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나는 될놈이다-1638화 (1,637/1,826)

§ 나는 될놈이다 1638화

PD의 목소리에 한 비슷한 게 서려 있어서, 태현은 사과할 수밖에 없었다.

“사실 저희 방송이 아니라 팀 KL 방송인만큼 저한테 사과하실 이유는 없긴 합니다만….”

배장욱은 그렇게 말했지만 목소리에는 진득한 아쉬움이 서려 있었다.

아까워도 너무 아까웠던 것이다.

저걸 대체 왜 안 틀어서…!

배장욱 쪽 방송이 아닌데도 아쉬워 죽을 지경이었다.

“결국 지금 오스턴 왕국을 점령하는 게 중요하다는 결론이 나오는군요.”

“오스턴 왕국을 한시라도 빨리 점령해야 합니다.”

자리에 있는 모두가 고개를 끄덕이며 동의했다.

오스턴 왕국은 지금 단순히 왕국 하나가 아닌, 전체 퀘스트 분위기와 연결되어 있는 중요한 분기점이었다.

눈치 보고 있는 플레이어들이 어느 쪽에 붙을지, 지금 굶주린 혼돈과 싸우고 있는 플레이어들이 용기를 얻고 계속 싸울지를 결정하는 분기점!

물론 분위기 때문에 오스턴 왕국을 원하는 게 아니었다.

오스턴 왕국은 지리적으로도 요충지였다.

지금 비교적 잘 버티고 있는 아탈리 왕국과 맞닿아 있는 만큼 연합해서 움직일 수 있었고, 서쪽으로는 에랑스 왕국. 동쪽으로는 우르크 지역까지 공략할 수 있었다.

굶주린 혼돈에 맞서는 플레이어들 입장에서는 반드시 오스턴 왕국을 다시 손에 넣어서 방벽으로 삼고 싶었던 것이다.

“그런데… 김태산 플레이어는 욕심이 없으신 걸로 알고 있지만.”

배장욱이 조심스럽게 운을 뗐다.

김태산이 이 자리에 있었다면 ‘아니야…! 나도 욕심 좀 있어!’ 하면서 아쉬워했을 테지만 김태산은 이 자리에 없었다.

물론 김태산이 태현을 도우려는 건 사실이었지만, 그렇다고 또 땅에 관심이 없냐고 묻는다면 관심이 없지는 않았던 것이다.

땅을 좀 챙겨주면 ‘아 뭐 이런 걸 다’ 하면서 받을 생각 정도는 있는 사람!

하지만 아쉽게도 김태산은 이 자리에 없었다.

“유성 게임단 분들은 오스턴 왕국을 어떻게 생각하시는지 좀 궁금합니다.”

배장욱의 질문에, 자리에 있던 다른 랭커들도 긴장한 표정으로 이세연과 선수들을 쳐다보았다.

태현을 포함한 원정대 랭커들은 기본적으로 태현을 우두머리 삼아서 모인 이들이었다.

길드 활동을 하지 않거나, 하더라도 소규모 친목 길드 출신인 이들.

태현이 아니었다면 애초에 모이지도 않았을 사람들인 만큼 태현이 오스턴 왕국을 다스리는 것에 불만이 없었다.

아탈리 왕국에 계속 있었던 사람들인 만큼 태현을 믿는 건 당연했던 것이다.

-오스턴 왕국을 점령했을 때, 김태현만큼 그걸 다스릴 자격이 있는 사람이 또 있나?

-솔직히 김태현 말고 다른 길드들은 줘봤자 세금 갖고 장난만 칠 것 같은데.

-김태현 말고 다른 사람이 다스리는 건 허락 못하지.

-잠깐. 갑자기 헷갈리는데, 김태현이 오스턴 왕국 회복하면 직접 다스리겠다고 말한 적이 있나?

-…없, 없지만 다스리겠지. 설마 해놓고 안 다스리겠어?

-김태현 성격에 안 다스릴 수도 있지 않나…?

-그건 판온 1 이야기고 요즘은 왕국도 다스리잖아.

