에서 열심히 싸우고 있는 상황.
태현은 그냥 혼자 들어갔다.
팍팍팍팍팍!
‘아, 케인이 이런 거 삽질 정말 잘하는데.’
태현은 고대의 망치를 들고 빠르게 땅을 판 다음 상대방이 들어오는 방향으로 뚫고 들어갔다.
[현재 지하 땅굴 통로와 가까워지고 있습니다!]
-사디크의 화염 룬.
[사디크의 힘이 담긴 화염 룬 글자를 새깁니다!
[글자가 사라지기 전까지 룬 글자에서는 계속해서 사디크의 화염이 분출됩니다!]
-사디크의 화염 룬. 사디크의 화염 룬. 사디크의 화염 룬.
태현은 닥치는 대로 화염을 깔기 시작했다.
이제 상대 쪽에서 조금만 더 땅굴을 파고 들어오면 바로….
[지하 땅굴 통로가 연결됩니다!]
[화염이 분출됩니다!]
-크아아아아아악!
-화염이다!! 화염이다!! 도망쳐라!!
[좁은 통로로 인해 화염의 힘이 더욱 더 강해집니다!]
[치명타가 터집니다!]
“어디서 같잖은 수작을!”
-멍청한 지휘관 때문에 우리 죽는다!! 멍청한 지휘관 때문에!!
태현은 오크들과 거인들의 뒤를 쫓아가며 집요하게 공격을 날렸다.
[<화염 적중> 스킬로 인해 치명타가 터질 때마다 사디크의 화염 기운이 점점 더 누적됩니다!]
[<위대한 화염의 검술> 스킬이 발동됩니다!]
[첫 번째 공격, 멸염을 시전합니다! 화염이 휩씁니다!]
-크아아아아악!
* * *
[평판이 크게 떨어집니다!]
[전술 스킬이 낮습니다!]
[화술 스킬이 낮습니다!]
[지휘에 페널티를….]
[…….]
-크아악! 너 인간 모험가! 멍청하면 지휘하지 마라!!
-멍청하다, 멍청하다! 머리통을 투구 거는 용도로 쓰냐!!
간신히 살아서 도망쳐 나온 오크들과 거인들은 분노해서 방방 뛰었다.
좁은 땅굴에서 사디크의 화염이 브레스처럼 닥쳐오면 아무리 강한 전사라도 할 수 있는 게 없었다.
팔렌스는 간신히 오크들과 거인들을 달랬다.
“정말 미안하다. 저놈들이 치사하게 저런 수법을 쓸 줄은 몰랐지. 내가 잘못했다! 제발!”
-멍청한 지휘관! 멍청한 지휘관!
“야. 좀 도와줘.”
팔렌스를 따라온 다른 신진 랭커, 머리셋과 김정수는 ‘이 자식을 믿어도 되나’하는 고민하는 표정을 지었다.
지금 굶주린 혼돈 퀘스트를 많이 깨서 따라왔는데 하는 꼴이 영….
“지금 무슨 생각을 하고 있는 거야?! 설마 따로 놀겠다고?? 내가 그걸 가만히 내버려 둘 것 같아?”
“아… 아니. 그럴 리가.”
“우린 널 믿지.”
다른 랭커들은 팔렌스를 달랬다.
팔렌스가 진상짓을 시작하면 그들도 상당히 귀찮아지는 것이다.
“땅굴로 침입은 실패했지만, 상관없어.”
-뭐라??
“아, 아니. 끝까지 들어봐라. 오크들. 저렇게 만들어진 땅굴은 어디 밑에 있지? 언데드 방벽 밑에 있잖아. 저기서 폭탄을 터뜨리면?”
“오…!”
랭커들은 솔깃해했다.
땅굴 밑에서 폭발을 터뜨리는 계획은 땅굴로 침입하는 것보다 훨씬 더 그럴듯하게 느껴졌던 것이다.
* * *
[기계공학 스킬이 매우 높습니다!]
[대장장이 기술 스킬이 매우 높습니다!]
[현재 굶주린 혼돈의 대장장이들이 폭탄을 만들고 있습니다!]
“아니??”
태현은 깜짝 놀랐다.
상대방이 폭탄을 만드는 것보다, 상대방에 기계공학 대장장이들이 있다는 것에 더 놀란 것이다.
‘하긴 굶주린 혼돈이 온갖 놈들을 다 받아들이는데 기계공학 대장장이들도 받아들일 수야 있겠지….’
하지만 고블린 대장장이들이 오크들 사이를 돌아다니면서 폭탄을 만드는 모습을 보자 태현은 궁금해졌다.
골짜기의 기계공학 대장장이들도 최근에 와서야 오작동이 많이 줄어든 거였다.
고블린 놈들은 안 그래도 대충대충 빨리빨리 만드는 놈들인데 괜찮을….
쾅!!
-아악! 이 고블린 자식!! 죽여 버린다!
-어허! 발전을 위한 희생일 뿐!
‘음. 안 괜찮겠군.’
그래도 태현은 내려가서 폭탄을 방해해야겠다고 다짐했다. 만들어지는 거 내버려 둬서 좋을 건 없었으니까.
