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 나는 될놈이다 1639화
“그, 그러네.”
“사실 이야기하려고 그랬어.”
이세연과 태현은 자신도 모르게 변명했다.
이다비의 시선이 묘하게 아프게 느껴졌던 것이다.
“그리고 우리가 굶주린 혼돈을 신경 안 쓰는 건 아닌데… 다 계획이 있어.”
“맞아. 나도 계획이 있어.”
“…….”
이다비가 말을 하지 않고 그냥 묵묵히 쳐다보자 둘은 왠지 모르게 더 변명하게 됐다.
“알겠어요. 두 분이 알아서 잘 하시긴 하겠죠. 그쵸?”
‘사실 그렇게까지 계획이 있는 건 아닌데.’
‘나도 사실 그렇게까지 계획이 있는 건….’
이세연과 태현은 속으로 생각했다.
물론 목표는 확실했지만 거기까지 가기 위한 확실한 계획은 아직 좀 부족했던 것이다.
하지만 이 상황에서 그걸 말하면 ‘그런 와중에 결투부터 생각하고 있어요?’란 대답이 돌아오겠지?
“물론이야. 벌써 끝난 거나 다름없달까.”
“굶주린 혼돈은 이미 내 손바닥 위에 있는 수준이야.”
“!”
“!”
이세연과 태현은 다시 한번 서로 놀라서 힐끗 쳐다보았다.
‘그 정도로?!’
‘대체 무슨 방법인 거지?’
‘이 사람들 지금 허세 부리는 건 아니겠지.’
이다비는 양쪽의 모습에 슬슬 의심이 가기 시작했다.
다른 사람들에게는 전 세계에서 손꼽히는 유명 랭커들이었지만 이다비는 둘이 은근히 치졸하다는 걸 알고 있었던 것이다.
“네. 알겠고요… 참. 이번에 베레타르바 교단 대주교한테 반지 얻었는데 MP 회복 속도 옵션이거든요. 나중에 받아가서 껴주세요.”
“앗… 고마워.”
이세연은 고마워하며 고개를 끄덕였다.
그러고는 문득 이상함을 느꼈다.
‘응? 베레타르바 교단?’
“태현 님은 치명타 성공 시 MP 회복 속도 옵션에, 처치 시 스킬 쿨타임 감소 옵션들로 챙겨놨어요.”
“아. 고마워.”
태현도 고마워하다가 뭔가 이상함을 느꼈다.
‘어라? 베레타르바 교단?’
이세연이 조심스럽게 물었다.
“어… 그런데 이 반지가 혹시 같이 쓰는 반지 아닌…?”
“같이 쓰는 반지 맞아요. 같이 써야 효과 생기더라구요.”
그 말에 태현도 조심스럽게 물었다.
“어… 그러면 그게 그… 그거 아닌가?”
“그거… 그거잖아?”
“??”
태현과 이세연의 말에 이다비는 고개를 갸웃거렸다.
“그게 뭔데요?”
“음. 아무것도 아니야.”
“아무것도 아니지!”
둘은 눈빛을 교환했다.
‘괜히 이다비 지적해서 머쓱하게 만들지 말자.’
‘지금 지적하는 게 낫지 않나?’
‘그럼 네가 지적해.’
‘싫어.’
차라리 이다비는 지금 지적해 주는 걸 더 원했을 테지만, 둘은 쓸데없는 배려심을 발휘했다.
“그러면 다음에 받아갈게.”
“다시 한번 고마워.”
“뭘요. 별 것도 아닌데요.”
이다비는 순수한 미소로 둘을 반겼다.
그 미소에 둘은 지금이라도 말해줘야 하나 다시 한번 고민했다.
* * *
-아키서스. 에다오르의 기운이….
“잠깐. 에슬라. 확인할 게 있다.”
태현은 말을 걸어오는 에슬라를 잠깐 막았다.
과거의 고대 제국에서 태현은 적들과 치열하게 싸웠다.
몇 번이고 적들과 싸우고, 도시를 불태우려는 적들을 쓰러뜨렸다.
[카르바노그가 도시를 불태운 건 적들이 아니라 아키서…]
악마 공작들이 여럿 쓰러질 정도로 치열하고 바쁜 싸움이었고, 태현도 덕분에 점검할 시간이 전혀 없었다.
‘지금 아이템 확인하고 점검하고 가야 한다.’
태현은 장비들을 꺼내놓고 하나하나 확인했다.
‘다행히 오염도가 심하진 않다.’
굶주린 혼돈이 까다로운 이유 중 하나는 그 하수인과 싸울 때 계속해서 오염이 퍼진다는 점이었다.
직접 싸워보지 않은 사람들은 잘 몰랐지만 직접 싸우는 사람에게 있어서 이건 아주 큰 문제였다.
지금 판온 도시들 대부분이 서로 연결이 끊겨서 고립되어 있는 상황이라 아이템 제작도 수월하지 않은데 내구도가 빠르게 떨어지면….
태현이 태엽 장비 세트 만들어서 원정대에 닥치는 대로 뿌린 데에는 다 이유가 있었던 것이다.
