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 나는 될놈이다 1631화
‘얘가 그래도 예전에는 케인 같은 순진함이 있었는데.’
태현한테 뒤통수 맞고 이세연한테 뒤통수 맞다 보니 스미스는 이제 더 이상 예전의 호구 같은 모습을 찾아볼 수가 없었다.
어쩌면 스미스는 냉혹한 한국 선수들이 만들어낸 괴물 아닐까?
‘하지만 그건 그거고 이건 이거지.’
“스미스! 뒤에!”
“…김태현 선수. 진짜 그딴 수작에 제가 당할 거라고 생각… 아니!?”
스미스는 어이없다는 듯이 대답하다가 급히 방패를 들고 몸을 돌렸다.
뒤에서 악마 공작이 달려들고 있었던 것이다.
[빙결공, 푸르네우스가 <얼음뿌리 나무>를 사용합니다!]
[얼어붙기 시작합니다!]
[굶주린 혼돈의 힘으로 저항하는 데 성공합니다!]
꽝!
푸르네우스가 날카롭게 뻗은 창끝은 스미스의 방패에 정확히 막혔다.
-감히?
푸르네우스는 불쾌하다는 듯이 스미스를 노려보았다.
감히 한낱 모험가 주제에 악마 공작의 공격을 막았다는 것 자체가 불쾌하게 느껴지는 모양이었다.
“굶주린 혼돈 세력에 들어간 제가 할 말은 아닙니다만 악마 공작하고 같이 움직이는 건… 아니, 말 좀 합시다!”
스미스는 기가 막히다는 듯이 말했다.
푸르네우스에게 시선을 돌리자 태현이 그 사이를 노리고 들어온 것이다.
정말 조금도 방심할 수 없는 적!
사람들도 많이 보고 있겠다 그럴듯한 대화 좀 하고 시작하려고 했던 스미스는 어이가 없었다.
“수많은 사람들이 지금 이걸 보고 있을 텐데 그렇게 기습으로 이기고 싶으십니까!”
“어.”
“…….”
스미스는 태현의 대답에 순간 할 말을 잃었다.
하지만 생각해 보니 태현의 팬들은 저런 대답을 더 좋아할 사람들이었다.
애초에 저런 점을 싫어할 사람들이라면 태현의 팬이 되지 않았을 것!
‘아. 잠깐. 방송 안 켰었네.’
태현은 스미스의 말을 듣고 나서야 뒤늦게 방송을 켜지 않았다는 걸 깨달았다.
퀘스트 진행 도중 방해 받지 않으려고 끄고 있었던 거였지만, 스미스 일행이 나타난 이상에야 이미 다 들킨 거니 켜도 상관없었다.
‘지금이라도 켜야겠다.’
태현은 서둘러 방송을 켤 준비를 했다.
리그 중지된 지금, 팀의 다른 선수들도 홍보를 위해 노력하고 있는데 태현도 가만히 있을 수는 없었던 것이다.
“…하긴 김태현 선수야 방송도 켜지 않고 퀘스트를 하고 있는 만큼 그런 걸 신경 쓰지 않으시겠죠. 가끔은 부럽습니다.”
“…….”
방송 켜려던 태현은 스미스의 말에 멈칫했다.
저렇게 말하니 갑자기 켜기 좀 머쓱해진 것이다.
그리고 태현은 모르고 있었지만, 실제로 보고 있던 수많은 사람들은 태현의 모습에 감탄하고 있었다.
-저게 품격이지.
-조회수 좀 더 뽑아보겠다고 굶주린 혼돈으로 갈아타는 선수들이 이 감성을 알겠냐 이 말이야.
-방송 켜고 홍보 왜 함? 어차피 썰려나가는 다른 선수들이 다 알아서 홍보해 주고 있는데?
“하지만 오늘 절 만나게 된 건 실수입니다.”
철컥!
스미스는 갑옷의 면갑을 올리고 얼굴을 완전히 가렸다.