* * *
“구시렉! 네 도움이 필요하다.”
-꺼져라!
간신히 포위망을 뚫고 탈출한 구시렉은 단단히 토라져 있었다.
[카르바노그가 저거 어떻게 풀어줄 거냐고 묻습니다.]
‘걱정 마라.’
태현은 케인을 상대하면서 삐진 놈을 어떻게 설득해야 하는지 마스터한 상태였다.
“뭐? 꺼지라고? 실망이군. 구시렉. 널 믿었는데. 에슬라가 널 잡아먹고 싶어 할 때도 내가 손수 말려줬는데 꺼지라니… 됐다. 나도 너 필요 없다.”
오히려 강하게 나가야 했다.
[화술 스킬이 매우 높습니다!]
[마계 대회의….]
[…….]
[…….]
[…….]
-아… 아니. 잠깐. 아키서스.
“됐어. 꺼져.”
-잠깐만! 내 말을 들어봐라. 물론 네 도움을 완전히 부정하는 건 아니다. 하지만….
“됐다니까.”
-…알겠다! 돕겠다! 뭘 도우면 되냐!
“그렇게 나와야지.”
태현은 만족스럽게 고개를 끄덕였다.
“내가 적진에 침투하는 동안 날 도와줘야겠어.”
-아.
구시렉은 안심한 표정을 지었다.
성벽 위에서 버프만 걸어주는 일이라면 얼마든지 해줄 수 있었다.
-내가 잊혀진 노래를 하나 또 꺼내주지.
“음? 그것도 나쁘진 않겠지. 자. 같이 내려가자.”
-…???
“네가 어그로 끌어줘야 해.”
-아, 아니. 왜?! 왜 내가!?
성벽 위에서 노래를 부르는 게 아니라 성벽 아래로 내려가서 어그로를 끌어야 한다니.
구시렉은 황당해했다.
그런 역할이라면 기계 에다오르나 에슬라가 더 적합하지 않은가!
“네가 한 번 주목을 끌기도 했고, 아무래도 네가 좀 더 만만해 보여서 어그로를 더 잘 끌 수 있을 거야. 게다가 노래도 있잖아.”
-…….
구시렉은 진지하게 태현을 공격해 볼까 고민했다.
* * *
태현 정도 되는 기계공학 대장장이에게, 고블린 대장장이들이 조악하게 만들고 있는 폭탄을 발견하고 터뜨리는 건 숨 쉬듯이 쉬운 일이었다.
[굶주린 혼돈의 임시 대장간을 발견합니다!]
[공성 병기들이 만들어지고 있….]
콰콰콰콰콰콰콰콰콰쾅!
태현은 메시지 창을 읽지도 않고 폭탄을 닥치는 대로 던졌다.
폭탄이 폭발하면서 쌓여 있던 고블린들의 폭탄을 건드리고 주변에 있던 공성 병기까지 날려 버렸다.
[…….]
[…….]
[…….]
-멍청한 고블린 놈들아!! 병기 관리 안 하냐!?!?
-네놈들은 저주받아야 해!!!
오크들과 거인들은 충격에 어질어질한 표정으로 고함을 질러댔다.
이게 무슨 난리란 말인가.
그리고 가장 충격을 받은 건 팔렌스와 랭커들이었다.
고블린들의 폭탄을 받아서 요새 벽을 날려 버리려고 했는데….
“김… 김태현이다! 저거 김태현이다!!!”
“저 자식이 터뜨렸어!!!”
랭커들은 멀리서 호다닥 도망가는 태현의 뒷모습을 보고 경악했다.
설마설마했는데 정말?!
“김태현 이 자식아!! 너 거기 안 서?!”
“죽고 싶냐?! 길드 동맹한테나 하던 짓을 여기서 해!?!!”
‘그런데 진짜 서면 우리가 죽지 않나?’
다행히 태현은 멈추지 않고 요새로 복귀했다. 도중에 어그로 끌던 악마 공작 놈도 같이 돌아갔다.
그러나 팔렌스 입장에서는 계획이 백지로 돌아간 셈이었다.
“김태현…! 땅굴도 저 자식이 막은 거였나…!”
“너무 괴로워하지 마. 김태현이면 막히는 것도 당연하지.”
“지금 그걸 말이라고 하냐! 닥치고 있어봐라! 내가 김태현을 꺾고 말 테니까!”
‘이 자식 미친 거 아니야?’
‘정신이 나간 건가?’
다른 랭커들은 속으로 생각했다.
팔렌스 정도 되는 랭커가 ‘내가 김태현 이길 거다!’라고 말하는 건 자신감이라기보다는 정신 나감에 가깝게 보였던 것이다.
김태현이 성벽 내려와서 달려들면 도망부터 쳐야할 것 같은데….
하지만 팔렌스는 진지했다.
일대일은 무리더라도, 지금 이 싸움은 공성전 아닌가.
그렇다면 기발한 전략으로 이길 수 있다!
“기발한 전략도 김태현이 위 아닌가? 이제까지 보여준 것만 봐도….”
“쉿. 팔렌스 지랄한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