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 나는 될놈이다 1637화
태현은 화끈하게 찌르고 들어갔다.
[<혼돈과 악마와 불의 검>의 스킬, <화염의 폭발>이 시전됩니다!]
태현의 검이 활활 타오르며 푸르네우스를 휘감았다.
푸르네우스는 설마 도움이 필요 없다고 말해서 칼을 맞을 줄은 몰랐는지 태현을 찢어 죽일 듯이 노려보았다.
-아키서스 이놈이 돌아버렸나!!
[푸르네우스의 친밀도가 더 이상 떨어질 수가 없습니다!]
[평판이…]
[……]
[……]
“도움이 필요 없다고 말한 죄. 다른 이들을 하찮은 쓰레기라고 말한 죄. 푸르네우스! 널 마계의 이름으로 벌하겠다!”
다른 악마 공작들도 있는 만큼 ‘니가 싫어서 이번 기회에 죽인다!’라고 할 수는 없었고, 태현은 적당히 그럴듯한 이유를 댔다.
옆에서 에슬라도 동의한다는 듯이 외쳤다.
-감히 다른 악마 공작을 배신한 죄! 감히 다른 악마 공작을 미궁에 가둔 죄!
-다른 악마 공작들을 찢어 죽이던 빌어먹을 잡놈이 뭐라고 지껄이는 거야!!
[빙결공 푸르네우스가 극도로 분노합니다!]
[냉기의 힘이 일시적으로 약해집니다!]
어지간해서는 흥분하지 않는 빙결공이었지만, 태현 앞에서는 몇 번이고 흥분하고 있었다.
그만큼 태현은 사람을, 아니, 악마 공작을 흥분하게 만드는 재주가 있었다.
아키서스! 고맙다! 우리를 해방시켜줘서!
“정령들을 돕는 건 내 기쁨이다!”
[정령계에서…]
[……]
우리를 왜 돕는지는 잘 모르겠지만 고맙다!
‘예리한데. 정령들.’
정령들은 예전부터 정령계에서 굴러먹던 경험이 있는 만큼 예리했다.
아키서스가 도와주면 ‘어? 아키서스가 우릴 왜 도와주지?’ 하고 의문부터 갖는 것이다.
[광기공, 에슬라가 힘을 폭발시킵니다!]
“!”
태현은 에슬라의 부하들이 날뛰는 건 보았지만 에슬라가 직접 이렇게 싸우는 모습은 처음 보았다.
평범한 신사처럼 서 있던 에슬라의 형태가 갑자기 아지랑이처럼 흔들거리더니 거대한 야수의 형태로 변했다.
콰직!
-크윽…!
그렇게 자만하던 푸르네우스도 에슬라의 일격에는 그대로 얻어맞았다.
에슬라가 마치 늑대인간처럼 달라붙어서 푸르네우스의 온몸을 물어뜯고 할퀴자, 푸르네우스는 욕설과 함께 마법을 사용했다.
[빙결공, 푸르네우스가 냉기 분신을 풀어놓기 시작합니다!]
[분신들과 위치를 교환합니다!]
냉기 분신들이 얼음 조각으로 부서지면서 푸르네우스는 간신히 탈출하는 데에 성공했다.
그러나 에슬라는 멈추지 않고 다시 달려들었다.
괜히 공작의 칭호에 ‘광기’가 들어간 게 아닌 것이다.
[광기공, 에슬라가 힘을 폭발시킵니다!]
“…아니, 저런 미친놈이?”
태현은 어이가 없다는 듯이 외쳤다.
에슬라가 변한 건 놀랍게도….
태현의 모습이었던 것이다.
‘변신할 게 없어서 내 모습으로 변신하냐!?’
하지만 정확히 따지자면 에슬라가 변신한 건 태현의 모습이 아니었다.
먼 예전에 에슬라가 직접 본 적이 있던 아키서스의 모습으로 변신했던 것이다.