<고대 제국의 백기사>라는 전설 직업을 가지고, 언제나 눈부실 정도로 희게 번쩍이던 갑옷을 입고 다니던 스미스였지만….
지금은 굶주린 혼돈의 기운으로 시커멓게 일렁거리고 있었다.
‘그런데 진짜 다른 선수들 어디 간 거지?’
전투 시작 전이라 내색하진 않았지만 신경이 쓰이는 건 어쩔 수 없었다.
하다못해 귓속말이라도 해야 하는데.
뭐지?
‘설마 김태현 선수가 말한 것처럼 전원 로그아웃 당한 건 아닐 테고….’
* * *
꽝!!
[굶주린 혼돈의 힘이 방패에서 폭발합니다!]
[<굶주린 혼돈의 철벽>이 시전됩니다!]
스미스는 판온에서 손꼽히는 탱커.
그에 맞서는 태현은 판온에서 손꼽히는 딜러.
둘의 싸움은 방패와 창의 싸움이라고 봐야 했다.
태현은 미친 듯이 쑤셔넣는 폭딜도 맷집으로 견뎌내는 스미스를 보며 ‘성기사 놈들 진짜 개사기 아니냐!?’ 하며 투덜댔지만, 스미스도 그렇게 많이 때리면서 한 대도 제대로 맞아주지 않는 태현에게 할 말이 많았다.
솔직히 스미스 입장에서는 태현이 더 사기처럼 느껴졌던 것이다.
하지만 이번에 스미스가 자신만만한 데에는 다 이유가 있었다.
[굶주린 혼돈의 힘이 주변을 휩쓸기 시작합니다!]
굶주린 혼돈 세력에 가입하고 나서 새로 얻은 스탯, 스킬, 아이템 보상들.
하나하나 다 사기 수준의 보상이었지만 더 중요한 점은 따로 있었다.
그건 바로 태현을 카운터치기 위해 면밀히 준비되었다는 점이었다.
[굶주린 혼돈의 힘이 방패에서 터져 나옵니다!]
[굶주린 혼돈의 힘이 바닥에서 가시처럼 솟구쳐 오릅니다!]
[굶주린 혼돈의 힘이 안개가 되어서 퍼져나갑니다!]
[굶주린 혼돈의 힘이…]
“…!”
스미스가 방패로 막거나, 방패를 휘두르거나, 아니면 방패 옆에 든 검을 견제하듯이 찌를 때마다 광역기가 터져 나오는 것을 본 태현은 놀랐다.
이 정도면 스미스 옆에서 숨만 쉬고 있어도 찢겨나갈 수준이었다.
‘광역기로 도배를 해왔잖아?!’
상대가 패배하고 나서 얼마나 이를 갈았는지 느껴질 정도였다.
하지만 태현은 물러서지 않았다.
이쪽도 작정하고 온 건 마찬가지였던 것이다.
[<아키서스의 반격>을 시전합니다!]
[굶주린 혼돈의 힘을 튕겨냅니다!]
[<굶주린 혼돈의 가시>가 시전됩니다!]
[굶주린 혼돈의 힘이 바닥에서 가시처럼 솟구쳐 오릅니다!]
[전설 검술 스킬을 가지고 있습니다.]
[시간이 느려집니다!]
카카카카캉!
전설 검술 스킬 상태인 태현은 폭풍처럼 몰아치는 광역기 콤보에도 전혀 물러서지 않았다.
오히려 검 한 자루만으로 광역기를 잘라내고 돌려보내는 광기 서린 컨트롤을 보여주었다.
“…!!!!”
아무리 스미스라도 경악할 수밖에 없었다.
-스미스! 정신 차려! 김태현 지금 약 빤 거야! 일단 피해! 시간 끌라고!
-스미스! 뒤로 피하라니까!
스미스 팬들은 애타게 외쳤다.
다른 선수들 계정으로 싸움을 밖에서 보고 있는 팬들은 상황을 어느 정도 짐작하고 있었다.