-왕국 다스리는 거 보면 다스리는 거에 별 욕심 없는 거 같은데. 욕심 있는 사람이면 세금을 그렇게 안 걷을 수가 없잖아.

-거의 방치형 수준이지.

-…야! 불길한 소리 하지 마! 김태현이 설마 그러겠어!!

-이러다가 파워 워리어가 다스리는 거 아닌가?

-미친 소리 하지 마. 파워 워리어가 나쁜 길드는 아니지만 믿음직스러운 길드는 아니거든.

-뭐? 파워 워리어를 욕하다니. 그러는 당신은 레벨이 몇이나 되길래 그래?

-너 파워 워리어 소속이지?

-헉… 어떻게 알았습니까?

-이러니까 못 믿는 거지!

…하지만 원정대 규모가 커지면서 생각이 다른 사람들도 늘어나고 있었다.

쑤닝처럼 ‘일단 스미스 새끼 조지고 나면 길드 동맹 길드원들이 구름처럼 몰려와서 다시 날 도와줄 거다!’ 하는 사람도 있었고, 제카스처럼 현실적으로 ‘스미스 깨고 나서 빈틈이 생기면 퀘스트로 이득을 보고 다시 한번 부활을 노려보겠다’ 하는 사람도 있었고….

그리고 유성 게임단 선수들은 그 중 가장 강력한 세력이었다.

애초에 이세연이 언데드 대군을 이끌고 상륙한 만큼 이들은 태현에게 빚진 것도 없었고 태현의 명령을 들을 이유도 없었다.

만약 오스턴 왕국 관련해서 권리를 주장하거나 혹은 불만을 내놓으면 다툼이 시작될 수도 있었다.

아직 불리한 상황에서 그런 다툼은 치명적일 터.

모두가 긴장한 표정으로 유성 게임단 선수들을 쳐다보았다.

“저와 다른 유성 게임단 선수들은 오스턴 왕국에 별다른 욕심이 없습니다.”

“…!!”

“!!”

그러나 이세연은 조금도 고민하지 않고 대답했다.

너무나도 시원한 대답에 긴장하고 있던 랭커들이 놀랄 정도였다.

“정말이십니까? 아. 죄송합니다. 못 믿어서가 아니라 너무 놀라워서….”

이세연은 옅게 웃으면서 고개를 저었다.

“놀라는 게 당연하다고 생각합니다. 하지만 정말입니다. 저도, 저희 게임단 선수들도 오스턴 왕국에는 별다른 욕심이 없습니다. 생각해 보세요. 이미 제국이 있는데 굳이 욕심을 낼 필요가 없지 않을까요?”

“과연…!”

“역시 이세연 선수는 다른 사람들과 차원이 다르십니다!”

“이세연! 이세연! 이세연!”

“이세연! 이세연….”

이세연의 친한 동생인 김현아가 시작한 외침을 따라 하던 랭커들은 이세연이 묵묵히 앉아 있자 민망해졌는지 헛기침을 하며 입을 다물었다.

“어쨌든 감사합니다. 김태현 선수. 참 잘 된 일 아닙니까?”

‘어. 잠깐. 내가 오스턴 왕국 다스리는 건 기정사실인가?’

태현은 ‘난 다스린다고 아직 말 안 했는데?’라고 하려다가 멈칫했다.

분위기가 그럴 분위기가 아니었던 것이다.

그리고 태현의 고대 제국 관련 퀘스트를 생각해 보면 오스턴 왕국 다스리는 건 필수과정이 맞긴 했다.

‘그래. 나 도와주겠다고 모인 사람들이 있는데 이 정도는 해야지.’

그건 그렇다 쳐도 태현은 다른 문제가 신경 쓰였다.

이세연이 너무 친절했던 것이다.

물론 남들 보는 자리에서는 이세연이 상당히 이미지를 관리한다는 건 알고 있었고(덕분에 많은 사람들이 이세연을 조용하고 차가운 사람이라고 착각할 정도였으니), 이세연이 굶주린 혼돈을 앞에 두고 태현과 싸워서 적한테 이득을 줄 정도로 멍청한 사람은 아니었지만….