오염도가 심하면 태현도 장비 교체를 고민해야 했을 텐데, 다행히 태현의 장비들은 멀쩡했다.
막대한 행운과 신성 스탯 덕분이었다.
‘반지와 목걸이는 아직 괜찮은데, 슬슬 갑옷을 고민하긴 해야겠군.’
<아스비안 제국의 영혼 목걸이>나 <에랑스 왕가의 신성한 비전 반지>나 귀걸이, 팔찌 세트 같은 건 아쉬움이 느껴지지 않을 정도로 훌륭한 장신구 세트였다.
물론 태현이 지금 착용하고 있는 아다만티움으로 만든 아키서스 갑옷도 처음 등장했을 때는 랭커들을 기겁하게 만든 무시무시한 방어구였지만….
‘굶주린 혼돈 놈들이 너무 강하단 말이지.’
사실 지금 태현이 너무 강한 적들을 상대하고 있긴 했다.
그런 만큼 아무리 행운 스탯과 컨트롤로 버티려고 해도 방어 무시 데미지가 계속해서 꾸준히 쌓이는 것이다.
더 좋은 갑옷.
‘그리고 더 좋은 검.’
<혼돈과 악마와 불의 검>은 현재 태현이 일회용으로 쓸 수 있는 검들 중 가장 쓸 만한 검이었다.
이걸 업그레이드하려면….
‘오스턴 왕국만 회복되고 나면 한 번 시간을 내서 갑옷과 검을 다시 업그레이드해 보고 싶은데.’
오스턴 왕국을 어떻게든 회복하면 새로 힘을 빌릴 수 있는 대장장이 NPC들부터 시작해서 각종 재료들을 수월하게 얻을 수 있을 것이다.
길드 동맹은 어마어마하게 세금을 걷기도 했지만 동시에 왕국 발전에 막대한 골드를 쏟아부었다.
그게 꽤 많이 남아 있을 테니 태현이 다시 끌어다 쓸 수가 있었다.
‘그렇게 생각하니 도시 불태운 게 좀 아까워지는데.’
태현은 검을 옆으로 넘기고 다음 아이템을 확인했다.
키도가오넬의 사악한 마법서:
고대 제국의 촉망받는 마법사, 키도가오넬이 남긴 사악한 마법서다. 스스로 의지를 가진 이 마법서는 영지의 마법사들에게 막대한 가르침을 내려준다.
“…?”
어?
왜 이렇게 멀쩡한 아이템이지?
‘카르바노그. 이거 뭐 수상쩍은 저주 같은 거 없나?’
[카르바노그가 그런 게 안 느껴진다고 당황합니다.]
태현은 처음에 마법 스킬이 낮아서 숨겨진 저주를 못 알아보나 의아해했었는데, 아무리 봐도 그런 게 없었다.
‘…그냥 골짜기에 설치해놔야겠군.’
[<키도가오넬의 사악한 마법서>가 골짜기에 배치됩니다!]
[골짜기 소속 마법사들에게 추가로…]
[……]
[……]
‘분명히 멀쩡하게 좋은 아이템인데, 왜 멀쩡하게 좋은 아이템이 나오면 의심부터 되는 걸까?’
태현은 그렇게 생각하며 다음 아이템을 확인했다. 대마법사 키도가오넬이 남긴 아이템이 꽤 여럿이었던 것이다.
굶주린 혼돈의 정수:
굶주린 혼돈의 수하들이 갖고 있는 기운의 조각이 뭉쳐진 정수다. 이 정수를 사용하면 강한 힘을 불러올 수 있다.
(굶주린 혼돈의 힘을 불러낼 경우 저주받을 수 있음)
‘이 정수들도 또 꽤 쌓였군.’
굶주린 혼돈과 계약한 적들을 쓰러뜨릴 때마다 나오는 정수 아이템.
태현은 이 아이템을 검에 써먹거나 폭탄에 써먹는 식으로 요긴하게 사용했었다.
‘사실 굶주린 혼돈만 날뛰지 않았어도 좀 더 적극적으로 썼을 텐데, 괜히 찜찜하단 말이지.’
굶주린 혼돈만 아니었어도 성벽에 정수 넣고 성문에 정수 넣고 광장에 정수 넣은 가로등 설치하고 했을 텐데….
굶주린 혼돈이 날뛰는 지금, 괜히 잘못 썼다가 피 보는 일이 생길 것 같아서 태현도 조심하고 있었다.
키도가오넬의 정화 마법서:
고대 제국의 촉망받는 마법사, 키도가오넬이 남긴 사악한 마법서다. 스스로 의지를 가진 이 마법서는 굶주린 혼돈의 힘을 순수한 에너지로 바꾸는 비법을 가르쳐준다.
“!!!!”
태현은 마법서 아이템을 보고 깜짝 놀랐다.
키도가오넬이 이런 마법서까지??
‘하긴 고대 제국 놈들이 다 기본적으로 속셈이 시꺼먼 놈들이니, 그냥 굶주린 혼돈과 계약했을 가능성은 적다고 생각했지.’