태현이 강한 건 알고 있었지만 이건 해도 해도 너무 강했다.
비정상적인 수준!
특별한 비장의 스킬을 쓴 게 분명했다.
그렇다면 시간을 끄는 게 답이었는데….
…스미스 입장에서는 그걸 알 수가 없었다.
하필이면 선수들도 다 썰려나간 탓에 조언을 줄 사람이 없는 것이다.
-다른 선수 새끼들은 스미스한테 안 알려주고 뭐한 거야?!
물론 선수들이 일부러 안 알려준 건 아니었다.
태현이 한 명당 10초도 걸리지 않고 미친놈처럼 썰어댄 탓에 알려줄 틈이 전혀 없었을 뿐!
하지만 그 덕분에 스미스의 정신적 충격은 몇 배였다.
‘이… 이 광역기를 저렇게… 쉽게 막아냈다고?’
전설 검술 스킬을 모르는 스미스가 받은 충격은 대단했다.
솔직히 이 광역기들로 태현을 잡지는 못하더라도 HP 절반은 깎을 거라고 자신했었는데…!
-스미스!! 정신 차려!
-김태현이 온다!
밖에서 들리지 않는 팬들의 비명과 함께, 태현이 광역기를 뚫고 스미스 앞으로 접근했다.
‘막는다!’
스미스는 본능적으로 움직였다.
뉴욕 라이온즈 선수들 중에서, 태현의 움직임을 가장 많이 연습한 건 스미스였다.
정면에서 서로 치고받는 건 무리더라도 거대한 방패로 의지해 태현의 공격을 막아내는 건 자신이 있었다.
어깨의 들썩거림.
팔의 꿈틀거림.
발의 움직임.
사소한 동작만으로도 어디서 어떻게 공격이 들어올지 예측할 자신이 있….
[치명타가 터졌습니다!]
[전설 검술 스킬로 인해 추가 데미지가…]
[장비의 내구도가 크게 떨어집니다!]
[공격 속도가 느려집니다!]
[……]
[……]
퍼퍼퍼퍼퍼퍽!
날카로운 소리와 함께 태현의 공격이 스미스의 전신에 작렬했다.
스미스의 예상보다 몇 배는 더 변화무쌍하고 빠른 검술 공격이었다.
전설 검술 스킬의 힘!
만약 굶주린 혼돈의 힘이 보호하고 있지 않았다면 스미스는 진작 쓰러졌을 것이다.
‘전설 검술 스킬!??’
빠르게 깎이는 HP와 각종 상태 이상, 장비 파괴를 보고 스미스는 그제야 상황을 깨달았다.
태현이 무슨 말도 안 되는 퀘스트를 깬 건지는 모르겠지만, 놀랍게도 전설 검술 스킬을 손에 얻은 것이다.
어쩐지 맞부딪히자마자 일방적으로 얻어맞고 있다 했더니…!
‘시간을 끌었어야 했다!’
스미스는 뒤늦게 깨닫고 바꾸려고 했지만, 태현이 그걸 내버려 둘 정도로 호락호락하지 않았다.
[아키서스의 일곱 번째 공격이 시전됩니다!]
[전설 검술 스킬로 인해 추가 효과가 발동됩니다!]
[방패의 방어를 관통하고 추가 데미지를 넣습니다!]
[회복을 무시하고 데미지를 넣습니다!
[치명타가 폭발합니다!]
[……]
[……]
원래 다양한 스킬들을 섞어 가면서 예측 불가능한 패턴을 만들던 태현이었지만, 이번에는 그러지 않았다.
오로지 검술 하나만!
그게 가장 강력하고 효과적이었던 것이다.
‘잡았다!’
태현은 손끝에 느껴지는 묵직한 감각에, 본능적으로 알아차렸다.
이건 확실히 잡았다고!
[HP가 0이 되어 로그아웃…]
[아이템을 얻었습니다!]
[아이템을…]
[……]
[명성이 크게 오릅니다!]