그렇다고 저렇게 친절하게 굴 사람은 또 아니었던 것이다.

‘이다비한테 물어보고 싶은데 이다비가 왠지 구박할 거 같다.’

태현의 예리한 직감은 쓸데없이 이다비의 반응을 잡아냈다.

이런 부분에서 이다비는 은근히 칼 같았다.

하지만 이다비는 이런 부분에서 태현보다 더 예리한 사람이었다. 태현이 고민하는 걸 알아채고 먼저 물어왔다.

“왜 그러세요?”

“이세연이 저렇게 양보하는 이유를 잘 모르겠어서.”

“말 그대로 아니에요?”

이다비는 고개를 갸웃거렸다.

이세연이 말한 그대로 같은데 태현이 괜히 확대해석을 하는 것 같았다.

유성 게임단은 이미 저 사막 지대에 드넓은 땅을 갖고 있는 데다가, 반(反) 굶주린 혼돈 퀘스트로 노선을 정한 이상 그 길로 확실히 달리면 됐지 굳이 싸움을 만들 이유가 없었다.

게다가 이 퀘스트를 성공하면 유성 게임단은 어마어마한 이미지를 얻을 수 있었다.

미국의 여러 대형 게임단들이 굶주린 혼돈 코인에 탑승했다가 박살 나는 것과 정반대의 결과.

충분히 할 만했다.

“…….”

물론 태현은 이다비의 말을 완전히 받아들이지 못했다.

머리로는 이해가 가도 가슴으로는 이해가 가지 않았던 것이다.

‘아 이세연이 뭔가 꾸미고 있을 거 같은데.’

“…그냥 따로 만나서 이야기하죠!”

* * *

“아. 안 그래도 따로 이야기하려고 했는데. 역시 너도 생각하고 있었구나.”

이세연은 태현과 이다비가 쫓아오자 그럴 줄 알았다는 듯이 고개를 끄덕였다.

“?”

“??”

태현과 이다비는 이세연이 무슨 소리를 하는지 몰랐지만, 일단 얌전히 들어보기로 했다.

가만히 있으면 언제나 절반은 가니까.

“…잠깐. 뭔가 이상한데. 아는 게 맞아?”

그러나 이세연은 그냥 넘어가지 않았다.

태현은 표정 관리를 제대로 했다지만 이다비의 표정에서 어색함이 살짝 남아 있었던 것이다.

“먼저 말해봐. 왜 온 건데?”

“그, 저, 제가… 이세연 선수가 좀… 걱정되서요… 퀘스트 도중에 서로 마찰이 생기지 않을지.”

이다비는 태현 대신 총대를 멨다.

괜히 태현이 의심했다고 말했다가 둘이 싸우는 것보다는 차라리 이다비 본인이 사이에 끼는 게 나을 것 같았던 것이다.

물론 이세연은 그런 거짓말에 속지 않았고, 태현도 그런 거짓말을 그냥 두고 볼 생각이 없었다.

“완전히 말도 안 되는 소리잖아요.”

“맞아. 이다비. 그런 거짓말 할 필요 없어. 이세연. 내가 의심했다.”

“알고 있거든? 뻔히 보이거든?”

이세연은 어이가 없다는 듯이 팔짱을 끼고 태현을 쳐다보았다.

“내가 약속하는데, 퀘스트 도중에 너 방해할 생각은 조금도 없어. 애초에 지금 굶주린 혼돈이 저렇게 멀쩡한데 내분을 일으킬 리가 없잖아.”

이세연의 말에 이다비는 안도의 한숨을 내쉬었다.

그러고는 태현에게 작게 말했다.

“봐요! 믿고 있었다니까요!”

“이다비. 아직 상대 말 안 끝났어. 긴장해.”

“그런데… 내가 보기에는 굶주린 혼돈을 완벽하게 막아내고 나면 너하고 내가 제대로 겨룰 기회가 없을 것 같거든.”