그 증거로 에슬라가 차고 있는 장비들은 태현의 장비들과 완전히 달랐다.
손끝에 들린 검은 살벌하고 기묘한 빛을 내뿜고 있었고, 차고 있는 갑옷은 본 적도 없는 보석들로 장식이 되어서 모든 공격들을 무효화시킬 것만 같았다.
부츠나 벨트, 반지나 목걸이 같은 장비들도 낯선 건 마찬가지였다.
하나하나가 아키서스 교단의 성물로 취급받는 장비들!
[아키서스 교단의 지식이 늘어납니다!]
[먼 옛날, 아키서스가 전투에 나섰을 때의 모습을 목격했습니다! 신성 스탯이 오릅니다!]
[아키서스가 직접 착용했던 성물들은 완전히 사라지지 않았을 가능성이 높습니다. 언젠가 다시 손에 넣어야 합니다!]
에슬라가 변신한 장비는 당연히 가짜였지만, 푸르네우스는 그것만으로도 충분히 당황한 모양이었다.
-아키… 크아아악!! 에슬라 이 개자식아!!! 이 영원히 저주받을, 아키서스보다 못한 쓰레기 자식!!
-하하하!
푸르네우스가 욕하면 욕할수록 에슬라는 더더욱 기쁜 모양이었다.
빙결공이 흘리는 차가운 푸른 피가 에슬라에게는 매우 커다란 기쁨이었다.
복수는 달콤하다!
-그러게 누가 감히 나를 미궁에 넣으라고 했나!
-저주받을 놈아! 네놈이 악마 공작들을 모두 죽이려고 했던 건 기억에서 지워버린 거냐?!
-그러게 누가 감히 나를 미궁에 넣으라고 했나!
‘와. 내 편이긴 한데 에슬라 진짜 뻔뻔하군.’
태현은 솔직히 감탄했다.
남의 말은 무시하고 자기 좋은 말만 하는 저 솜씨는 태현도 좀 배워야 하는 구석이 있었다.
[정령들이 당신을 보호합니다!]
[냉기 저항이 엄청나게 증가합…]
[……]
[……]
“고맙다!”
태현은 외침과 함께 달려들었다.
에슬라가 어그로를 끌어주고 있는 만큼 태현도 공격을 넣을 시간이었다.
이럴 때 가장 쓰기 좋은 무기는?
‘황제 살해자!’
[<황제 살해자>를 착용합니다!]
[<황제 살해자의 독>이 발동됩니다! 착용자의 생명을 빼았습니다!]
[HP가 1% 감소합니다!]
[HP가 2% 감소합니다!]
[……]
마검 황제 살해자.
공격이 들어가기만 하면 상대의 전체 HP에 % 단위로 데미지를 주는, 판온에서도 비슷한 무기를 찾기 힘들 정도로 사기적인 무기였다.
하지만 장점만 있는 무기는 없는 법. 황제 살해자의 단점은 너무 강력했다.
착용하는 것만으로도 안 그래도 부족한 태현의 HP를 쭉쭉 깎아먹는 것이다.
태현이 상대하는 적이 약하거나 물리 공격밖에 없는 적이라면 이 검을 마음껏 쓸 수 있었겠지만, 최근 태현이 상대한 적들은 전부 다 태현보다 레벨이 압도적으로 높고 온갖 까다로운 스킬을 쓰는 적들.
괜히 이 마검을 쓰다가 잘못해서 광역기라도 한 대 맞으면 그냥 스스로 자폭하는 꼴밖에 되지 않았다.
하지만 지금, 정령들이 가호를 해주고 에슬라가 푸르네우스와 정면으로 물고 뜯는 상황은….
‘충분히 찔러 넣을 만하다!’
[치명타가 터졌습니다!]
[<황제 살해자의 저주>가…]
[……]
[검술 스킬이 오릅니다!]
-크아아아악!!
에슬라에게 정신이 팔려 있던 푸르네우스는 오늘 가장 커다란 비명을 질렀다.