[카르바노그가 그건 좀 편견 같다고 말합…]
하지만 태현의 말이 맞았다.
키도가오넬 같은 대마법사가 굶주린 혼돈과 계약할 때 뒷일을 생각하지 않을 리 없는 것이다.
굶주린 혼돈 몰래 힘을 정화시켜서 계약을 무효화시킬 준비를 했던 것!
악마 공작이든 신이든 남몰래 계약을 무효화시키고 뒤통수치려는 건 다들 똑같은 모양이었다.
[<키도가오넬의 정화 마법서>가 당신에게 비법을 가르쳐줍니다!]
[<에너지 정화의 탑> 설치가 가능해집니다!]
[굶주린 혼돈의 힘이 순수한 에너지로 정화됩니다!]
[……]
[……]
[마법 스킬이 오릅니다!]
‘고맙다. 키도가오넬. 네가 남긴 의지는 내가 잘 쓰겠다.’
키도가오넬 본인이야 불쾌하게 생각하겠지만 태현은 일단 감사 인사를 남겼다.
키도가오넬의 마수 주머니:
고대 제국의 촉망받는 마법사, 키도가오넬이 남긴 사악한 주머니다. 이 주머니 안에는 키도가오넬이 생전에 수집한 고대 제국의 마수들이 우글거린다.
키도가오넬의 악마 주머니:
고대 제국의 촉망받는 마법사, 키도가오넬이 남긴 사악한 주머니다. 아키서스 교단이 악마를 부리는 것에서 영감을 얻은 키도가오넬은 수집한 악마들을 주머니 안에 남겼다.
……
……
‘키도가오넬… 정말 고맙다.’
태현은 다시 한번 감사를 표했다.
이렇게 멀쩡하게 좋은 보상들을 계속 주던 보스 몬스터가 얼마 만이던가.
최근 보스 몬스터들은 다른 놈들한테 집어 삼켜지거나, 폭발해서 흔적도 찾기 힘들거나, 아니면 이상한 아이템만 주거나….
굶주린 혼돈에게 하사받은 검투사의 제복:
내구력 380/450, 물리 방어력 450, 마법 방어력 450.
스킬 ‘굶주린 혼돈의 증오’ 사용 가능, 스킬 ‘굶주린 혼돈의 압박’ 사용 가능, 스킬 ‘굶주린 혼돈의 혈액’ 사용 가능, 스킬 ‘굶주린 혼돈의 기도’ 사용 가능….
굶주린 혼돈의 영역에서 싸울 경우 추가 보너스, 굶주린 혼돈의 공적치 포인트가 높을 시 추가 효과 발동.
굶주린 혼돈이 쓸 만한 하수인에게 직접 내린 갑옷이다.
주의하라!
굶주린 혼돈의 총애를 잃지 않도록….
(착용 시 굶주린 혼돈에게 저주받을 수 있음)
‘이런 느낌이군. 굶주린 혼돈 놈들. 정말 편하게 게임하는데?’
뉴욕 라이온즈 선수들 잡고 나온 아이템들을 확인하던 태현은 갑자기 부러워졌다.
아키서스 교단이 만약 굶주린 혼돈 같았다면….
전직하자마자 하늘에서 갑옷이 내려오고 스킬이 내려오고 태현 도와줄 NPC들이 막 떨어지고 그랬을 것 아닌가.
굶주린 혼돈이 하사한 아이템은 방어력 자체는 그리 높지 않았지만 어마어마한 스킬 세트들과 추가 보너스로 커버가 됐다.
게다가 검투사 직업이면 방어가 좀 낮아도 커버가 될 테니….
-아키서스!! 아키서스!!!
“???”
-확인 그만하고 전투 준비해라!
에슬라가 다급한 목소리로 외쳤다.
언제나 부드럽게 ‘다음 악마는 언제 죽일 건가?’ 하던 에슬라가 저렇게 나오자 태현은 깜짝 놀라서 검을 들었다.
어떤 적이 나오는 거지?
-통로에서 적들이 나오고 있다! 범상치 않은 놈들이야!
‘얼마나 강하길래…!’
에슬라가 저렇게 말할 정도면 상대는 분명 강한 적이었다.
태현은 검을 들고 뒤에 있던 토끼 수인족 전사들에게 눈짓했다.
“모두들 조심해라!”
-걱정하지 마십시오. 저놈들이 아키서스의 후계자에게 상처를 입히려면 저희부터 모두 죽여야 할 겁니다!
[토끼 부족 전사들이 <맹수의 긍지>를 사용합니다!]
[공격 속도가…]
‘…카르바노그. 너 진짜 좋은 부족을 두었구나.’
몇 번 경험해 봐도 적응이 되지 않는 이 든든함.
토끼 수인족 전사들은 정말로 믿음직스러웠다.
-아키서스…! 아키서스…!
-역시 아키서스의 원수인가.
에슬라는 별로 놀랍지도 않다는 듯이 말했다. 태현은 살짝 발끈했다.
자기도 원수 많으면서!
-아키서스 만세…!
“?!?”
-?!