“!”

태현은 이세연의 말에 얼굴을 굳혔다.

역시 이세연이 저렇게 호락호락하게 넘어갈 리가 없었던 것이다.

“오스턴 왕국은 물론이고 여러 왕국까지 다 회복하게 되면 네가 지금보다 몇 배는 강해질 확률이 높겠지. 그건 그렇다고 쳐. 어쩔 수 없는 부분이니까. 하지만 그렇게 되면 너무 아쉽잖아. 우리 둘 다 한쪽의 승패가 확실한 상황에서 싸우는 타입은 아니니까.”

“…….”

이세연의 말이 맞았다.

태현이나 이세연이나 둘 다 승산이 있을 때 싸우는 스타일이지, 승산도 없는데 일단 부딪히는 스타일은 아니었다.

둘 사이의 분위기가 묘해지자 이다비는 안절부절못하며 이세연에게 말했다.

“그, 그건 꼭 그렇게 된다는 보장은 없지 않아? 너도 퀘스트 깨고 있으니까 강해질 거고….”

“다비야. 물론 내가 내 직업 퀘스트를 포기한다거나 하는 소리는 아니야. 하지만 객관적으로 봤을 때, 나는 이 대형 퀘스트가 끝나고 나면 김태현이 상당히 심한 차이로 역전할 가능성이 높다고 생각해. 퀘스트를 깨는 효율이 다르거든. 지금도 레벨이 나 이상일 가능성이 높은데.”

“…….”

아니거든!

태현은 그렇게 말하려다가 참았다. 약점을 드러내는 꼴이었으니까.

“그래서?”

“그 전에 한 번 붙자. 목숨 안 걸어도 돼. 스킬도 안 아껴도 돼. 내가 결투용 주문서 준비한 게 있거든.”

‘아니 얘 진짜 집념이 소름돋네.’

태현은 이세연의 말에 솔직히 놀랐다.

저런 임시 투기장 만들어주는 결투용 주문서는 절대 흔하지 않았다.

게다가 스킬 쿨타임까지 신경 안 써도 되는 결투용 주문서라니.

들어본 적 없는 거 보니 고대의 희귀 아이템이 분명했다.

그리고 저걸 구해서 갖고 있는 이유는 하나밖에 없지 않은가.

“지면… 뭐지? 유성 게임단에 들어가야 하나?”

태현의 말에 이세연은 웃음을 터뜨렸다.

“아니.”

“안 들어가도 되나?”

“넌 날 대체 뭘로 생각하고 있는 건데? 네가 팀 KL을 얼마나 열심히 꾸려가고 있는지 알아. 결투 하나 이겼다고 그거 다 접고 들어오라는 소리를 하겠어?”

이세연은 어이없다는 듯이 말했다. 태현은 살짝 민망해졌다.

하긴 이세연이 그런 부분에서 억지를 부리는 사람은 또 아니었던 것이다.

‘내가 이세연을 너무 나쁘게 생각했던 걸지도 모르겠어.’

“그러면… 지면 뭐지?”

“아무것도 없어. 그냥 지는 거야.”

“…그게 전부라고?”

“그게 전부야.”

이세연은 그렇게 말하고 태현을 똑바로 쳐다보았다.

그 흔들림 없는 강한 눈동자에서, 태현은 이세연의 속마음이 들려오는 것 같았다.

“…그렇지. 사실 그게 전부지.”

태현은 고개를 끄덕였다.

판온 최강 길드가 어디니, 누가 판온을 지배하느니 같은 것들은 사실 서로에게 별 의미가 없었다.

두 사람에게 중요한 건 서로의 평가였다.

둘은 벌써 느끼고 있었다.

이번 결투가 끝나면 둘이 다시 붙을 기회는 오지 않을지도 모른다고.

이번에 지면 평생 상대를 만날 때마다 ‘너 개못하잖아’란 환청을 들어야 한다!

“저기. 두 분. 굶주린 혼돈 막는 방법은 이야기 안 해요?”

이다비는 질린 표정으로 말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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