[굶주린 혼돈을 받드는 모험가를 쓰러뜨렸습니다. 굶주린 혼돈의 세력이 약해집니다!]
[……]
[……]
[전설 검술 스킬의 지속 시간이 끝납니다!]
[전설 검술 스킬을 경험한 것으로 인해 검술 스킬이 오릅니다!]
[검술 스킬 성장에 추가 보너스를 받습니다!]
[……]
[레벨 업 하셨습니다!]
[레벨 업 하셨습니다!]
-잘 했다, 아키서스!
구시렉은 통쾌하다는 듯이 외쳤다.
굶주린 혼돈의 힘을 빌려 까불던 모험가 놈이 결국 쓰러진 것이다.
“…….”
그러나 태현의 표정은 심각했다.
가만히 서 있던 태현은 재빨리 돌아서더니 미친 듯이 반대 방향으로 달리기 시작했다.
-?
[굶주린 혼돈의 심장이 새로운 숨을 불어넣습니다!]
[죽음에서 부활합니다!]
-!!
* * *
“김태현 선수!! 어디 가십니까! 이리 오십시오!”
[굶주린 혼돈의 힘으로 부활했습니다.]
[악명이 미친 듯이 오릅니다!]
[일정 기간 내에 제물을 바치지 못할 경우 목숨을 잃습니다!]
[……]
[……]
죽음에서 돌아온 스미스는 귀기가 흘러넘쳤다.
스미스는 태현의 전설 검술 스킬이 끝났다는 걸 짐작했다.
그렇지 않다면 저렇게 돌아설 리가….
팟!
“???!”
도망치던 태현이 갑자기 사라지더니 다시 옆의 골목길에서 뛰쳐나오자, 스미스는 깜짝 놀랐다.
‘안 끝났다고!?’
스미스는 체면이고 뭐고 일단 뒤로 몸을 날렸다.
태현은 그런 스미스를 향해 폭탄을 집어 던진 다음 다시 튀었다.
“…김태현 선수!!!!”
스미스는 시뻘게진 얼굴로 소리를 질렀다. 태현은 못 들은 척 무시했다.
‘아. 추가 목숨 있을 거 같긴 했는데 진짜 있었군.’
태현도 추가 목숨 달고 다니는데 스미스도 없으란 법은 없었다.
문제는 저걸 어떻게 잡느냐!
마음 같아서는 악마 공작들을 시키고 싶었지만….
[관문에서 더욱더 많은 군단이 내려오기 시작합니다!]
[……]
[……]
열린 관문에서 더 많은 군단들이 내려오기 시작한 탓에 악마 공작들도 바빠지기 시작했다.
굶주린 혼돈도 어떻게든 이 오스턴 왕국의 수도를 꼭 손에 넣고 싶은 게 분명했다.
하긴 기껏 점령했는데 웬 미친놈들이 과거로 날아가 도시를 박살 내고 있었으니 굶주린 혼돈의 마음도 이해는 갔다.
‘일단 최대한 부수고 가야겠다.’
태현은 스미스와 정면으로 붙는 것보다, 도시를 최대한 부수기로 마음먹었다.
만약 잡지 못하게 되더라도 도시는 확실하게 부수고 간다!
[<사디크의 지옥 화염 폭탄>을 설치합니다!]
[기계공학 스킬로 인해 추가 보너스를 받습니다!]
[<제국 토끼 광선 장난감>을…]
[<드래곤 폭탄> 스킬을 시전합니다!]
[스탯이 영구적으로 소모됩니다!]
[<지진 폭탄> 스킬을…]
[스탯이…]
[<폭탄 정령 소환>을…]
[……]
[……]
[……]
철컥철컥철컥!
태현은 정말 닥치는 대로 폭탄을 옆에 뿌리면서 이동했다.
그 뒤를 바짝 쫓던 스미스는 슬슬 위화감을 느끼기 시작했다.
‘…뭘 노리는 거지?’
뭔가….
뭔가 불길했던 것이다.