태현이 공격을 해오는 건 알고 있었지만 충분히 견딜 수 있을 거라고 판단했던 것이다.
하지만 공격의 위력은 상상을 초월했다.
마검에서 뿜어져 나온 독이 푸르네우스의 온몸으로 퍼져 나갔다.
[빙결공의 HP 7%를 빼앗습니다!]
[빙결공의 HP 4%를 빼앗습니다!]
[빙결공의 HP 10%를 빼앗습니다!]
[빙결공, 푸르네우스가 혹한의 숨결을 흩뿌립니다!]
태현은 황제 살해자를 재빨리 집어넣고 뒤로 거리를 벌렸다.
채 10초도 안 썼는데 벌써 태현의 HP도 절반 이상 닳아 있었다.
한번 쓰게 되면 정신 놓고 쓰게 되는, 그야말로 마검!
[<진설의 조각>의 힘이 더욱더 강해집니다!]
“!”
진설의 조각들은 냉기의 핵을 봉인시켜 놓았던 강력한 힘의 결정체.
푸르네우스는 그 조각들을 뽑아서 쓰는 것으로 막대한 힘을 얻을 수 있었다.
하지만 여기서 더 강해질 줄이야.
태현은 빠르게 머리를 굴렸다.
‘어떻게 한다?’
[빙결공 푸르네우스의 힘이 폭주합니다!]
-안 돼!
놀랍게도 푸르네우스 본인이 비명을 질렀다.
푸르네우스의 왼쪽 팔은 멋대로 움직이며 거대한 얼음 덩어리처럼 변해가기 시작했다.
콰드드득!
[카르바노그가 악마 공작이 지나치게 욕심을 부렸다고 말합니다!
-멈춰라! 이 멍청한 놈아! 내가 네 주인이란 말이다!
-아키서스! 지금이다!
에슬라의 외침에 태현은 고개를 끄덕였다.
다시 한번 꺼낸 불타오르는 검이 푸르네우스에게 작렬했다.
[치명타가 터졌습니다!]
[<화염 적중>으로 인해 화염 기운이 점점 더 누적됩니다!]
[<위대한 화염의 검술>로 인해 추가 검술 스킬이…]
“위대한 화염의 검술, 첫 번째 공격 멸염!”
태현의 외침과 함께 사디크의 화염이 푸르네우스를 후려갈겼다.
동시에 에슬라가 사납게 푸르네우스를 공격했고, 풀려난 정령들도 푸르네우스의 전신을 집요하게 봉인했다.
안 그래도 진설의 조각이 폭주한 탓에 자신의 힘을 컨트롤할 수 없게 된 푸르네우스는 허무하게 두들겨 맞았다.
-이… 이 빌어먹을… 놈들…! 기억해 둬라. 나는 반드시 돌아온다. 어떤 대가를 치러서라도 네놈들을 멸망시키고야 말겠다!
푸르네우스의 외침에 에슬라와 태현은 시선을 교환했다.
놈을 마계로 돌려보내지 말고 영원히 봉인해버려야 한다!
정령들이 합창하듯이 외쳤다.
아키서스, 그리고 광기공! 너희 둘은 받아들일 수 없겠지만 우리들은 저 악마 공작을 영원히 봉인시켜야 한다. 어떤 대가든 지불할 테니 봉인을 도와다오!
“어. 난 상관없는데.”
-나도.
…….
정령들은 둘의 쿨한 반응에 살짝 당황했다.
고… 고맙다!
[빙결공, 푸르네우스의 힘이 점점 더 약해집니다.]
[움직임이 더욱더 느려집니다!]
[푸르네우스가 마법을…]
[실패합니다!]
[모든 냉기들이 한곳에 모이기 시작합니다!]
[푸르네우스가 얼어붙기 시작합니다!]
[푸르네우스가 더욱더 얼어붙기…]
[……]
[……]
[……]
쩌저저저적!
