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 나는 될놈이다 1641화
붙잡힌 포로들을 전부 처형하려는 펠마스를, 다른 아키서스 교단 NPC들이 말렸다.
그 모습에 플레이어들이 속삭였다.
“펠마스는 언제 제정신으로 돌아오는 거지?”
“몰라. 너무 오래 걸리는데 영원히 안 돌아오는 거 아니야?”
“난 원래 펠마스가 좋았는데.”
플레이어들은 슬슬 옛날의 펠마스가 그리워졌다.
뇌물만 바치면 이것저것 너그럽게 풀어주던 펠마스의 모습!
-너 이놈! 신성한 아키서스 광장에 쓰레기를 버려?
-아, 아니. 가방 꽉 차서 잡템 버린 거예요. 누가 가져가겠죠.
-꽉 찬 건 잡템이 아니라 네놈의 부도덕한 마음이다! 아키서스 교단의 이름으로 네놈을 처벌하겠다! 하지만 소량의 골드로 용서해 줄 수 있긴 하지.
-…여기 있습니다.
‘아닌가? 생각해 보니까 별로 안 그립기도 한 것 같은데.’
펠마스가 없으니 아키서스 교단에 이제 말 통하는 NPC가 거의 없었다.
도박꾼 펠마스나 필사꾼 갈락파드 둘 다 극단적인 NPC.
대도적 에드안이나 전직 근위기사 넥돈, 암살자 로샤크는 교단의 일에 적극적으로 나서기보다는 내려온 일을 묵묵히 하는 스타일이었고….
그나마 믿을 수 있는 건 펠마른밖에 없었다.
“펠마른 님!”
“펠마른 님 오셨다!”
유령의 흐릿한 형체가 나타나자 플레이어들이 환호성을 질렀다.
아키서스 교단에서 유일하게 플레이어들과 대화가 통하는 든든한 NPC, 펠마른!
게다가 본인 또한 먼 옛날부터 아키서스를 믿어 온 주교였던 만큼 능력도 대단했다.
그런 만큼 아키서스 교단에 가입한 플레이어들이 마음 둘 곳은 펠마른밖에 없었다.
다른 NPC들은 꼭 나사 하나씩 빠진 구석들이 있었으니….
“펠마른! 펠마른!”
-다들 비켜보게.
펠마른의 말에 NPC들도 비켜섰다.
배분만 따지면 교단 내에서도 원로 중의 원로였으니 펠마른에게 함부로 대할 수 있는 사람은 없었다.
…펠마스 빼고.
-저 건방진 놈들을 모조리 제물로 바쳐야 합니다!!
-그만해라. 이 미친놈아.
-끌어내! 아니. 이놈 예전 모습이 그립네 진짜.
다른 NPC들이 펠마스를 끌어냈다.
펠마른은 항복한 고대 수인족 부족들에게 말했다.
-너희는 무슨 목적으로 난동을 부렸느냐?
-하! 강한 놈이 약한 놈을 쓰러뜨리고 군림하는 건 당연한 자연의 섭리다. 고대 제국 놈들은 비겁한 수법이나 쓰는 약자 놈들! 우리가 지배하는 것이 옳다!
“져놓고 뭐라는 거야.”
-…….
[고대 여우 부족 전사들의 친밀도가 떨어집니다!]
[고대 여우 부족 전사들 사이에서 평판이 내려갑니다!]
‘아니 말 한마디 했다고…!’
지켜보고 있던 플레이어는 억울해했다.
당연한 말인데 이거 가지고 삐지냐?!
-저 모험가의 말처럼 너희들은 패배했다.
-우리가 항복하긴 했지만, 우리에게 좀 더 시간이 있었다면 우리가 이겼을 거다. 우리의 상태가 온전하지 못했다! 저 얼음 때문에!
고대 수인족 부족들은 동의한다는 듯이 고개를 끄덕였다.
냉기의 핵 때문에 단단히 얼어붙어서 봉인되어 있던 전사들.
핵이 사라져서 풀려났다지만 바로 상태가 돌아오는 건 아니었다.
아직 완전히 해동되지 않은 전사들도 있었고, 제대로 싸우기 힘든 전사들도 제법 많았다.
유령주교 펠마른은 자비로운 표정으로 고개를 끄덕이며 말했다.
-그 분한 마음 이해한다. 그러면 이렇게 하는 건 어떠냐? 우리를 위해서 싸워라. 공을 세운다면 나중에 풀어주겠다.
-그걸 믿으라는 거냐? 웃기는 소리 하지 마라! 우린 제국 놈들한테 속지 않는다!
‘제국 망한 지가 언젠데….’
‘저놈들한테 누가 역사 강의 좀 해줘.’
플레이어들은 속으로 투덜댔다. 밖으로 말하면 괜히 또 친밀도가 깎일까 봐.
고대 수인족 부족들은 단단히 고집을 부렸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펠마른은 포기하지 않고 진득하게 설득했다.
-강한 적을 상대하고 이기는 것이 너희들의 즐거움 아니더냐? 고대 제국은 사라진 지 오래고, 그 고대 제국을 멸망시킨 적들이 다시 정복하려고 하고 있지. 저들이 정복하면 너희들은 또다시 추운 북쪽으로 밀려날 거다. 그 적들을 물리쳐서 공을 세워라. 여기 너희들의 땅을 얻게 해주겠다.
-흥! 제국 놈들의 말은 믿지 않….
듣고 있던 펠마스가 흥분해서 외쳤다.
-그냥 아키서스의 감옥에 넣어버립시다!
-…지만 고민은 조금 해보겠다.
“…….”
“…….”
플레이어들은 갑자기 말을 바꾼 고대 수인족 부족들의 모습에 웅성거렸다.
저 자식들 생각보다 겁이 많은 거 아니야?
* * *
“기계 에다오르. 기계 구시렉.”
-…뭐라고?
“아. 미안. 기계 에다오르. 구시렉. 미궁을 빠져나가자.”
음악공 구시렉은 소름 돋는 표정으로 태현을 쳐다보았다.
‘이놈… 방금 내 이름 앞에 기계를 붙였던 것 같은데.’
지금 대검공 에다오르의 모습은 악마 공작도 겁에 질리게 만들었다.
키메라보다 더 흉악한 반-골렘 융합 상태라니.
어떤 흉측한 악마 대장장이도 저런 괴상망측한 물건을 만들지 못했으리라.
그런데 태현이 무심코 에다오르처럼 구시렉을 부르자, 구시렉 입장에서는 더 두려울 수밖에 없었다.
이 자식 나도 이렇게 만들려는 거 아니야!?
-나… 나는 뒤에서 가겠다.
“너 원래 뒤에서 움직였잖아.”
-그, 그렇지.
구시렉은 최대한 거리를 벌리려고 노력했다. 에슬라는 그 모습에 속삭였다.
-놈이 눈치를 챈 것 같은데.
“눈치를 채긴 뭔 눈치를 채. 하지도 않은 계획 억지로 만들지 마라.”
태현은 에슬라의 말을 잘라내고 남은 아이템들을 확인했다.
타락한 제국 백기사의 갑옷:
내구력 710/1500, 물리 방어력 920, 마법 방어력 920.
스킬 ‘굶주린 혼돈의 불멸’ 사용 가능, 스킬 ‘굶주린 혼돈의 허기’ 사용 가능, 스킬 ‘굶주린 혼돈의 숨결’ 사용 가능.
굶주린 혼돈과 계약한 상태에서만 착용 가능. <고대 제국의 백기사>만이 착용 가능.
고대 제국의 백기사만이 착용할 수 있는 영광스러운 역사의 갑옷이지만, 굶주린 혼돈과의 계약으로 인해 그 영광도 퇴색되었다.
강력한 힘을 가지고 있는 이 갑옷은 차라리 부숴버리는 게 나을지도 모른다.
(자격 없는 자가 착용 시 굶주린 혼돈에게 저주받음)
‘아니. 이거 스미스 장비잖아?!’
생각해 보니 한 번 죽였을 때 스미스의 장비를 뺏은 모양이었다.
태현이 아무리 행운 스탯이 높다지만 상대가 입고 있는 극도로 희귀한 갑옷을 한 번에 뺏는 건 거의 불가능에 가까운 일이었다.
원래 죽을 때 아이템을 떨어뜨린다지만 가치가 높은 게 바로 나오진 않는데….
‘스미스. 너도 이제 길드 동맹과 비슷한 수준이 되었구나.’
태현은 그사이 스미스가 얼마나 악명을 쌓았는지 짐작할 수 있었다.
굶주린 혼돈 퀘스트+PK까지 하면 아무리 스미스처럼 착하게 살아오던 놈도 훅 갈 수밖에 없는 것이다.
‘이 장비 부수긴 아까운데… 결국 부수긴 해야겠지.’
지금 태현은 오스턴 왕국 퀘스트가 끝내면 대대적으로 인력과 자원을 동원해서 다시 한번 장비 제작에 들어갈 생각이었다.
그러기 위해서는 온갖 희귀한 재료는 모으고 모아도 부족한 상황.
스미스의 장비도 그냥 묵혀둘 수는 없었다. 분명 쓸 만한 재료들이 많이 나올 테니….
-내가 입는다. 강해진다.
“???”
태현은 기계 에다오르의 말에 당황했다.
“아니. 굶주린 혼돈한테 저주 받는 갑옷인데?”
-나는 괜찮다.
‘아. 그렇지. 이 자식 굶주린 혼돈한테 오염된 상태지.’
생각해 보니까 지금 에다오르의 상태는 혼종 중의 혼종이었다.
악마+굶주린 혼돈+기계=에다오르!
“그… 그래. 일단 네가 입어봐라.”
태현은 갑옷을 내밀면서 문득 생각했다.
그런데 이걸 얘가 또 착용할 수가 있나?
[에다오르의 능력으로 갑옷 위에 갑옷을 추가로 착용합니다!]