어떻게든 발버둥 치던 푸르네우스가 하나의 얼음 조각상으로 변해 버렸다.
정령들은 그 조각상을 태현에게 선물했다.
고맙다! 아키서스! 네가 아니었다면 우리들은 영원히 갇혀 있었어야 했다!
[아이템을 얻었습니다!]
‘…이거 갖고 다녀도 되는 거 맞아? 찜찜한데 좀.’
[카르바노그가 더운 곳만 안 가면 되는 거 아니냐고 말합니다.]
물론 더운 곳에 간다고 녹진 않을 테지만, 태현은 묘하게 찜찜했다.
그렇다고 이걸 내버려 둘 수도 없고….
‘일단 챙겨놓긴 해야겠군.’
빙결공의 봉인된 얼음조각상이라니.
[마계의 악마 공작, 빙결공 푸르네우스를 영원한 봉인에 빠뜨리는 데에 성공합니다!]
[이는 어마어마한 업적입니다. 모든 교단의 NPC들이 당신의 활약에 감탄할 것입니다!]
[명성이 크게 오릅니다!]
[신성이 크게 오릅니다!]
[레벨 업 하셨습니다!]
[레벨 업 하셨습니다!]
[……]
[……]
[정령들이 자신들의 힘으로 관문을 열어줍니다!]
[현재로 돌아갑니다!]
아키서스! 다시 한 번 감사를 표한다!
네 위대한 여정을 우리가 도와주겠다!
정령들이 감사해하는 메아리와 함께, 태현 일행은 현재로 돌아가기 시작했다.
* * *
쿠우웅-!
‘여긴 어디지?’
[카르바노그가 오스턴 왕국 같다고 말합니다.]
현재로 돌아오긴 했는데, 바로 파악이 안 되는 낯선 곳이었다.
넓은 지하에, 인기척이나 적대적인 기운은 없고….
‘어디 지하 구역인가?’
일단 수도인 아레네 시는 아니었다.
‘아닌 게 다행이지.’
만약 아레네 시로 돌아왔다면 굶주린 혼돈의 군단과 수많은 플레이어들이 태현을 격하게 환영해줬을 것이다.
-김태현 개자식아! 도시를 불태운 것도 모자라서 얼려 버려?!
-여기가 얼음과 불의 노래 촬영장이냐! 죽여 버려!
[카르바노그가 동부 지역 같다고 말합니다.]
-으윽… 차원을 움직였더니 어지럽군.
-크윽.
악마 공작들은 하나둘씩 정신을 차리며 일어섰다.
처음 마계 대회의가 시작되었을 때에는 그렇게 웅장했던 세력이었지만, 그동안 수많은 격전을 치러오면서 악마들이 확 줄어 있었다.
얼마나 치열했는지 느껴지는 모습이었다.
‘굶주린 혼돈을 막기 위해 악마들이 참 열심히 싸웠군.’
-지금 일어나기 전에 치는 게 어떤가?
에슬라가 속삭였다. 태현은 못 들은 척 무시했다.
“다들 잠시 휴식을 취하도록 하지.”
태현도 워낙 퀘스트를 깬 게 많아서 확인이 필요했다. 과거에서 얻어 온 게 많았던 것이다.
-잠깐… 왠지 에다오르의 기운이 느껴지는데. 기분 탓인가?
에슬라가 중얼거렸지만 태현은 확인하느라 듣지 못했다.
* * *
“어쨌든 이렇게 간신히 탈출하기는 했어.”
태현의 말을 들은 사람들은 그제야 정신을 차릴 수 있었다.
배장욱 PD가 손을 들고 물었다.
“김태현 선수. 궁금한 게 있습니다.”
“압니다. 악마 공작들이 몇 명 남았는지 궁금하신 거죠?”
“아니요. 스미스 선수가 도망친 이후에는 왜 방송을 안 트신 거죠?”
“…미안합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