[페널티가 부여됩니다.]
[……]
놀랍게도, 에다오르는 갑옷 위에 갑옷을 추가로 착용하는 데에 성공했다.
페널티가 조금 있다지만 이 정도면 감지덕지!
“에다오르… 너 정말 대단하구나! 괜히 악마 공작이 아니야!”
-칭찬. 감사.
-…칭찬인가?
에슬라가 옆에서 고개를 갸웃거렸다.
에다오르가 제정신이라면 ‘와! 너 갑옷 2개 입을 수 있냐?! 너 진짜 악마 공작 맞구나!’ 이딴 칭찬에 기분 좋아하지는 않을 것 같은데….
그러나 기계 에다오르는 저런 칭찬에도 감사하는 순수한 마음을 가지고 있었다.
태현은 다른 아이템들을 차례대로 확인하고 마지막 아이템을 꺼내들었다.
푸르네우스를 잡았을 때 얻은 아이템이었다.
빙결공의 왕관:
내구력 710/900, 마법 방어력 150.
스킬 ‘냉기 지배’ 상시 발동.
냉기 관련 마법 사용 시 추가 보너스.
빙결공이 냉기를 지배하기 위해 사용한 왕관이다. 왕관에 서린 강력한 마력이 냉기를 지배한다.
설명도 간단하고, 갖고 있는 스킬도 적고, 마법 방어력도 그리 높지 않았다.
악마 공작을 봉인하고 얻은 아이템이라고 생각하기에는 너무 초라한 아이템.
하지만 태현은 실망하지 않았다. 이 왕관이 어떤 왕관인지 이미 짐작하고 있었던 것이다.
‘푸르네우스가 계속 이걸로 무기를 만들어냈었지.’
[<빙결공의 왕관>을 착용합니다!]
[<냉기 지배>가 상시 발동됩니다!]
쩌저적!
아니나 다를까 태현의 손에 거대한 얼음 창이 만들어졌다.
[냉기로 무기를 만들었습니다!]
[현재 마법 스킬로 인해 추가 보너스를 받습니다!]
[아키서스의 고대 냉기 마법 스킬을 갖고 있습니다. 추가 보너스를 받습니다!]
[마법 스킬이 오릅니다!]
[……]
[……]
‘쏠쏠한데?’
안 그래도 검을 계속 지속적으로 부숴먹는 태현 입장에서 이렇게 무기를 만들어주는 장비는 나쁘지 않았다.
게다가 냉기 관련 상태 이상 효과도 넣을 수 있고….
[냉기의 정령들이 당신에게 감사하고 있습니다. 냉기 무기를 휘두를 때마다 추가 보너스를 받습니다.]
“!”
[아키서스의 고대 냉기 마법 스킬로 인해 냉기 무기를 휘두를 때마다 예측하기 힘든 일이 일어납니다.]
“…….”
[냉기의 정령들이 아키서스의 고대 냉기 마법을 싫어합니다!]
“내가 일부러 익힌 건 아니야.”
태현은 은근슬쩍 정령들에게 변명했다.
* * *
[미궁을 탈출하는 데에 성공합니다!]
[명성이 오릅니다!]
[악마 공작들의 미궁에 대한 지식이 늘어납니다! 앞으로 미궁에 갇혔을 때 더 수월하게 탈출할 수 있습니다.]
[……]
‘…설명이 좀 재수가 없는데.’
기껏 탈출했는데 찜찜한 건 또 처음이었다.
어쨌든 탈출한 태현은 주변을 둘러보았다.
이 미궁이 있는 위치는 오스턴 왕국. 그것도 왕국의 동부.
당연히 굶주린 혼돈과 원정대가 싸우고 있는 만큼 주변 분위기는 삭막하고 흉흉했다.
-아키서스. 싸움이 일어나고 있다.
구시렉이 가장 먼저 앞을 가리켰다. 음악공답게 다른 모든 사람들보다 소리를 먼저 들었던 것이다.
“굶주린 혼돈의 군단인가? 숫자가 적으면 공격하고, 많으면 굳이 붙지 말고 피하자.”
-언데드들과 굶주린 혼돈의 하수인들이 싸우고 있군.
“!”
태현은 그 말을 듣자마자 바로 무슨 상황인지 깨달았다.
“도우러 간다!”
-언데드들을? 왜?
구시렉은 일단 뒤쫓으면서도 의아해했다.
보통 교단이면 언데드들도 굶주린 혼돈처럼 싫어해야 하는 것 아닌가?
그 질문에 기계 에다오르가 친절하게 대답해 줬다.
-언데드. 질 좋은 일꾼. 얼마든지 이용 가능.
에다오르의 대답에 에슬라가 흡족한 목소리로 칭찬을 해줬다.
-이야. 에다오르. 너 정말 똑똑해졌구나.
-칭찬. 감사.
-…….
구시렉은 진심으로 생각했다.
차라리 죽으면 죽었지 저렇게 되고 싶지는 않다고!